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책/詩

현재 진행형의 변신: Ovidius『변신 이야기』

엔디 2006. 7. 31. 00:08
원제는 그저 Metamorphoses일 뿐이다. 변신이야기라는 제목은 아마도 일본어판인 『轉身物語』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인 신화학자 중에는 가장 유명한 이윤기가 펭귄판으로부터 옮겨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판을 읽었다. 이윤기는 일러두기에서 몇 가지를 고백하고 있는데, 먼저 라틴어 원문은 2인칭이며 운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어판은 3인칭 산문으로 되어 있다.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대신, 해석은 매끄러웠고 모난 곳은 없었다. (단국대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변신이야기』가 작년에 나왔다. 라틴어에서 바로 옮겼고, 행갈이를 하여 운문의 형태를 하고 있다.)



1

1권과 달리 2권은 좀 지루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아이네이아스나 로물루스-레무스 이야기, 그리고 왠지 낯간지러운 카에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직접적인 아부 때문만은 아니다. 1부에서 등장한 신들의 이야기가 점차 영웅의 이야기나 인간의 이야기로 옮겨오면서 '변신'의 사례가 줄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원문의 문제인지 펭귄판의 문제인지 이윤기의 문제인지 한 문단의 길이는 점점 길어졌고, 산문화한 것은 똑같지만 그 안에서 아직 감지할 수 있었던 운문의 맛은 줄었기 때문이다. 1권이 산문시에 가깝다면 2권은 그냥 산문에 가깝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1권의 첫 서사序詞는 거의 시라고 해도 무방하다.

마음의 원願에 쫓기어 여기 만물의 변신 이야기를 펼치려 하오니, 바라건대 신들이시여, 만물을 이렇듯이 변신하게 한 이들이 곧 신들이시니 내 뜻을 어여쁘게 보시어 우주가 개벽할 적부터 내가 사는 이날 이때까지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풀어갈 수 있도록 힘을 빌려주소서. (1:15)

이 부분은 본래 기도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지만, 다음 인용하는 구절들은 번역의 거름망을 통과하고 있는 시적 성취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아폴로가 이런 약속을 하자 월계수는 가지를 앞으로 구부리고 잎을 흔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듯이…… (1:49)


나르키소스는 푸른 풀을 베고 누웠다. 곧 죽음이 찾아와 아름답던 그의 눈이 감기었다. 사자死者들의 나라로 간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스튁스 강에 비치는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케피소스 강 요정들은 동생인 나르키소스의 죽음을 애도하느라 머리를 모두 깎아 그의 죽음에 바쳤다. 숲의 요정들도 울었다. 에코는 이들의 울음소리를 숲 하나 가득하게 되울렸다. (1:138)

반면 2권은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글이 무척 산문적이다. 묘사적인 부분을 일부러 찾아봐도 그렇다.

이윽고 신사神蛇는 빛나는 신전 계단을 기어내려와 뒤를 돌아다보았다. 떠나기에 앞서 정든 제단을 뒤돌아본 것이었다. 정들었던 집인 신전과 작별 인사를 나눈 이 거대한 신사는 자기에게 바쳐진 무수한 꽃다발 위를 기어 도시 한복판을 지나 방파제 있는 곳으로 갔다. 방파제에 이르렀을 때는 고개를 돌려 군중을 바라보았다. 배웅하러 나온 군중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산사는 이탈리아 배에 올랐다. 배는 신사의 무게가 무거웠던지 용골이 잠길 정도로 내려앉았다. (2:326)

짧은 문단에 '이윽고'를 두 번이나 썼다든가, 이별의 모습이 지나치게 장황하여 연설을 듣는 것 같다든가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은 잘 다듬으면 훌륭한 시적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도, 아쉬움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2

한편 아부에 관해서라면, 나는 색다른 실망감을 맛보았다: 로마 최고 시인 반열에 오른 오비디우스의 아부 실력을 보고 싶었지만, 그런 것은 나타나 있지 않았다. 최고 시인의 아부는 무척 거칠고 직접적이어서 왠지 불쌍해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역자 후기에서 이윤기는 이 아부를 용비어천가에 빗대고 있지만,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용가는 두줄 남짓한 글귀 속에서 중국 고사와 이성계 가문을 잘 맞대면서 훌륭한 시적 성취를 드러내고 있다;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지라도 시적으로는 최고의 찬사를 받아 아깝지 않다. 고교 시절 배웠던 용가의 발췌문들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참신한 울림을 주고 있다.

『변신』의 아부는 그렇지 아니하니, 가령 다음 구절을 보자:

…… 그러나 카에사르는 당신의 나라에서 신이 되신 분이시다. 마르스 신의 직분인 전쟁은 물론이고 평화를 정착시키신 것은, 이 분께서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셨고, 평화시에는 많은 업적을 쌓으셨으며 엄청난 명성을 얻으셨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옳다. 카에사르의 공적 가운데 이 분을 아드님으로 삼으신 것 이상으로 빛나는 공적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329)

여기서는 죽어 혜성이 된 카이사르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양자인 아우구스투스를 대놓고 칭찬하고 있다. 카이사르의 수많은 업적보다 "프린캡스 폐하"의 존재 자체가 더 훌륭하다는 투다. 카이사르 대 아우구스투스의 관계가 사투르누스와 유피테르의 관계와 같다는 식의 표현도 등장한다. 그뿐이 아니다. 영원한 아부의 소재, 장수長壽 역시 빠뜨리지 않는다:

신들께 기도를 드리오니, 아우구스투스 폐하께서, 당신께서 다스리시던 이 땅을 떠나 하늘에 오르시고, 그 높은 곳에서 인자하시게도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루어지게 하시는 날이 더디오게 하소서, 다음 세기에나 오게 하소서. (2:336)

오비디우스의 꿈은, 그러나 당대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변신』의 결사結詞는 이렇게 끝난다:

내 육체밖에는 앗아가지 못할 운명의 날은 언제든 나를 찾아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 이승의 삶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나 육체보다 귀한 내 영혼은 죽지 않고 별 위로 날아오를 것이며 내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마가 정복하는 땅이면 그 땅이 어느 땅이건, 백성들은 내 시를 읽을 것이다.
시인의 예감이 그르지 않다면 단언하기니와, 명성을 통하여 불사不死를 얻은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2:336)

그러고보면 카이사르가 신이 되었다든가, 아우구스투스가 신이 되었다는 그의 표현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지금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살고 있다. 오비디우스 역시 그런 영생을 누린다. 그는 무사이 여신들에게 늘 빌고 있지만, 지금 그 스스로가 시신詩神이 되어 수많은 시인들에게 다시금 영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신'은 과거 신화의 시대에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변신 이야기 1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