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전

길의 지식, 거리의 지혜: 보라 《로드 스쿨러》

엔디 2008. 9. 24. 01:35

미투데이를 통해 보라 감독의 《로드 스쿨러》를 접하게 되었다. 흔히 '탈학교청소년' 또는 '홈스쿨러homeschooler'라고 불리는 이름을 거부하고 '로드 스쿨러roadschooler'라는 새 이름을 원하는 청소년-청년들의 이야기였다. 예술가들조차 거리를 버리는 이 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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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는 한 시작詩作 메모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전집, 333):

「밤눈」을 쓰고 나서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만약 시 속에 존재와 삶의 비밀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단 몇 퍼센트만이라도 믿는다면, 우리는 이 '로드스쿨러'들을 주목해야 한다. 지금의 학교 교육은 기형도가 말한 '자연'과 '거리' 가운데 어느 하나도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은 성장이 아니라 경쟁을 말하고, 믿음과 잠언이 아니라 암기暗記를 말한다. 나는 경쟁과 암기가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그 나름대로 중요한 가치일 터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들 속에 매몰되는 다른 소중한 가치들이다.


시 「밤눈」이 묘사하고 있는 거리는 만만치 않다. 시인은 밤눈에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고 말해준다. 거리는 겨울이고, 그곳에 눈보라가 친다. 사시나무가 떨고 있고, 썩은 가지들은 엎드려 있다. 은실들은 엉켜 울고 있다. 그러나 밤눈은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 또 다른 사랑을 꿈꾸"고 있다. 그러면서 밤눈은 춤을 춘다. 시인은 궁금하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이를테면 로드스쿨러들은, 약간은 무책임한 비유이지만, 그 겨울과 눈보라 속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이다. 길의 지식과 거리의 지혜는 눈보라와 무관치 않다. 고통에 기반한 이 아름다운 지혜들은 삶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통 속에서도 춤을 출 수 있고, 그 속에서도 사랑을 꿈꿀 수 있다. 이런 춤과 사랑이 특이하게 보인다면, 오랜 인류의 삶을 조금만 더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본래 모든 축제란 슬픔 속에서,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내 생각에, 보라 감독의 인도 기행은 아마 그 고통과 축제가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볼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야위어 있거나 물에 잠겨 있었으며, 그들은 느릿느릿 살고 있었고 자유로웠다. 보라 감독은 그들을 "친근했다"고 하고 "행복의 속도"에 대해 말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적용될 행복의 공식을 알고 있었고, 그 공식이 옳다는 것을 믿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행복했다. 그것이 거리의 지혜였을 것이다.


거리의 지혜는 자유롭지만, 마찬가지로 책임이 따른다. 보라 감독이 말하고 싶어하는 로드스쿨러는 기성 권력에 반대하는 단순한 우상파괴주의자가 아니다. 그들은 남들이 유예한 자유를 미리 '쟁취'하면서 자유에 따른 책임 역시 함께 '쟁취'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지치면 서가에서 소설을 찾아 읽거나 멀티미디어실에서 영화를 본다는 로드스쿨러도 있었다. 책과 영화 속에 공부한 내용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들은 자유가 분명 통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문예창작, 사회과학, 만화, 애니메이션……. 그들이 하고자 하는 공부의 목록 일부다. 그들은 학교를 뛰쳐 나왔지만, 학업의 목표를 위해 수능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물론 이와 같은 '성실 모드'로만 이들을 평가하는 것은 성급하다. 아직 길을 찾고 있는 로드스쿨러도 있고, 모르긴 해도 잠깐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거리에서 삶과 직접 부딪혀 본 그들이 오히려 더 '책임'에 민감하고, 더 고민을 거듭하는 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밤눈이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듯이.

로드스쿨러들이 명성이나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보라 감독은 책을 출간함으로서 사회적 시선의 방패막이를 하려고 했고, 산은 대학에 감으로써 주변의 시선을 극복하려 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나로서는 이것이 로드스쿨러들의 어쩔 수 없는 인식이라기보다는 아직까지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인식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로서는 그들 가운데 많은 숫자가 대학에 갔으면 좋겠다. 다름을 용인하지 않고, 올바름을 고민하지 않는 이 사회의 주목을 끌면서 그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길을 그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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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공부한답시고 다시 찾아간 대학은 '캠퍼스 리쿠르팅'이 한창이었다. 보라 감독이 말하는 '취업 준비소'의 가장 첨예한 모습이다. 그 가운데 '동아리 리쿠르팅'도 보였다. 후배에게 물었다:

"아니, 동아리도 리쿠르팅을 하나?"
"요즘 신입생 잡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그래? 요새 애들은 동아리를 잘 안 하나 보지?"
"아뇨, 하긴 하는데,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동아리는 잘 하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이 로드스쿨러들이 대학에 적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해보건대 그래도 대학은 사회 다른 부분보다 더 순수한 곳이었고, 세계를 바꾸기 위해서는 대학부터 순수의 모습을 찾아가야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4·19를 믿고, 68을 믿는다. 그래도 거리와 자연의 힘이 살이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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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가 조금만 더 친절했으면 좋겠다. 굳이 단락를 나눌 필요는 없지만, 대략 주제가 어떻게 흘러간다는 정도만은 자막으로 살려 줬으면 어떨까.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