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이 책을 묵혀두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객관성이었다. 동물학자의 인간론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무언가를 기대했던 것이다. '털없는 원숭이'라는 제목은 내게 그런 기대를 품게 했다.

책을 다 읽고난 지금은 무척이나 실망스럽다. 처음 머리말을 읽을 때부터 심상치않았다.

초기의 인류학자들은 우리의 본성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진리를 해명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엉뚱한 곳만 찾아다녔다. 그들이 부지런히 달려간 곳들은, 이를테면 전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성과가 나빠서 거의 소멸해 버린 문화적 오지들이었다. [……] 그러나 그것은 전형적인 털없는 원숭이의 전형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이것은 주요 문명권에 속해 있는 정상적이고 성공적인 개체들―즉, 절대 다수를 대표하는 표본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공통된 행동양식을 조사해야만 알 수 있다. (8쪽)

그리하여 그가 선택한 샘플은 유럽에 사는 '털없는 원숭이'이다.

동물학자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코끼리를 연구할 때 사라져가는 코끼리 집단보다 번성하는 코끼리 집단을 연구하는 것이 일반적일테니까. 하지만 그가 잊고 있는 것은, 오지의 문명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파괴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최소한 그가 유럽의 '털없는 원숭이'가 전형적이고 정상적인 개체라고 말하려면, 그들이 '오지'에서 저지른 만행도 함께 '털없는 원숭이'의 특성으로 언급했어야 한다.

이 책의 결점은 방금 지적한, 얼마간 '도덕적'이고 얼마간 '전제적前提的'인 것 외에 또 있다. 이 책은 과학적 증거들로 가득찬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가설과 가정 투성이이다. 자연 과학에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을 가설로만 채우는 것은 과학자로서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물론 그가 가설을 내세웠을 때, 그에 해당하는 방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털없는 원숭이'가 털을 벗어던진 이유를 가정하면서, 사냥감을 추격할 때 나타나는 체온상승을 막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하는 설명은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개연성 그 뿐이다.

저자는 처음부터 과학 서적을 저술하려는 의도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대중을 상대로 한 서적이지 논문이 아니기 때문일수도 있다. 꼭 시치미를 뚝 떼고 '털없는 원숭이'를 동물로만 바라봐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글 사이 간간이 등장하는 '우리'나 '우리 인간'이라는 용어가 갖는 책 제목과의 간극은 엄청나다. 문맥이 턱 막히는 느낌이다.


털없는 원숭이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문예춘추(네모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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