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책/詩

나르시시슴과 그 확장: 김혜순 시 다섯 편의 분석

엔디 2004. 9. 4. 23:07
김혜순의 시는 '몸의 시'이다. 인간이 육체와 욕망을 발견하게 된 것이 르네상스 이후라고 한다면 그때부터 생산되었을 수많은 시들에 몸의 묘사나 언급이 안 나올 리 없지만, 김혜순의 시를 '몸의 시'라고 하는 것은 그보다 더 나아간 의미에서이다. 대개의 경우, 시에서 나타나는 몸은 주체이거나 대상이다. 1인칭의 몸이 다른 대상을 욕망할 때, 그 '몸'은 주체의 몸이다. 또 1인칭이 3인칭의 몸을 욕망할 때, 그 '몸'은 대상의 몸이다. 그런데, 김혜순의 시에서 '몸'은 주체이자 곧 대상이다. 이 강렬한 나르시시슴narcissisme, 그것이 김혜순 시의 본질이다.

김혜순 시에서는 특징적으로 물의 이마쥬가 무척 강렬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거기서 물의 이마쥬는 자세히 살펴보면 실은 거울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의 경우에는 나르키소스 자신이, 그리고 거울의 경우에는 이상李想이 예증적으로 그렇듯이 물과 거울은 자기 자신과 만나게 하는 동시에 이를 단절시키는 기능을 주로 한다. 때문에 나르시시슴의 끝은 늘 불행하다. 그러나 이처럼 불행으로 끝나는 나르키소스 이야기는, 벌써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상정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김혜순의 시에서 보이는 나르시시슴과는 거리가 있다.

「물 속에 잠긴 TV」는 그 징후가 보이는 작품이다. 첫째 연 맨 앞에서 화자는 "TV 욕조 속에서 하루 종일 나오지 않는 그녀를 들여다"본다. 그런데, 셋째 연 첫 행에서 화자는 앞서의 진술을 조금 바꾸고 있다. "나는 이어서 그녀라는 이름의 TV를 들여다보네." 그녀가 "TV 욕조 속"에 있다는 진술과 "그녀라는 이름의 TV"라는 진술은 거울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엇바뀜이다. 거울은 항상 자기자신을 '주인공'으로 비추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울은 주체와 대상 사이를 단절시키기도 하지만, 주체와 대상이 있는 문맥contexte을 희석화시키는 기능도 한다. 그래서 나르시시슴은 생산성이 없는, 망각의 시학이 될 가능성이 짙다. 더구나 목욕이라는, 가장 강조된 자기애自己愛가 그 중심에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나르키소스는 아사餓死했던 것이다.

하지만 김혜순의 위의 시에서 물(거울)과 등치되는 매개로서 'TV'가 관련되고 있다는 것은 시사적이다. 거울과 TV는 주체와 대상을 만나게 하면서 동시에 단절시키는 유사점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밖의 기능은 모두 서로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거울이 자기자신을 비추는데 비해 TV는 자기자신이 아닌 것을 비추고, 거울이 문맥을 희미하게 만드는데 비해 TV는 문맥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울 속에서 우리는 자신 속에 함몰되는데, TV 속에서 우리는 TV로 표상되는 세계 속에 함몰되어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화자는 그 TV를 거울삼아 그 속에서 자기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정 뉴스가 끝나면 그 뉴스에 이어서
그 뉴스를 견뎌내는 건 바로 그녀
오늘밤 자정 뉴스는 오십 명의 넥타이 맨 남자들을 보여주었지만
여자들이 맡은 배역은 불에 타 죽은 아이를 껴안고
몸부림치며 우는 역할뿐

화자는 TV속에 등장하는 "여자들" 속에서 자기자신을 보는 것이다. 본래 TV의 특성은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그래서 마치 우리가 TV를 지배하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하는 데에 있는데, 이 시의 화자는 그렇게 TV를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그 뉴스를 견뎌내"고 있다. 그녀의 TV 시청은 "점점 더 깊은 땅속으로 끌려들어가서는 / 묻혀서도 숨쉬는 허파처럼 / 끝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TV 속에는 "여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의미심장한 2연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3연에서 앞서 인용했던 '주인공'이 된 "그녀"가 TV속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계속 "이어서" TV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시에서 TV가 거울역할을 대신했다는 것은 김혜순의 나르시시슴이 개인차원을 넘어선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거울은 자의식만을 강조하고 TV는 문맥만을 강조하는데 비해, "물 속에 잠긴 TV"는 두 가지 역할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이 TV에서부터 김혜순의 사회학적 상상력은 시작된다. télévision의 télé-가 본래 '원격遠隔의-'라는 뜻을 가진 접두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여기서 김혜순이 표현한 여성의 자의식이 사실은 보다 넓은 파문을 통해 퍼질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얼음 비단, 얼음 아씨」는 바로 그 점을 집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시이다. 길을 걷고 있는 화자를 누군가 안는다. 그 '누군가'는, "천사"로 지칭되고 있는데, "아주아주 멀고 먼 곳"에 있는 이다. 그는 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을 환하게 밝히며 들어"오고, "핏줄마다 살결마다 스며[든]"다. 그런데 여기서, "천사"들이 내 속에 있다는 것에서 사실은 나도 "천사"들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함께 안고s'embrasser있는 것이다. 생각을 더 진전시켜보면, "천사"들이 사실은 화자 자신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사"들은 화자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곧, 화자의 자의식 속에 있기 때문이다.

"천사"와 화자를 연결시켜주는 것은 "氷蠶"이다. "氷蠶"은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누에인데, 서리와 눈 속에서 나며 이 누에고치에서 나온 실로 짠 천은 젖지도 않고 타지도 않는다고 하는 전설상의 동물이다. 더불어 얼음 빙氷자가 예비하고 있는 것은 화자의 눈물이다. 화자의 눈물은 "효모"로, "솜털"로 "가볍고도 환한" 이마쥬로 제시되어 있다. 눈물이면서 환하고 눈물이면서 젖지도 타지도 않는다고 하는 진술은, 그 눈물이 결코 소모적이고 자기 함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그 눈물은 생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눈물(곧, "氷蠶")로 화자와 "천사"가 튼튼하게 엮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눈물의 이마쥬는 「자욱한 사랑」에서는 "눈보라"로 바뀌어 나타난다. "이토록 자욱한 눈보라" 때문에 화자는 "헤집고 갈 수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눈보라"가 부정적인 이마쥬만이 아닌 것은 바로 이어서 나온다.

세상에! 돌림병처럼 자욱한 눈보라!
이 병 걸리지 않고는 네 몸을 건너갈 수가 없겠구나

여기서 우리는 "눈보라" 역시 거울처럼 만남과 단절을 함께 주는 매개체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눈보라"는 거울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매개체이다. 거울은 만남을 주는 척하면서 실은 단절을 주는 매개체라면, "눈보라"는 단절을 주는 것 같은데, 사실은 만남을 주는 매개체인 것이다. '눈보라 돌림병'에 걸리기만 하면 "네 몸 속"으로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돌림병"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돌림병"이란 말 자체와 "결핵"이 피를 상기시키고 있고, "어린 새"와 "아가의 심장을 만들어오시는 그분이 / 아무도 몰래 넣어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주머니"가 자궁(子宮)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월경menstruation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여성성을 말하는데 있어서 월경이 갖는 위상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것이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것, 곧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레위기Lévitique 이래로 늘 부정하다고 여겨졌고 그것이 여성이 열등하다는 증거로까지 쓰여왔던 것이다. 여기서 월경을 일종의 병病으로 지칭하는 것은 '월경'이라는 단어가 종종 갖는 사회적 문맥과 관계가 깊다. 화자가 "나 어떻게 이 숨찬 눈보라 건너가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러나 모든 여성들은 그 눈보라를 건너가야만 하며, 그 눈보라, 곧 "氷蠶"을 통해서 먼 곳에서도 서로를 안을 수 있는 것이다.

여성의 이와 같은 형상화는 '어머니로서의 여성'이라고 불릴만 하다. 바로 그 점에서 「어머니 달이 눈동자 만드시는 밤」은 좀더 상세하게 이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어머니는 "달"로 표상되고 있는데, 이것은 앞서 서술한 '월경'과 관계가 깊다. 월경을 '달거리'라고도 하는 것이다. 달에서 어머니를 보는 것은 아르테미스 신을 상기시킨다. 아르테미스 신은 달의 신이며 수렵의 신인데, 달의 둥근 굴곡이나 활의 둥근 모습이 만삭의 배와 같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아르테미스 여신은 달의 신이자 출산의 여신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문맥은 좀더 넓게 펼쳐지고 있다. 화자가 "걸어들어"가는 곳이 바다이기 때문이다. 왕왕 모성성을 드러내는 바다의 모티프들이 여기에 드러나고, 밀물과 썰물을 두고 "우리 어머닌 한 천 년째 바다를 휘젓고 계시다"고 쓰고 있는데서 볼 수 있듯이, 여기서의 어머니는 개인적인 어머니가 아니라 세계의 어머니, 생명의 창조자로서의 신이다. 되짚어보면, 「자욱한 사랑」에 나왔던 바로 그 "네가 태어나기 전 먼먼 옛날부터 / 뜨거운 손길로 아가의 심장을 만들어오시는 그분"이 바로 어머니인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라노스에서부터 시작되는 남신들의 계보는 "바다 깊이 잠들어"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아버지'에게 배꼽이 있다는 것이다. 배꼽은 탯줄의 흔적이므로, 남신인 '아버지'도 실상은 '어머니'로부터 온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와 아퀴나스의 제1원인으로서의 신의 우주론적 증명에서 보이는 남신의 역사도, 사실은 여신이 없다면 있을 수 없다는 거대한 인식의 전환이 여기에 보이는 것이다. 아퀴나스를 풍자하여, 제1원인으로서의 '어머니'는 "바다를 휘[저]"어서 생긴 "파도란 파도 / 그 모든 파도의 물방울 방울마다" 맺히는 "영롱한 눈망울"을 만들고 있다.

그 '어머니'는 '할머니'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혜순은 일찍이 씌어진 「딸을 낳던 날의 기억」에서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거울 안에 어머니가 앉아 계시고
거울 열고 다시 들어가니
그 거울 안에 외할머니가 앉으셨고
외할머니 앉은 거울을 밀고 문턱을 넘으니
거울 안에 외증조 할머니 웃고 계시고
외증조할머니 웃으시던 입술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니
그 거울 안에 나보다 젊으신 외고조할머니
돌아 앉으셨고
그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또 들어가니
또 다시 들어가니

와 같이 쓴 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혜순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세계의 어머니, 곧 가이아로서의 대모라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어머니와 할머니와 증조할머니와 고조할머니와 ……로 이어지는 연대기-계보는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우주적 친연성의 필요조건이 된다. 이런 연대기가 있었기 때문에 "氷蠶"의 정신감응télépathie이 가능했던 것이다. 「잘 익은 사과」에서 맨 처음에 들려오는 소리들은 이와같은 우주적 친연성을 예표해주는 장치이다. 그런 우주적 친연성은 특히 화자가 "고향 마을"로 가고 있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는데, 그 "고향 마을"에는 다름아닌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노망든 할머니"가 바로 대모다, 가이아다, 제1원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라 하더라도 이 할머니 역시 언젠가 '어머니'였음에 틀림없다면, 화자가 그 할머니에게 우주적 친연성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처사라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김혜순적인 나르시시슴이다.

그러나 화자는 더이상 "氷蠶"의 이불 속에서 있을 수는 없다. 「어머니 달이 눈동자 만드시는 밤」에서 화자는

그러나 시방은 다시금 내가 그 바다에서 걸어나올 시각
나는 가슴에 나란히 포갰던 손을 풀고
오대양 육대주 넘실거리던
내 두 눈동자의 주름을 거두어 들고
이불 밖으로 몸을 솟구쳐올린다

고 쓰고 있다. 화자가 그 아름다운 친연성의 천국에 "천사"들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이유는, 그녀가 여전히 "자정 뉴스는 오십 명의 넥타이 맨 남자들을 보여주"는 '지금-여기'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여기'를 보여주는 시는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의 다른 시편들에 훨씬 많은데, 특히 표제시인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는 시인이 직접 남신에게 항의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남신의 역사(달력)는 지금껏 본 여신의 역사보다 훨씬 지루하게 그려져 있다. 남신들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며, 지겨운 열두 곡의 노래를 계속해서 틀어댄다. 생명의 탄생과 관계하는 여성성의 환희와 비교해보면 남성의 역사의 권태로움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사실 「물 속에 잠긴 TV」만 보아도 그런 권태는 충분히 드러난다. 넥타이 50개가 쉴새없이 들락날락하는 TV!

권태는 시의 안과 밖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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