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전

나르시즘과 글쓰기: Michel Gondry 《수면의 과학》

엔디 2008. 8. 1. 19:45

도스또예프스끼는 병에 걸린 상태에서 꾸는 꿈은 무척이나 선명하고 강렬해서 뿌쉬낀이나 똘스또이 같은 작가들이라도 평상시에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라고 말했다(Dostoevskii 2002a, 85; 2002b, 1116). 이를 뒷받침하듯 프로이트는 일관되게 꿈은 소원성취라고 말했다(Freud 2003, 162). 그에 따르면 꿈의 유일한 목적은 소원성취이며, 그것도 순전히 이기적인 소원성취라는 것이다(Freud 2003, 384). 그렇다면 병에 걸린 사람처럼 현실에 불만이 많고, 고통을 많이 겪는 사람일수록 꿈도 강렬하고 생생할 것이다. 꿈은 현실을 뛰어넘고자 하는 ‘나’의 소원이나 욕망에서 비롯된다.

글쓰기 또한 이런 소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청준은 언어사회학서설 연작의 「지배와 해방」에서 작중 인물의 입을 통해 글쓰기의 시작이 ‘복수’라고 언급하고 있다(이청준 2000, 107-118). 복수라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이 현실에서 대개 패배자라는 것이고, 그렇다면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 역시 프로이트가 앞서 꿈에 대해 언급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글쓰기--넓게 보아 작품 활동--의 목적은 소원성취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소년, 스떼판#

불행한 현실의 세계를 벗어나 충족적인 꿈의 세계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나’의 삶은 행복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 여섯 살 때부터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스떼판이라는 소년이 있다. 그의 삶은 가령 이런 식이다:

어머니 “스떼판, 오늘 왜 일하러 회사에 가지 않았니?”
스떼판 “일 했는걸요.”
어머니 “뿌셰씨가 전화를 했단다.”
스떼판 “일 했다니까요. 하루종일 일을 했어요……. 꿈 속에서요dans mon rêve.”

수면의 과학

꿈과 현실의 삼투. 영화 《수면의 과학》은 이 특이한 스떼판의 일상을 따라가면서 소망 내지 욕망으로서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우리가 기쁨의 순간에 흔히 내뱉는 탄성은 이미 프로이트의 주장이 사실임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이게 꿈이냐 생시냐”라고 묻고 자신의 팔뚝이나 허벅지를 꼬집는다. 이 “꿈이냐 생시냐”라는 말에서 우리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고, 그것의 삼투 현상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약간의 착란 증세만 있다면 스떼판처럼 그 둘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한데, 이렇게 꿈과 현실의 경계를 지워나가는 이야기는, 프로이트의 명제를 뒤따라가 보면, 결국 현실 속에서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이루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꿈과 현실이 삼투되면서 현실에다가 꿈에서 성취된 소원을 하나씩 끼워넣는 것이다. 이 기묘한 나르시즘은 영화의 수용자로 하여금 스떼판이라는 이를 결코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스떼판은 결국 자신이라는 사실을--그것을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간에--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스떼판은 멕시코인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가 살고 있는 프랑스로 돌아온다. 어머니는 뿌셰 씨에게 부탁하여 달력 만드는 회사에 그를 취직시킨다. 그러나 자신이 무척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일을 하는 줄로 알았던 스떼판은 실망하고 만다. 벌거벗은 여인의 사진이 붙은 ‘바보같은’ 달력에 들어갈 글자를 풀칠하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는 ‘재앙력Disastrology’이라는 황당한 달력 그림을 사장에게 가지고 가지만, 사장은 이를 출판하기를 거절한다. “스떼판 씨, 농담이시죠?” 그 때 회사 동료는 스떼판을 위로하는 척하면서 “좋은 면도기를 쓰느냐”고 묻는다.

스떼판의 손#

스떼판은 하루종일 손으로 단순 노동을 하는 일에 무척 지치고 실망한다. 그는 거대한 손으로 동료들과 사장에게 복수하는 꿈을 꾼다. 스떼판의 면도기는 거미처럼 기어가서 사장에게 지저분한 수염을 넝마주이의 그것처럼 덥수룩하게 달아놓는다. 사장을 쫓아낸 후, 그는 사장실에 자신의 거대한 작품 ‘재양력’을 걸어둔다. 그리고 복사기 위에서 마르띤과 섹스를 한 다음, 물 속인지 공중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 빠리 시내를 날아다닌다.

꿈은 과장과 합리화의 소산이다. 스떼판의 거대한 손은 자신이 하는 실망스러운 풀칠 작업에 대한 불만과 그런 일을 강요하는 사장과 동료들에 대한 복수심이 함께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동료가 잠깐 말한 면도기에 대한 말도 꿈 속에서 놓치지 않는다. 사장을 수염 덥수룩하도록 만드는 것은 이를테면 ‘내 수염에 그렇게 지저분하다고? 너희들은 어떤가 보자.’하는 유아기적인 복수심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늘을 난다. 프로이트는 이 하늘을 나는 꿈이 유아기의 운동성과 관계가 있다고 단언한다(Freud 2003, 329): “아이를 안은 팔을 높이 들어올린 채 방안을 뛰어다녀 날게 하지 않은 삼촌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이 꿈은 동시에 흔히 “성적 감각”을 일깨우기도 한다는 것이다(Freud 2003, 330).

아니나다를까, 영화는 곧 아버지와 함께 장난을 하는 어린 시절의 스떼판을 비춰준다. 스떼판은, 마치 아침 잠이 많아 깼다가 다시 잠드는 일이 많은 우리들 중 일부처럼, 잠시 꿈에서 깬 듯하더니 다시 꿈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아무런 고통이 없는 듯한, 홈비디오 화질의 영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꿈이 끝나자마자 요란한 드릴 소리를 내며 그의 운명의 여인이 나타난다. 옆집으로 스떼파니가 이사 오는 소리다. 스떼판은 얼결에 스떼파니의 피아노를 옮기다가 그만 손을 찧는다.

스떼판의 손은 ‘거대한 손의 꿈’에서 보았듯 스떼판에게 있어서 무척 가슴아픈 존재다. 작품 활동을 하는 대신 열심히 풀칠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손이 매개가 되어 치료를 핑계삼아 그는 마음껏 스떼파니의 방에 들어선다. 실은 스떼파니가 그를 자신의 방으로 초대한 것이다: “세탁소는 나중에 들르고, 지금은 제가 당신 손을 봐 드릴게요.”

전망의 공간, 방#

영화에서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중요한 사건은 이 방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그는 손을 치료받고, 여기서 자신의 발명품들을 스떼파니에게 보여주고 선물한다. 여기서 그는 바다를 찾아다니는 배를 만들고, 여기서 “골든 더 포니 보이Golden the pony boy”라는 말 인형을 발견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방Zimmer’은 ‘여자Frauenzimmer’의 상징적 묘사에 사용된다(Freud 2003, 418). 우리는 스떼판이 스떼파니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에로스는 거의 소원을 성취했다고 말할 수 있다. ‘방’에 들어서는 것은 ‘여자’에게로 들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Bachelard 1990, 115): “집이란 세계 안의 우리들의 구석인 것이다. 집이란--흔히들 말했지만--우리들의 최초의 세계이다. 그것은 정녕 하나의 우주이다. 우주라는 말의 모든 뜻으로 우주이다. 내밀하게 파악될 때, 더할 수 없이 비천한 거소라도 아름답지 않겠는가?” 집이 내밀하다면 보다 개인적인 공간인 방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런 내밀한 공간 속에서 바다를 찾고자 하는, 숲을 안은 배를 함께 만들 때 그것은 그 두 사람이 하나의 전망을 갖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원 성취, 그리고 꿈과 현실의 삼투#

그러나 어쨌든 전망은 아주 미래적인 것이고, 현재로서는 불충족적인 것이다. 스떼판은 자신의 꿈 속에 스떼파니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가 경멸하는, 어머니의 새 애인으로부터 REM에 대해 들은 후 그는 소리친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잠의 노예가 아니야. 꿈을 조절할 수 있어.” REM이란 rapid eye movement, 곧 꿈을 꿀 때 눈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는 잠을 잘 때 눈에 어떤 장치를 해놓음으로써 꿈을 조절하고자 한다.

이것은 프로이트를 따라간다면 무척이나 기묘한 일이다. 꿈은 현재 이루지 못한 소원을 충족하는 기제인데, 스떼판은 꿈을 통제함으로써 현실의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다시피 스떼판은 꿈과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독특한 꿈과 현실의 삼투 현상을 이용하여, 꿈의 통제를 통해 자신의 현실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현실 속에서 어떤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스떼판의 소원은 온 세계가 자신의 작품‘재앙력’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스떼파니와의 사랑이다.

영화는 스떼판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데, 영화의 수용자 역시 스떼판처럼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스떼판의 꿈인지, 어디서부터가 생시인지 알 수가 없다. 영화는 주인공의 꿈과 현실을 흩뜨려놓음으로써 수용자의 꿈과 현실도 흩뜨려버릴 수 있는 어떤 권능을 행사하는 셈이다. 그만큼 수용자들은 스떼판이라는 캐릭터에 몰입하게 되는데, 그 몰입은 다름이 아니라 스떼판의 소원을 공유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연출의 힘이라고 하기 힘들다. 우리 모두 스떼판과 같은 소원을 이미 우리 속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프로이트가 『햄릿』을 분석하면서,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햄릿』을 썼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1년 후에 『햄릿』을 해독하고 있기 때문이다(Bergez 1997, 86). 여기서 작가와 작중 인물과 수용자는 모두 하나의 소원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꿈: 나르시즘과 글쓰기#

영화는 그렇게 어디까지가 꿈인지 어디서부터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끝난다. 스떼판은 멕시코로 다시 떠나려다가 스떼파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그 방으로 다시 들어간다. 말했다시피 스떼파니의 방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스떼파니에게로 다시 돌아간다는 뜻이다. 스떼파니의 방에서 2층 침대가 완성된 것을 본 스떼판은 그 2층 침대로 올라간다. 그곳이 자신의 자리라는 듯이. 거기서 그는 완성된 배와 자신이 선물한 발명품들을 본다. 그리고 꿈으로 다시 빠져든다. 스떼파니는 스떼판을 부른다.

현실에서 스떼판의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아닌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꿈 속에서 사는 행복을 스떼판은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스떼판은 꿈 속에서 스떼파니와 함께 진짜 ‘골든 더 포니 보이’를 타고, 숲을 안은 배에 오른다. 배는 드디어 바다를 찾았다. 스떼파니가 말하듯 바다mer는 곧 어머니mère이기도 한 것이다. 이 동음이의어는 '그들'의 꿈이 전적으로 언어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언어는 곧 글쓰기이다. 《수면의 과학》은 글쓰기가 나르시즘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면서, 글쓰기의 행복감에 대해서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이청준. 2000. 『자서전들 쓰십시다』. 이청준 문학전집 연작소설1. 서울:열림원.
Bachelard, Gaston. 1990. 『공간의 시학』. 곽광수 옮김. 이데아총서21. 서울:민음사.
Bergez, Daniel et al. 1996. 『문학비평방법론』. 민혜숙 옮김. 문예신서121. 서울:동문선.
Dostoevskii, Fyodor Mikhailovich. 2002a. 『죄와 벌』. 상. 신판. 홍대화 옮김.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서울:열린책들.
---. 2002b.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하. 신판. 이대우 옮김.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서울:열린책들.
Freud, Sigmund. 2003. 『꿈의 해석』. 재간. 김인순 옮김. 프로이트 전집 4. 서울: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