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산울림의 《고도…》가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다는 소리도 들은 바 있고 해서 기대를 상당히 했는데, 그 기대가 전혀 깨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의 흠도 없이 진행된 연극은, 거의 세 시간이나 되는 긴 연극이었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예상과는 무척 다른 연극이긴 했다. 그건 나의 고정관념 때문에 텍스트를 잘못 읽어서 생긴 문제였다. '실험극', '부조리극' 따위의 말 때문에 나는 이 연극이 으례 지루하고, 시종 비장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베케트의 '고도…'는 비장한 극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희극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라고 이 연극을 보고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식이다. 비극적인 희극 혹은 희극적인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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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거의 완전히 원작을 실제로 구성해냈다. 내가 원작에서 특히 주목했던 부분은 대사들의 리듬이었다. 물론 원작에 특별히 meter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혹시 있다고 해도 번역과정에서 사라졌기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대사들이 '운율'이 없이도 한 권의 시집처럼 리듬감있게 진행되고 있었다. 번역의 뛰어남과 연출·연기의 뛰어남이 함께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에스트라공 그런데 우리가 그자한테 정확히 무슨 부탁을 했지?
블라디미르 너도 같이 있었잖아?
에스트라공 난 정신을 안 차렸거든.
블라디미르 저― 딱히 뚜렷한 건 없었지.
에스트라공 일종의 기도였지.
블라디미르 맞아.
에스트라공 막연한 탄원이었고.
블라디미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에스트라공 그래 그잔 뭐라고 대답하데?
블라디미르 좀 두고 보자는 거야.
에스트라공 아무것도 약속은 못하겠다는 거군.
블라디미르 생각을 해봐야겠다는 거지.
에스트라공 맑은 정신으로.
블라디미르 가족들하고 의논도 하고.
에스트라공 친구들하고도.
블라디미르 지배인들하고도.
에스트라공 거래상들하고도.
블라디미르 자기 장부하고도.
에스트라공 은행 통장하고도.
블라디미르 그래야 결정을 내리겠다는 거지.
에스트라공 그건 당연하지.
블라디미르 하긴 안 그렇겠니?
에스트라공 그런 것 같군.
블라디미르 내 생각도 그렇다.

-『고도…』, 25-26쪽.

여기서의 대화의 리듬은 두 사람이 단어들을 주고받는 데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 장면에서 그들 두 사람이 말한다고 하는 것보다는 말이 '튀어나온다'고 하는 편이 좀더 정확한 설명이 될 것이다.

에스트라공 가자.
블라디미르 갈 순 없다…….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81쪽)

이 대사는 연극 전편에 걸쳐 계속 나오고 있는데, 블라디미르가 오금을 굽혀앉으며 "고―도를 기다려야지―"라고 대답하면 에스트라공은 합장을 하며 "참! 그렇지!"한다. 번역자 오증자가 말한 것처럼 이 대화는 '교향곡의 모티브'처럼 계속되어 "기다림에 이유와 활기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런 "이유와 활기"는 그것이 단지 계속된다는 점에서 부여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임영웅의 연출은 베케트의 극에 대한 충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훌륭한 연출이다.

럭키의 그 유명한 장광설도 잘 읽어보면 그러니까 잘 들어보면 어떤 리듬이 거기에 숨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구두점이 없음에도 대략 길이가 일정하게 설정된 어구의 길이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고, "인체체체", "아카카카데미", "설설설정"(이상 69쪽) 처럼 흐르는 리듬을 끊는 장치에 의거하기도 하는 것이다. 또 럭키의 장광설은 생각을 시작하게 되면 외부로부터의 치명적인 강압이 없이는 그가 말을 그만두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시 그 리듬감과 리듬의 관성을 충분히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임영웅은 이를 치밀하게 계산하여 '생각' 이전에 일정한 휴지休止를 둠으로써 그 리듬감을 극대화시키고 있고, 더구나 굉장히 빠른 '생각'을 통해서도 리듬을 전혀 망치지 않고 훌륭하게 소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김인환은 "한 권의 시집이야말로 한 편의 연극에 매우 유사한 구조를 밑에 깔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도 훌륭한 연극은 그 음악성 때문에 궁극적으로 시가 되고 만다.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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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minoci.net 민노씨 2009.11.16 15:12 신고 댓글주소 | 수정/삭제 | 댓글

    이 글 정말 오랜만에 다시 읽네요. :)
    지금 다시 읽어도 아주 빼어난 연극평이네요.
    이제 직장생활도 어지간히 적응이 되셨을텐데 블로그에서 더 자주 뵙기를 바라봅니다.

    • Favicon of http://endy.pe.kr 엔디 2009.11.16 22:59 신고 댓글주소 | 수정/삭제

      노력하겠습니다. 근데 막내라는 점이 걸리네요. ^^ 그동안의 공백도 있고 하여... 하여간 '그 형식'이 아닌 다른 글이 그립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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