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언젠가 나는, 마이클 무어의 《화씨911》을 보면서, 공화당이 불만이면 민주당, 민주당이 불만이면 공화당으로 갈 수밖에 없는 미국인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두 정당으로부터 '표밭'으로만 인식되지 '국민'이나 '시민'으로 인식되는 것 같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공화당에게 실망한 미국인들이 민주당으로 몰려드는 모습은 마치 레밍쥐들의 이동 같았다.

하지만 한국의 실정은 또 어떤가. 내 보기에 한국의 정당 정치에는 전통이라는 게 없다. 김수영은 "전통傳統은 아무리 더러운 傳統이라도 좋다"고 했는데, 한국의 정당 정치에는 그 전통이라는 것이 도무지 없다. 말장난을 하자면, 전통이 없다는 것이 전통일 정도다.

여당은 야당을 끌어모아 합당하거나 표지갈이만 한 신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은 어느 사이 그 신당에 참여하지만 임기 말이 되면 어김없이 탈당이라는 절차를 거친다. 그 모든 과정의 목적은 단 하나: 책임회피다.

가령 지금의 한나라당이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에서 이어지는 독재정권의 계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지금의 한나라당에게 12.12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한나라당이 12.12의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좀더 정교한 정치적·역사적 분석을 필요로 할 것이다. 다만, 앞으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면피하려는 정치 세력에 대해서는, 우리가 시민으로서 대처해야 마땅하다는 것뿐이다.

열린우리당은 워낙 기움투성이의 정당이라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면 쪼개질 것이라는 예상이 컸고, 한나라당 역시 이념적 스펙트럼이 너무 넓어 당내 불화도 상당한 만큼 어떤 계기를 만나면 이합집산할 공산이 크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기대는 역시 확실한 정책을 가진 이념 정당이다.

이념 정당은 확실한 색깔이 있는 만큼 그 특성상 당의 간판을 바꾸더라도 책임을 회피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이념 정당은 자신의 이념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개발에 매진하게 되어 있다. 이념이라는 '원칙'이 있기 때문에 쉽사리 포퓰리즘에 빠질 염려도 없다.

무엇보다도 이념이란 단순한 '정권 창출'보다는 호흡이 길어 전통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정당의 목적은 단순한 '정권 창출'이 아니다. 정당의 목적이 '정권 창출'이라면 왜 모든 정당을 다 하나로 합당하지 않을까? 그것은 정당의 목적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정권을 창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상당히 오랜 기간 정권 창출의 신화를 이룬 독일 녹색당이 창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전통을 가꿀 수 있는 것은 확실한 정체성 때문이다.

미국은 공화당과 민주당 단 두 정당밖에 없지만, 두 정당이 확실한 이념적 정체성을 가지고 스펙트럼을 나누어 점유하고 있다. 어쩌면 미국인들을 그토록 단순하게 평가한 내가 레밍쥐처럼 사고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인들은 한 정당이 싫어지만 다른 정당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이념 중에서 취사선택하여 장점을 뽑으려고 긴 세월동안 노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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