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책/詩

입자의 크로놀로지: 이윤학『먼지의 집』

엔디 2005. 1. 16. 23:37
책장에서 오랫동안 잠자던 시집을 한 권 꺼내본 적이 있는가. 종이가 바스러질까 조심스럽게 꺼내서, 어딘지 색이 바랜 것 같은 모습에 눈을 껌뻑거린다. 그리고는 촛불 끄는 시늉을 하듯 조용히 입김을 불어본다. 더께앉은 먼지가 날아오르면서 눈을 따갑게 한다. 그렇게 한참을 눈을 비비고 나면, 별 무늬도 없는 장정인데도 제 색을 찾은 시집은, 미켈란젤로의 천정화처럼, 선명하게 윤기가 흐른다. 그러나 그 윤기를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선연하게 물이 흐른 흔적이 있다.



1


제비가 떠난 다음날 시누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제비집을 헐었다. 흙가루와 함께 알 수 없는
제비가 품다 간 만큼의 먼지와 비듬,
보드랍게 가슴털이 떨어진다. 제비는 어쩌면
떠나기 전에 집을 확인할지 모른다.
마음이 약한 제비는 생각하겠지.
전깃줄에 떼지어 앉아 다수결을 정한 다음날
버리는 것이 빼앗기는 것보다 어려운 줄 아는
제비떼가, 하늘 높이 까맣게 날아간다.

- 「제비집」全文

시인은 곳곳에서 먼지 앉은 시집을 발견한다. 그 위에 얹힌 먼지의 두께는 시집이 견딘 시간의 무게를 의미한다. "만큼"이라는 말이 의비하는 바가 그것이다. 그리고 "품다"나 "가슴털"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삶은 따뜻한 삶이다. "마음이 약한 제비"가 아마도 미련을 갖고 몇 번이고 둘러본 제비집의 모습이다. 집이란 기억을 담는 장소이고, 이를테면 몽상의 고향이다. 그리고, 기억은 먼지, 비듬, 터럭, 그리고 가루와 같은 입자로 등장한다.

서정주의 「新婦」에서 우리는 이미 이 '입자의 상상력'을 보았다. 우리는 "매운재"가 "초록 재"나 "다홍 재"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을 때로 받지만, 매운재의 사전적 정의가 "진한 잿물을 내릴 수 있는 독한 재"라는 것을 상기하면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가 견디어야 했던 시간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고, 거기서부터 매운재의 말맛을 다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리의 새가 죽어갔다. 한 가지 표정으로
굳어 있다. 응달에 흩어져 있는 새가 남긴 털들
한때는 새털이었던 털들이 흩어지고
털을 잃은 몸이 웅크리고 있다. 털들은 더 넓은 곳으로
흩어지고, 새의 죽음은 더 넓은 곳으로 퍼진다.
오그라든, 틀이 안 맞는 발가락들, 빛을 잃은 발톱들이 남긴
검은 그림자, 높은 곳에서 반들거리던 털들이 흩어지고
새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문을 열고 줄지어, 뿔뿔이 흩어지는
수십 마리의 구더기…… 검은 점을 하나씩 달고…… 날아다니던
구더기, 엉금엉금 기어간다. 너무 오래 갇혀 지냈다.

- 「구더기」全文

하나의 삶이 다만 많은 입자들로 바뀌어버리는 이 놀라운 환원은, 그 흩어짐을 통해서 더욱 세상에 편재하는omniprésent 것이 된다.

그런데 화자話者는 그 제비집을 헐었다고 했다. 제비가 몇 번이고 아쉬워했던, 자신의 몸을 품어주었던 제비집을 화자는 떠난 다음날 헐어버린다. 여기서 그가 빗자루를 들고 제비집을 허는 이유를 설명해야 할까. 그의 빗자루는 흙가루와 먼지와 비듬, 그리고 제비의 가슴털을 위한 것이다. 그는 마음이 약한 제비의 "상처", 그 기억들을 쓸어버린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비집은 사라지지 않는다. 화자가 제비집을 헐어버렸는지 모르지만, 제비의 기억은 화자가 쓸어버린 제비집 속에 남아있다. 다만 흩어질 뿐이다.


나는 매달려 생을 다 허비하고 말 거야
[…]
나를 가두는 것이 있다면
밑으로 끌어내리는 힘이었다. 알 수 없는 끝내 느낄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천천히 지워져갔다 단단해지면서.

- 「좀약」부분

좀약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흩어지지만 좀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죽어가는 좀약은 자신의 몸뚱아리를 흩으면서 자신의 몸을 퍼뜨린다. 이 시는 「구더기」와 함께 죽음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 시로서 중요성을 가진다. 시간이 우리를 지운다는 것은 쉽게 인식 가능하지만, 지움으로써 단단해진다는 것은 얼핏 이해하기 힘든 명제다.

봉현이 형은 방위병이었다. 그는 한 마리 개구리였다.
죽은 다음에 강해졌다. 강해지기 위해
죽었다. 입을 닫고 눈을 부릅떴다. 살아 남은 者는
약하다, 그래서 울음 주머니가 필요하다


- 「개구리」부분

「개구리」에서도 그와 같은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 "죽은 다음에 강해졌다"는 진술은 그 다음 행의 "입을 닫고 눈을 부릅떴다"는 근거를 딛고 있다. 그는 이제 더이상 울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좀약은, 좀약은 죽음으로써 다만 사라져 없어지지 않는가. 그러나 오래된 장롱을 열었을 때 흠씬 풍겨오는 좀약 냄새를 생각해보자. 그 좀약은 기화氣化됨으로써 더욱 단단해진 것이 아닌지.

「그 노인」에서는 제비가 노인으로 바뀌어 다시 등장하고 있다. 노인이 살던 집 처마끝의 제비집에 시선을 멈춘 화자는, 거기서 다시 노인의 생전 모습을 그려본다.

봄이 왔다. 담쟁이넝쿨 뻗어나와 그 집
흙벽을 덮는다. 봄에 얼어 죽은 노인이 살던 집
처마끝 제비집, 바람에 검불들 흔들린다. 백발의 노인은
꺼칠한 수염을 달고, 마루 끝에 서서 먼 산을 바라보곤 했다.


- 「그 노인」부분

읽는이들는 그 집이 흙벽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유심히 볼 일이다. 흙벽은 그 이름부터가 옛집古家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그 입자인 흙을 쌓아 만들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퇴적형의 기억을 생각하게 된다. 노인이 얼어죽자 담쟁이덩굴은 그 기억의 흙벽을 덮어버린다. 덩굴은, 보아뱀처럼, 기억의 흙벽을 자신의 몸 속으로 완전히 소화시킨다.

우리는 시의 마지막에서 그 노인이 평생을 홀아비로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의 앞부분에 제시된 폐가閉家의 모습으로 봤을 때, 그 노인에게는 후사後嗣가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도 따지 않는 열매들 붉어져갔다."가 갖는 명백한 생식生殖의 의미도 여기서 풀린다. 그 노인은 어쩌면 스스로를 구더기라고 생각했을까.

구덩이에서 알을 깔 수는 없었다
더러운 生을 물려줄 수는 없었다


- 「구더기의 꿈」부분

노인이 얼어죽었다는 데서, 우리는 안락함을 주지 못하는 집의 존재를 새롭게 깨닫는다. 바슐라르의 행복한 상상력과는 달리, 때로는 집도 아무런 구원이 되지 못한다. 자기 집을 얹고 사는 동물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들의 집은 그들에게 힘겨움은 주면서도 진정한 휴식은 되지 못한다.

집이 되지 않았다 도피처가 되지도 않았다

- 「달팽이의 꿈」부분




2

시인에게 진정한 휴식은 오로지 죽음으로만 가능하다. 노인의 죽음 혹은 그 죽음의 공간, 그도 아니면 그 죽음의 기억을 덮은 담쟁이덩굴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 또, 하늘나라를 가리킨다 하더라도 어색하지 않은 따뜻한 남쪽나라를 향해 날아간 제비집에서도 그것은 발견된다. 죽음이 휴식이 된다는 것은, 흔히 지적되듯이 물화物化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물화는, 시인에게는, 결코 어둠에 속한 것이 아니다. 시인이 묘사하는 삶의 모습들이 오히려 어두움에 속한 것이다.

이제 그 눈물 속에서 보낸 밤들을 돌려보낸다
흐르는 강물아, 썩어 흐르는 강물아 그 깊은 밤들은 이제
끝이다
[…]
이제는 추억을 버려야 살 것 같다
[…]
강둑에 앉아 마른
풀을 만지며 흘러가지 않는 구름들을 본다, 전할 말 없느냐


- 「沙金」부분


화자는 눈물 속에서 밤을 보냈다고 고백한다. 흐르는 강물에게 밤의 작별을 고하는 것은, 그 강이 밤과 같은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강물은 추억을, 썩어 흐르는 강물은 썩은 추억을 가리킨다. 앞서 인용했던 「구더기」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보자. 새가 죽고 나서 날아다니던 수십마리의 구더기가 새 가슴의 문을 열고 흩어졌다고 시인은 적고 있다. 사체死體에 파리가 쉬를 슬면 구더기가 나타난다는 인식을 시인은 뒤집고 있는 것이다. 구더기는 살아 있을 때 그 몸 속에 있다가, 새가 죽자 거기서 나와 흩어진다. 시인에게서는 삶과 죽음이 역전되어 있다.

한편 화자는 지금 구름을 동경하고 있다. 그 구름은 이를테면 보들레르의 이방인이 "나는 저 구름을 사랑하오... J'aime les nuages..."라고 고백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이 시의 구름은 고정되어 있다. 흘러가지 않는다. 그 흐르지 않음이 강물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는 것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전할 말 없느냐"는 의문문의 객체가 강물인지 독자인지 밝히기는 힘들지만, 확실한 것은 화자는 이제 곧 구름으로 지칭되는 다른 곳으로 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가 가려고 하는 곳은 과거가 없는 곳이다.

몇몇은 사생아를 낳고
과거 없는 곳으로 떠났다.

- 「1985년」부분


과거가 없다면 그곳은 미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사생아를 낳았기 때문이다. 과거가 없는 곳이란 없으며, 다만 현재화된 과거, 물화된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새하얀 구름이 받쳐주는 색채의 감각에 힘입어 그곳은 밝은 곳이다. 밤의 추억들을 버리고 시인은 밝은 곳으로 떠나고자 한다.

나는 언젠가 이 무거운 몸을 버리고
환해질 것이다
그때는 아무것도 아닐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을 덮어줄 먼지들이
내 주위엔 얼마든지 있다

- 「솜공장에서―먼지」부분


죽으면 그 죽음을 덮어줄 수 있다. 그러면 그 먼지 안에서, 담쟁이덩굴 안에서, 그리고 흩어지면서 죽음은 환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그 죽음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생식을 부정한다는 면에서 삶에의 부정, 세상에의 부정에 다름 아니다. 시인은 시간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죽음 속에서 시간은 더이상 흐르지 않는다.

죽음이란, 단지, 물러가지 않는 어느
튼튼한 벽과 영원히 만나
날개를 가두는 것이라고,

- 「바퀴벌레의 춤」부분

아아아아, 입만 크게 벌리고 있다
갈 곳을 잊고 있다 쓸쓸하고 변하지 않는
공기가 한 줌, 그 크게 벌린 입 안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 「죽음, 변하지 않는―노가리」부분

더듬어 무덤 하나를 찾고 있다, 타버린 돌들로 뒤덮인 작은 무덤. 죽음은 늙지 않는 것이리.

- 「판교리2―무덤」부분


그러므로 시인에게 있어 죽음은 없어짐은 아니다. 죽음은 그대로 있음이다. 아, 이제 드러났다. 시인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을 송두리째 가두고 싶은 것이다. 가엾은 사랑을 빈집에 가두는 몸짓으로, 시인은 자신의 사랑의 기억을 가둔다.

앞으로도 그런 배꽃은 피지 않을
거다. 배꽃은 녹지 않는 눈이다. 내리지 않는 눈이다. 그리고
배꽃은, 배나무집 女子가 안겨주는 작은 혹이다. 눈 한 번
맞추지 못한 女子, 나 혼자 쳐다보고 感電된 그 女子의 먼
눈이다.

- 「배나무집 女子」부분





3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이다. 그는 자식을 낳는 족족 잡아먹었다. 크로노스는 시간이라는 뜻이므로 대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은 시간'이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크로노스의 막내 아들인 제우스가 어머니 레토와 함께 크로노스를 속여 죽인 다음, 배를 갈랐더니 거기에서 하데스와 포세이돈을 비롯한 그의 형제·자매들이 뛰쳐나왔다는 사실은 모두 간과하고 있다. 시간은 모든 것을 삼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은 그 삼킨 것을 그 안에 보존한다. 시간에 의해 소화된 과거는, 현재로서의 과거이다. 하데스와 포세이돈이 제우스보다 형임에도 제우스가 맏형 노릇을 하게 된 것은, 크로노스의 뱃속에 있었던 그들이 갓난아이의 모습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점을 보다 명확하게 해 준다.

먼지의 집에서 먼지 속에 쌓여 있던 모든 것들은, 그러므로 항상 부활의 조짐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그곳에 죽어 있음에 틀림없지만, 그럼으로써 보존된 것이다. 이를테면, 「그 노인」은 노인이 평생 홀아비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끝나고는 있지만, 그 바로 앞 연에서 까치가 집을 지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까치는 텃새라는 점에서나 노인이 죽은 다음 덩굴과 함께 들어왔다는 점에서나 노인의 적자嫡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미 부활의 단초가 보이고 있다. 특히 시집 뒤편에 실린 나무 시편들에서 그런 부활의 모습은 쉽사리 관찰된다.

그가 온다, 밤이 되기 전에 와서
가시가 되는 것이다. 두툼한 가시가
기다림의 가시가, 그대로 있다. 그가
다녀간 흔적들이, 혹 같은 열매들이
맺혀 있다.
 
불 속에서만 타오르는 연기의 냄새를 숨기고,
늙고 병든 여자가 숨어산다.
숨어산 지 오래 되었다.


- 「향나무」全文


열매와 불이 사실은 하나임을 지각하고, 여자가 타오른다는 진술을 잘 생각해보면 이 시는 부활의 시편이 되는 것이다. 향나무, 그 여자는 그를 기다리며 혹 같은 열매를 맺으며 숨어산다. 향나무의 향내를 생각해보자. 그것이야말로 죽음으로 단단해진 좀약의 인식이 아닌가. 그러므로 향나무의 향내야말로 부활이 아닌가 말이다.

참아보거라 참아보거라, 검은 흙에서 싹이 돋아나고
깍지를 풀고 콩이 커진다.

- 「측백나무1」부분


코로 숨쉬면 아픈 기억이 생생하고 입을 벌리면 썩은 이의 아픔이 구역질을 내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어머니는 담에 걸렸다. 그러나 이토록 어려운 시절과 함께 화자는 식물이 가진 생명력에 주목한다. 흙은 세월에 썩은 검은 입자이지만, 거기에서 콩은 더욱 잘 자라는 것이다. 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열매는 저 혼자 떨어지고, 그 안의 씨는 또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다.

나는 죽지 않았다. 나는 자식을 낳았다. 검은 피부의 아버지가
불쌍해졌다.
[…]
나는 죽을 순 없어, 베어져도 남길 것이
있어, 다시 살아나야 할 이유가 있어.
잘린 부분에서 자, 새로 태어나는
싹을, 두 눈 꼭 감고 지켜보아라.

- 「측백나무4」부분


늘 푸른나무인 측백나무는 시간 속에 갖힌 것처럼 늘 같은 색이다. 시간이 덮어버린 탓일까. '나'는 죽지 않고 자식을 낳았다. "검은 피부의 아버지"가 '나' 자신을 지칭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나면, 그 고통스러운 삶이 실은 부활의 삶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두 눈 꼭 감고 지켜본다.

그 아이 돌아오지 않고 기다렸네
[…]
그 아이 무덤 위에
억센 조선잔디 보름처럼 입히고 싶었네
그 자리 억새 사이 빛 고운
잔디씨, 누런 봉투 가득 훑어
나만 홀로 학교에 갔었네


- 「잔디씨」부분


두 눈 꼭 감고 지켜보았다. 기다려보았다. 그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긴 그렇다. '나'는 노란 단무지처럼 늘 아팠고, 어머니는 담이 결렸다. 그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아이 무덤 위에서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거기에는 억센 조선잔디가 있다. 누런 봉투 가득히 그 고운 잔디씨를 받아가는 '나'. '나'가 시인이 된다면 분명히 이 입자의 크로놀로지chronologie를 한 권의 시집으로 써내지 않을까.


먼지의 집
이윤학 지음/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