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어릿광대의견해

국민국가와 출산의 의무

엔디 2004. 12. 22. 23:32
우에노 찌즈꼬는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젠더 중립성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것은 국민국가가 국민 혹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고, 그 요구는 '국방의 의무'로 대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상의 어떤 나라도 남성과 여성에게 똑같이 병역의 의무를 지우는 경우는 없다. 흔히 양성공동병역의무제의 사례로 이야기되는 이스라엘에서조차 여성의 복무기간이 남성의 복무기간에 비해 훨씬 짧다. 이같은 상황 때문에 군으로 위문오는 선교단체들은 항상 젊은 여자를 앞세워 "여러분들 덕분에 저희가 안전하게 사는 거죠?"하고 묻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에서 "남성이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는 것이다.

이 인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옳다. 남성은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성만 군대라는 곳에 가겠는가. 왜 군에 가기 직전의 남성이 돈을 주고 여성을 사는지의 의문도 여기서 풀린다. 그 남성은 그 여성을 지키기 위해 군에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제국주의 일본 당시의 '위안부'와 소위 말하는 '사창가'의 공통점이 있다. 여성들은 왜 자신들을 지키러 이 사내들이 군에 간다고 생각하는가. 자신들은 자녀를 낳아야 하기 때문이다.

국민국가 체제의 가장 주된 속성은 영속하려고 하는 욕망이다. 그 영속의 욕망이 '국방의 의무'를 만들어낸다. 그 '국방의 의무'는 다시 '병역의 의무'와 '출산의 의무'를 만들어냈다. '병역의 의무'가 보다 성문법적이고 '출산의 의무'가 보다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국민국가 체제가 개인을 억압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보다 너무나 쉽게 깨달을 수 있다. 그건 인구정책을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가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가 되고, 그것이 또다시 "한 집 걸러 한 집 낳기"와 같은 캠페인을 낳았다면, 그것은 국가에 의한 출산 통제의 아주 기본적인 문맥이다. 당시의 예비군들이 공짜로 정관을 묶는 수술을 받고 당일의 훈련을 면제받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지금은 보다시피 정관수술은 이제 보험 혜택도 받을 수 없다. 국민국가는 교묘하게 우리의 육체를 조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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