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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라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대한민국을 노래했을 때, 나는 대한민국의 일원임이 자랑스러웠다. 나는 동남아시아나 인도 따위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불쌍하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네들은 그런 나라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학 시절 나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그 명제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별다른 고생을 하지 않고 살아온 내 20년도 나름 꽤나 괴로운 시간이었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도록 해주지도 않고, 해줄 수도 없는 나라라는 생각이었다.

저 노랫말의 의미를 지금은 조금 깨달을 것 같다: 저 명제는 확실히 참이고, 다만 교묘하게 주체를 숨겼을 뿐이다. 대한민국은 어떤 사람에게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나라인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과 그렇지 않은 다른 많은 사람들간의 격차를 고착화시킨 것이 바로 1988년의 서울 올림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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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은 신기한 일이 많이 일어난 해였다: 전국민 직선제에 의해 뽑힌 '보통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고, 월북 또는 납북된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출판 금지 조처가 해제되었고, 백무산의 『만국의 노동자여』가 출간되었다. 그리고 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솔직히 서울 올림픽에 대한 기억은 이제 거의 없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개막식 행사 마지막 부분의 굴렁쇠 굴리는 소년, 세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성화를 점화하는 모습, 그 때 날아오른 흰 비둘기들, 가장 먼저 입장한 '가나'라는 나라와 '대한민국'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이름을 달고 맨 마지막으로 등장한 한국, 김수녕을 비롯한 여자 양궁수들의 개인전 금·은·동 '싹쓸이', 칼 루이스의 당시 100미터 달리기 세계 신기록 9초86, 벤 존슨의 도핑 테스트 양성 반응 소식, 금메달 12개로 세계 4위에 오른 한국의 성적... 정수라가 부른 '아, 대한민국'... 그 정도다.

아마 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보여지는 것'에 민감한 한국인의 속물 근성 때문에 밀려나야 했던 판잣촌의 사람들. 분명 서울 올림픽 유치 소식에 함께 기뻐했음이 틀림없는 그들은, 난장이였기 때문에 기쁨 대신 슬픔을 얻었을 것이 분명한. ...88 올림픽은 시작부터가, 80년 5월 사건을 거쳐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이 밀어붙인 3S 정책의 일환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더 쉬워질는지도 모른다.

최근 영국 일간지 가디언 기사에서 올림픽과 개발 그리고 소외에 대한 기사가 있었나보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서 해당 기사를 번역하여 올렸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 대회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군사독재 세력은 올림픽을 통해 민중들이이 소유한 토지를 빼앗아 소수의 엘리트가 주인이 되는 기업도시로 서울을 만드는 기회로 이용했다. 72만명의 주민들이 자기 집에서 쫓겨났고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폭력배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구금됐다. 세입자들은 사전 공지도 없이 퇴거조치 됐고 일부는 고속도로의 뚝 밑에 굴을 파서 살게 됐다. 노점상은 금지됐고, 노숙자, 알코올중독자, 거지, 정신장애자들은 한데 모아져 수용소에 갇혔다. 세계는 그런 장면을 보지 못했다. 단지 번듯한 사람들이 활보하는 번듯한 새 도시만 보았다." (프레시안)

어쨌든 그 한두 해 뒤 정태춘은 다른 '아, 대한민국'을 발표한다.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이 뛰어난 곡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곡은 사람들이 보지 못한... 혹은 보려 하지 않은 한국 사회의 이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이색적이라는 것이다.



정태춘 - 아, 대한민국 가사 열기


노래를 듣다보면 우리는 아주 익숙함을 느낄 수 있는데, 뉴스나 신문의 사회면과 노래 가사가 닮아 있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계몽적이지 않다. 불어에 기반을 둔 '계몽enlightenment'이란 낱말이 진리가 없는 어두운 곳에 빛lumière을 비추이는 것이라면, 정태춘의 이 노래는 사람들이 다 아는 사건들을 몽타주 식으로 이어붙인 것에 불과하다. 누구나 사회면을 보고 잊어버리는 것들을 상기시키는 효과를 보여주는데,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올림픽의 화려한 모습에 비해 그런 사건들을 쉬이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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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태생의 박노자 교수는 소치 "승리"를 한탄한다...라는 글에서 소치의 동계올림픽 유치 소식을 비보로 받아들인다. 그는 소치라는 땅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 땅의 아름다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데, 이제 곧 그 땅이 사라지는 것이다. 가령 침엽수림의 나이테로 가늠했던 소치의 나이는 이제 철근과 콘크리트의 녹과 부식 정도로나 가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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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도 그렇다. 나는 평창에 누가 살고 있는지, 어떤 생태가 있는지 모르지만... 아름다운 설원에서 눈의 아름다움보다는 돈의 아름다움이나 정권의 아름다움만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만은 치가 떨린다.

그러니까 말이지, 이 땅에는 참 많은 천성산 도롱뇽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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