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어릿광대의견해

구술사의 진실과 점근선: 뉴라이트식 실증주의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를 넘어서

엔디 2008. 8. 3. 02:05

흔히 뉴라이트 역사교과서라고 불리는 교과서포럼『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가 내세우는 것은 실증주의다. 그들은 기존의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되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교과서포럼 창립선언문을 통해 이렇게 자신들의 지향점을 밝혔다:

<교과서포럼>은 대한민국의 과거를 미화하지도 않겠지만, 비하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연히 우편향도 아니고 좌편향도 아니다. 오로지 있는 그대로 우리가 치열하게 살아온 과거를 맑은 거울에 비추어보는 것처럼 진솔하게 보고자 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야말로 <교과서포럼>이 지향하고 있는 교과서철학이다.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좌편향'과 '우편향'을 벗어나겠다는 주장은 오래도록 우파의 논리였던 '탈정치'와 다를 바가 없고, '실사구시'라고 하는 것도 우파들이 말하는 '실용주의'의 정체가 밝혀진 지금에 와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오히려 문제는 여기서 "있는 그대로", "맑은 거울에 비추어보는 것처럼 진솔하게"와 같은 말이다. 요컨대 교과포럼의 주장은 '사실事實이란 사실史實이어야 하며 특히 사료적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믿지 않겠다는 말이다.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출간을 알리면서, 교과서포럼은 그들의 주장을 한 단어로 요약해서 소개했다. 바로 '실증주의'라는 방법론이다:

4.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과 새로운 시각에서 저의 교과서포럼은 《대안교과서》의 서론에서 밝힌 대로 다음과 같은 방법론을 채택하였다.

1) 첫째는 철저한 실증주의이다. 현행 교과서는 물론, 종래의 한국 근ㆍ현대사 서술은 너무나 많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숨겨왔다. 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예민한 문제들이 의도적으로 회피되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대안교과서》는 역사 서술에 어떠한 터부를 두지 않고, 모든 역사를 있었던 그대로 충실하게 기술하고자 노력하였다. 역사에 대한 궁극적인 판단은 역사가가 아니라 일반 독자의 몫이다. 역사가는 역사를 충실히 묘사할 뿐이며, 그 기본 책무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2) 종래 지나치게 강조되어 온 민족주의사관을 누그러뜨리려고 노력하였다. […]

실증주의는 일곱 가지 방법론들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하고 있으며, 그 앞에 '철저한'이라는 꾸밈말까지 붙어 있다. 이 책에서 실증주의라는 가치가 차지하는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게다가 그 바로 아래에는 '민족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시사함으로써 실증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립 양상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실증주의와 사료#

실증實證이란 실제로 증거를 댈 수 있는 것을 이른다. 증거를 댈 수 없는 것은, 곧 허구이거나 거짓말 또는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실증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증은 객관적 인식이자 과학정신이다. 그런데 오귀스뜨 꽁뜨가 실증주의positivisme를 들고 나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은 이상하게도 '진보'였다(김영한 1990, 63):

꽁트에 의하면 인간 정신의 진보는 3단계 법칙에 따르고 있다. 이 법칙은 ① 신학적神學的 또는 가상적假想的 단계, ②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또는 추상적抽象的 단계, ③ 과학적科學的 또는 실증적實證的 단계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바로 필연적 역사 법칙의 불가피한 결과들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

실증주의는 결국 옛 정신으로부터의 진보를 이름이었다. 이 '진보'의 이름으로 실증주의가 학문의 발전에 미친 영향은 작지 않다. 실제로 오랫동안 인간들은 잘못된 신학이나 잘못된 형이상학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잘못된 학문들의 하위 학문이었던 의학의 예를 보면 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무엇이 사실인지,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생명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병이 나면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바슐라르(1977, 63)는 생명이 잉태될 때 어떻게 성별이 정해지는가를 '설명'한,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17세기의 글을 소개하고 있고, 플로베르(1997, 47)는 황열병을 치료한답시고 피를 너무 많이 뽑아 환자를 죽게 한 일화를 쓰고 있다:

삐에르 쟝 파브르 의사는 1636년에 남성과 여성의 탄생에 관한 이론을 개진한다. "하나이며 모든 부분이 똑같으며, 동일한 기질을 갖고 있는 씨가 자궁 속에서 분리되어 하나는 오른편으로 다른 하나는 왼편으로 빠진다면, 그 씨의 분리 자체에서 형태나 모양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성性에 있어서까지도 하나는 남성, 하나는 여성이라는 식으로 대단한 차이가 야기된다. 씨의 힘과 기력과 열기를 유지할 보다 따뜻하고 보다 힘있는 육체의 부분이므로, 오른편으로 빠진 씨의 부분에서 남성이 생겨날 것이고, 인체의 보다 차디찬 부분인 왼편으로 빠진 다른 부분은 씨의 힘을 훨씬 감소시키고 약화시킬 찬 특질을 받아들이게 되어, 거기에서 여성이 생겨날 것인데, 그것도 원천에서는 남성적이다." (원주=파브르, 《화학비밀개요》)

더 나아가기 전에, 객관적 경험과는 최소한도의 관련도 맺고 있지 않는, 그 단언의 완전히 근거없음을 강조해야만 하겠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빅토르가 탔던 배의 선장으로부터 직접 조카가 어떻게 죽었는지 듣게 되었다. 황열병黃熱病을 치료한다고 병원에서 너무 피를 많이 뽑았다는 것이었다. 네 명의 의사가 동시에 그에게 매달렸지만, 그는 곧 사망했고, 주임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제기랄! 또 하나가 갔네!"

그래도 더 객관적일 것으로 기대되는 자연과학, 그 가운데서도 인간의 삶과 직결되는 의학이 이럴진대 다른 학문이 겪고 있던 비논리성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실증주의의 등장 이후로 이와 같은 난센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실험을 통해 증명된 것만 믿고, 검증을 통해 확정된 것만 신뢰하는 과학적 태도는 이제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역사에 대한 서술도 있는 사실을 그냥 그대로 적어내기만 하면 된다.'라고는 그러나, 말할 수가 없다. 김영한은 실증주의 역사학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김영한 1990, 60-61):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많이 쓰이는 '실증적'이라는 말과 '실증주의적'이라는 말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실증적'이라는 말은 사료史料의 객관적 취급, 이른바 랑케가 말하는 "사실을 과거에 있었던 그대로 재생하는 것"(wie es eigentlich gewesen)을 뜻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은 과거 사실의 충실한 확인과 복원은 일면에서는 실증주의의 정신과 부합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곧 실증주의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의 정확성과 정밀성은 실증주의가 추구하는 첫 단계의 과정에 불과하며 실증주의의 최종적 목표는 어디까지나 경험에 입각한 법칙성과 예측성을 찾는 데 있기 때문이다. […]

[…] 자료의 객관적 취급이나 사실의 정확성을 추구하는 것은 따지고보면 실증주의자들에게만 고유한 특성은 아닐 것이다. 관념론자나 상대주의론자를 막론하고 모든 역사가가 사실을 정확히 확인하는 것은 그들의 제1차적 의무이며 필요조건인 것이다. 다만 문제의 발단과 견해의 차이는 이와 같은 사실의 확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확정된 사실에 대한 해석과 설명 방식으로부터 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에서 흔히 '실증사학'이라고 말할 때의 '실증'의 개념이 사료와 문헌에 대한 철저한 고증이라는 단순한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 한, 이것은 역사 연구의 특정한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우리나라에서 쓰이는 실증사학實證史學과 서양에서의 실증주의實證主義 사학史學과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며

좀 긴 인용문이지만, 요약하면 실증주의란 법칙을 세우기 위한 방법론이지, 결코 사실을 그냥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역사를 있었던 그대로 충실하게 기술하고자 노력하였다. 역사에 대한 궁극적인 판단은 역사가가 아니라 일반 독자의 몫이다. 역사가는 역사를 충실히 묘사할 뿐이며, 그 기본 책무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고 천명한 교과서포럼의 역사 교과서는, 실증이라는 단어에만 집착했지 실증주의의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서도 잘 몰랐기 때문에 법칙을 세우는 실증주의의 '기본 책무에 소홀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즈오의 나라』와 민족주의 사관#

가즈오의 나라
대중적 민족주의자라 할 만한 김진명이 주로 관심 갖는 것은 한국의 고대사와 근·현대사다. 그로서는 찬란한 한국의 고대사가 일제의 침략을 받은 근·현대 시기에 말소되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함으로써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다. (그의 글에서 중세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곧 그는 주로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한국이라는 나라 혹은 민족의 정체성을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실증주의는 식민사관에서 나온 자학사관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두 번째 소설에서 실증주의에 대한 "싫증"을 토로하고 있다(김진명 1995, 268-269):

"왜 단군 신화를 역사로 보지 않는 겁니까? 왜 이야기 정도로 치부하는 겁니까? 일본인들은 자기네 역사를 올리지 못해 안달인데 왜 우리는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입니까?"

상훈에게는 참으로 가슴에 와닿는 얘기였다. 에이지의 사건을 추적하면서 뼈저리게 느끼던 부분이었다.

"실증이 안 되고 있잖아요."

"밤낮 그놈의 실증 실증 하지 마십시오. 정말 싫증납니다. […] 이 나라 학생들은 제 나라 시조를 유치원에서 이야기 정도로나 배우라는 겁니까?"

"학문이란 그런 것이 아니오. 교과서에는 고증된 것만을 실어야지."

"일본이 수천 권의 역사서를 불태우고 말살해버린 한국의 고대사는 시시한 사서에 한 줄만 있는 사실도 애지중지하며 키워내야 합니다. 그런데 삼국사기 같은 정사에 있는 기록도 못 믿겠다고 교과서에서 빼버리면 우리나라 역사를 어디로 끌고 가겠다는 겁니까? 왜 과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하던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겁니까?"

학자들은 눈에 띄게 조선사편수회 시절부터 내려오던 뿌리 깊은 식민사관을 극복해내고 있었다.

소설에서 민족주의자들은 실증주의의 옷을 입은 식민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들의 논리는 일본이 사료 자체를 말살한 마당이니 실증주의라는 것도 허구가 아니냐는 것이다. 실증주의는 그 사료중심성 때문에 일제에 의해 조작된 사료에 휘둘려 식민주의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문영 님의 일제는 20만 권의 사서를 태웠나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제가 태운 역사 관련 책은 51종에 불과하다:

서희건 저 <잃어버린 역사> 1권 11쪽에는 <제헌국회사>와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이라는 책을 인용해 일제가 핀매금지하고 수거한 책은 총 51종 20여만 권이라고 밝히고 있다. <군국일본조선강점36년>을 쓴 사람은 일제시대 군수를 지낸 골수 친일파 문정창이라는 재야사가인데, 이 재야사가는 이외에도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많이 지어낸 인물이다. 바로 이런 사람이 주장한 내용이 일제가 20여만 권의 사서를 불태웠다고 주장한 것이다.

한국인들은 오래도록 반일 감정을 교육받았기 때문에 사실을 적확하게 지적하지 않기로 마음먹으면 한국인들을 도발하기는 무척 쉽다. 어쨌든 사료 말살설을 애지중지 키우면 "한국의 고대사는 시시한 사서에 한 줄만 있는 사실도 애지중지하며 키워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바뀐다. 실증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라 할 수는 없지만, '실증'의 정신은 찾아볼 수 없다. ('시시한 사서에 한 줄만 있는 사실'을 자꾸 키워내려다 보니 '고대 삼국은 한반도가 아닌 중국에 있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게 된다. 대체로 출전이 없는 주장이지만, 간혹 출전이 있더라도 문외한이 보더라도 무리한 적용이 많다. 실제로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상세하고 논리적인 비판이 나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격인 상훈은 때로 일본의 제국주의 역사학자들의 논리를 깨기 위해 실증주의를 주창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상훈은 제국주의자들의 역사관을 "황국사관"이라고 부르며, "학계의 양심"에 호소한다(김진명 1995, 222-223):

말은 삼국 학계라 하고 있었지만 결론은 일본을 제외한 중국과 한국의 역사기술을 옳지 못하다고 나무라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 올바른 토론이라기 보다는 한국과 중국의 역사학계에 대한 성토장이 되고 있었다. 누군가 상훈의 의견을 물어오자 상훈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일본 학계의 대표들이기 때문이었다.

"본인은 동양 삼국의 역사를 올바로 기술하기 위하여 삼국의 사서를 대조하고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을 위주로 하여 이제까지처럼 자국중심의 역사기술 태도를 버리고 철저히 사료에 입각하여 역사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고대사 중에서 한일간에 쟁점이 되어 있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일본의 역사기술은 여전히 황국사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므로 이 점에 있어서 학계의 양심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앞으로는 "자국중심의 역사기술 태도를 버리고 철저히 사료에 입각하여 역사를 재구성"하라는 것이다. 곧 실증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후 상훈은 주로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해석, 그 중에서도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일본 역사학자들을 압도한다. 사실과 전설을 구분해야 하며, 광개토대왕비에서도 과장된 부분은 인정해야 하며, 『일본서기』의 사료적 가치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토론 과정에서 또다서 등장하는 것이 역시 '분서焚書'론이다. 한국의 국수주의자들은 일제가 고대사 사료들을 말살했다고 주장하고, 일본의 황국사관에 빠진 사람들은 한국이 '임나일본부설'은 부끄러운 역사라 관련 사료를 다 없애버렸다고 주장한다(김진명 1995, 233):

"결국 한 점의 자료도 찾지 못하자 한반도의 사람들이 치욕적인 사실이라 기록을 모두 없애버렸다고 주장하기도 했지요. […] 세계 역사상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4·5세기 경이면 양국간에 사신 한번 왔다 간 것도 모두 사료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세기에 걸쳐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한 것이 겨우 일본서기의 기록 한 줄로 압축될 수 있습니까? […]"

한 소설에 실린 두 분서론은 자국중심주의적 역사관이 얼마나 쉽게 허구가 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의 주장을 깨뜨릴 때에는 '실증주의'를 종용하고, 한국의 역사를 기술할 때에는 "시시한 사서에 한 줄만 있는 사실"을 키워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 민족주의의 두 얼굴이다.

실제로 식민주의와 민족주의는 같은 논리를 가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다. 차하순(1990, 188-196)은 식민주의 사관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① 인종적 식민주의 사관 ② 진화론적 식민주의 사관 ③ 문화적 식민주의 사관 등이 있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식민주의자들이 타국을 침략할 때 "우리가 우월하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인종적 식민주의 사관이고, 그와 거의 구별할 수 없지만 굳이 가르자면 "우리가 더 진화되었으니 너희는 도태되어도 되므로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진화론적 식민주의 사관이다. 또, "우리 문명이 더 위대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문명을 주겠다"고 말하는 것은 문화적 식민주의 사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세 가지 식민주의 사관은 그대로 한국 민족주의에도 적용된다.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라는 주장이나 한국의 찬란한 고대사만을 강조하는 주장이 문제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구술사와 '기억'의 정치학#

교과서포럼이 '실증'적 태도를 견지하기 위해 취했던 것은 전적으로 사료에만 의존하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관점에 전연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의 황당무계한 주장을 그들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관찬 사서'라고 할 만한 중·고등학교 국사 책에조차 부족한 근거로 한국과 한민족을 치켜세우는 표현이나, 과장된 표현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때문에 교과서포럼 역시 일정 부분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이 철저하게 사료--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공문서--에만 의존하면서 간과한 부분도 적지 않다. 가령 동학농민운동은 "남겨진 실증적인 사료에 관한 한" 농민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 일으킨 보수적 농민 봉기로 평가된다. 이 교과서는 일제의 토지 수탈을 위한 토지조사에 대해서도 농민이 근거를 제출하면 땅을 돌려주었다는 식으로 기록하고 있고, 일본군 '위안부' 역시 '속아서 제발로 돈 벌러 갔다'는 취지로 쓰기도 했다. 이와 같은 '묘사'는 아마 그들이 택한 사료가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료였기 때문일 것이다. 공문서 중심의 태도는 필연적으로 개개인의 발언을 무시한다. 피해자들이 아무리 내가 피해자라고 증언해도 그 증언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가해자의 양심선언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속아서 제발로 돈 벌러 갔다'는 주장은 그런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셔널리즘과 젠더
우에노 찌즈꼬(1999, 149-154)는 1996년 12월에 발족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주장을 네 가지로 요약했다: ① '위안부' 강제 연행을 뒷받침할 실증 자료가 없다. ② 실증 사학의 입장에서는 피해자의 증언이 신뢰성을 의심받는다(구두 증언은 신뢰성이 없다). ③ 성性의 어두운 면을 중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④ 국민적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

우에노는 넷째가 그들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이라고 했지만, '기억'을 말하는 역사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첫번째와 두번째 주장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우에노는 그들의 주장에 약간 흥분한 듯하지만, 사실은 매우 차분하게 반박한다. 먼저 첫번째 주장에 대한 반박을 보자:

언뜻 보기에 이 주장은 문서 사료 지상주의인 실증 사학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네오 나찌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네오 나찌는 유태인 말살을 지시했던 히틀러가 사명한 문서 자료가 없다는 논거로 유태인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문서 사료 지상주의가 안고 있는 위험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 패전국이 전후 처리에 앞서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자료를 폐기 처분했다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나 교과서포럼이 택하고 있는 '실증주의'라는 것의 맹점이 나타나는 부분이다. 이들은 사료가 없다면 어느 무엇도 확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고, 그 사료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문서 사료에 한정된다. 문서 사료가 당대에 거쳐야 할 필연적인 숙명인 '검열'을 고려하지 않은 연구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우에노는 이어서 "실증 사학이라는, 언뜻 보기에 '과학적'인 방법론을 채용하는 것이 어떤 함정에 빠질 수 있는가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들이 '과학화'를 부르짖음으면서도 결국 궁극적으로는 '비과학화'로 나아가고 있다는 주장을 편다.

실증 사학에서는 문서 사료, 고고학적(물적) 사료, 그리고 구두 사료를 사료로 인정하는데, 이 가운데 구두 사료보다는 나머지 둘의 사료 가치가 더 높다. 또 문서 사료 가운데에서도 공문서가 사문서보다 가치가 높다. 그런데 문제는 "'공'문서란 '관官'에서 사태를 어떻게 '관리'했는가를 나타내는 자료"라는 점이다. 따라서 공문서는 언제든지 관의 판단에 따라서 수정되거나 삭제될 수 있는 문서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공문서만을 신봉하는 태도는 일견 불편부당不偏不黨한 태도로 보이지만, 사실은 당시 권력을 점하고 있던 쪽에 편향된 판단을 내리게 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 주장에 대한 반박을 보자:

'위안부' 문제의 특질은 지금까지 누구나 그 존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침묵함으로써 피해자가 없는 범죄가 되어 왔다는 것이다. […] '위안부' 문제는 '위안부'를 경험했던 여성들을 침묵하게 하는 일에 성공했다. 그 피해자들이 간신히 무거운 입을 열고 자신들의 체험을 증언하는데, 구두 증언은 역사 자료로서 신뢰성이 없다는 이유로 피해 자체를 부인하려 한다.

무분별하게 '실증'을 신봉하는 태도는 '말'을 신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고민은 사실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여성사 일반에 적용된다. "여성사는 '씌어진 역사'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역시 구술사oral history뿐이다(우에노 찌즈꼬 1999, 169-175).



MBC TV에서 3월 29일 방영한 뉴스후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구술사를 강조했다

구술사는 분명 몇 가지 문제가 있다: ① 망각이나 잘못된 기억 ② 비일관성 ③ 기억의 선택성 ④ 회상이라는 시점이 그것들이다. 곧 신뢰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기억이란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고, 이야기의 앞뒤 줄거리가 종종 맞지 않는다. 또, 기억은 항상 선택적인 것이어서 기억되는 것이 있고 잊혀지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게다가 편년체적으로 당대의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후일 인터뷰를 통해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이므로 현재의 처지가 과거의 기억을 윤색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씌어진 역사'인 '정사'에서도 구술사의 문제점은 다 나타난다: ① '정사'에서도 씌어지지 않은 기록이나 지워진 기록, 잘못된 기억이 있다. ② 정사 역시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한 '앞뒤가 맞는 역사'는 오히려 더 위험한 역사이다. 딱 맞아떨어지는 역사는 목적론적으로 '편집된 역사'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③ '정사' 역시 권력자의 시각에서 취사선택된 것만 기록한다. ④ 역사는 본래 당대에 어떤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끊임없는 '재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는 '회상'이다.

'씌어진 역사'만을 신봉하는 태도는 오히려 우리를 사실事實로부터 멀어지게 함은 물론, 그럼으로써 진실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 주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공식 문서뿐 아니라 작은 화장실의 낙서와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증언이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실증적인 태도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실증주의'는 현대 학문science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정보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판단력 그 자체이다. '씌어진 역사'만을 신봉하는 '실증주의'는 반쪽 실증주의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프레베르가 썼듯이 당대의 '위대한 사람'이란 후손을 위해 제 몸의 치수를 재게 마련이기 때문이다(Prévert 1986, 120):

위대한 사람
Le grand homme

석공의 집에서
난 그를 만났지
그는 제 몸의 칫수를 재고 있었어
후손을 위해서.

결론#

역사학자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사랑과는 별개로 학문의 연구는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것이 실증주의다. 실증주의라는 방법론은 당연히 항상 유효하다. 중요한 것은 '실증'의 근거를 무엇으로 잡는가이다. 공문서 중심의 담박한 서술이 역사 교과서의 임무라고 믿는다면, 역사학자라는 사람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 집필진에 역사학자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역사적 사실은 항상 미스테리일 수밖에 없으며, 다만 우리는 진실에 점근선으로 다가갈 수 있을 따름이다. 가령 식민지 근대화론이 완전히 허구인지 어느 정도의 진실성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른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든 적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이들 증언은 하나하나가 소중한 구술사이다. 물론 우리가 그들의 주장을 덮어놓고 100% 신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의 주장이 상당한 진실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판단된다면 거기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성실한 태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교과서포럼의 '담박한 서술'은 실제로는 철저히 편향된 시각에 불과하게 될 뿐이다.

참고문헌#

김영한. 1990. "實證主義史觀". 실린곳: 차하순 엮음. 『史觀이란 무엇인가』. 청람논단1. 증보7쇄. 서울:청람. 57-76쪽.
김진명. 1995. 『가즈오의 나라』. 2권. 서울:프리미엄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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