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어릿광대의견해/그말이잎을물들였다

한국 말의 로마자 표기법

엔디 2005. 1. 5. 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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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법을 둘러싼 논란과 2000년 발표된 새 로마자 표기법안을 살펴보고 나서 나는 다시 『훈민정음』을 생각했다. 정인지는 『훈민정음』에 붙인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사방의 풍토가 구별되고, 성기聲氣가 또한 따라서 달라진다. 대개 외국(중국 이외의 나라)의 말은, 그 소리는 있되 그 글자가 없어서, 중국의 글자를 빌어다 통용通用하니, 이는 마치 모난 막대기를 둥근 구멍에 끼운 것과 같도다. 어찌 능히 통달하여 거리낌이 없을 것인가.
然四方風土區別, 聲氣亦隨而異焉. 蓋外國之語, 有其聲而無其字. 假中國之字以通其用, 是猶枘鑿之鉏鋙也, 豈能達而無礙乎.

우리가 한국 말을 로마자로 표기하려 애쓰거나 외국 말을 한글로 표기하려고 애쓰는 것은, 여러 사정으로 그것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지 결코 그 편이 좋아서가 아니다. 만약 한국 말을 표기하는 데에 로마자가 한글보다 낫다면 나는 당연히 로마자를 한글 대신 쓰자고 주장할 것이다. 세종대왕이 얼마나 훌륭한 언어학자였는가나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인가는, 한글 사용에 대한 인과적·간접적인 근거는 충분히 될 수 있지만 직접적인 근거는 결코 아닌 것이다. 말인즉슨, 로마자로는 한국 말을 완벽하게 표현해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로마자 표기법을 문제 삼을 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무턱대고 이러이러하니 이건 안 된다고 반대하는 것은 이 경우 결코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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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한국 말을 로마자로 표기할 때 논란이 되는 것은 닿소리에서 'ㄱ', 'ㄷ', 'ㅂ', 'ㅈ'과 그 된소리 및 거센소리 표기와 홀소리에서 'ㅓ', 'ㅔ', 'ㅡ' 들과 'ㅕ', 'ㅖ', 'ㅝ', … 와 같이 그 관련된 표기이다.

그러나 지금의 표기법에 반대하는 이들이 내어놓는 표기법들은 지나치게 자의적이거나 불편한 경우가 많아서 그것이 충분히 대안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특히 모음에서 그렇다. 가령 'ㅓ'에 대해서 ŏ, e, u, eo, o’ 들이 상정되었을 때 이 가운데 eo를 뽑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일단 ŏ는 전산화가 불편하고, e나 u는 한국 뿐 아니라 거의 전 세계에서 대체로 'ㅔ'와 'ㅜ'로 쓰이고, o’는 말무리言衆들이 전혀 쓰지 않는 표기이면서 그 표현에 필연성이 없다. 하지만 eo는 전부터 일부에서 사용해왔으면서도 전산화가 어렵지 않고, a e i o u처럼 세계적으로 거의 고정된 소릿값을 해치지 않는다. 'ㅔ'를 ei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ㅡ'를 u로 써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반박을 할 수 있다.

다만 내가 지금의 로마자 표기법에 불만스러운 점은 'ㄱ', 'ㄷ', 'ㅂ', 'ㅈ' 등의 유성음/무성음 여부를 가리지 않고 표기하도록 한 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들 닿소리는 유성음과 무성음을 갈라서, 'ㄱ'을 예로 들면, 각각 g와 k로 적고, 받침은 k로 적되 소리이음連音될 때는 g로 바꾸어 적으며, 된소리는 kk로, 거센소리는 kh로 적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주로 외국인들에게 고유명사를 알리는 데 쓰는 로마자 표기는 유성음과 무성음을 확실히 인지하는 그들에게 일단 맞추어주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들이 한국 말에서도 유성음과 무성음을 구별하는 것은 외국인이 만든 로마자 표기법 체계인 매큔-라이샤워 체계에서 그것을 엄격히 구별했던 것에서 증명된다.) 생각해보면 일반 사람들이 로마자 표기법을 활용할 때는 자신의 이름을 적을 때와 자신의 주소를 적을 때 뿐이다. 그나마도 주소는 이미 다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름을 로마자로 적을 때만 표기법을 참고하면 그만이다. (인터넷에는 로마자 변환기를 제공하는 사이트도 있다. 국립국어원에서도 로마자 변환기를 제공하고 있다. 2008. 3. 12. 추가) 그리고 유성음과 무성음에 대한 내용은 중등교과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Kim이라는 표기 때문에 한국 말 말무리까지도 '미스타 킴' 하는 식으로 '킴'이라는 발음이 일반화되었다고 설명하는데 그건 근거가 약하다. '미스터 김'이라고 한 번 발음해보면 왜 사람들이 '미스타 킴'을 고집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미스 김'을 '미스 킴'이라고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점만 봐도 이 점은 분명해진다.)

kk와 kh는 글자를 겹쳐쓰는 것이 부담이 된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나는 그 부담이 그렇게 큰 것인가 되묻고 싶다. kk와 같은 경우는 어느 정도 전자법轉字法적인 면모가 보이지만, 예사소리-된소리-거센소리의 구분은 이미 로마자로는 불가능하므로 다소 전자법을 수용할 수밖에 없고, 무성음이므로 k를 겹쳐쓰는 편이 옳다. 물론 'ㅉ'의 경우는 관행이 되기도 했고 편리하기도 한 jj로 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kh의 경우는 본래 거센소리가 h 소릿값이 포함된 소리이므로 이렇게 쓰는 편이 합당하다. 한글에서의 한 글자가 로마자에서 여러 글자에 대응된다고 불평할 수도 있겠지만, 부수적인 기호를 쓰지 않고 표기하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 말을 로마자 표기할 때, 끼릴 문자 한 글자가 로마자로 여러 글자에 대응하는 경우는 흔하다. 러시아 말의 로마자 표기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가장 흔히 쓰는 방법이 미국 의회 도서관에서 쓰는 방식이다. 이 경우 ж-zh, х-kh, ц-ts, ч-ch, ш-sh, щ-shch 등으로 한 글자가 여러 글자에 대응하는 경우는 흔하다. (홀소리의 경우도 ю-iu, я-ia 에서 보듯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Пушкин은 Pushkin이 된다. (받침이 있는 한국 말과 달리 러시아 말의 경우는 끼릴 문자 대 로마자의 변환에서 전자법과 표음법의 구분이 모호한 것 같다. 그러나 대체로 전자법에 가까운 것 같다. 가령 뻬쩨르부르그에 가깝게 읽힌다는 Петербург는 Petersburg로 표기된다.)

그러나 내 의견은 이 편이 좀더 낫지 않겠는가, 하는 덧말일 뿐이지 이 편이 반드시 좋다는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쪽으로 통일해서 말무리들이 널리 쓰도록 하는 것이다. 오랜 관행은 모든 법칙에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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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지 않은 로마자 표기법을 우리는 어떻게 써야 할까. 나는 여기서 "나를 이렇게 불러주세요Call me …/Appelez-moi …." 하는 문화가 중요하다고 본다. 로마자뿐 아니라 서양 사람들끼리도 이름을 잘못 부르는 경우는 흔하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S. Freud는 미국에서 프로이드라고 불리고, Albert Einstein은 알버트 아인슈타인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미국 대통령 George Bush는 프랑스에서 조르쥬 부쉬로 불리고, 영국의 옛 수상 M. Thatcher는 프랑스에서 따쭤로 불리며, 독일의 관념철학자 G. W. F. Hegel은 에겔로 불린다. 아르헨티나에서 나서 나중에 꾸바 국적을 갖게 된 Ché Guevara는 프랑스에서 쉐 게바ㅎ-라로 불린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를 이렇게 불러주세요"라고 하면 그만이다.

안정효는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N. Kazantzakis는 카잔차키스가 아니라 카잔차키라는 점을 지적했으며, 고종석은 마시뱅크스Majoribanks나 팬쇼Featherstonehaugh와 같은 이상한 이름들을 소개한다. 레이건Reagan 전 미국 대통령은 오랜 배우 시절 리건이라고 불렸고, 대통령이 되어서야 레이건으로 제대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길은 "나를 이렇게 불러주세요"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다. 쁘띠로베르Le Petit Robert 인명사전에는 아날 학파 역사학자 뤼씨앙 페브르Lucien Febvre의 이름 옆에 "[fεvr]"라고 씌어 있다. 이렇게 읽어달라는 것이다. 거스 히딩크 전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도 자신의 이름Guus가 [후스]나 [구스]가 아니라 [거스]로 발음된다며, '거스'로 표기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조선일보: 기사에서는 Guss로 잘못 나와 있음). (지금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J. Bonfrère는, 본래 말밑語原이 그렇거니와, 프랑스 말 봉 프레르로 잘못 읽힐 수 있을 것이지만, 지금 본프레레로 불린다.)

한국 말을 쓰는 말무리들도 마찬가지다. No Muhyeon을 외국인이 못 읽는다면 '노무현'이라고, Bak Geunhye를 못 읽는다면 '박근혜'라고 읽어주면 된다. 외국인이 발음을 잘 못한다면? 비슷하게만 해주면 된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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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시 강조하듯이 오랜 관행은 모든 규칙에 앞서야 한다. 설사 그것이 개인적으로 행해왔던 관행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노무현의 노가 No, Ro, Roh, Nou, Nau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그것은 외부인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 가령 최근 '류' 씨 성과 관계된 소동을 보면서 조선일보의 한 부장(대우) 기자는 엉뚱하게 로마자 표기 때문에 곤란을 겪었던 사례를 든다. (조선일보) 말인즉, 프랑스의 호텔로 전화를 했는데 상대방이 성姓을 어떤 철자로 쓰는지 몰라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외국의 호텔에 묵고 있는 사람과 통화를 하고 싶다면 그 정도는 미리 알아두었어야 한다. 자신 이름의 로마자 표기를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로마자 표기를 만든 목적이 무엇이냐고? 그야 땅이름이나 주소처럼 사용이 개인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한 표기를 위해서, 그리고 사람이름을 표기하는데도 어떤 표준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봐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3장 7항이 왜 있겠는가. 가령 회사 이름 같은 경우, 삼성은 어느 나라에서도 [삼성]이라고 읽어주지 않는 SAMSUNG을, 현대는 어느 나라에서도 [현대]라고 읽어주지 않는 HYUNDAI를 계속 쓸 것이다. 그 이름값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이들은 심지어 외국에서의 자사 광고에서도 [삼성], [현대]라는 발음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렇게 불러달라고 하지도 않는다. 프랑스에서 현대의 텔레비전 광고의 마지막에는 [윤다이]라고 회사 이름을 각인시킨다.)

권재일은 회사 이름을 바꾸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며 '(럭키)금성'과 '선경'이 각각 'LG', 'SK'로 바꾼 사례를 들었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설득력이 없다. 금성과 선경이 LG와 SK로 이름을 바꾼 것은 '해외무대'로 나가기 전으로 파악할 수 있다. 가령 지금 삼성과 현대에게 표기를 바꾸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니, 이제 널리 알려진 LG나 SK도 이제는 회사 이름을 바꿀 수 없게 되었다. (반면 Pekin이 Beijing으로, Bombay가 Mumbai로, 버마가 미얀마로 바뀐 사례에서 보듯 지명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가능하기도 하다. 그러나 역시 힘과 품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다.)


덧말

두 가지 무지無知를 지적해야겠다. 하나는 로마자 표기를 영문 표기로 오해하는 것이다. 흔히 공문서의 이름 적는 칸에도 "(국문) / (영문)"과 같이 씌어 있다는 것에서 볼 때, 이와 같은 무지는 뿌리깊은 것이다. 『창작과 비평』2000년 가을호에 실린 서반석의 「로마자 표기법의 식민성과 탈식민성」에 실린 대로, "'영'을 'young'이라고 쓰고 '선'을 'sun'이라고 쓰고 '순'을 'soon'이라고 쓰는 '폐단'을 하루 빨리 버려야 체계적인 표기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로마자 표기법에 전문가만 관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새국어생활』2000년 겨울호에 실린 유만근의 글 「종전 로마자 표기법의 이론과 실용상 문제점」은 그런 점에서 무척 오만하다. 로마자 표기법을 언어학자/음성학자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야 하는 것은 옳지만 말무리들을 '제도'하려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전문가적 식견으로 그는 무척 '관대'하게도 "요컨대 비전문가 작품으로서 언어학적/음운학적 미숙한 점을 많이 드러내고 있지만 그런 대로 그것은 지금까지 한국어 음성정보를 전달하는데 어지간히 기여해 왔다"고 논평하고 "이렇게 열두 가지 발음 중 어느 것 하나도 뒤쪽 모음 'ㅓ'와 비슷하지 않은데 'ㅓ'에 eo를 채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서울' 영어철자 Se-oul에서 음절 경계를 잘 못 넘겨짚어 Seo-ul로 착각한 나머지 'eo'를 'ㅓ'로 여긴 것이다. Seoul이라는 철자 유래, 즉 그것이 원래 불어식으로 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저지른 어이없는 잘못이다. 어쨌든 'eo'를 한국인 이외에는 아무도 'ㅓ'는커녕 그 비슷하게도 발음하지 않는다."고 일갈一喝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내게 '영'을 yeong로 쓰는 편이 낫다고 알려준 사람은 프랑스 사람이었다. 한편 내가 처음에 '영'을 young로 썼더니 그는 전혀 딴판으로 발음했다. 이 하나의 사례는 위의 두 무지를 뒤엎는 사례로 내게는 소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