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바람'이라고 부르던 兄이 있었다. 그는 발소리도 없이 나타났다가, 인기척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그는 어쩌면 자유로웠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제 '바람'으로서의 그가 많이 외로웠으리라고 짐작한다. 겨울의 문턱 즈음에 태어난 그가 스스로를 '바람'이라고 부를 때, 산뜻한 봄바람이 연상되는 경우는 없었다. 나는 매년 가을 경에 요절한 시인의 시비詩碑에 앉아 시를 읽곤 했다. 그때마다, 그때마다, 바람이 불었다.


황동규에게 '바람'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그의 시는 항상 바람 부는 곳에서 있고, 그 바람은 또한 항상 비바람 아니면 눈보라다. 때문에 그의 바람은 "산 위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도, 더운 여름날 여자들의 치마 끝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는 가벼운 바람도 아니다. 그의 바람은 늘 습윤濕潤하고, 그러므로 무겁다. '바람의 시인'으로서 황동규는, 또다른 '바람의 시인' 정현종과는 아주 대조적인 시를 보여준다. 정현종의 바람이 율동을 통해 발레리나의 발을 대지에서 띄워준다면, 황동규의 바람은 발레리나의 발을 다시 땅에 붙박게 만든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황동규는 땅으로의 발디딤을 통해서 오히려 자유로워지려고 더 노력한다. 우리는 황동규의 구속과 자유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볼 것이다. 먼저 그의 「풍장風葬」 연작의 첫 일절을 보자.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이것은 「풍장1」의 첫 부분이다. 여기서 "아주 춥지는 않게" 위에 윗점을 좀 찍어보면 어떨까. 그는 그의 죽음이 아주 추울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옷도 입고 있고 전자시계도 차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죽음은 그의 생生과 구분된 것이 아니다. 시계가 "가는 채로" 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삶의 시간과 죽음의 시간이 나뉘지 않는다는 인식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삶이 그토록 차가운 생이었는가, 우리는 그의 초기시를 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그의 데뷔작인 「시월」을 보자. 「시월」에 바람은 싸늘히 불고,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려진다. 바람은 빈 가지를 흔드는 존재이고, 낡은 단청 밖으로 이는 존재이며, 비와 함께 낙엽을 떨어뜨리는 존재이다. 그 계절 속에서 '나'는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려지기를 원한다; 「즐거운 편지」에서는 '내'가 눈이 퍼붓는 골짜기에서 기다리는 존재로 표상된다.

시인에게 있어 데뷔작이 갖는 의미는 크다. 데뷔작은 그 시인을 시인되게 한 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뷔작은 일정한 방향성方向性을 가지고 있다. 시인의 지향이 삶을 통해서 변모한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시인은 자신의 데뷔작으로부터 항시 자유롭지 못하다. 황동규의 시를 둘러보면 그의 시가, 겨울 장면이 하나도 없었다는 어떤 이상한 영화와는 달리, 가을이나 겨울, 혹은 그 언저리에 자리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시는 또한 비바람이나 눈보라 속에서 씌어지고 있으며, '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너의 마음 가에 바람소리 바람소리 - 「겨울 노래」
귀 기울이지 않아도 바람소리 바람소리 - 「겨울 노래」
문을 닫아도 바람소리 바람소리 - 「겨울밤 노래」
내 잠시 생각하는 동안에 눈이 내려 눈이 내려 생각이 끝났을 땐 눈보라 무겁게 치는 밤이었다 - 「기도」
소리 없이 바람은 불고 - 「이것은 괴로움인가 기쁨인가」
밤새 눈 속에 부는 바람 - 「어떤 개인 날」
포장 속에 우는 어두운 바람소리 - 「悲歌 제7가」
길게 부는 寒地의 바람 /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 「기항지 1」
마당에는 은행나무가 바람에 잡혀 / 조심스런 첫 잎을 떨구고 있었다 - 「세 개의 정적」
우리 願의 오랜 물결 / 사면에 바람은 분다 - 「비망기」
폭풍경보의 바다 / 바람의 속도 속에 보이지 않는 해 - 「북해」
눈떠라 눈떠라 참담한 시대가 온다. / 동편도 서편도 치닫는 바람 - 「전봉준」
바람 속에 남아 있는 우리의 얼굴 - 「입술들」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끌려가며 - 「더 조그만 사랑노래」
빗소리 속에도 바람이 부는지 / 풀들이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 「김수영 무덤」

되는대로 뽑아본 『三南에 내리는 눈』(이하 『三南』) 속에서의 바람의 등장모습들이다. 부분부분 인용된 것들을 쓱 훑어만 보아도 황동규의 '바람' 인식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다: "문을 닫아도" 들리는 바람은 "밤새 눈 속에 부는" 바람, "무겁게 치는" 눈보라이며, 그것은 다시 "참담한 시대"를 암시하는 "폭풍경보"의 바람이다. 그런데 시 속에서 보이는 '내'가 그 바람 속에서 취하는 행동은 좀 놀랍다. 황동규, 혹은 황동규 시의 '나'는 그 바람 속에서 웃는다.

황동규 시에서 웃음은 놀라운 상황에서의 인식과 대응이다. 그 웃음은 그 안에 모든 것을 초탈해서 무의미화하려는 신비주의의 웃음이 아니라, 습윤한 인생의 한가운데를 관통하여 '나'의 모든 감정을 한 순간에 드러내는 웃음이다. 그러므로 그 웃음은 순수하지 않다. 가령 「겨울밤 노래」의 첫머리에서

조금이라도 남은 기쁨은 버리지를 못하던
해 지는 언덕을 오를 때면 서로 잡고 웃던
해서 눈물겹던 사내여 오라.

고 했을 때, "서로 잡고 웃"는 행위는 그 안에 많은 표현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 웃음이 다만 차가운 바람 속에서만 있을 수 있는 복합적인 것임을 밝혀주는 구절로는 「얼음의 비밀」의 1련, "헐벗은 옷 틈새의 웃음소리, 내민 살의 내민 살의 웃음소리."를 들 수 있다; 「갈매기」에서는 "나는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웃음을 울고 싶었다"고 노래함으로써 그 웃음의 정체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황동규 시에서 역시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새'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두자. 제목만으로 본다면 「갈매기」, 「들기러기」, 「철새」, 「바다새들」과 『三南』과 같은 시기에 씌어진 시들을 수록하고 있는,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이하 『바퀴』)의 「새들」이 있다. 다른 제목 아래 씌어진 새들의 숫자까지 합하면 훨씬 많다. 황동규가 기르는 이 수많은 새들은 기본적으로 '바람'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시행에 있어서는 바람보다 더 처절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늘을 날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소원이라고 했을 때, 새는 그 소원이 있게 한 동물이다. 그러므로 새를 바라보면서 자유나 탈출, 혹은 도주逃走를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도주기」에서 그는 죽음을 암시하는 도주를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바로 다음에 수록된 기러기는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날아 내[리]"고 있으며, 들기러기들의 삶은 "다섯 달 겨울"로 설정된다. 떠남의 모티프는 「기항지1」에서도 보인다.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지만, "정박중의 어두운 龍骨들"은 모두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것이 이 시의 뼈대를 이룬다. '그'의 떠남은 번번이 좌절되는 것이다. 결국 그는 "행해를 단념한다." (「남해안에서」) '그'는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어디로 떠나고자 하는 것일까.

「어떤 개인 날」은 "아무래도 나는 무엇엔가 얽매여 살 것 같으다"는 자조적인 예언을 담고 있다. 「새벽 빛」에서는 "진실로 같은 틀로 나고 끝남을 알게 된다면, / 다시 나고 싶지 않으리라 / 이끼풀까지도, / 다시 살고 싶지 않으리라"고 보다 명확하게 이를 밝혀주고 있다. "해탈처럼 쉬운 건 없지 / 매일밤 해탈에 脫皮까지 하고 / 아침이면 한 바퀴 돌아 / 제자리에 와 있더라"라는 「네 개의 황혼」에서의 통탄할 인식은 이 얽매임이 무엇보다도 근원적이고 치유불가능한 것임을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그래서 '그'은 의문을 표시한다. "같이 쫓기며 누리는 허황되지 않은 자유가 있을까." (「북해」)

역설적이게도 '그'의 자유는 단단함 혹은 땅의 단단함 속에서 찾아진다. 인도 시인에게 부쳐진 『바퀴』의 「편지․1」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이번 여름에는 미칠 듯 가을을 기다릴 것 같고
가을에는 또 꽝꽝한 얼음장이나 기다리며 살겠읍니다.

그것은 뜸[浮上]에서 자유가 아니라 두려움을 찾은 사람의 상상력이다. 항우의 고사를 연상시키는 「楚歌」라는 제목의 시는 "미치는 것도 미치지 않고 잔구름처럼 떠 있는 것도 두렵잖아요"라고 노래하고 있으니 말이다. 「김수영 무덤」은 김수영의 「풀」에 대한 독서讀書로 보이는데, "젖은 마음을 잠시 땅 위에 뉘어놓"는 행위나 "이 악물고 그대가 흔들리고 / 마지막으로 다시 풀들이 흔들[리]"는 묘사에서, 땅이 주는 휴식과 땅에 붙어 있으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여기서 이중의 역설이 발생한다. 땅에 발 디딘 자만이 마음껏 떠날 수 있고, 마음껏 죽을 수 있다는 사소한 진리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정감록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변주」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아버지가 명당마다 타오른다.
명당이 죽은 후 명당이 우리 자리에 타오른다.
우리가 죽은 후 우리가 흰 옷 입은 도적이 되어 타오른다.
흰 옷 입은 도적들, 빨래 같은, 도처에 흰 천들.

죽음이 저질러졌다. 바람소리들이 되돌아왔다. 던진 돌도 되돌아오고 깨어진 머리들도 되돌아왔다. 삭제된 문장들도 삭제된 채 되돌아왔다. 골목에 파수 세우고 문서 태우고 우리가 습격하는 우리의 집들, 소리 소리 우리.

이 즈음에서 황동규는 바람에 얽힌, 눈에 얽힌 비밀을 털어놓는다. '金炳翼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바퀴』의 시 「성긴 눈」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한두 마디씩 내리는 성긴 눈발"이라는 시구를 찾아볼 수 있고, 「더 조그만 사랑노래」에서는 "아직 멎지 않은 / 몇 편의 바람"이라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고보면 『바퀴』에 실린 「새들」에서 "할 말을 않고 있는 새들"을, 「세 줌의 흙」에서 "몇 마디 아픈 말이 뱉어지지 않는다"는 쓰라린 고백을 찾아볼 수 있다. 말할 수 없음은 말하고 싶음과 긴밀히 연결된다. 그것이 「手話」를 부른다. 나중에 이성복에 의해서 「口話」로 발전할 이 시에서 시인은 삭발-눈발, "웃음 그 얼음 낀 벗음"과 같은 음성적 유사성에 의한 언어 유용과 "이건 […]", "저건 […]"의 반복을 통한 말배움을, 그리고 '조지다' '오입' 등과 같은 비속어를 통해서 새로운 말을 찾는 그의 치열함을 볼 수 있다. 그의 생을 괴롭히는 바람과 눈이 사실은 말[言]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구원도 말로부터 올 수밖에 없다는 인식으로 전환될 수 있다. 바람처럼 날아오는 말, 눈처럼 내려쌓이는 말을 우리는 삶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황동규의 연애시는 편지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썼다는 「즐거운 편지」도 바람처럼 날아오고 눈처럼 쌓이는 한 통의 편지이며, 「조그만 사랑노래」와 「더 조그만 사랑노래」, 「더욱더 조그만 사랑노래」들도 "어제를 동여맨 편지"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사랑노래는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신뢰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나'의 능동적인 기다림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편지이다. 그러나 그런 기다림의 가능성을 '그'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조그만 사랑노래」에서는 흩날리는 눈발을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으로 묘사하고 있고, 「더 조그만 사랑노래」에서는 "한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끌려[간]"다는 표현까지도 등장한다. 그 어디에도 기다림에 대한 믿음의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기다림에 앞서서 황동규의 현실 인식을 먼저 보자. 황동규는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 혹은 사람을 기다리는 사랑의 처지와 한국 혹은 한민족의 처지를 같은 것으로 보려고 하고 있다. 그것은 「태평가」에서 자세히 나타난다. 약소민족의 난해한 사랑 같은 것을 황동규는 계속해서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느끼고 있다. 에든버러에서 쓴 것으로 되어 있는 「낙법」은 "主語가 없는 그대와 나. // 칼날처럼 벗은 우리 조국"을 부르고 있고, 「虎口」에서는 "조국은 닫혀 있다"는 명제를 내세우기도 한다. 「정감록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변주」에서는 "축소된다, 모든 것이, 가족도 친구도 / 국가도, 그 엄청나게 큰 것들, 그들 손에 들려진 채찍도," 라고 선언하고 있고, 「돌을 주제로 한 다섯 번의 흔들림」에서는 "드디어 <너>도 <나>도 지워진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라. 어느샌가 <우리>만 남아, 아 항상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할"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보여준다. 다음 단계는 그러한 의식을 역사 속에서 찾는 단계다. (시인이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했던 사람은 T. S. 엘리엇이었다.) 「전봉준」 시편들과 「허균」 시편들, 「열하일기」 시편들을 제시함으로써 황동규는 '그'의 기다림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봉준이"의 "일자무식"한 혁명이 '그'에게 있어서는 「手話」의 말의 혁명으로, 일자무식의 새로운 말배움으로 환치되고 있는 것이다.


황동규의 시 속에서 우리는 구원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구원은 여전히 '시-안'이 아니라 '시-바깥'에 있다. 시는 구원이 아니다. 이성복의 지적대로 문학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하나의 신비화이다. 그러나 문학은 기다림의 가능성을 알려줄 수 있다. 왜 우리는 소용없는 줄을 알면서도 "빛이 있으라"라고 목이 쉬도록 외쳐야 하는가.

잠언: 『三南』에서 보이는 시작의 발전과정을 다시 한 번 참조 해볼 것.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황동규/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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