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우석 감독의 데뷔작인 영화 '변호인'은 성공한 영화다. 개봉한 지 불과 한 달여 만에 관객 수가 1000만 명을 넘어섰다. 일반적인 서사 예술의 문법으로 봐도 변호인은 별다른 흠을 잡을 수 없는 영화다; 아니 흠을 잡을 필요가 없는 영화다. 학벌이나 환경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던 한 사내가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고, 그 다음에 보다 의미있는 일을 위해 사회적인 성공을 저버리는 이야기.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 굳이 작은 흠을 찾자면 '속물 변호사' 송우석이 갑자기 '인권 변호사'가 되는 모습이 너무 급작스럽다는 점 정도가 될 것이지만 줄거리 자체는 수백 번도 더 들어본, 매끈한 것이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덧칠하는 순간 관객은 구름처럼 몰렸다.

지금까지 관객 1000만 명을 넘은 한국 영화는 모두 9편이지만, 그 가운데 감독의 데뷔작이었던 작품은 변호인 하나뿐이다. 이런 사실은 변호인이 이만큼 성공한 것이 단지 영화가 좋아서는 아닐 것 같다는 의심이 들게 한다. 노무현을 그리는 어떤 정치적 상황에 기댄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제작자인 최재훈 위더스필름 대표는 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 전제조건이 '노 전 대통령의 색깔을 최대한 빼자'는 거였"다고 밝히고 있고, 조이뉴스와 인터뷰에서 주연배우인 송강호도 언급했듯이 출연진도 영화 제작발표회에서 노 전 대통령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느 중학생들이 만해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에서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라는 싯귀에 밑줄을 긋고 태연히 '님'이라고 해답을 적듯이 사람들은 너나없이 변호인이라는 영화 제목 아래 밑줄을 긋고는 아무 의심 없이 노무현이라고 해답을 적었던 것이다.

감독도 배우들도 이내 그 '해답'에 화답했다. 양 감독은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왜 노 전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그가 청문회에서 보여줬던 모습과 1992년 3당합당 때의 기억 때문이라고 답했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출연진은 2014년 1월 23일 봉하마을을 방문해 노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했고 송강호는 방명록에 "영광이었습니다"라고 적었다.

제작진과 출연진은 이런 태도는 마치 변죽만 열심히 때리면서 관객이 직접 복판을 울리기를 기다린 것처럼 보인다. 한가운데는 놓아두고 둘레만 애무하는 것 같은 모양새다. 의도한 것이라면 뛰어난 마케팅이다. 홍문종 새누리당 사무총장조차 "변호인은 픽션 드라마이지 논픽션 드라마가 아니다"라고 발언해 영화사의 이런 마케팅에 도움을 준 셈이 됐다.

영화평론가 허지웅은 주간경향에 실은 글에서 "변호인을 감상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단점은 영화 외부로부터 발견된다"면서 변호인의 단점으로 '일베'의 존재와 '열성 노무현 팬덤'의 존재를 들었다.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고 잘 만들어졌지만 영화 바깥의 '어른의 사정'이 걱정된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나 사실 일베의 존재와 열성 노무현 팬덤의 존재는 이미 변호인이 보유한 상업적 장점이다. 그리고 '어른의 사정'은 이미 영화 속에 있다.

변호인에서 가장 중심이자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되는 부분은 역시 재판이다. 조선일보는 부림사건을 수사했던 고영주 당시 부산지검 공안검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영화 변호인이 실제 사건과 얼마나 달랐는지를 하나하나 지목하려 했고, 한겨레는 부림사건 피해자들인 고호석 씨와 송병곤 씨와의 인터뷰에서 영화 변호인이 얼마나 실제 사건과 비슷한지를 보여주려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림사건이 실제 변호인과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가가 아니다. 실제 부림사건에서 문제가 됐던 책이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였든 무타이 리사쿠의 '현대의 휴머니즘'이었든, 내부고발자 군의관이 있었든 없었든, 국밥집 아들의 모델이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별로 상관 없다. 그 정도의 각색은 여느 영화에서나 다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노무현의 색깔을 최대한 빼려고 노력했다는 이 영화에서 노무현에 대한 미화가 있었다면 얘기가 다르다.

문학평론가 유종호(1998, 21-28)는 프랑스 시인 자끄 프레베르의 시 '위대한 사람'을 인용하면서 전기(자서전)을 고쳐 쓰는 일의 허영심을 지적한다. "내가 그를 만났던/ 돌 깎는 사람 집에서/ 그는 후세를 위하여/ 제 몸의 치수를 재고 있었다"는 '위대한 사람'처럼 제 몸의 치수 재기를 위해 자꾸 과거를 윤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종호는 염상섭 만세전의 해방 이전 판본과 해방 이후 판본의 비교를 시도한다:

"요보말씀예요? 젊은 놈들은, 그래도 제법들이지만, 촌에 들어가면 대만의 생번(生蕃)보다 낫다면 나흘까, 인제 가서 보슈…… 하하하,"

'대만의 생번'이란 말에, 그 욕탕에 들어 앉었든 사람들이, 나만 빼어놓고는 모다 킥킥 웃었다. 나는 가만히 앉었다가 무심코 입살을 악물고 치어다 보았으나, 더운 김에 가리워서, 궐자(厥者)들에게는 자세히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말이지, 나는 그 우국의 지사는 아니다. 자기가 망국민족의 일분자이라는 사실은 자기도 간혹은 명료히 의식하는 바요, 따라서 고통을 감(感)하는 때가 없는 것은 아니나……

유종호는 이렇게 1924년판 만세전을 인용해놓고 1948년판과 비교하면서 "검열당국에겐 거슬리는 말이지만 그대로 나와 있고, 제4텍스트(1948년판)에서도 크게 바뀐 것은 없다"고 평가한다. 바꿔 말하면 해방 이전에도 할 말을 다 했고, 해방 이후에도 우국지사였던 양 윤색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장들은 어떨까: "증인이 말하는 국가는 이 나라 정권을 강제로 찬탈한 일부 군인들, 그 사람들 아니야?" "니는 애국자가 아이고, 죄 없고 선량한 국가를 병들게 하는 버러지고 군사정권의 하수인일 뿌이야."

부림사건의 희생자들이 당시 변호인이었던 노무현 변호사가 판사와 싸웠다는 증언을 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1981년에, 모든 발언이 속기로 기록되는 재판장에서 노무현이 저런 단어까지 썼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이런 발언은 이 영화가 1981년이 아니라 2013년에 개봉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대사이기가 쉽다. (더구나 극중 송우석은, 국밥집 난동 신에서 보듯, 저런 종류의 의식은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위험하다. 노무현은 분명 20세기말에서 21세기초 한국 사회의 한 문제적 개인이지만, '후세'가 알아서 그 몸의 치수를 다시 재서 윤색하는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도 나쁘다.

이 작품이 만약 부림 사건 재판이라는 시공간을 이용해 신군부 초기의 어떤 시대적 진실을 내보이려 했다면 일부 각색이 있었더라도 대체로 좋은 영화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변호인은 부림사건으로 끝맺지 않고 1987년 노무현에 대한 구속적부심에서 변호사 99명이 공동변호인단을 꾸린 장면을 마지막으로 하고 있다.

양 감독은 이런 결말에 대해 "송우석이 7년 뒤에도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이유를 밝혔지만, 이 부분도 이 영화가 '부림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니라 노무현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임을 드러내 주는 대목이다. 이 영화는 노무현의 색깔을 뺀 영화가 아니라 속속들이 노무현의 색깔로 채워진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전기영화는 대체로 흥행을 위해서 많은 사실을 각색하거나 윤색하고서는 영화 바깥에서는 '이 영화는 실화'라고 광고하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 그대로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노무현은 부림 사건을 나서서 맡고 재판장에서 열심히 싸운 것만으로 이미 훌륭한 변호사다. 적어도 그 시점 그 공간에서 노무현이라는 개인은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다. 거기에 대한 덧칠이나 개칠은 오히려 그 작품을 훼손하는 일이 될 성 싶다.

참고문헌:

유종호. 1998. 문학이란 무엇인가. 서울:민음사. 증보판.

슬로우뉴스에 실린 글.

Posted by 엔디

그래, 먼저 가만히 작고 어두운 영화관 하나를 떠올려보자. 시인 기형도가 죽었다던 허름한 종로의 극장도 좋고, 사람들이 데까메론을 알건 모르건 매년 그해의 '보카치오'를 동시상영으로 마구 틀어댔던 동네의 3류 극장도 좋다. 예술영화를 자주 틀어주는, 그래서 관객은 별로 없는 조용한 극장도 괜찮다. 사실 꼭 작고 어두운 극장일 필요도 없다. 푹신푹신한 의자에 음료 거치대까지 있는 최신식 멀티플렉스 영화관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내가, 당신이, 그리고 사람들이 영화를 본다는 것이다.

자, 영화가 끝났다. 영화란 건 늘 금세 끝나는 법이니까.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대다수 극장에서는 환하게 불도 켜준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어디로? 세상으로. 커다란 박스 속에 들어가 한두 시간을 어둠 속에 머물며 주인공과의 삼투현상을 경험했던 우리는 이제 다시 '나'로 돌아온다. 문득 궁금하다. 내가 잠시 사라진 동안 세상에는 별일이 없었나?

우리가 극장에 있는 그 한두 시간 동안 어쩌면 어머니는 감기에 드셨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눈이 더 침침해져 돋보기 안경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누이는 어디선가 휴대폰을 잃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시간 동안 대통령이 유명을 달리했을지도 모르고, 크레인에 올라갔던 한 노동자가 실신했을지도 모른다. 어딘가 요정에서는 정치인들의 킬킬거리는 소리가 새나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국의 군대가 어느 민간인과 언론을 향해 총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두운 극장 속에 있는 그 사이에.

출구없는 극장#

사건과 사고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우리가 극장을 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되거니와 그럴 수도 없다; 우리는 누구나 극장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는 델리스파이스와 함께 출구 없는 극장을 노래하고 있다:

오 오 오 너는
오 오 오 너는
생의 무대 위 안락의자에 고양이처럼
차갑고 초연한 고양이처럼 앉아있지
출구 없는 극장 안에, 출구 없는 극장 안에

수많은 영화들 지나가네
웃기고 슬프고 외롭고 힘들고 대답없는
그런데 이 어두운 극장 밖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오 오 오 너는…
오 오 오 너는…

이를테면, 우리는 누구나 출구 없는 극장 안에 앉아 있다. 웃긴 영화와 슬픈 영화를 번갈아 보지만, 그것들 대부분은 우리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아침 지하철에서 봤던 신문지를 모으는 할아버지와 지하도 입구 앞에 앉아 손을 벌리고 있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장애인 사내를 보고서도 그저 '뻔하게 슬픈 영화로군' 하고 중얼거릴 뿐이다. 우리가 이 습한 극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안 그랬을는지도 모른다. 지팡이를 짚고서 객차를 오가는 사람을 보고서도 조금쯤 눈물을 흘리고, 제 부모를 졸라 천원 한 장이라도 그 가벼운 바구니에 넣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기억은 모두 사라져 알 수 없다. 그 젖은 필름만 기억 속에 남아 이젠 거의 외울 수도 있을 정도가 됐다, 시인 김혜순이 「달력공장 공장장님 보세요」에서 "이 음악은 이제 너무 들었어요 지겨워요 / 열두 곡이 다 흐른 다음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잖아요?"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딱하지만, 나와는 관계 없는 영화들이다. 달력의 배경사진 같은 영화들.

하지만 순간 우리는 얼마간 외로워진다. 가령 어느날 지하철에 서 있던 나에게 급성위경련이 찾아왔다. 그래, 앉으면 조금쯤 안정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앞에 앉아있는 아저씨는 나에게 관심조차 없다. 입속에서는 역한 침이 나온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화장실로 뛰어간다. 요컨대 내가 만든 영화도 결국 그렇고 그런 영화일 뿐이었던 것이다. 다 보고 나서도 별로 기억나는 장면도 없는 영화 말이다. 아무리 내가 떠들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제서야 이 극장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출구는 없다.

그제서야 문득 궁금하다: 그런데, 이 어두운 극장 밖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한국에서의 학살#

참, 그렇지. 바깥에서는 학살이 있었다고 했어. 삐까쏘Picasso라든가 황석영, 이런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전했지. 삐까쏘는 「한국에서의 학살」로, 황석영은 『손님』으로. 신천 대학살이라고 했어. 처음엔 조금 놀랐고, 다음에는 의심했고, 이어 분노했지만, 곧 평온을 되찾았어. 그건, 그래, 예술성 짙은 좋은 영화였을 뿐이니까.

생각난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그 표현주의적인 면모가 뛰어났지. 「1808년 5월 3일」이라는 고야의 그림과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이란 마네 작품의 구도를 그대로 가져왔고. 마침 그러고보니 삐까쏘는 공산주의자였다지.

『손님』은 또 어떻고. 종래의 리얼리즘을 재편하겠다며 다성성多聲性을 들고 나온 황석영의 역작이었어. 다성성이란 건 그러니까 러시아의 문학평론가 바흐찐이 도스또예프스끼 시학에서 얘기했던 건데, 뭐 등장인물들이 작가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하고 작가에게 대들기도 하는 여러 목소리를 가진 거라고 하던가. 영어로는 폴리포니polyphony. 근데 『손님』을 읽어보니 꼭 그렇지도 않던걸. 여러 사람이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다 똑같은 말만 하던걸. 종래의 리얼리즘을 바꾼다는 황석영의 말을 차치하고, 어쨌든 좋은 작품이었지. 그러고보니 황석영은 북에도 갔다왔잖아. 내 기억이 맞다면,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벌건 표지의 책도 한권 냈을걸.

하지만 어쨌거나 이런 것들은 다들 옛날 얘기만 하잖아. 이젠 시대가 달라진 거 아니야? 극장 바깥은 아직도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뭐? 학살이 또 있었다고?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그래. 그러고보니 들은 적이 있었던 것도 같아. 하지만 이젠 학살이 하나 더 있고 덜 있고 간에 상관이 없는 그런 지경 아니야?

학살은 아우슈비츠에서도 있었고, 킬링필드에서도 있었어. 남미나 아프리카 같은 데선 한때 거의 일상적이었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원자폭탄도 떨어졌다구. 그리고 사실 빈민가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은 학살이 상시화된 거 아니야? 수많은 학살 가운데 하나가 더 있다고 해서 지금 무슨 차이가 있냐구.

작은 연못#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의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고
여린 살이 썩어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죠

하지만 학살로 사람들이 죽었어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었어요. 가끔씩 티격태격 다퉜고, 때로는 서로 흉도 보고 비웃기도 했지만, 그래도 함께 살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었어요.

순진하게 미군을 믿다가 죽고, 탈출하다 죽고, 말이 안 통해 죽고, 갓난 아이는 그저 울다가 죽고…….

지금껏 우리의 슬픔을 얘기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어요. 누구는 그럴리 없다고 했고, 누구는 전쟁 통이니 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했어요.


그래놓고, 이제와 또다시 전쟁을 하자고 해요. 우리를 죽인 사람들이 우리편이고, 우리를 구해준 사람이 적이래요.

그럼 우리는 누구인가요? 누가 우리인가요? 우리는 적인가요? 적은 우리인가요?

극장 밖#

비로소 출구가 열렸다.

어두운 극장을 나서서 바깥 세상으로 나왔다.

어떻게 나왔을까, 지금까지는 왜 출구가 안 보였을까.

바깥 세상은, 그러나, 극장 안과 마찬가지로, 어둡다.

지금이 몇 시인지 모르겠다, 사람들마다 다르게 말했다.

한 노인은 지금이 상쾌한 아침 10시라며 기지개를 켰고, 어떤 정치인은 지금은 새벽 5시임을 확신한다고 했다.

토끼를 키운다는 작가들은 지금이 25시라고 입을 모았고, 커다란 벽시계는 밤 11시5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문득 손목시계를 보니 뉴스를 할 시간이었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Posted by 엔디

미투데이를 통해 보라 감독의 《로드 스쿨러》를 접하게 되었다. 흔히 '탈학교청소년' 또는 '홈스쿨러homeschooler'라고 불리는 이름을 거부하고 '로드 스쿨러roadschooler'라는 새 이름을 원하는 청소년-청년들의 이야기였다. 예술가들조차 거리를 버리는 이 시대에!

1

기형도는 한 시작詩作 메모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전집, 333):

「밤눈」을 쓰고 나서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만약 시 속에 존재와 삶의 비밀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단 몇 퍼센트만이라도 믿는다면, 우리는 이 '로드스쿨러'들을 주목해야 한다. 지금의 학교 교육은 기형도가 말한 '자연'과 '거리' 가운데 어느 하나도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은 성장이 아니라 경쟁을 말하고, 믿음과 잠언이 아니라 암기暗記를 말한다. 나는 경쟁과 암기가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그 나름대로 중요한 가치일 터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들 속에 매몰되는 다른 소중한 가치들이다.


시 「밤눈」이 묘사하고 있는 거리는 만만치 않다. 시인은 밤눈에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고 말해준다. 거리는 겨울이고, 그곳에 눈보라가 친다. 사시나무가 떨고 있고, 썩은 가지들은 엎드려 있다. 은실들은 엉켜 울고 있다. 그러나 밤눈은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 또 다른 사랑을 꿈꾸"고 있다. 그러면서 밤눈은 춤을 춘다. 시인은 궁금하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이를테면 로드스쿨러들은, 약간은 무책임한 비유이지만, 그 겨울과 눈보라 속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이다. 길의 지식과 거리의 지혜는 눈보라와 무관치 않다. 고통에 기반한 이 아름다운 지혜들은 삶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통 속에서도 춤을 출 수 있고, 그 속에서도 사랑을 꿈꿀 수 있다. 이런 춤과 사랑이 특이하게 보인다면, 오랜 인류의 삶을 조금만 더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본래 모든 축제란 슬픔 속에서,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내 생각에, 보라 감독의 인도 기행은 아마 그 고통과 축제가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볼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야위어 있거나 물에 잠겨 있었으며, 그들은 느릿느릿 살고 있었고 자유로웠다. 보라 감독은 그들을 "친근했다"고 하고 "행복의 속도"에 대해 말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적용될 행복의 공식을 알고 있었고, 그 공식이 옳다는 것을 믿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행복했다. 그것이 거리의 지혜였을 것이다.


거리의 지혜는 자유롭지만, 마찬가지로 책임이 따른다. 보라 감독이 말하고 싶어하는 로드스쿨러는 기성 권력에 반대하는 단순한 우상파괴주의자가 아니다. 그들은 남들이 유예한 자유를 미리 '쟁취'하면서 자유에 따른 책임 역시 함께 '쟁취'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지치면 서가에서 소설을 찾아 읽거나 멀티미디어실에서 영화를 본다는 로드스쿨러도 있었다. 책과 영화 속에 공부한 내용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들은 자유가 분명 통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문예창작, 사회과학, 만화, 애니메이션……. 그들이 하고자 하는 공부의 목록 일부다. 그들은 학교를 뛰쳐 나왔지만, 학업의 목표를 위해 수능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물론 이와 같은 '성실 모드'로만 이들을 평가하는 것은 성급하다. 아직 길을 찾고 있는 로드스쿨러도 있고, 모르긴 해도 잠깐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거리에서 삶과 직접 부딪혀 본 그들이 오히려 더 '책임'에 민감하고, 더 고민을 거듭하는 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밤눈이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듯이.

로드스쿨러들이 명성이나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보라 감독은 책을 출간함으로서 사회적 시선의 방패막이를 하려고 했고, 산은 대학에 감으로써 주변의 시선을 극복하려 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나로서는 이것이 로드스쿨러들의 어쩔 수 없는 인식이라기보다는 아직까지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인식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로서는 그들 가운데 많은 숫자가 대학에 갔으면 좋겠다. 다름을 용인하지 않고, 올바름을 고민하지 않는 이 사회의 주목을 끌면서 그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길을 그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얼마 전부터 공부한답시고 다시 찾아간 대학은 '캠퍼스 리쿠르팅'이 한창이었다. 보라 감독이 말하는 '취업 준비소'의 가장 첨예한 모습이다. 그 가운데 '동아리 리쿠르팅'도 보였다. 후배에게 물었다:

"아니, 동아리도 리쿠르팅을 하나?"
"요즘 신입생 잡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그래? 요새 애들은 동아리를 잘 안 하나 보지?"
"아뇨, 하긴 하는데,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동아리는 잘 하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이 로드스쿨러들이 대학에 적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해보건대 그래도 대학은 사회 다른 부분보다 더 순수한 곳이었고, 세계를 바꾸기 위해서는 대학부터 순수의 모습을 찾아가야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4·19를 믿고, 68을 믿는다. 그래도 거리와 자연의 힘이 살이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3

다큐멘터리가 조금만 더 친절했으면 좋겠다. 굳이 단락를 나눌 필요는 없지만, 대략 주제가 어떻게 흘러간다는 정도만은 자막으로 살려 줬으면 어떨까.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Posted by 엔디

도스또예프스끼는 병에 걸린 상태에서 꾸는 꿈은 무척이나 선명하고 강렬해서 뿌쉬낀이나 똘스또이 같은 작가들이라도 평상시에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라고 말했다(Dostoevskii 2002a, 85; 2002b, 1116). 이를 뒷받침하듯 프로이트는 일관되게 꿈은 소원성취라고 말했다(Freud 2003, 162). 그에 따르면 꿈의 유일한 목적은 소원성취이며, 그것도 순전히 이기적인 소원성취라는 것이다(Freud 2003, 384). 그렇다면 병에 걸린 사람처럼 현실에 불만이 많고, 고통을 많이 겪는 사람일수록 꿈도 강렬하고 생생할 것이다. 꿈은 현실을 뛰어넘고자 하는 ‘나’의 소원이나 욕망에서 비롯된다.

글쓰기 또한 이런 소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청준은 언어사회학서설 연작의 「지배와 해방」에서 작중 인물의 입을 통해 글쓰기의 시작이 ‘복수’라고 언급하고 있다(이청준 2000, 107-118). 복수라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이 현실에서 대개 패배자라는 것이고, 그렇다면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 역시 프로이트가 앞서 꿈에 대해 언급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글쓰기--넓게 보아 작품 활동--의 목적은 소원성취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소년, 스떼판#

불행한 현실의 세계를 벗어나 충족적인 꿈의 세계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나’의 삶은 행복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 여섯 살 때부터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스떼판이라는 소년이 있다. 그의 삶은 가령 이런 식이다:

어머니 “스떼판, 오늘 왜 일하러 회사에 가지 않았니?”
스떼판 “일 했는걸요.”
어머니 “뿌셰씨가 전화를 했단다.”
스떼판 “일 했다니까요. 하루종일 일을 했어요……. 꿈 속에서요dans mon rê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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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현실의 삼투. 영화 《수면의 과학》은 이 특이한 스떼판의 일상을 따라가면서 소망 내지 욕망으로서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우리가 기쁨의 순간에 흔히 내뱉는 탄성은 이미 프로이트의 주장이 사실임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이게 꿈이냐 생시냐”라고 묻고 자신의 팔뚝이나 허벅지를 꼬집는다. 이 “꿈이냐 생시냐”라는 말에서 우리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고, 그것의 삼투 현상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약간의 착란 증세만 있다면 스떼판처럼 그 둘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한데, 이렇게 꿈과 현실의 경계를 지워나가는 이야기는, 프로이트의 명제를 뒤따라가 보면, 결국 현실 속에서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이루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꿈과 현실이 삼투되면서 현실에다가 꿈에서 성취된 소원을 하나씩 끼워넣는 것이다. 이 기묘한 나르시즘은 영화의 수용자로 하여금 스떼판이라는 이를 결코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스떼판은 결국 자신이라는 사실을--그것을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간에--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스떼판은 멕시코인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가 살고 있는 프랑스로 돌아온다. 어머니는 뿌셰 씨에게 부탁하여 달력 만드는 회사에 그를 취직시킨다. 그러나 자신이 무척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일을 하는 줄로 알았던 스떼판은 실망하고 만다. 벌거벗은 여인의 사진이 붙은 ‘바보같은’ 달력에 들어갈 글자를 풀칠하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는 ‘재앙력Disastrology’이라는 황당한 달력 그림을 사장에게 가지고 가지만, 사장은 이를 출판하기를 거절한다. “스떼판 씨, 농담이시죠?” 그 때 회사 동료는 스떼판을 위로하는 척하면서 “좋은 면도기를 쓰느냐”고 묻는다.

스떼판의 손#

스떼판은 하루종일 손으로 단순 노동을 하는 일에 무척 지치고 실망한다. 그는 거대한 손으로 동료들과 사장에게 복수하는 꿈을 꾼다. 스떼판의 면도기는 거미처럼 기어가서 사장에게 지저분한 수염을 넝마주이의 그것처럼 덥수룩하게 달아놓는다. 사장을 쫓아낸 후, 그는 사장실에 자신의 거대한 작품 ‘재양력’을 걸어둔다. 그리고 복사기 위에서 마르띤과 섹스를 한 다음, 물 속인지 공중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 빠리 시내를 날아다닌다.

꿈은 과장과 합리화의 소산이다. 스떼판의 거대한 손은 자신이 하는 실망스러운 풀칠 작업에 대한 불만과 그런 일을 강요하는 사장과 동료들에 대한 복수심이 함께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동료가 잠깐 말한 면도기에 대한 말도 꿈 속에서 놓치지 않는다. 사장을 수염 덥수룩하도록 만드는 것은 이를테면 ‘내 수염에 그렇게 지저분하다고? 너희들은 어떤가 보자.’하는 유아기적인 복수심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늘을 난다. 프로이트는 이 하늘을 나는 꿈이 유아기의 운동성과 관계가 있다고 단언한다(Freud 2003, 329): “아이를 안은 팔을 높이 들어올린 채 방안을 뛰어다녀 날게 하지 않은 삼촌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이 꿈은 동시에 흔히 “성적 감각”을 일깨우기도 한다는 것이다(Freud 2003, 330).

아니나다를까, 영화는 곧 아버지와 함께 장난을 하는 어린 시절의 스떼판을 비춰준다. 스떼판은, 마치 아침 잠이 많아 깼다가 다시 잠드는 일이 많은 우리들 중 일부처럼, 잠시 꿈에서 깬 듯하더니 다시 꿈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아무런 고통이 없는 듯한, 홈비디오 화질의 영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꿈이 끝나자마자 요란한 드릴 소리를 내며 그의 운명의 여인이 나타난다. 옆집으로 스떼파니가 이사 오는 소리다. 스떼판은 얼결에 스떼파니의 피아노를 옮기다가 그만 손을 찧는다.

스떼판의 손은 ‘거대한 손의 꿈’에서 보았듯 스떼판에게 있어서 무척 가슴아픈 존재다. 작품 활동을 하는 대신 열심히 풀칠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손이 매개가 되어 치료를 핑계삼아 그는 마음껏 스떼파니의 방에 들어선다. 실은 스떼파니가 그를 자신의 방으로 초대한 것이다: “세탁소는 나중에 들르고, 지금은 제가 당신 손을 봐 드릴게요.”

전망의 공간, 방#

영화에서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중요한 사건은 이 방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그는 손을 치료받고, 여기서 자신의 발명품들을 스떼파니에게 보여주고 선물한다. 여기서 그는 바다를 찾아다니는 배를 만들고, 여기서 “골든 더 포니 보이Golden the pony boy”라는 말 인형을 발견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방Zimmer’은 ‘여자Frauenzimmer’의 상징적 묘사에 사용된다(Freud 2003, 418). 우리는 스떼판이 스떼파니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에로스는 거의 소원을 성취했다고 말할 수 있다. ‘방’에 들어서는 것은 ‘여자’에게로 들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Bachelard 1990, 115): “집이란 세계 안의 우리들의 구석인 것이다. 집이란--흔히들 말했지만--우리들의 최초의 세계이다. 그것은 정녕 하나의 우주이다. 우주라는 말의 모든 뜻으로 우주이다. 내밀하게 파악될 때, 더할 수 없이 비천한 거소라도 아름답지 않겠는가?” 집이 내밀하다면 보다 개인적인 공간인 방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런 내밀한 공간 속에서 바다를 찾고자 하는, 숲을 안은 배를 함께 만들 때 그것은 그 두 사람이 하나의 전망을 갖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원 성취, 그리고 꿈과 현실의 삼투#

그러나 어쨌든 전망은 아주 미래적인 것이고, 현재로서는 불충족적인 것이다. 스떼판은 자신의 꿈 속에 스떼파니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가 경멸하는, 어머니의 새 애인으로부터 REM에 대해 들은 후 그는 소리친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잠의 노예가 아니야. 꿈을 조절할 수 있어.” REM이란 rapid eye movement, 곧 꿈을 꿀 때 눈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는 잠을 잘 때 눈에 어떤 장치를 해놓음으로써 꿈을 조절하고자 한다.

이것은 프로이트를 따라간다면 무척이나 기묘한 일이다. 꿈은 현재 이루지 못한 소원을 충족하는 기제인데, 스떼판은 꿈을 통제함으로써 현실의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다시피 스떼판은 꿈과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독특한 꿈과 현실의 삼투 현상을 이용하여, 꿈의 통제를 통해 자신의 현실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현실 속에서 어떤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스떼판의 소원은 온 세계가 자신의 작품‘재앙력’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스떼파니와의 사랑이다.

영화는 스떼판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데, 영화의 수용자 역시 스떼판처럼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스떼판의 꿈인지, 어디서부터가 생시인지 알 수가 없다. 영화는 주인공의 꿈과 현실을 흩뜨려놓음으로써 수용자의 꿈과 현실도 흩뜨려버릴 수 있는 어떤 권능을 행사하는 셈이다. 그만큼 수용자들은 스떼판이라는 캐릭터에 몰입하게 되는데, 그 몰입은 다름이 아니라 스떼판의 소원을 공유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연출의 힘이라고 하기 힘들다. 우리 모두 스떼판과 같은 소원을 이미 우리 속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프로이트가 『햄릿』을 분석하면서,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햄릿』을 썼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1년 후에 『햄릿』을 해독하고 있기 때문이다(Bergez 1997, 86). 여기서 작가와 작중 인물과 수용자는 모두 하나의 소원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꿈: 나르시즘과 글쓰기#

영화는 그렇게 어디까지가 꿈인지 어디서부터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끝난다. 스떼판은 멕시코로 다시 떠나려다가 스떼파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그 방으로 다시 들어간다. 말했다시피 스떼파니의 방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스떼파니에게로 다시 돌아간다는 뜻이다. 스떼파니의 방에서 2층 침대가 완성된 것을 본 스떼판은 그 2층 침대로 올라간다. 그곳이 자신의 자리라는 듯이. 거기서 그는 완성된 배와 자신이 선물한 발명품들을 본다. 그리고 꿈으로 다시 빠져든다. 스떼파니는 스떼판을 부른다.

현실에서 스떼판의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아닌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꿈 속에서 사는 행복을 스떼판은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스떼판은 꿈 속에서 스떼파니와 함께 진짜 ‘골든 더 포니 보이’를 타고, 숲을 안은 배에 오른다. 배는 드디어 바다를 찾았다. 스떼파니가 말하듯 바다mer는 곧 어머니mère이기도 한 것이다. 이 동음이의어는 '그들'의 꿈이 전적으로 언어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언어는 곧 글쓰기이다. 《수면의 과학》은 글쓰기가 나르시즘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면서, 글쓰기의 행복감에 대해서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이청준. 2000. 『자서전들 쓰십시다』. 이청준 문학전집 연작소설1. 서울:열림원.
Bachelard, Gaston. 1990. 『공간의 시학』. 곽광수 옮김. 이데아총서21. 서울:민음사.
Bergez, Daniel et al. 1996. 『문학비평방법론』. 민혜숙 옮김. 문예신서121. 서울:동문선.
Dostoevskii, Fyodor Mikhailovich. 2002a. 『죄와 벌』. 상. 신판. 홍대화 옮김.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서울:열린책들.
---. 2002b.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하. 신판. 이대우 옮김.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서울:열린책들.
Freud, Sigmund. 2003. 『꿈의 해석』. 재간. 김인순 옮김. 프로이트 전집 4. 서울:열린책들.

Posted by 엔디

문학이 문체를 통해 독자를 유혹하듯이, 영화는 영상을 통해 독자를 유혹한다. 하지만, 문학은 문체만으로 떨어질 수 없고, 영화 역시 영상만으로 떨어질 수 없다. 화려한 수사나 미사여구가 문학 텍스트가 가진 메시지의 해석decoding을 방해--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할 수 있듯이 하드코어 혹은 하드고어한 영상도 마찬가지다. 밀로스 포만 감독의 영화 《고야의 유령들Goya's Ghosts》은 그런 점에서 오해할 소지가 많은 영화다; 이 영화는 단순한 시대극도 아니요, 종교 재판을 비난하려는 영화도 아니요, 야만의 시대를 고발하려는 영화도 아니다.

《고야의 유령들》은 '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영화다. 이 영화는 한 편의 예술가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구성을 취하면서도, 영화에서 주인공이자 관찰자인 그 예술가를 사건 속에 역동적으로 개입시켜 '진실'에 대한 성찰을 하게 하는 영화이다. 영화는 진실vérité과 진실에 대한 판단jugement에 대해 여러 번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다. 조금은 허무할 수 있는 밀로스 포만의, 혹은 고야의 결론을 위해 영화를 따라가 보자.


1. 로렌조와 다른 신부들: 고야의 그림1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엄숙한 신부들이 나타나 고야의 그림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이런 것이 시중에 팔리고 있단 말인가? 이런 신성모독 같으니라고! 이런 걸 그린 사람이 누군가? 당장 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는 어둠이 보낸 자가 틀림없다.

고야, 「그들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라」그 때 로렌조라는 이름의 신부Brother Lorenzo가 일어나서 고야의 그림을 변호한다: 요컨대 고야는 선량하고 믿음 깊은 신자이고, 에스빠냐 최고의 화가라고. 그런 신자의 예술 표현을 오독하고 그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고야는 실제로 이 세상을 그가 본 대로 그렸을 뿐이라고. 문제는 그 그림이 아니라 이토록 악마가 가득한 이 세상이라고.

실제로 당시 세상에 그토록 악마가 가득했을까? 그걸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여기서 로렌조의 의견과 다른 신부들의 의견이 충돌하는 것을 본다; 로렌조는 고야의 그림이 세계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보지만, 다른 신부들은 그의 그림이 세계를 왜곡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로렌조는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다: "실제 이 세상은 이토록 악마가 가득하고, 타락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날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옛날의 방식'이란,

바로 종교 재판을 일컫는다.

2. 이교도의 판별식

고야, 「빼어난 선생」 종교 재판을 말하던 로렌조 신부가 사람들 앞에서 이교도를 구별하는 방법에 대해 말한다: 볼테르Voltaire에 대해 말하거나 과학science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은 이교도, "교회church"라는 말 대신 "신전temple"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신교도, 소변을 보면서 성기를 가리는 사람은 할례를 받은 유대교인, ……. 그의 앞에는 신앙심 깊은 제자들이 모여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로렌조 신부가 나열하는 것은 일종의 판별식이다: b²-4ac가 0보다 크지 않으면 일단 무조건 이교도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로렌조 신부가 나열한 목록이 이교도 됨을 증명하는 충분조건이 아님을 명확히 알고 있다. 그 점에서 우리는 하나일 진실을 사이에 두고 로렌조 신부와 대척점에 서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로렌조 신부는 아마도 그 신앙심을 바탕으로 본인이 말한 것이 분명히 진실임을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사람을 발견하면 (종교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교회로 알리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놀라야 하는 이유는, 그 자리의 어느 누구도 그의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의문을 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과 우리가 진실에 대해 갖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3. 자백confess과 믿음 ①

이네스 빌바뚜아Inés Bilbatúa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 사실fait이 지금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이교도의 판별식을 적용하면 이 사실은 이네스가 본래 유대교도라는 것의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네스는 바로 그 혐의로 종교재판소 소환장을 받는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유대교의 교리를 따르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유대교도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모세오경 가운데 특히 규례들을 많이 담고 있는 레위기는 유대인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지 못하는 음식을 나누어 규정해 놓고 있다(레 11:1-8):

야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주어라. '땅 위에 있는 모든 네 발 짐승 가운데서 너희가 먹을 수 있는 동물은 이런 것들이다.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은 먹을 수 있다. 새김질하는 짐승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이라도 다음과 같은 것은 먹지 못한다.

낙타는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사반도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토끼도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돼지는 굽은 두 쪽으로 갈라졌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이런 동물의 고기는 먹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주검에 닿아도 안 된다.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한 것들이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가 유대교도임을 논증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종교재판이 채택하는 방법은 자백confess이다; 적어도 본인이 자신의 입으로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니겠느냐는 논리다. 이것이 재판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는 현대의 소송법이 자백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현대법에서는 이른바 '자백보강법칙'은 일종의 상식이다: 즉, 자백이 유일한 증거이면 그를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12조 ⑦항은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폭행·협박·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망 기타의 방법에 의하여 자의로 진술된 것이 아니라고 인정될 때 또는 정식재판에 있어서 피고인의 자백이 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때에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거나 이를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고 규졍하고 있고, 형사소송법 310조는 "피고인의 자백이 그 피고인에게 불이익한 유일의 증거인 때에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자백이라는 것의 증거 능력은 결국 다른 증거를 뒷받침하는 보조 증거로만 쓰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재판은 그런 절차를 무시했다.

고야, 「삼켜라, 개야」 게다가 당시 종교재판에서는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들이 '심문Question'이라고 부르는 '고문torture'의 절차를 도입했다. 이네스는 손을 뒤로 묶이어 천정에 매달리는 고문을 당했고, 결국 그들에게 자신이 유대교를 믿고 있다고 '자백'했다. 심문에 대한 그들의 논리는 이런 것이다: "만약 그가 유대교도라면 그는 결국 긴 심문을 견디지 못해 자백하고 말 것이며, 그가 유대교도가 아니라면 신이 그에게 버틸 능력을 주실 것이다."

여기서 중세의 마녀 사냥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일까? 영화 속에서 이네스는, 고야의 집에서 얼굴이 없는 그림을 보고 화가에게 묻는다: "저 그림은 왜 얼굴이 없어요?" "유령이니까요. 유령을 본 적이 있나요?" "아뇨, 하지만 나 마녀는 본 적이 있어요. 꼬부라진 몸에 냄새가 고약했어요." "음, 내가 본 마녀와는 좀 다르군요. 내가 본 마녀는 젊고, 아름다운 데다 꽃향기가 나던데 말이에요. 그 사람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지요." 이네스는 깜짝 놀라며 발랄하게 반문한다: "난 마녀가 아닌걸요? I'm no witch?"

중세에는 다양한 마녀 사냥이 행해졌는데, 대표적으로 이런 방법들이 쓰였다(Jeffrey Burton Russell 2001, 139-140):

마녀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몇 가지 고문법도 고안되었다. 예컨대 '수영'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고대에 행하던 물에 의한 죄인 판별법의 잔존형태라고도 말할 수 있는 '마녀의 수영'은 피고의 손발을 묶은 뒤 깊은 물 속에 던져 넣는 것을 말한다. 물에 가라앉으면 그것은 마녀가 신의 창조물이어서 물이 받아들인 증거이므로 무죄임이 인정되어 물 밖으로 건져내었다. 그러나 만일 물 위로 떠오른다면 그것은 물이 그녀를 거부한 증거이기 때문에 유죄로 판정된다… 그뿐 아니라 바늘로 찌르기도 있었다. 사람들은 마녀의 몸에 악마의 표식인 무감각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상흔이나 멍으로 남의 눈에 보이는 일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발견할 때까지 끝이 뾰족한 물건으로 피고의 온몸을 찔러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고문법은 마녀가 자신이 마녀라고 쉬 자백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거나, 혹은 끝까지 버티더라도 만신창이가 되거나 죽게 되는 방법들이다. 그렇다면 설령 고문으로 인해 얻어지는 결과가 진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용의자의 삶은 이미 파탄이 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문이라는 심문 방식이 갖는 잔인함이 아니다; 문제는 고문과 진실의 관계다. 고문당하는 사람이 바라는 것은 고통의 회피이므로 진실이 아니라 고문하는 사람이 원하는 '진실' 곧, 거짓을 말하게 마련이다. 현대의 재판에서 고문에 의한 자백이 증거능력을 잃는 것은, 고문이 잔인하기 때문이 아니라 고문에 의한 자백의 진실성 자체가 의심되기 때문이다.

이네스의 사례로 돌아가자: 이네스는 단순한 심문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대교도라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황당하다는 표현을 짓는다. 심문자들은 '진실'을 말하라고 했고, 이네스는 진실을 말했지만 심문자들은 믿지 않는다. 급기에 이네스는 심한 고문을 받게 된다. 그가 매달려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진실이 무엇인지 말해주세요! Tell me what the truth is!" 곧 당신들이 원하는 진실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는 외침이다.

4. 자백과 믿음 ②

이네스가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 토마스 빌바뚜아Tomás Bilbatúa는 고야에게 부탁해서 로렌조 신부를 집으로 초대한다. 로렌조는 거기서 '심문'을 통해 진실을 밝혀낼 수 있다는 신념을 말한다. 빌바뚜아 가족들은 그런 '심문' 방식이 오래 전에 없어진 것이 아니었는지 물었으나 로렌조는 "'진실'을 가려내기 위해" 다시 부활했다고 말했다. 교회 법에 의하면 '심문'에 의한 '자백'은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된다고까지 했다.

빌바뚜아 가족들은 급기야 자신만만한 로렌조를 붙잡아 고문하고, "실은 나는 침팬지와 오랑우탄 사이의 호로자식으로……" 운운하는 글에 서명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고문이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증거물로, 로렌조의 서명이 든 그 글을 왕에게 보여 주며 도움을 요청했다. 종교재판소는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그들은 '심문'의 능력을 부정하는 대신, 로렌조 한 사람을 '타락한 자'로 규정하고 만다.

5. 상대방이 원하는 진실: 고야의 그림 2

궁정화가 고야는 말을 탄 왕비의 모습을 그렸다. 왕비는 역사에 '있는 그대로, 젊고 아름답게' 남기를 원했지만, 고야는 상반된 두 진실 가운데 앞엣것을 택해 그린 모양이다. 있는 그대로 그려진 왕비는 꽤나 흉했고, 왕과 왕비는 그 그림을 보자마자 방을 나가버린다. 곧바로 왕은 고야을 불러다놓고 엉터리 자작곡을 바이올린으로 켠다. 고야는 그제서야 깨달은 듯, 왕이 원하는 '진실'을 말해 준다.

6. 진실의 증거자: 고야의 그림 3

그러던 중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15년 후 나뽈레옹 보나빠르뜨가 이끄는 '혁명군'은 에스빠냐로 진주한다. 약탈과 폭행을 일삼는 '혁명군'들. 고야는 허울 좋은 혁명이 실은 변질된 것이라는 점을 그림을 통해 증거하기로 마음먹는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것이 실은 또다른 권력에의 탐욕이었으며  나뽈레옹이라는 독재자를 만들기 위한 수순에 불과하였다는 것. 에스빠냐 사람들에게 있어서 혁명군이라는 것은 결국 침입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야는 말한다. 여기서 고야의 그림은 진실의 증거자 역할을 한다. 감독은 예술가를 진실의 증거자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고야, 「5월 3일」

특히 다른 예술가들보다 고야는 더더욱 그런 진실성을 띤 예술가다. 곰브리치(1997, 485)는 그의 『서양미술사』에서 고야가 그린 에스빠냐 왕의 초상화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사실 그에게 스페인 궁중에서의 지위를 확보해준 초상화들은 얼핏 보면 반 다이크나 레이놀즈 류의 어용 초상화들처럼 보인다. 그가 마술을 부리듯 비단과 황금의 반짝임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티치아노나 벨라스케스를 연상시키지만 사실 고야는 그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옛 거장들은 권력에 아첨했지만 사실 고야는 그것을 버리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는 그들의 초상화에서 허영과 추악함, 탐욕과 공허함을 낱낱이 드러냈다. 자기 후원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던 궁정 화가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7. 진실 대 거짓

어쨌든 혁명군의 진주로 종교재판소는 폐지되고, 이네스도 풀려난다. 만신창이가 된 이네스는 길을 걸어 고야의 집에 도착한다. 그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글로 고야에게 말하였고, 고야는 이네스를 구할 길을 찾다가 우연히, 사라졌던 로렌조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혁명군과 함께 혁명의 이상을 배워가지고 왔다. 고야는 그에게 이네스를 데려간다. 이네스는 로렌조에게 '우리' 아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로렌조는 미친 모양이라며 이네스를 격리시킨다. 사실 고야로서는 알 수 없다. 이네스가 정말 로렌조의 아이를 낳았는지, 혹은 이네스의 환상에 불과한 것인지. 실제로 이네스는 정신이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론: 알리시아와 진실의 존재 의의

고야, 「저 시체」 그러나 알리시아의 등장으로 고야는 이네스의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고야는 그들 둘을 만나게 해 주려고 애쓰지만, 영국군의 등장으로 안타깝게도 성공하지 못한다. 로렌조는 알리시아를 만나 많은 돈을 주고 남미로 보내려고 하지만, 알리시아는 거절한다. 그리고, 이내 혁명을 등에 업고 기세등등했던 로렌조는 영국군을 피해 혁명군과 함께 도망가다가 잡힌다. 그에게 사형이 언도된다.

알리시아는 아마 자신의 아버지일 로렌조가 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옆 사람과 잡담을 나눈다. 이네스는 어느 춘부의 아이를 자신과 로렌조의 아이로 잘못 알고 '아버지'에게 아이를 보이려고 형장으로 나와 기쁘게 로렌조를 본다. 로렌조는 죽어 달구지에 실려 가고, 이네스는 그런 로렌조를 좇는다. 그 뒤로 고야가 그들을 보고 있다.

알리시아는 진실을 모르고, 이네스는 잘못된 것을 진실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진실은 이 세계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편의상 존재하는 것일 뿐인가. 밀로스 포만 감독의 견해는 무엇인가.

"고야의
나로서는 그가 그래도 진실이라는 것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고 보고 싶다. 적어도 《고야의 유령들》이라는 영화 제목은 그걸 말해주고 있다. 나는 복수로 쓰여진 '유령들'이란 고야의 그림들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그림들은 세계에 대한 정직하고 정확한 묘사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야는 사건에 역동적으로 개입하면서도, 무엇보다도 관찰자의 역할을 떠맡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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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Gombrich, Ernst Hans Josef. 1997. 『서양미술사』. 백승길·이종숭 옮김. 서울:예경.
Russell, Jeffrey Burton. 2001. 『마녀의 문화사』. 김은주 옮김. 서울:다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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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영화는 '리얼'하다; 이창동의 영화가 현실의 비루함을 드러내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간직한 것과는 달리 홍상수의 영화는 습기 가득찬 현실을 그대로 비춰줄 뿐이다. 그러므로 시작할 때부터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영화는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가진 한 중요한 장점이다. 우리는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박은 그의 영화를 보면서, 현재 습도를 정확하게 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짧은 글에서 우리는 최근작인 《밤과 낮》의 한 주제thème를 이루는 죄의식에 대해 살펴보자.

According to the Wikimedea Commons, this image has been released into the public domain by its author, Carroy. This applies worldwide.

여기 '인류의 기원L'origine du monde'이라는 그림이 있다. 19세기 사실주의 화가 귀스따브 꾸르베Gustave Courbet는 얼굴을 가린 한 여성의 하체를 그리고 '인류의 기원'이라는 제목을 붙여놓았다. 이 그림을 보고 《밤과 낮》에 등장하는 한 남자와 한 여자는 대략 이런 대화를 나눈다:

성남 "좀 이상하지 않아요?"
현주 "인류의 기원을 그린 그림인데 뭐가 이상해요?"
성남 "그건 그렇지만......"
현주 "예술인데 경건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성남 "그렇긴 한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인류의 기원'이라는 그림은 두 가지 면에서 성스럽다. 먼저는 인류를 잉태한 여성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그것이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그 그림을 대하는 사람은 알 수 없는 죄의식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것은 아름답고 성스러운 것을 보고 죄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현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Gustave Coubet, L'origine du monde, 1866, Huile sur toile, 55cm x 46cm, Musée d'Orsay

굴을 먹으며 유정을 발을 보는 성남(꿈). 밤과 낮.Canon | Canon EOS 5D | Manual | Spot | 1/200sec | f2.8 | 0EV | 37mm | ISO-640 | No Flash | 2007:08:21 22:28:29
그런 상황은 다시 모든 모든 인간이 죄 속에서 태어났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모두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을 밝혀주지만, 홍상수는 그런 원죄 이외에도 우리 스스로가 죄에 약하고 민감한 존재라는 것을 그림 한 장으로 보여준다. 성스럽고 아름다운 대상을 두고 죄의식에 빠지고야 마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성남에게 꾸르베의 그림은 구체적인 죄악의 예고이기도 했다: 성남은 현주의 룸메이트인 유정의 발을 보고 참 예쁘다고 생각한다. 그의 발에 입을 맞추는 꿈을 꾸기도 한다. 화면으로만 보면 유정의 두 발을 잡는 카메라의 구도는 꾸르베의 그림과 닮아 있다. 이것은 성남이 느낄 죄의식의 표상이다. 이후 성남이 유정과 헤어지면서 유정이 임신 가능성을 언급하자, 성남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모두 내 탓이다'라고 말한다. 성남에게 유정과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죄악의 관계였다.

사실 영화 《밤과 낮》은 죄에 관해 무척 많이 말하고 있다. 먼저 성남이 한국에서 프랑스 빠리로 도피하게 된 것부터가 호기심에 단 한 번 손댔던 대마초 때문이었다. 겁이 많은 성남은 함께 있었던 누군가가 자백했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빠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이다. 이것이 영화의 시작이다.

옛 애인 민선을 우연히 만난 성남. 밤과 낮.Canon | Canon EOS 5D | Manual | Spot | 1/160sec | f5 | 0EV | 120mm | ISO-160 | No Flash | 2007:08:11 19:31:22
빠리에서 생활한 지 얼마 안 되어 옛 애인 민선을 만난 성남은 그가 결혼했으며 오늘 자기를 만나러 나온다고 프랑스인 남편에게 이야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벌벌 떤다. 잠자리를 함께 하자는 민선의 유혹에 그는 짐짓 산상수훈의 일절을 인용하며 민선을 설득한다(마 5:29-30):

오른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또 오른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던져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한편, 우연히 참석하게 된 파티에서 평양에서 왔다는 사람을 만난 성남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자리를 뜬다. 돌아오면서 그는 생각한다: '큰일났다. 북한 사람을 만났다. 자수해야 하나? 대사관에 신고해야 하나?'

영화에서 성남의 죄의식은 이를테면 겁쟁이의 죄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죄악 그 자체를 미워한다기보다는 그 죄로 인해서 자기가 지게 될 멍에를 두려워한다; 경찰을 두려워하며, 옛 애인의 남편을 두려워하고, 또 북한 사람과 접촉해서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를 불행을 두려워한다. 얼마 후, 민선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는 민박집 주인을 붙잡고 "내가 죄인이에요."라며 오래 운다.

성당에 가서 기도하다 잠든 성남. 밤과 낮.Canon | Canon EOS 5D | Manual | Spot | 1/125sec | f2.8 | 0EV | 62mm | ISO-1600 | No Flash | 2007:09:11 01:03:35
홍상수는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구원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비록 성남이 느끼는 죄의식이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그가 구원을 바란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이것이 인류의 근본적인 속성이다. 종교사학자 엘리아데는 『성聖과 속俗Das Heilige und das Profane』에서 고대인들에 비해 비종교적인 것으로 보이는 현대인들도 여전히 성스럽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과 의식ritual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현대인들도 여전히 구원을 바란다.

그러나 성남의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영화에서는 엉뚱하게도 성남의 빠리 도피가 아내의 거짓말로 끝난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를 끌어안고 침실에 들지만, 빠리에는 어쩌면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르는 유정이 남아 있고, 꿈에서는 자신이 또다른 누군가와 재혼해 있다. 영화는 돌아옴이 진정한 구원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남의 진정한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디에서 올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그 답을 알고 있다.

free music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알레그레토 (지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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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가벼운 이야기로 우리는 이지형의 장편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를 알고 있다. 문학평론가 도정일이 "만화적 상상력"이라고 부른 이지형의 '모던 보이' 이야기는 무척 유쾌했다. 40년대의 경성도 30년대만큼 날렵했을까. 대동아 전쟁이 발발하고, 반도에서는 소위 민족 말살정책이 서슬퍼렇던 그 총력전의 시대에? 하지만 이 실용주의의 시대에 그런 실증주의적 분석은 허랑하다. 확실히 사람들은 민족이니 독립이니 하는 무게감을 뺀, 날렵한 시대물을 원하는 면이 있다.

정용기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은 그런 사람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만한 영화다. 독립운동의 비장함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독립운동을 빙자한 도둑질이나, 희화화된 독립운동가들만이 남아 있다. 이 영화 속에서 소위 독립운동가라고 하는 친구들은 지나치게 우둔하거나, 지나치게 영리하다.


1-1. 안티내셔널리즘? - 우둔한 독립운동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이름을 딴 카페 상호가 무색하게도, 이 까페의 사장과 요리사는 영화에서 가장 우둔한 쪽에 속한다. 이들은 까페를 운영하여 번 돈을 상부(아마 임정)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갖다 바치는 한편, 종종 내려오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일제 유력 인사나 중요 시설에 대한 태러를 감행(시도)한다.


이를테면 '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넣는다, 냉장고 문을 닫는다' 식의 허무한 계획을 세우고서 엄청난 테러를 기획하는 그들의 모습은, 독립운동이라는 큰 거대담론 자체를 희화화시키고 만다. 거기서 독립운동의 존재이유는 사라지고, 우리편/상대편 식의 단순한 2분법과 웃음만 남는다. 여기서 웃음이 유발되는 요인은 '거대담론'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져버리는가에 있다. 김기림(1988, 142)은 '비소법比小法bathos'을 통한 '유머'를 단순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가령

"군대는 새벽거리를 국경으로 향하여 이동하기 시작했다. 중화기重火器가 이에 따르고 치중부대가 뒤를 따랐다"고 말하여 무슨 비상 사태인 줄만 알게 해놓고 끝에 가서 "이리하여 군대는 연습지로 향하였다"

라고 하는 식이다. "상부에서 '동방의 빛' 고것을 탈취해 오랴." "계획은 있고?" 계획이 있을 리가 없다. "뭐 별로 계획할 것두 없겠구먼." 이런 식이다.

예고편에서는 사장은 열혈 독립투사로, 요리사는 '생계형 독립운동가'로 소개되었지만, 실상은 사장이나 요리사나 모두 빠듯한 생계生計 곧 살 궁리 속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그것은 요리사 희봉의 "그럼 이번에는 다이아만 훔치고, 정무총감은 담에 한가할 때 좀 죽이면 워뗘?"와 같은 대사나 사장의 "해서 독립운동도 까먹지 않게끔 좀 정기적으로 꾸준히 해야 되는겨."에서 잘 드러난다.


1-2. 안티내셔널리즘? - 영리한 독립운동

봉구는 지나치게 영리하고, 제멋대로인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온갖 문화재들을 일본인들에게 고가를 받고 팔아넘긴다. 영화에서 액션 장면을 가장 많이 보여주는 그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테러리즘을 통한 독립운동을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아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는 독립운동가연한 적이 없다. 그가 독립운동에 관련이 있었음을 보여준 것은 오로지 그가 가져온 금괴 10궤짝이 독립운동 자금 대신 건국 자금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말하는 내레이션뿐이다.

그러나 봉구라는 캐릭터는 코미디 영화의 등장인물로서 상당히 매력적인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1999, 31, 1448a)가 말한 대로 "희극은 실제 이하의 악인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실제 이상의 선인을 모방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가 문화재를 팔아넘기는 것에 대해 전당포 주인은 "그게 다 민족혼인데." 하고 혀를 찬다. 하지만 봉구는 태연하게 말한다: "민족혼이 밥 멕여 줍니까. 오까네お金가 아리마센ありません인데."

봉구가 외모나 체격, 그리고 영리함 등 많은 면에서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우월한 캐릭터임에도 그의 행동이 코미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그가 도덕률에 있어 우리보다 낮은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저는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은 아니에요. 전 불의를 보면 그냥 쭉 봐요."라고 장난스럽게 대답해서 웃음을 유발한 한 잘생긴 연예인처럼, 봉구도 모든 면에서 멀쩡한 사람이 문화재 뒷거래를 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쿨한 답변을 할 줄 안다는 것이 코미디의 조건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1-3. 안티내셔널리즘? - 춘자와 하루꼬와 해당화의 사이

춘자는 미네르빠에서 인기 있는 가수이면서, 해당화라는 이름을 걸고 일본인이나 친일파의 사저를 뒤지는 도둑이다. 그는 "한국인이지?"라는 질문에도 "일본인이지?"라는 질문에도 도리질을 한다. 식민지인과 내지인 사이에서 태어난 상황은 한 여자의 삶을 이중적으로 만들어냈다. 가수/도둑의 사이, 한국인/일본인의 사이, 곧 춘자/하루꼬/해당화의 사이에 그가 존재한다.

특히 유명한 테러리스트 독립운동가인 안중근의 마디 없는 손도장과 해당화라는 이름은 춘자가 독립운동가일 것이라는 심증을 굳게 하지만, 그건 시쳇말로 낚시다. 여기서도 역시 춘자의 존재는 독립운동이라는 거대담론을 우습게 만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1-4. 안티내셔널리즘 < 내셔널리즘

하지만 이런 세목들에서 내셔널리즘이 희화화되는 중에도 오히려 관객은 복류하는 내셔널리즘의 강력함을 체험하게 된다. 미네르빠의 사장과 요리사는 결국 정무총감을 암살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내용이나, 봉구가 빼돌린 돈이 결국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였으며, '동방의 빛' 사건으로 빼돌린 돈은 건국 자금으로 쓰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장면이 그렇다. 여기서 미네르빠의 사장과 요리사는 단순한 마음의 소유자로 방법은 졸렬하지만 우직한 충성심을 가진 그들 나름대로 탁월한 독립운동가라고 다시 자리매김하게 된다. 봉구 역시 탁월한 사기꾼 기질을 독립을 위해 쓴 것이었다는 사실이 직소퍼즐의 완성을 통해 밝혀지면서 그에 대해 가졌던 관객의 의구심은 풀리고 만다. 그는 기지 넘치는 독립운동가의 자금책으로 재포장된다. 열 궤짝의 금괴를 '해방된 조국'에 그대로 갖다바쳤다는 설정은 잠깐 스치듯이 지나가지만, 현재 정치권의 부패에 질린 관객들에게는 반드시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에서 보여주는 내셔널리즘의 희화화는 관객들이 내셔널리즘에 침윤되어 있을 때라야 빛을 발하는 이중 장치라는 것이 밝혀진다. 가령 봉구의 경우를 보자: 민족혼을 팔아먹는 그의 윤리 의식이 웃음을 유발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객들은 그보다 고상한 윤리 수준, 곧 좀더 강한 내셔널리즘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주인공 봉구가 악한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미에 금괴 열 궤짝을 건국 자금으로 바쳤다는 설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미네르빠의 사장과 요리사도 역시 희화화된 테러리즘적 독립운동에서 웃음을 유발하지만, 그들이 실패한 독립운동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무총감 테러에 성공하여 '해피 엔딩'을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춘자에 이르면 좀더 재미있어진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니라는 춘자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경계인의 눈물 자국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니라던 춘자는 결국 해방 이후에도 별다른 설명 없이 조선, 아니 미군들이 모인 남쪽의 한국에 남는다. 패전국 일본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승전국 로시아로 가서 멋진 재즈 바를 차리지도 않고 말이다. 그도 아니면 로시아에 더 가까운 이북이나 김기림이 "아라사의 소문이 자주 들리는 곳"이라고 노래했던 곳으로도 가지 않고 말이다. 바로 몇 분 전까지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그 '사이'에 있으면서 내셔널리즘을 비웃을 준비를 하고 있던 춘자는, 조금의 고민도 보이지 않고 '해방된 조국' 남한을 택한다. 걸출한 도둑이었던 해당화가 어느 새 의존적 여성 춘자가 된 것은, 그가 '사이'에서 '남한'으로 삼투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한다. 그런데 관객들은 그런 춘자의 변화를 별다른 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데, 여기서 작용하는 것이 내셔널리즘이다. 한국인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춘자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 하고 놀랐을 것이다. 춘자春子라는 촌스러운 이름부터가 그렇다. 본인이 아무리 하루꼬春子라고 불러 달라고 애써도 민족혼을 들먹이는 전당포 주인은 그를 춘자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엔딩 크레딧에서조차 하루꼬가 아니라 춘자로 등장한다.)

춘자와 하루꼬 사이, 혹은 그 둘과 해당화 사이에서 머물던 그는 어느 사이인게 해당화를 먼저 지워버리고, 그 다음에는 하루꼬를 지워버렸다. 그렇게 그는 안티내셔널리즘에서 내셔널리즘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된다.


2. 전당포의 자본주의

《원스 어폰 어 타임》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전당포이다. 모든 음모는 전당포를 기점으로 시작되고, 독립운동이라든가 하는 중요한 의제는 전당포에서 드러난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위기 상황 역시 전당포에서 드러난다. 그 말은, 이 영화가 자본주의를 밑바탕에서부터 깔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자본주의를 세상의 모든 것에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간명하게 정의한다면, 전당포야말로 초기 자본주의의 총아라고 할 만한 것이다; 온갖 물품들이 금액, 곧 숫자로 환산되어 나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박태원(1987, 56)의 「피로」와 오장환(1989, 24)의 「古典」은 전당포를 이렇게 언급한다:

나는 그 고무장화의 피곤한 행진을 보며, 그것을 응당 물로 닦고 솔질을 할 그들의 가엾은 아낙들을 생각하고, 또 그들의 아낙들이 가끔 드나들어야만 할 전당포를 생각하고, 그리고 그곳에 '삶'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전당포에 고물상이 지저분하게 늘어슨 골목에는 가로등도 켜지지는 않았다. 죄금 높다란 포도鋪道도 깔리우지는 않었다. 죄금 말쑥한 집과 죄금 허름한 집은 모조리 충충하여서 바짝바짝 친밀하게는 늘어서 있다. 구멍 뚫린 속내의를 팔러 온 사람, 구멍 뚫린 속내의를 사러 온 사람. 충충한 길목으로는 검은 망또를 두른 쥐정꾼이 비틀거리고, 인력거 위에선 차車와 함께 이미 하반신이 썩어가는 기녀들이 비단 내음새를 풍기어가며 가느른 어깨를 흔들거렸다.

그런데 《원스 어폰 어 타임》의 전당포는 박태원이나 오장환이 언급한 곳보다 더 다이내믹한 공간, 곧 장물아비의 집으로 묘사된다. 확실히 "민족혼이 밥 먹여 줍니까. 오까네가 아리마센인데."라고 봉구가 전당포에서 말했을 때 그는 도굴꾼의 마인드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독립운동을 위한 운동 자금을 위해 문화재를 팔아 넘겼던 것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드러나는 당연한 결론은 독립에도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기실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독립운동가들은 기본적으로 운동의 자금책이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미네르빠의 수익금은 분명 임정으로 들어가고 있고, 전당포 주인의 역할 역시 마찬가지다. 봉구는 문화재를 팔아먹거나 사기를 쳐서 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있다.

여기서 그들의 저항적 내셔널리즘과 자본주의의 끊지 못할 인연이 드러난다. 미네르빠의 사장과 요리사가 남쪽에 남은 것은 임정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에서 충분히 보이지만, 봉구와 춘자가 남쪽에 남은 것 역시 이와 같은 자본주의와의 연관 관계를 통해 이미 드러나 있던 것이라는 점이다.


내셔널리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원스 어폰 어 타임
《원스 어폰 어 타임》은 1940년대를 정확하게 그리지 못하고 있다. 이 영화는 시대물도 아니며, 비장한 각오로 봐야 하는 영화도 아니고, 그저 오락꺼리일 뿐이다. 문제는 그런 영화일수록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시장 논리다. 영화의 포스터는 "독립군의 시대는 가고 사기꾼의 시대가 왔다!"고 우스꽝스럽게 주장하고 있지만, 이 영화는 독립군의 내셔널리즘에서 한 발짝도 옮기지 않고 있다. 더구나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는 극단적 자본주의가 횡행하는 21세기 초 남한의 관점을 그대로 영화에 투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화에서 1940년대의 경성이 아니라 2000년대 첫 10년의 서울을 보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 영화에서 내셔널리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긴밀한 커넥션을 느낄 수 있다면, 그대와 나 역시 자본주의의 총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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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기림. 1988. 『金起林 全集』. 4: 文章論. 서울:심설당.
박태원. 1987. 『小說家 仇甫氏의 一日』. 기민근대소설선10. 천안:기민사.
오장환[최두석 엮음]. 1989. 『오장환 전집』. 1: 詩. 서울:창작과비평사.
Aristoteles et al.. 1999. 『詩學』. 천병희 옮김. 서울: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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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재 이야기

나는 천재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는다. 매번 대선에 출마하는 누군가가 "IQ 430인 나의 공약은 보통의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재가 만약에 있다고 해도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천재는 우리 같은 범인凡人에게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일 뿐이다. 가령 살리에리가 정말 모차르트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다. 아인슈타인이 도서관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범인들은 늘 천재 이야기에 열광하고 그 이야기를 가슴 깊이 믿는다. 그럼으로써 자기의 현재 상황에 대해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것일까.

어거스트 러시 포스터
사람들이 좋아하는 천재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이미지의 천재가 아니라, 모차르트나 랭보와 같은 이미지의 천재를 좋아한다: 즉 신동 말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외모에 대해서도 열광한다. 특히 미소년 랭보의 모습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겹쳐져서인지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광고계에서 3B라고 하면 미인Beauty, 아기Baby, 동물Beast이라고 하는데, 이런 미소년 신동들은 아름다운 아기beautiful baby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그들이 보이는 기행奇行에 대해서는 은근히 반감을 갖기도 한다. 모차르트의 기행이나 랭보의 동성애는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 기행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상상적 인물caractère imaginaire은 영화 《향수》에서 후각의 천재였던 장-밥띠스뜨 그르누이다. 세례 요한이라는 그의 이름과 달리 그는 영화에서 후각에 대한 메시아였다. 그를 해치려는 자들은 다 죽었고, 형장에서 사람들을 열락悅樂의 구원으로 이끌고 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가 얼마나 특이한 천재인가는 어떤 동정심도 어떤 인간적인 마음도 없었고, 오로지 냄새에 대한 열정만 갖고 있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아마 그를 보고 섬짓했을 것이다.




2. 표백된 천재, 에반

에반 aka. 어거스트 러시
《어거스트 러시》의 에반은 미소년 천재의 계보를 잇는 극중 인물이다. 그는 미소년이고 천재이지만, 흔히 신동들이 갖고 있는 기이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소리에 대한 엄청난 감각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모차르트처럼 출세나 돈벌이에 이용하는 것은 서툴다. 그는 오로지 동화적 감수성을 가지고, 자신이 내는 소리를 본 적도 없는 그 부모가 들을 수 있을 것이란 신앙만으로 살아간다. 어떤 기행도 벌이지 않는다. 게다가 정말 착해서,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아서를 구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는 천애고아다. 부모를 한 번도 본 적도 없으면서, 부모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고아원의 아이, 허름한 침대에서 잠들면서도 자신을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는 아이다. 사람들이 애정어린 동정을 보낼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면서, 사람들이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어두운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3. 반복되는 우연과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의 행동



서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할리우드 영화에서 받는 거부감은 역시 그 스토리의 비합리성에 있다. 《어거스트 러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먼저 에반이 잉태되는 과정부터가 보름달이 비춰주는 옥상에서의 하룻밤으로 꽤 낭만적이지만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다. 라일라 노바첵Lyla Novacek은 이전에 결코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여자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보름달이 수태를 상징하고, 앞서의 장면에서 록 공연과 첼로 솔로 연주의 오버랩이 이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여기서 이 장면에 면죄부를 주더라도 《어거스트 러시》의 스토리는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성 투성이다. (면죄부는 주더라도, 천재 영화에서는  대체로 이런 '출생의 비밀' 모티프가 등장한다는 점은 짚어 주어야 하겠다.)

가령, 라일라 노바첵은 뉴욕 필과의 협연을 제의받을 만큼 꽤 촉망받는 첼리스트인 듯한데, 루이스 코넬리Louis Connelly가 그를 찾아다닌다며 몇 년이 되도록 이를 인지하지 못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더구나 노바첵이 누구인지 인터넷 뉴스를 통해 알아낸 후 거주하는 곳까지 찾아가는 열정을 보이면서, 정작 뉴욕에서는 온 시내를 뒤덮은 플래카드 속에서 그의 이름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이 경우는 영화 후반의 가족 상봉을 극적으로 그리기 위해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합리성을 무시한 것이다.

에반을 찾아 뉴욕을 헤매는 제프리스에게 '마법사Wizard'가 미국 사회복지 행정에 대한 쓴소리를 하는 것처럼 어색한 장면이 또 있을까? '마법사' 역시 고아였기 쉽다는 점에서 이해하려 해도, '어거스트 러시'를 빼돌려 장사를 하고자 하는 그가 그토록 주목받을 행동을 하는 것은 역시 어색하다. 예상대로 곧바로 제프리스는 경찰력을 동원해 '마법사' 패거리의 은거처를 습격하고 '마법사'는 '어거스트 러시'와 헤어지고 만다.

에반이 어느 교회에 들어가서 희망Hope이란 이름을 가진 소녀에게 악보에 대해 20초간 배운 뒤, 온 벽을 악보로 채우는 부분도 실은 말도 안 된다. 리듬과 음정에 대한 감각은 타고날 수 있고, 다른 사람보다 소질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악보는 수천년 동안 전해내려오는 일종의 약속이다. 그건 선천적으로 재능이 있을 수 없으며, 독보법은 따로 배워야 한다. 우리야 높은음자리표나 낮은음자리표가 그려진 오선지에 익숙하므로 악보라곤 그것밖에 없는 줄로 알고 있으니, 그걸 순식간에 터득한 에반이 천재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에반이 정간보의 수많은 약속들을 순식간에 터득하는 장면이 있다면 그만큼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을까?

정간보井間譜

정간보井間譜, ⓒ국립국악원


마찬가지로 모두 같은 시기에 뉴욕을 향해 세 가족이 모인다는 설정도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아이가 들을 것 같다", "그녀가 들을 것 같다"는 라일라와 루이스의 이야기는 영화 전반에 흐르는 어떤 우주적 울림에 관한 신앙이고, 그런 신앙이야말로 영화를 지탱하는 유일한 힘이므로 문제삼을 것이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하필 같은 시기에 다시 음악을 시작하고 그때 마침 '어거스트 러시'가 된 에반의 곡이 뉴욕에 울려퍼지는 이 우연의 일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거슬러 올라가면, 성공한 비즈니스맨이 된 루이스가 마침 옛 밴드 동료의 택시에 올라타는 것도 우연이요, 때맞춰 라일라의 아버지가 죽고 라일라가 진실을 알게 되는 것도 우연이다.


4. 미약한 캐릭터

이 영화에는 사실 루이스, 라일라, 에반 외에 다른 등장인물은 없다고 봐도 좋다. 사회복지과의 리처드 제프리스Richard Jeffries는 사실 라일라를 거의 도와주지 못하며, '마법사'Maxwell "Wizard" Wallace는 단지 에반에게 '어거스트 러시'라는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서만 등장하는 것 같다.

제프리스가 에반의 파일을 찾았을 때 라일라는 이미 게시판에서 에반의 얼굴만 보고 자신의 아들인 줄 알았으며, 제프리스가 '어거스트 러시'가 에반인 줄 알고 뛰어갔을 때 라일라는 이미 자기 아들의 공연을 보고 있었다. '마법사'는 에반에게 음악에 대해 모든 것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지만, 그런 장면은 나와 있지 않다. 사실 에반의 모든 기타 연주 가운데 교회에서의 앰프와 코러스 계열 이펙터만 가지고 연주한 태핑 연주만큼 감동적인 것은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즉, 극중에서 에반은 '마법사'에게 배우기 전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free music


기타를 치며 기뻐하는 에반에반의 태핑 기타 연주

오히려 '마법사'가 기억에 남는 것은 마지막의 짧은 하모니카 연주 때문인데, 그것조차 편집된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의미있을 만큼 길지 않다.


5. 엄마 찾아 삼만 리

재미있는 것은 역시 이번에도 에반이 남자라는 점이다. 에반 정도의 신동이 여자라면 영화가 좀더 재미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제작진은 남자 아이를 택했다. 그 편이 여러 모로 편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남자 아이가 갖고 있는 부모에 대한 결핍을 그려내기가 쉽다. 엄마와 아들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역시 성모 마리아와 예수라면, 신동의 대표적인 이미지도 실은 성서의 예수다(표준새번역, 눅 2:41-50):

예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갔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는 해에도 그들은 절기관습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갔다. 그런데 그들이 절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그의 부모는 이것을 모르고,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다음에, 비로소 그들의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그를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은 그를 찾으려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사흘 뒤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는데,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

그의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랐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이렇게 에반은 예수의 이미지를 쉽게 전유專有하는데, 그 전유의 끝은 가족의 상봉이다. 음악이라는 거창한 우주적 메시지를 말하던 영화는 어느 사이 한 가족의 가정사로 축소되어 구원의 의미를 축소하고, 마지막 오케스트라를 통해 세계에 평화와 구원이 왔음을 천명한다.

어쨌거나 순진하고 순수한 남자 아이의 이미지는 여자 아이의 이미지보다 가족의 상봉이라는 구원사에 보다 접근하기 쉬운데, 그것은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이 보다 더 뜨겁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에서 루이스는 (아들의 존재를 몰라서 그렇겠지만) 아들보다는 라일라를 찾고 있고, 라일라는 왜인지 모르지만 루이스는 안중에 없고 잃은 아들을 찾고자 하는 열정에 가득차 있다. 실제로 구글 검색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거스트 러쉬를 본 많은 블로거들은 이를 「엄마 찾아 삼만 리」와 연관시키고 있다. 즉, 관객들의 심리 속에서는, 여기서 아버지란 존재는 지워지고 없다. (오히려 아버지의 역할은 불완전하고도 불합리하게 '마법사'가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엄마의 포근하고 따뜻한 이미지야말로 이 영화가 기대고 있는 음악의 우주적 울림이 갖는 포근함의 비밀이기 때문이다.


6. 영화와 음악

영화 내용은 그저 그래도 음악만은 좋다는 평이 많았을 때, 한 팝 칼럼니스트가 <어거스트 러쉬> 그렇다고 음악은 훌륭해?라는 포스팅을 통해 음악도 실은 형편없다는 견해를 밝혀 블로거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었다. 사실 그가 지적한 대로 영화를 전반적으로 밀고 나가는 음악이 없다시피하고, 음악의 편성이 지나치게 단순 반복적이었다는 것은 맞다. 사실 나는 위 포스팅의 의견에 거의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앞서 불합리한 장면의 하나로 지적했던 악보해독 장면과 달리, 교회에서의 에반의 기타 연주는 놀라운 데가 있었다. 일단 기타는 각 현이 대체로 5도 정도로 떨어져 있고, 각 플랫은 반음 간격이므로 처음 기타를 접하는 음악 천재가 다루기 힘든 악기는 아니다. 더구나 굉장한 연습이 필요한 속주 연주가 아니면서, 기타를 장난감 다루듯이 현을 때리며 우연인 듯 아닌 듯 나오는 태핑 멜로디는 꽤나 아름다우면서도 음악적 합리성을 취득한 장면인 것이다. 기타 하나로 리듬, 멜로디, 화음이 모두 이루어지는 이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볼 만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훈련받지 않은 음악 천재가 선보일 수 있는 개연성을 가진 , 수준 높은 기타 연주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트 러시》가 '음악 영화'라는 태그를 받기에 불완전하다 해도 최소한 음악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영화라는 점은 맞다.

그러나 영화인들이 자랑스럽게 영화를 종합 예술이라고 부를 때는, 어떤 영화든 어느 특정 요소로만 떨어져버린다면 실패한 영화라는 점을 자인한 셈이다. 음악은 좋다, 는 말은 영활르 보느니 OST를 사겠다, 는 말과 바꿔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OST를 들어도 기억에 남는 곡은 없었다.
Posted by 엔디

1

어린 시절, 누구나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살아있다고 믿는다. 내가 자고 있을 때 내 장난감들이나 인형이 살아 움직일 것이라는 상상력은 상당히 많은 동화나 만화의 기본적인 설정으로 되어 있다. 특히 철강과 거대 기계가 찬양받던 지난 세기에는 일단 무엇이든 로봇으로 변하는 독특한 생각이 만화영화의 기반 상상력이 되었다. 전투기나 탱크에서 라이터까지 로봇으로 변신했고, 초능력으로 불러내는 존재도 귀여운 여자친구나 다정한 말벗이기보다는 로봇이었다.

언젠가부터 만화 영화들은 거대 로봇 만들기를 그쳤다. (아마도 일본) 경제에서 '중후장대重厚長大' 시대가 가고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시대가 온 탓이다. 워크맨이라고 불리는 소형 카세트라디오가 그 신호탄이었다면 작고 가벼운 mp3 플레이어와 얇은 휴대전화는 나름대로 그 문화의 첨단이라고 할 만하다.

영화 《트랜스포머》가 나온 건 그 시점이다. 이 영화는 나오자마자 '키덜트 무비kidult movie'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변신 로봇이 나오는 영화가 어째서 '키드 무비kid movie'가 아니라 '키덜트 무비'일까.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간단하다: 경박단소 키드의 머릿속에는 저런 변신로봇이 없기 때문이며, 장난감으로 이제 자동차를 소유한 '마이카my car' 족들을 명백한 타겟으로 정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엉뚱하게도 나는 이 영화에서 미국의 정신을 좀 찾아보고 싶다. 250년 동안 미국을 키운 건 '팔할'이 강철왕 카네기와 자동차왕 포드였고, 미국이 경제 대국이 된 것은 유럽 대륙의 큰 전쟁에 군수 기계와 물자를 대면서였던 것이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은 자동차와 전투기로 변신하는 로봇 '트랜스포머' 장난감을 만들어 거대 시장 미국에 팔았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 "분명히 일제일 거야."라는 대사가 있다.) 그래서 이들 '트랜스포머'와 미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각별한 사이가 되어 있다.

2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은 주술 신앙이다. 주술 신앙은 합리주의와도 다르고 마법과도 크게 다른데, 근본적으로 상대를 대화의 대상으로 여기고 하나의 인격으로 대한다는 점이 바로 차이점이다. 가령 우리가 시계를 사서 손목에 차고 다니면서, 그것을 시각을 알려주는 기계라고만 생각해버리면 우리는 일종의 합리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시계를 자신의 종이나 거래의 당사자로 여기고 시계에게 주문spell을 외거나 시계--또는 시계(시간)의 신--에게 영혼을 판다면 우리는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주술은 대상을 신이나 대화 상대자로 여기는데 기우제를 지낼 때 하늘에 대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기도를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트랜스포머》에서 나타나는 주술 신앙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일어나는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범블비가 아직 로봇이 되기 전, 샘 윗위키가 미카엘라를 태우고 가다가 멈추는 상황에서 그렇다. 윗위키는 자동차에게 부탁ask을 한다: 제발 움직여라. 범블비는 그 부탁에 반응하고, 그래서인지 그날의 데이트(?)는 꽤나 성공적이게 된다. 누구나 한두 번쯤 겪음직한 이 일은 이 영화가 근본적으로 주술적인 신앙에 기대고 있다는 증거로 꽤나 중요한 것이다. ('고물차' 운운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3

'태초'라는 낱말로 시작되는 텍스트는 언제나 그만큼의 무게와 부담감을 갖게 마련이다. 그런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신앙심이 강한 사람이거나 어린 아이다. 이 이야기는 어린 아이 같은 감성과 똑 그만큼의 지성을 갖춘 윗위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 속에 아직도 미국을 닮아가려는 욕망이 있다. 특히 거대한 군수 기계들이나 자동차를 보면서 미국의 힘에 혀를 내두르는 일은 적지 않다. (MS나 구글, 애플과 같은 회사에 대한 동경은 좀 별개의 문제이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일종의 미국교에 대한 영화이다. 미국은 이 영화를 통해 자동차를 비롯한 많은 기계가 자신들로부터 만들어졌다고 공포한다. 거대화, 대형화라는 미국의 이데올로기가 여기서 주술 신앙으로 바뀌어 사람들에게 이식되는 것이다.

Posted by 엔디
젖은 머리칼이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고교 시절, 여자애들은 매일 아침 머리를 감고 묶으면 하교할 때까지 머리가 마르지 않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 적이 놀랐었는데. 그러고보면 나 스스로가 머리를 감고 나서 수건으로 대충 문지르고는 제대로 말리지 않고 나오기도 한다. 어쩌면 는개 같은 가는 비는 그냥 맞는 것도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알래스카》는, 씨네큐브에서 韓과 《스파이더 릴리》를 봤을 때였거나 아니면 혼자 《스틸 라이프》를 봤을 때--혹은 둘 다일지도--예고편을 접했던 것 같다. 고교 시절 이후 설어버린 독일어가 나오는 영화라는 것과 함께, 주인공은 젖은--혹은 젖은 듯한--머리칼이 인상적이었다. 응, 나는 이마 앞으로 흩뜨려진 그런 머리칼을 좋아한다.

인생에는 긴 게임과 같은 면이 있어서, 그 게임에서 정한 규칙에 따라 점을 찍지 않으면 삶의 경로가 이상하게 틀어져버리는 것이다. 미로가 단일폐곡선이라면 결국 돌아나와 출구로 나올 수 있겠지만, 게임에는 시간 제한이 있다. 그러므로 천로역정의 크리스찬처럼 돌아나와 다시 곧고 바른 길로 돌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숨고, 싶다.

♠ 이 포스팅은 씨네큐브 블로그 이벤트를 위해 씌어진 것이다.
Posted by 엔디
대학 시절, 습작을 쓸 때마다 나는 늘 무슨 말을 더할까를 생각했다. 내 몸 속에 왜 이다지도 말이 없을까 안달했다. 부족한 나의 시--그 중 나은 시들은, 그러나, 말의 뺄셈에서 나왔다는 것이 내 솔직한 고백이다, 지금. …가령, 이것저것들을 주워섬겨 아날로지analogie를 형성하면서도 정작 복판은 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나를 잘 알고 있거나, 나의 시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치지 않은 복판의 울림을 들을 것이라고.

신까이 마꼬또新海誠 감독의 단편 연작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를 보면서, 내가 계속 생각한 것도 말의 뺄셈이었다. 확실히 이 작품은 말을 아끼는 작품이고, 말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는 작품이다. 이 말은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가 적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줄곧 길고 긴 독백을 하고 있다. 타카키는 아카리에게 할 말이 몸 속에 한가득 있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이 말의 뺄셈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말과 말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를 찾도록 하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잃어버린 고리를 찾는 일은 의외로 어렵지 않고, 찾았을 때의 기쁨은 크다. 그 고리를 찾는 힘을 나는 공감sym-pathie이라고 부르고 싶다.

(합법적으로 블로그에 노래를 틀 수 있을 때까지 노래 잠시 내립니다. 2008년 3월 24일. 신까이 마꼬또,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

초속5센티미터

"들어주길 바라는 말이 내겐 정말 한가득 있었다."



I

타카키는 멋진 표현의 독백을 구사한다. "귀가 아플 정도로 갖다댄 수화기", "눈 내리는 날 도시 특유의 냄새", "시간은 뚜렷한 악의를 가지고 내 위를 천천히 흘렀다", "그 순간 영원, 마음, 영혼 같은 것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따위의 표현은 쉽게 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순간'에 온 신경을 집중했을 때 비로소 기억할 수 있는, 맡을 수 있는, 그리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애니메이션이 13세 소년의 이야기이지만, 다른 연령대의 사람들까지 쉽사리 공감할 수 있는 원인은 바로 타카키의 순간에 대한 집중력 덕분이다.

초속5센티미터

"아카리가 상처 받는 모습이 손으로 만져질듯이 와 닿았다."


타카키가 순간의 묘사에 주력하는 동안, 보는 이들은 그 순간이 얼마나 중요하고 아픈 순간인지를 알게 된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경험에서 우러난 공감 때문인데, 가령 "귀가 아플 정도로 갖다댄 수화기"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쉽사리 공감하는 것은 누구나가 심야통화와 같은 어릴 적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정현종이

1
별들은 연기를 뿜고
달은 폭음을 내며 날아요
그야 내가 미쳤죠
아주 우주적인 공포예요

2
어둠이 촛불에 몸 씻듯이
깊은 밤 속에 잠겨 있으면
귀밝아오노니
지하수 같은 울음 소리……

- 정현종, 「심야 통화 3」全文

와 같이 노래했을 때, 밤에 통화하는 것과 우주의 공포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우리는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나만의 못난 경험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체험이라는 것을 아는 데에서 공감sym-pathie은 출발하는데, 그 공감을 통해서 말은 복판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II

시든 소설이든 영화든 애니메이션이든 서사 문학은 결국 말로 이루어진 예술이다. 영화나 뮤지컬을 '종합 예술'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역시 거기에서도 눈요깃거리만 제공하는 시간 죽이기용 제품이 아닌 이상 말의 우위가 두드러진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말의 암호는 결국 말로 풀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초속5센티미터


타카키가 "13년간의 삶을 서로 나눈 것 같았다"고 말했을 때 웃은 사람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열세 살의 사랑이라니, 우습다 내지는 귀엽다 같은 이야기를 혹시 꺼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음 순간 타카키는 "우리의 앞에는 너무나 거대한 인생이, 아득한 시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가로놓여 있었다"라고 털어놓는다. 일종의 시간의 역계산이다.

팔십 노인이 "우리의 앞에는 너무나 거대한 인생이 ……" 운운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팔십 노인의 사랑은 그래서 쿨하다. 그러나 어느 쪽이냐 하면 숫기가 없는 타카키는 13년 간의 자기 삶에 대비하여 자기 앞에 놓여진 남은 알파의 삶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초속5센티미터

"견딜 수 없이 슬퍼졌다."


말의 암호는 두 개의 변죽을 울려 함께 울리는 복판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복호화decoding할 수 있다.


가끔 사람들은 삶이란 영화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아마 그건 영화가 삶과 유리되어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영화는 공감을 이끌어낼 수 없고, 동경이나 환상만 제조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멜로는 SF나 무협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멜로가 아닌, 사랑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

이제 사랑을 찾아갈 때다; 초속5센티미터의 공감의 스피드를 함께 나눌 사랑을, 불가능한 것은 이제 없으니까. 그런 점에서 《초속5센티미터》가 「소나기」류의 아련한 과거에 대한 작품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타카키는 버려진 존재이거나 혹은 (능동적으로) 버린 존재이지만, 그는 초속5센티미터의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태양계의 끝까지 나아가는 우주선처럼.

이 땅에는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확실히 사랑은 눈雪처럼 쉽게 변하고 쉬 사라지는 것이지만--그 변화는 나 혼자의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의 변화이다--, 우리 무거운 인생은 경험과 공감이 쌓인 만큼 짐을 벗고 오히려 홀가분해지는 것이다.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 가사 열기


초속 5센티미터 (초회한정판)
신카이 마코토 감독/태원엔터테인먼트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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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이 「다시 봄이 왔다」에서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이라고 울부짖었을 때도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도 기다림에 대한 연극이다. 이 작품이 자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비교되는 이유는, 이 기다림의 시간이 흡사하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와 버스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작품이 펼쳐지는 공간 또한 상당히 흡사하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는 장소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시골이고, 《버스 정류장》 역시 '버스 정류장車站' 팻말이 서 있는 시골길이다. 또, 두 작품의 공간은 연극 내내 바뀌지 않는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여기까지다.


두 작품의 가장 분명한 차이점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기다림에는 목적이 없는 반면 《버스 정류장》의 등장 인물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버스를 기다린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목적만큼 불행하다. 다시 말하자: 그들은 모두 자신의 존재만큼 꼭같이 불행하다. 가령 요구르트를 마시러 가는 불량배의 초조함은 한 남자와의 첫 약속에 나가는 처녀나 챔피언과 장기를 두기로 약속을 했다고 주장하는 노인의 초조함보다 못하지 않다; 그는 누구보다 먼저 시내에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서 새치기까지 일삼는다.

시간은 이들이 목적을 가진 만큼 중요하다. 가령 대입 시험을 준비하는 청년이 시계를 보고 놀라는 이유는 그가 시내에 가려는 목적이 시간과 무척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목적을 좌절시키는 사건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고통스러워 몸부림친다. 어떤 이들은 돌아가려고까지 한다. 그들에게 시간은 붙잡아두어야만 할 것, 도대체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시간 공포증chronos-phobia이다.

그들의 목적 자체가 시간이었다.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는 일, 훌륭한 제자를 길러 자신의 손재주를 전하는 일, 남편과 자식을 주말마다 만나며 삶을 이어나가는 일, 차후의 시간을 지배할 대학 입학 시험을 준비하는 일 따위는 모두 그들이 '시내'에 가서 해야 할 일은 시간을 소모하는 일임을 보여준다. 그뿐이 아니다. 불량배가 먹으러 가는 요구르트는 우유에 시간을 들여 시큼하게 발효시킨 음식이다; 연극은 시간이야말로 우리 존재의 조건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주의를 끄는 것은 노인의 목적이다. 노인은 장기 챔피언이라는 사람과 장기를 두러 시내에 간다고 했다. 여기서 립 밴 윙클Rip Van Winkle 형의 선경설화仙境說話를 떠올리는 것이 무리일까. 장기가 바둑과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평생을 장기만 두어온 노인의 장기 대국은 그 자체로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를' 구경거리임이 틀림없다. 비가 오자 노인은 보이지 않는 장기알들에게 명령한다: "사 막고 궁 앞으로! 궁 막고 차 앞으로! 차 막고 마 앞으로! 장이야!" 그의 말대로 장기는 심심풀이가 아니라 정신을 다하여 두는 것이다. 그 안에 시간의 비밀이 숨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들을 구속하고 있다. 이를 극복할 방법은? 나로서는 작가가 사랑을 믿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시간의 흐름으로 생을 망쳐버린 청년과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던 처녀는 서로 사랑을 나눈다. 행복한 사람, 처녀는 말한다: "시계를 보지 말아요." 불량배는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충고를 듣고 목수로부터 기술을 배우기로 한다. 잠깐만에 그들은 무척 돈독하게 사랑하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버스 정류장에 선다. 삶이 어느 '시간'부터 잘못되어 꼬이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자못 씩씩하게 신발끈을 조인다. 그들은 잠시 멈칫하지만, 결국 출발하고 말 것이다. 거기에서, 더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버스 정류장車站》
작作 가오싱젠
연출 임경식
극단 반도
대학로 극장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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