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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령공주》의 우리나라 개봉일이었다. 연인과 함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았고, 어제는 《이웃집 토토로》를 보았다. 《센》이나 《토토로》에서는 조금 약화되거나 암시적으로만 있고, 《원령공주》나 《나우시카》에서는 좀 더 주제의식이 명확하다는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미야자끼 하야오 감독은 '생태'를 그 가운데 두고 있다고 생각된다. "인간과 숲이 함께 살아갈 수는 없나요?"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


인간의 추악하고 역겨움, 그건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되지 않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 아니었을까? 신들이나 자연이 인간을 역겨워 하거나 증오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자연보다 위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새것 콤플렉스와 성장발전의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은 '에보시'가 왜 단죄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이르는 대로, 여자들이 속편히 살 수 있는 곳을 만들어주고 나병환자들까지 수용한다. 그는 철저한 인본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 자체가 늘 죄이듯 인본주의는 자연과의 대립을 낳기가 쉬울 것 같다. 아시타카나 산은 노한 자연과 인간의 가운데에 있는 이들이다. 시시 신의 분노는 얼마쯤 대홍수 모티프를 닮아있다. 홍수 모티프에는 늘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아시타카와 산이다. 데우칼리온과 퓌라가 등 뒤로 돌을 던졌듯 아시타가와 산은 시시 신의 머리를 돌려준다. 그리고 대자연에 새로운 싹이 돋는다... 시종 영화에 끌려다니기만 했다. 그만큼 미야자끼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흡인력이 있다. 그래서 영화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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