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 은사님이 녹음해서 주셨던 천지인의 테이프를 처음 더블 데크에 걸었을 때 나온 노래가 "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였다. 테이프가 늘어질까봐 아껴아껴 듣다가 최근에야 복각판 CD를 구매했는데...

어쨌든 대학에 들어가 기형도를 찬찬히 읽으면서 이 곡이 본래 그의 시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CD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는 없는데...)


천지인-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 (보기)


기형도의 시가 좀더 사색적이고, 사실적이지만
이 경우, 록의 매력은 직선적인 것이 아닐까.

종이달 - 기형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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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과거의 '시운동' 동인의 한 명이었던 안재찬이 어느 날 갑자기 류시화가 되었다. 상상력에 주목한 '시인동' 동인에서 명상가로 옮겨간 그를 보면 상상력이 명상과 얼마나 가까운지, 그리고 시가 명상으로 떨어지기가 얼마나 쉬운지 알 수 있다.

나는 명상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라, 명상이란 본시 말을 벗어나는 것이므로 말을 붙잡아야 하는 시로서는 후퇴라고 말하는 것이다.

김현 선생은 안재찬이라는 시인을 주목하여 "그의 시세계를 받침하고 있는 것은 '나에게는 할 말이 없다'라는 쓰디쓴 자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의 담백하고 좋은 시 '소금인형'은 긴 말 하지 않는다. 워낙 담백한 시고, 그래서 독자는 일순 당황하지만 그 다음 자기-없음의 이 상태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안치환의 소금인형은 일반적인 노래의 길이에 맞추어 반복을 통해 가사를 늘렸지만, 그럼으로써 이 시를 얼마간 애처롭게 만들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자기-없음의 상태가 극적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좋은 노래라고 생각한다.


소금인형 - 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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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Analogies with the totality of laws are reproduced exactly in the tiniest leaf.
아날로지는 법칙의 총체성과 함께 가장 작은 나뭇잎에서도 완벽히 재현된다.

Art does not reproduce visible, rather it makes visible.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 올림픽 공원 내 소마 미술관
파울 클레Paul Klee 전 : 눈으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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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의 샴푸의 요정이다.

장정일의 시를 잘 변형하여 만든 이 노래를 오래 좋아했다. 다소 몽환적인 분위기를 즐겼던 것일까?

항상 노래와 영화를 대할 때면 시와 소설을 생각했다. 현대의 대표적인 서정 문학은 시가 아니라 노래이며, 현대 서사문학은 소설이 아니며 영화가 아닐까? 하지만 나는 거기에 쉽게 녹아들 수가 없었다. 노래에 대해 시의 우위를, 영화에 대해 소설의 우위를 항상 느꼈기 때문이다.

가령, 빛과 소금의 '샴푸의 요정'에는 장정일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 애증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매트릭스 안의 모든 것이 조작된 것임을 알면서도 매트릭스를 동경하는 것으로, 나는 키치Kitsch 시인들 모두에게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노래나 영화에서는 볼 수가 없다.


샴푸의 요정 - 장정일



장정일의 시 '샴푸의 요정'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사내'라는 호칭이 1연 4행에서 '나'로 3연 3행에서 '우리'로 바뀐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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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기 위해 적어두는 경구:

Yvette:
Non, c'est triste, mais je ne suis pas responsable.

Nana:

On se croit qu'on est toujours responsable des ce qu'on fait, et libre.
Je lève la main-Je suis responsable.
Je tourne la tête à droite-Je suis responsable.
Je suis malheureuse-Je suis responsable.
Je fume une cigarette-Je suis responsable.
Je ferme mes yeux-Je suis responsable.
J'oublie que Je suis responsable, mais je le suis.

- Jean-Luc Godard, Vivre sa vie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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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뜨:
아니, 슬프지. 하지만 내겐 책임이 없어.

나나:

내 생각엔, 우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책임이 있어, 그리고 자유롭지.
내가 손을 든다-내게 책임이 있어.
내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내게 책임이 있어.
내가 불행하다-내게 책임이 있어.
내가 담배를 피운다-내게 책임이 있어.
내가 눈을 감는다-내게 책임이 있어.
난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만, 실은 내게 책임이 있는 거지.

- Jean-Luc Godard, 그녀의 삶을 살다 (1962)


Posted by 엔디
르몽드
『르 몽드』
최연구, 살림.
2003년 12월 30일 초판.

<ㅉ=69>르 몽드 광고 수입은 38%

르 몽드의 1년 매출액은 1999년 기준으로 2억3천5백만 유로(약 2,700억 원) 규모이다. 그런데 르 몽드 총매출액 중 신문 판매를 통한 수입은 2000년 기준으로 전체 수입 중 62%이다. 반면 광고 수입은 38%이다. 이 수치는 장-마리 콜롱바니 회장이 르 몽드를 이끌면서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광고 비중을 대폭 늘린 이후의 수치이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르 몽드의 수입 구조는 구독료 수입(지대)과 광고가 각각 70%, 30% 정도였다. 어쨌거나 광고 수입보다 신문 판매 수익이 절대적으로 많다는 것은 이 신문이 광고주인 대기업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의 언론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일 수는 있어도, 광고주인 기업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르 몽드는 이런 자본주의 언론의 한계를 처음부터 자각했고, 경제권력(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광고보다 판매 수익을 우선으로<ㅉ=70>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초지일관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 권력으로부터의 재정적 독립은 르 몽드의 독립성을 뒷받침하는 토대이다. (한편 우리나라 신문은 어떤가. 우리나라는 그 구성 비율이 정반대이다. 우리나라 주요 일간지의 재정구조를 보면 광고 수입이 평균적으로 신문 재정의 약 70%를 웃돈다.)

이처럼 광고 수입을 제한하여 언론의 독립성을 견지하고 있는 르 몽드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1985년부터는 광고 업무를 아예 자회사로부터 분리시켜 편집과 광고의 유착 관계를 근원적으로 '단절'시켰다. 르 몽드는 이런 면에서 여러 가지로 독립 언론의 모델이 되고 있다.

그러나 르 몽드가 최고의 지성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독특한 소유 구조나 재정적인 독립성 때문만은 아니다. 르 몽드는 분명한 색깔과 논조를 가지고 있는 소신 있는 언론이다. 기사의 깊이와 세련된 분석은 단연 타 신문의 추종을 불허한다.

르 몽드는 '모든 권력(정치권력과 금권)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한다. 하지만 독립성과 중립성은 다른 개념이다. 르 몽드는 양비론처럼 모호한 입장을 표방하거나, 중립성을 내세우는 회색 언론은 결코 아니다. 르 몽드의 입장은 오히려 분명하고 명확하다. 특히 인종주의나 극우 이데올로기에 대한 르 몽드의 입장은 비타협적이기까지 하다.

프랑스 언론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정치적 색깔을 분명히 갖고 있고 사설의 논조도 일관성을 갖는다. 르 몽드의 목소리는 진보적이다. 르 몽드는 프랑스 지성들이 그러하듯 자신과<ㅉ=71>다른 의견에 대한 정치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언론이 정치인이나 정당, 정치 세력에 대해 색깔 공세를 퍼붓는다는 것은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상상할 수도 없다. 프랑스 문화와 지성을 유지해 온 가장 큰 힘은 다양성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적 다양성, 문화적 다양성은 프랑스 사회가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가치이다. […]

<ㅉ=75>중립 표방 않는 프랑스 언론

프랑스 언론은 결코 중립을 표방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나라 언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이다. 우리나라 언론은<ㅉ=76>저마다 정론직필의 정론지를 자처하고 있고 언론의 객관성, 중립성을 내세운다. 보수적인 신문이든 진보적인 언론학자이든 모두 같은 논지를 펴고 있다. 가령 언론학자 김동민 교수는 오마이뉴스에 실린 글을 통해 "나는 거듭 강조하거니와 언론의 생명은 '도덕성'과 '비당파성'이다"라고 말했다. 언론의 중립성을 통한 공정성을 주장하는 것은 진보적인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프레시안에 실린 다음의 글은 '새 언론포럼'에서 프레시안의 한 간부가 발표한 발제문의 일부이다.

언론이 현실의 특정 정치 세력과 일체화되는 것은 위험하다. 현실의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진리와 정의를 독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은 항상 옳다'는 공산당의 무오류 선언은 오류였음에 드러났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한 세력이 절대선을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며 이에 동조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현실의 특정 세력은 정당성의 일부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누가 더 정당성의 비율이 많은가'이다. 언론의 역할은 공정한 심판자로서 현실 세력의 시시비비를 냉정하게 가려내는 것이다.(「프레시안」, 2003년 11월 21일.)

언론이 공정한 심판자로서 현실 세력의 시시비비를 객관적으로 가려낸다는 것이 가능한가? 정치적 사안에 대한 공정한 심판이 과연 가능한가? 이런 객관성, 가치중립성의 주장<ㅉ=77>은 막스 베버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보수건 진보건, 한국 언론들이 하나같이 공정성과 중립성을 표방하는 것은 한국 언론이 그동안 너무 편파적이거나 친권력적이었음을 반증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론이 중립성, 비당파성, 객관성을 견지한다는 것 또한 관념적인 신화에 불과하다. 프랑스 언론은 도덕성, 진실성은 표방하지만 비당파성을 표방하지는 않는다. 하니리포터 김승열은 언론은 오히려 당파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프랑스 언론에 비추어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다.

현재 한국 언론은 당파성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한국 언론 대부분이 무당파성, 정론, 객관성, 균형을 강조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프랑스에는 오히려 이러한 당파성을 근거로 논쟁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극우에서 극좌에 이르는 언론들이 무지개처럼 늘어서 있고, 누군가가 사회에 대한 발언을 할 때는 그가 지지하는 정당, 그 정당을 지지하는 언론을 보아야만 올바로 발언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으며, 미국도 마찬가지도 명백히 공화당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언론이 나누어져 있다.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라면 다양성을 토대로 하여야 하고, 이는 언론의 당파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언론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과 진실이지 비당파성이 아니다. 피하여야 할 것은 왜곡이지 당파성이 아니다.(김승열, 「하니리포터」, 2001년 7월 5일.)

<ㅉ=78>언론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은 언론의 독립성이다. 한 나라가 독립을 잃으면 자유를 잃듯이, 언론도 독립성을 잃으면 자유를 잃게 된다. 언론의 역사는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언론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현대 사회에서 언론은 입법, 행정, 사법부에 버금가는 제4의 권력(제4부)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주필인 이냐시오 라모네(Ignacio Ramonet)는 자신의 저서 『커뮤니케이션의 횡포』에서 미디어를 제4부가 아닌 제2부로 규정하고, "제1부로 뛰어오른 경제, 제3부로 밀려난 정치와 함께 새로운 '삼권 분립'을 이루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하지만 그래도 이 막강한 펜의 힘은 때로는 정치권력 앞에, 때로는 자본의 위력 앞에 굴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프랑스의 언론도 처음부터 자유 언론이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던 나폴레옹 시대의 언론만 보더라도 프랑스의 언론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신문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기는커녕 정치권력 앞에서 해바라기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권력 앞에서 신문 편집이 굴절된 고전적인 예가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최대 일간지 모니퇴르(Moniteur)이다. 지금은 사라진 언론이지만 모니퇴르는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시민혁명을 옹호하면서 최대의 일간지로 부상했다. 하지만 반혁명적인 나폴레옹이 집권하자 이번에는 나폴레옹을 적극적으로 지<ㅉ=79>지하면서 시민세력의 기대를 저버린다. 나폴레옹이 패전한 뒤 엘바 섬으로 유배되자, 이 신문은 다시 나폴레옹을 비판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15년 3월 1일 엘바 섬을 탈출해 다시 파리로 입성한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파리로 들어오는 20일간에 드러난 모니퇴르의 논조 변화를 보면 언론이 권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고 친권력적이었는지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모니퇴르 머리기사의 제목 변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살인마 소굴에서 탈출
-코르시카의 아귀 쥐앙 만에 상륙
-괴수 카프에 도착
-괴물 그르노블에 야영
-폭군 리용을 통과
-약탈자 수도 60마일 지점에 출현
-보나파르트 급속히 전진! 파리 입성은 절대 불가
-황제 퐁텐블로에 입성하시다
-어제 황제 폐하께옵서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거느리고 궁전에 듭시었다(손석춘, 『신문읽기의 혁명』(개마고원, 1997) 재인용.)

전두환 장군이 집권하자 조선, 동아일보가 보여주었던 용비어천가식의 보도 기사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ㅉ=80>언론은 권력과 긴장 관계 유지해야

물론 오늘날의 프랑스 언론에서 이런 권력에 대한 아부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그만큼 시민 사회가 탄탄해졌고, 언론이 투쟁을 통해 '자유'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쟁취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언론이 사회의 공기(公器)로서 제 기능을 다하자면 언론은 권력과 부단히 긴장 관계를 가져야 한다.

언론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라고 해서 언론의 독립성이 완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경제권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언론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언론은 여전히 '광고'라는 경제권력으로부터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르 몽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르 몽드는 자본주의의 언론도 충분히 경제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때문에 르 몽드는 정치권력과 금권으로부터의 독립성이야말로 신문의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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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Marching in the street

Tariq Ali & Susan Watkins, 안찬수·강정석 옮김, 삼인.
2002년 12월 13일 초판 4쇄 발행.


스포츠: 잘 잰 시간의 감옥
멕시코 올림픽 사보타주


스포츠는 비정치적 활동이라는 관념만큼 비판을 받지 않은 격언은 없다. 내가 아는 한 모든 스포츠 행사가 전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토론의 주제로 삼은 적은 결코 없다.

일반적으로 스포츠에 이의를 제기할 만한 이유로는 적어도 네 가지가 있다.

1. 스포츠는 '경쟁심'을 고취한다.

2. 오늘날 대회가 개최될 때 스포츠는 민족주의의 가장 원색적인 형태를 고취한다.

3. 육체적인 건강함을 강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군국주의적이다.

4.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 깃든다"는 (아름다운 것이 좋은 것이라는 관념을 함축하고 있는) 관념은 파쇼적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스포츠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할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다. 즉 스포츠는 민중의 아편으로 주요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기껏해야 스포츠는 노동자 계급에게 고통스러운 일에서 벗어나는 거짓 '탈출구'를 제공해 줄 뿐이다. 일류 선수들이 대개 '성공'을 이룬 노동자 계급 출신의 젊은이라는 사실이 지적될 때에도 자기 만족적이며 대체로 반동적인 성격을 지닌 그들은 거의 놀라지 않는다. 옛날에 성공한 사람들은 술집이나 스포츠용품점을 얻었다. 어쨌든 한 단계 올라선 것이다. (북아일랜드 축구 선수) 조지 베스트Geroge Best의 부티크는 종류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스타일이 바뀌었을 뿐이다.……

하지만 몇몇 출세한 사람들만이 스포츠 제도를 정당화하는 데 익숙할 뿐이다. 가장 노골적인 것으로 리 트레비노Lee Trevino가 올해의 미국 골프 오픈American Golf Open에서 우승했을 때 신문 기사들에는 상금을 받은 기쁨에 대한 이야기가 넘쳤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던 스포츠의 또다른 영역인 올림픽이 마침내 공격 대상이 되었다. 미국 올림픽 팀의 흑인 선수들이 제안한 올림픽 보이콧에 동참하고 차선책으로는 무하마드 알리의 복권 운동에 동참하는 인권을 위한 계획Project for Human Rights은 스포츠 영역에서 근거없이 내세워졌던 '인종 차별 폐지'라는 주장이 거짓임을 드러냈다.

흑인 선수 가운데 성공을 이룬 사람들은 아주 소수다. 그러나 유쾌한 한때를 맞이하려고 수많은 선수들이 자신들의 귀중한 청춘을 낭비하고 있다. 그리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흑인 스타일과 자기 자신을 관련 지어 생각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자기 자신을 거세하고 있다.

한 명의 흑인 육상 선수가 올림픽 팀에서 이탈하거나 또는 그외 방법으로 멕시코 올림픽 경기를 혼란시킨다면 그에게 마구 비난이 쏟아질 텐데 비난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일 것이다. 그런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결국 너무 힘에 겨운 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백인 언론인은 그 운동이 허장성세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백인 언론은 틀렸다. 흑인 선수들의 제안이 던져 준 충격은 이미 표면적인 파문을 넘어섰다.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우롱당할 수만은 없다는 그들의 메시지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스포츠를 좋아하는 미국 기성 사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비정치적인' 스포츠가 지금까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발화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역설적인 일일지는 몰라도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고든 피터스Gordon Peters
『블랙 드워프』, 1968

(290쪽)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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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린느
"솔직히 말해서 연인들이란 모두 돌았어요!"
- 몰리에르, 「따르뛰프 혹은 위선자」

Dorine "À vous dire le vrai, les amants sont bien fous!"
- Molière, Le Tartuffe ou L'Imposteur


명언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는 말이다.
가끔 이렇게 몰리에르 선생을 존경하게 된다. 하긴 말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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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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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飜譯語成立事情』
『번역어성립사정』
柳父章, 서혜영 옮김, 일빛.
2003년 4월 1일 초판.

<ㅉ=5>글머리에

이 책에서 다루는 '사회' '개인' '근대' 등의 번역어는 학문과 사상의 기본 용어이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나 신문지면 등에도 자주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도 가정의 거실에서 가족들끼리 또는 직장 동료들끼리 편하게 대화를 할 때에는, 이런 말은 보통 사용하지 않는다. 상당히 교육 정도가 높은 사람의 가정이라 하더라도 그럴 것이다. 만약 편안한 자리에서 누군가가 이러한 말을 입에 올린다면, 주위 사람들이 얼른 자세를 고쳐 앉거나 자리가 썰렁해질지도 모른다. 즉 이런 말은 사용되는 장소가 한정돼 있어서, 일상 생활의 장에서가 아니라, 학교나 활자 속의 세계 혹은 집안이라 해도 공부방에서만 사용된다. 일상어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다른 세계의 말이다. 우리들은 생활 속에서 각각의 장면에 따라 이러한 말을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난해한 책을 많이 읽은 젊은이라 하더라도 교실이나 친구와 토론하는 자리에서는 어렵고 딱딱한 어감의 말을 자주 입에 올릴지 몰라도, 어머니 앞에서는 그런 말투를 사용하지 않는다.

일본의 학문과 사상의 기본 용어가 일상어와 따로 놀면서 이 책 곳곳에서 지적한 바 여러 가지 왜곡이 따르게 되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렇게 언어가 따로 놀게 된 데에는 한자를 수용하기 시작한 이래 형성된 뿌리 깊은 배경이 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번역어가 일상어와 동떨어져 있는 덕에 근대 이후 서<ㅉ=6>구 문명의 학문과 사상 등을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던 측면도 있다.

이와 같은 우리들의 숙명적인 사실을 놓고 좋으냐 나쁘냐를 가르기보다는, 우선 사실 그 자체를 알았으면 한다. 그것은 의외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을 쓴 이유이다.

이 책 앞부분에서 다룬 여섯 개의 용어인 '사회' '개인' '근대' '미' '연애' '존재'는 바쿠후(幕府) 말기에서 메이지(明治) 시대에 걸쳐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진 신조어이다. 혹은 실질적으로 신조어와 동등한 말이다. 그 뒤에 다른 네 개의 용어, 즉 '자연' '권리' '자유' '그' ('그녀'는 신조어)는 원래부터 사용되던 일본어로 일상어 속에 살아 있던 말인데, 번역어로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 것들이다. 이상 두 가지 경우 번역어가 갖는 문제는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특히 후자와 같이 전래된 일본어를 번역어로 사용했을 경우에는, 서로 다른 뜻이 혼재하면서 상호 충돌하는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양자 모두 번역어 특유의 효과로 인해 뜻을 알기 힘들거나 의미를 혼동하게 하는 등의 문제를 똑같이 안고 있다.

번역어의 문제를 다루는 나의 기본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본문 속의 여러 곳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을 모두 모아 '근대'의 제2절 부분에서 종합하여 설명하였다.

이 책에서 다룬 번역어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에서도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그 중 이 책에서 다룬 주제가 처음 나온 문헌은 다음과 같다.

<ㅉ=7>'사회'  저서 『번역이란 무엇인가』, 호세 대학(法政大學) 출판부. 1976년.

'개인'  『문학』1980년 12월호,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근대'  『도서』1981년 1~3월호, 이와나미쇼텐

'미'     『도서』1981년 5~7월호

'연애'  『번역의 세계』1979년 10월호, 일본번역가양성센터

'존재'  『번역의 세계』1980년 8~9월호

'자연'  저서 『번역의 사상』, 헤이본샤(平凡社), 1977년

'권리' '자유' '그, 그녀'  저서『번역이란 무엇인가』

이 책에서는 나의 번역론에서 단어론을 총정리한다는 생각으로 각각의 논문을 상당 부분 손질했다. 또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쓰기 위해 노력했다.

이 책이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기까지는, 이와나미쇼텐 편집부의 사카마키 카츠미(坂卷克巳) 씨께 도움 받은 바가 크다.

1982년 1월
야나부 아키라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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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濟成長がなければ私たちは豊かになれないのだろうか』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C. Douglas Lummis, 최종철·이반 옮김, 녹색평론사.
2002년 12월 10일 초판, 2003년 2월 20일 2쇄.


<ㅉ=189>일본에 와보기 전에는 '영어회화(English Conversation)'라는 말을 그 어디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물론 이 두 낱말이 어떻게 해서 복합명사화하게 되었는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쓰는 영어회화라는 표현은 그것이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종의 슬로건적 느낌을 풍긴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영어로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영어회화를 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라는 우리가 종종 접하게 되는 문장은, 많은 영어선생들의 순진한 생각과는 달리 결코 중복적인 표현이 아니다. 영어회화라는 표현에는 단순히 언어훈련이라는 뜻만 아니라 어떤 세계관까지도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식 약국과 햄버거 이야기

일본에 있으면서 내가 처음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일자리를 얻게 되었던 것은 1961년의 일이었다. 이때 나는 곧 이것이 매우 난감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후에도 외국어학원, 회사, 대학 등지에서 간간이 영어회화라는 것을 가르치게 되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영어회화를 가르친다는 교실<ㅉ=190>을 들어설 때마다 심란하고 어색한 느낌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다.

한 3년 바깥엘 나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작년 가을, 나는 도쿄에 있는 주요 외국어학원들의 회화반을 둘러보았다. 판에 박힌 듯한 강의가 조금도 다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얀 벽에는 예의 그 디즈니랜드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다섯명의 젊은 사무직 여성들이 얌전을 빼고 나란히 한줄로 앉아 있었다. 미국인 여자 선생이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그 여성들은 그 앞에서 다음과 같은 레슨을 합창하고 있었다.

A― Let's stop in this drugstore a minute.
B― OK. I'd like to go in and look around. We don't have drugsotres like this in Japan. We only sell medicine.
A― Well, you can get medicine here, too. See that counter over there? That's the pharmacy department. The man who wears the white coat is the pharmacist.
B― Look at all the other things here, candy, newspapers, magazines, stationery, cosmetics. In Japan we don't see such things at the drucstore.
……
A― Shall we go to the soda fountain?
B― What's the soda fountain?
A― Well, most drugstores have a soda fountain where you can get icecream, soft drinks, sandwiches, and so on.
B― OK. Let's go. I'm hungry. I'd like to get a hamburger and a milkshake.

나는 이 여섯명의 인간이 서로의 사이에 무슨 뚫을 수 없는<ㅉ=191>벽 같은 것을 두고 서로를 진지하게 응시하며 이런 문장들을 복창하는 것을 보면서, 마치 초현실주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도대체 이 나라에서는 이러한 허구의 미국식 약국과 거의 전설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진짜' 햄버거 이야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해왔던가? 정작 가치있는 이야깃거리가 이밖에도 얼마나 무궁무진할 텐데 이런 내용이 계속 반복되다니, 이것은 미국문화의 진면목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문화의 빈곤성만을 과시하는 격이 아닌가?

그리고 만약 이 회화반 수강생들을 이같은 미국의 문화적 불모성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게 하지 않고 영어회화학원으로 잡아 끄는 이유가 바로 이 끝없이 계속되는 약국, 슈퍼마켓, 드라이브인 영화관, 햄버거 판매점 이야기들 때문이라면, 이거야 참으로 낯간지러운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처지를 문제시하는 미국인 선생들은 별로 없다. 이곳 외국인 사회에서 영어를 가르친다는 일이 무슨 보람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그저 쉬운 돈벌이라는 생각에 그대로 넘어간다는 것이 사실이다. 맡은 바 일을 양심적으로 하려는 선생들도 소수 있다. 그러나 대개는 그럴 필요까지 있겠느냐는 투다. 그저 꼬박꼬박 강의실에 들어가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만 때우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일주일에 한시간 미국인과 직접 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수강생들이 돈을 내는 이유가 아니냐 하는 것이 이런 선생들의 암묵적 생각인 것이다.

그들의 평생소원은 영어회화 구사

1961년 여름 나는 이미 여러 달을 일본에서 보냈던 터였다. 그때 돈이 떨어진 나한테 어떤 친구가 쉬운 일자리가 하나 있다<ㅉ=192>는 것이었다.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라 했다. 나는 자격이 없다며 사양했다. 경험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방면의 전문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본어도 능숙하지 못한 처지였다. 그러자 친구는 내 순진함에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이렇게 말했다. "경험이나 훈련 같은 건 필요없네. 여기서는 이탈리아인, 독일인, 프랑스인들까지도 고등학교 때 배운 영어실력으로도 선생노릇을 하니까. 여기 사람들이 학원에 다니는 이유는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외국인을 만날 기회를 얻겠다는 거지. 아주 간단한 일일세. 그저 강의실에 들어가서 무슨 소리든 되는 대로 한시간 떠들면 그만이네."

당시로서는 그의 이야기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느낌이었다. 일본말을 잘 몰랐기 때문에, 내가 아는 사람들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에 한정되어 있었다. 내가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었던 대학에도 ESS(English Speaking Society ― 영어상용반)가 하나 있었는데, 그 대다수 반원들이 내게 보이는 추종적 태도에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그들의 '평생소원'이 영어회화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이며 그들이 제일 가고 싶은 데가 로스앤젤러스이며 제일 좋아하는 소설가가 호손이며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 롱펠로라는 이야기 등을 들었을 때 나는 정말 그럴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 그리고 일본말을 모르는 대다수 외국인들은 ― 이런 태도가 일본문화를 대표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영어회화의 세계, 즉 ESS의 세계가 단지 하나의 하위문화로서 일본 대학생 전체의 특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훨씬 뒤의 일이었다.

나는 곧 ESS 반원들이 미국인과 유럽인에게 보이는 추종적<ㅉ=193>태도가 그저 외국 손님들에 대한 우애의 표시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같은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별난 족속으로 대하는 태도를 결코 우애의 표시로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 내가 곧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태도가 일부 외국인들에게만 취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1962년에 나는 교토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교토대학 ESS가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클럽을 후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모임에 한번 나가 보았는데, 거기에 있던 외국인―그 대부분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학생들이었고, 그들은 격앙된 상태에 있었다. 얘기를 들으면, 일본인 반원들이 동나아시아 학생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미국인 학생과 유럽인 학생들만을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녔던 모양이다. 나는 그때 ESS대표가 동남아시아 학생들의 거센 항의를 들으면서 지었던 표정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ESS측은 이 외국인학생 클럽이 주로 아시아인들로 채워질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대가 어긋났지만, '공평'의 원칙상 그들은 이 클럽을 계속 후원하지 않을 수 없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분명 동남아시아 학생들이 자진해서 없어지기를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인종차별주의적 영어회화의 세계

그후 나는 또 귀중한 교훈 하나를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내가 나가는 영어학원의 한 일본인 선생에게서였다. 월급날의 일이었다. 이 노신사가 내게 오더니 점잖은 말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이 있는 것 같소. 나는 여기서 15년 동안을 일해왔소. 당신의 경우는 3개월에 불과하지<ㅉ=194>요. 그러나 내 봉급이 당신보다 적소. 이런 소리를 했다고 해서 나쁘게는 생각 마시오. 당신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알려주었을 뿐이니까." 그는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훌쩍 떠나버리고 말았다. 나는 얼떨떨했다. 그리고 어지러운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는 유능한 언어학자에다 풍부한 경험을 가진 교사였다. 반면 내 경우는 열차를 타고 학원으로 오면서 열차칸에서 생각해낸 농담조 이야기로 그날그날의 강의를 때웠던 것이다. 내가 그보다 돈을 많이 받아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그후 나느 이 질문을 여러 사람에게 던져보았다. 그때마다 되돌아오는 대답이 외국인(백인을 의미한다)의 경우 "생활비가 더 필요하다"는 식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이런 답변을 내가 어떻게 수긍할 수 있겠는가? 차별대우라는 생각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영어회화의 세계에서는 한마디로 인종차별주의가 당연시되고 있다. 물론 나로서는 선생이나 수강생 개개인을 비난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이들 가운데서도 헌신적이고 진지한 사람들이 다수 있기 때문이다.내가 문제시하고 싶은 것은 다만 이 영어회화라는 하위문화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구조이다. 그것은 고용방식과 광고방식 면에서 인종차별주의적이며, 교재와 강의실에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 면에서 또한 인종차별주의적이다.

예컨대 "본토인(native speaker)이다"라는 선전이 성행하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협잡이나 다를 바 없다. 특히 영리를 목적으로 운영되는 외국어학원에서는 본토인이 출강한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본토인이란 결국 '백인'을 의미할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부 본토인들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유럽인들이다.

<ㅉ=195>반면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 등에서는 영어가 공용어이다. 그러나 이곳 출신자들은 본토인 취급을 받지 못한다. 그들이 가끔 일자리를 얻게 되는 것은 자신의 뛰어난 영어실력을 인정받았을 경우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능력을 시험받을 기회도 얻지 못한 채 그대로 문전박대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회사에서 미국인들을 고용하는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다. 백인들만을 고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 일본인들에게 '미국인'이란 말은 '백인'과 동의어이다. 그런데 일본에 오는 미국인들이 어디 백인뿐인가? 백인이 아닌 미국인들도 일본의 많은 외국어학원에서 일자리를 쉽게 구하지 못한다.

일본의 외국인사회에서는 백인이라면 아무런 자격이 없어도 적어도 두가지 일자리는 쉽게 구할 수 있다는 말이 통용되고 있다. 하나는 영어선생이고, 또 하나는 광고모델이다. 아니, 한가지가 더 있다. 여성일 경우 본인의 의사만 있다면 스트리퍼(stripper)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가지 일이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실은 일본에서는 하얀 피부 자체가 돈벌이 재료라는 것이다. 스트립쇼 업소의 주인들은 춤을 못 추어도 '외국인' 스트리퍼가 있으면 손님들이 더 몰려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백화점 주인들 역시 파란 눈의 블론드 마네킹들이 진열되어 있어야 여성들에게 서양옷을 잘 팔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거야 원, 나치가 그리던 게르만 민족의 세계지배격이 아닌가? 텔레비전 광고주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백인들이 자기 상품을 쓰는 모습을 소비자들에게 보여주어야 매출액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지라 외국어학원들에서도 본토인들을 선생으로 삼으려고 서로들 기를 쓰고 있다.

전문적 훈련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는 교사로서의<ㅉ=196>자질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외국어학원에서 본토인들을 선호하는 까닭은 종종 발음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동남아시아인들은 미국의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발음이 나쁘다는 것이다. '진짜' 미국식 영어를 하는 사람은 백인 미국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발음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영국이든 미국이든 간에 사투리도 많고 어형 변화도 제각각이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에서 어느 것이 '표준어'인가는 권력에 의해 결정되는 문제이다. 표준어란 지배계급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리핀에서 발달한 영어라 해서 그것을 '틀린' 영어라 매도할 수는 없다. 영국인들이 앵글로색슨어와 프랑스어로부터 새로운 언어를 창출할 수 있었다면, 또 미국인들이 북미에서 나름대로의 영어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면, 필리핀인들이라고 해서 그들 나름의 독특한 영어를 발전시켜서는 안된다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발음으로 영어를 익히느냐 하는 문제는 언어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문제다. 그것은 전적으로 배우는 사람이 앞으로 누구를 상대할 것인가에 따라 결정될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를 배워야 할 이유

분명히 밝히지만 나는 영어를 배워야 할 훌륭한 이유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영어는 상당수 나라에서 모국어이다. 그리고 더 많은 나라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공용어로 쓰이고 있다. 영어가 피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첫째로 대영제국의, 그리고 둘째로 아메리카제국의 유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의 사람들과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언어, 각국 수준에서 국제적 교호와 연대를 강화<ㅉ=197>시킬 수 있는 언어가 바로 영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많은 일본인들이 영어를 공부하는 이유가 다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유럽인들과 대화를 나누려는 희망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런데 영어회화의 교재나 강의실의 현실을 보면 이 희망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만다.

물론 영국식 영어를 강조하는 곳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영어회화의 세계에서는 그 이상적인 상대자가 거의 늘 중산층 백인 미국인이다. 어떤 교재든 슬쩍 훑어만 보아도 이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각 과의 첫머리에 나오는 대화자들을 보면 적어도 주인공 한 사람은 늘 이런 미국인이다. 장소 또한 늘 일본 아니면 미국이다. 돈의 단위는 늘 달러이며, 도량형 단위는 늘 야드, 피트, 인치이며, 약국에는 늘 간의식당이 있으며, 식료잡화류를 파는 데는 늘 슈퍼마켓이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재미 중의 하나가 일종의 대상(代償) 여행에 있다고 한다면, 가끔은 그 동기가 적어도 상상 속에서나마 자기 사회의 한계를 벗어나고픈 욕구 때문이라고 한다면, 영어회화의 교재들은 이 욕구를 미국으로만 집중시킨다.

나로서는 일본에서 영어회화와 미국이 얼마나 동일시되는지에 대해 무어라 단언을 내리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국적이 어떻든 백인 한사람이 일본의 골목길을 가다가 거기서 노는 어린아이들과 마주쳤다고 하자. 그러면 아이들이 외쳐대는 첫마디가 "야, 외국인이다" 또는 "야, 미국인이다"라는 소리이다. 또 학교를 다닐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아무 의미없이 "I have a book", "I have a pencil"을 외쳐댄다. 어디서나 거의 한결같이 이런 장면이 연출되곤 하는데,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영어회화가 원초적으로 갖고 있는 몇몇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을 발견할<ㅉ=198>수 있다. 우선 첫째로 (유럽인, 캐나다인, 남미인, 호주인 등에게는 아주 기분이 나쁘게도) 이 아이들에게는 '외국인'이라는 말과 '미국인'이라는 말이 사실상 동의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것은 일본 바깥의 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인 것이다. 즉 그것은 일본의 반대말이다. 더욱이 '미국인'들은 일본말을 못 알아들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바로 앞에 두고도 "야, 코가 크구나" 등 이런저런 소리를 마구 떠들어도 별일이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 상대방이 조그마한 반응이라도 보일라치면 곧바로 "I have a book", "I have a pencil" 등 무의미한 영어회화가 등장한다. 책이나 연필이 있든 없든 그것은 상관없다. 건네는 말의 내용이 완전히 무관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영어회화의 아이들 세계이다.

성인들의 영어회화 세계는 물론 이보다 훨씬 세련된 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데올로기가 더욱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이다. 일본 바깥에 미국 외에도 많은 나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성인들이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 나라들을 그저 주변적인 국가들로 생각한다. 그 나라들의 이름이 직접 언급될 때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종종 '공평'을 기하기 위해서이거나 자신의 이야기에 약간의 코스모폴리탄적인 양념을 치기 위해서일 뿐이다. 따라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진짜' 나라는 일본과 미국뿐이라는 식의 태도이다. 비교의 대상이 늘 미국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영어회화의 세게에서는 오로지 일본과 미국만이 '범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국가들은 '우연'으로서만 존재한다. 외국이라는 것이 미국 이외에도 많이 있지만, 미국이야말로 양국의 모방, 대조, 결합 등에 의해 '일본성'이 규정될 수 있는 역사적 비교대상인 것이다.

<ㅉ=199>미국이 곧 '세계'인가

대다수 미국인들은 일본인들의 이런 태도를 아주 당연시하는 듯한 태도이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의 그런 태도가 자기 나라의 세계적 위치에 대한 그들 자신의 견해와도 아주 멋지게 들어맞기 때문이다. 아시아에 주둔해있는 미군들 사이에서는 미국이 '세계'라는 속어로 불리기도 한다. 고국에서 온 편지는 '세계에서 온 편지'이며,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자기 이미지를 아주 정확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미국 바깥에 있는 세계는 미국처럼 진짜가 아니다. 미국 바깥에 있는 세계는 설사 존재한다 할지라도 미국보다 저위(低位)에 존재한다. 따라서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다지 중시할 것이 못된다. 이런 태도는 특히 아시아에 있는 미국인들에게 강한데,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혼란스럽고 우발적이며 불안정하고 부수적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이 무의미한 혼란 속에 미국인들은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인 고국의 이미지를 그리면서 향수를 달랜다.

예컨대, 사고 싶은 물건들이 선반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약국 같은 것이 고국의 이미지인 것이다. 고국이야말로 정말로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며 정말로 감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곳이다. 세계 자체가 바로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인들은 자기 나라를 '보편적인'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나라들(특히 아시아와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해서는 '특수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의 생활은 일본적이며, 필리핀인들의 생활은 필리핀적이며, 베트남인들의 생활은 베트남적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생활은 생활 자체라는<ㅉ=200>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생활임과 동시에 생활의 이데아, 즉 보편적 이성의 제반 원칙에 가장 부합되는 생활의 이데아라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자기들의 생활방식이야말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생활에 대해 제대로 알고, 또 선택의 자유가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선택할 것이라는 뿌리깊은 믿음을 갖고 있다.

1950년대 냉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 미공군이 동유럽 상공으로 날아가 시어즈사의 카탈로그를 도시와 가로에 뿌려야 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미국인들이 많았다. 동유럽 사람들이 카탈로그에 소개된 그 놀라운 물건들을 보기만 한다면 자기들이 소비에트 당국에 속아왔음을 깨닫고 반란을 일으키리라는 생각에서였던 것이다. 평화봉사단이라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비슷한 발상에 기초했다. 즉, 인습에 찌든 마을에 미국인 젊은이가 나타나기만 하면 그 현지인들이 곧 옛 관습을 버리고 열심히 그를 모방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던 것이다.

미국의 사회과학에서는 이 순진하고도 건방진 가정이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망토를 걸치고 다시 나타난다. 이른바 '전시효과'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미국인 학자들에 의하면 제3세계의 혼란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의해 초래된 것이 아니라 이른바 '기대상승혁명'에 의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대중통신매체들을 통해서 그리고 기계, 빌딩, 시설, 소비재, 쇼윈도, 루머, 행정적·의료적·군사적 관행 등의 전시를 통해서" 이 '기대상승혁명'이 현대생활의 제반 측면에 걸쳐 촉발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 '현대생활'의 선구자가 바로 미국이라는 것이다.

미국인들의 이런 태도는 일본을 대할 때 더 강하다. 일본이 미국의 점령지였기 때문이다. 일본에 대해 전혀 공부한 바<ㅉ=201>가 없는 미국인들조차도 점령지에 대한 막연한 역사적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현대적 민주주의 국가를 운영할 줄 모르는 일본인들에게 미국이 그 시범을 보이기 위해 맥아더를 파견했다는 것이다.

언어교육 속에 담긴 교묘한 선전

사정이 이러한지라 미국인들은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선생과 학생의 관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의식적인 견해의 형태가 아닌 무의식적인 가정의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의식적으로는 이런 견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그 행동을 보면 그런 가정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내심 자기들은 매사가 질서정연한 사회의 출신이며, 따라서 일본 영토에서는 자기들이 보통 시민에서 선생으로 변하게 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자기 나라에서는 도저히 선생 노릇을 할 수 없는 미국인들도 일본에서는 자기가 선생노릇을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언어학적 훈련 같은 것도 이곳에서는 아예 필요없다는 투다. 왜냐하면 그들의 실제 역할은 외국어를 가르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식 생활방식의 살아있는 예를 제시하는 데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일본여행이 미국인들 사이에서 그렇게도 인기가 높은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지배계급의 일원으로 대접받으면서 급작스러운 지위상승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이런 대접을 받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은 "서비스 만점인 일본을 나는 무척이나 사랑한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러한 미국인들과 일본인들로부터 태어났다. 강의나 교재에서 미국의 사소한 일생생활적 측<ㅉ=202>면들이 끊임없이 다루어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 덕분이다. 언어학습에도 이데올로기가 침투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독자들이라면, 전쟁 전에 사용되던 독본에 나오는 "전진하라, 전진하라, 병사여 전진하라"라는 유명한 문장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언어교육 속에 담겨져 있는 프로파간다는 특별한 미묘함을 지니고 있다. 주의가 온통 언어학습에만 집중되기 때문에 선전메시지의 진실 여부는 전혀 의문시되지 않는다. 영어교재에 미국식 '생활방식'을 소개하는 그 사소한 대화들을 계속 집어넣는 것 자체가 바로 미국을 선전하는 수단인 것이다. 내 주장을 부정할지도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낱말바꾸기 연습'에 나오는 다음의 문장들을 예시해보겠다.

He is inteligent but he has no drive.
He is inteligent but he has no money.
He is handsome but he has no money.
He is handsome but he has no girlfriend.
He is young but he has no girlfriend.
He is young but he has no ambition.

학식, 추진력, 돈, 용모, 여자친구, 젊음, 야망, 이것은 바로 자본주의 미국에서 한 인간의 성공 조건들을 쭉 열거한 것이다. 결국 "소유하라, 소유하라, 비즈니스맨이여 소유하라"라는 것이 이 학습의 주제이다.

영어회화의 세계에서 묘사된 미국의 실체

오해를 피하기 위해 또 미국에 대한 내 생각부터 밝혀야겠다.<ㅉ=203>미국은 매우 흥미로운 나라, 공부할 가치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나라다. 미국은 실험의 나라였다.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새로운 세계에 새로운 종류의 사회, 유럽에서 부정되었던 자유와 정의와 평등과 행복의 제반 조건들을 제공하는 새로운 종류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진지한 시도였다. 이 실험의 기본 원칙들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들은 학식이 높은 지성인들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이 약속들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 미국이 더욱더 진지하게 연구되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회화의 세계에서는 이런 내용이 전혀 없다. 영어회화의 세계에서 묘사되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미국이 아니라 미국인 영어선생들이 희구하는 바의 미국, 그들이 향수 속에서 그려보는 그러한 미국인 것이다. 영어회화의 세계에서는 오늘날 이 나라에 왜 환멸감과 방향상실감이 그렇게도 만연해 있는지를 배울 수 없을 것이다. 왜 밤이 되면 도시의 거리들이 불안의 장소로 변하는지, 왜 사람들이 자기보호를 위해 무기를 지니고 다녀야 하는지, 왜 가장 급속도로 확대되는 정부관청이 경찰서인지, 왜 대다수 미국 노동자들이 그들의 직업을 무미건조한 것으로 느끼는지, 왜 가정주부들 사이에서 알코올중독과 마약복용이 늘어가고 있는지, 왜 많은 미국인들(주로 비백인들)이 희망도 없는 쓰라린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지, 왜 빈민가의 많은 자식들이 문맹의 상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는지, 왜 미국인들의 인종차별적 심성 속에서 일본인들이 백인 쪽으로보다는 유색인 쪽으로 분류되는지, 영어회화의 세계에서는 이 이유들을 결코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더더욱 문제가 되<ㅉ=204>는 것은 영어회화의 세계에서는 미국에 대한 이런 사실들이 그저 언급되지 않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이미지를 진실에서 더욱더 멀리 떨어지도록 만들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혼다 가츠이치(本多勝一)의 《아메리카 합중국》을 읽었던 여러 영어회화반 수강생들이 내게 한 말에 의하면, 그의 묘사는 그들이 배운 미국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그가 틀림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영어회화와 의사소통 문제

이제 남은 문제는 영어회화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느냐에 대한 설명이다. 영어회화를 공부한 사람들은 물론 역으로 가는 길을 묻는다거나 물건 값이 얼마냐고 묻는다거나 하는 데는 아주 능숙하다. 그러나 이런 대화들은 여기서 내가 말하는 그런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다. 영어회화가 어떻게 의사소통을 방해하는가에 대해 딱부러지게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러나 다음의 일화는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부터 약 5년 전 12월말의 밤에 나는 카나자와(金澤)의 한 사찰에서 자정을 맞춰 울려퍼지기 시작한 커다란 종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미 수시간 전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겨울의 첫눈이었다. 새해가 새하얀 눈빛 세계의 모습을 하고 새롭게 다가왔던 것이다. 나는 눈빛 세계에 울려퍼지는 거대한 종소리를 들으면서 나름대로의 감회에 젖어 있었다. 이때였다. 누군가 다가와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실례합니다. 영어로 말씀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느닷없는 불청객에게 왈칵 짜증을 느꼈지만 "물론이죠"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그 판에<ㅉ=205>박은 질문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Where are you from?
How long have you been in Japan?
Are you sightseeing in Kanazawa?
Can you eat Japanese food?
Do you understand what this ceremony is about?

그가 쏘아대는 이런 쓸데없는 질문들 때문에, 나는 은은한 종소리아 차가운 밤공기 내음으로부터 밀려나와 그 뚫을 수 없는 쇄국의 벽 저편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의 이런 질문은 "I have a book"이라는 무의미한 소리와 마찬가지로 이 상황에 전혀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그의 질문은 사실상 건성이랄 수밖에 없었고, 또 나의 대답에 정말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는 나라는 개인을 상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그려져 있는 외국인의 표상에 질문을 던지고 있을 뿐이었다. 또 내게 말을 하고 있는 사람도 실제로는 그 일본인 개인이 아니었다. 그가 암기해서 던지고 있는 질문들은 판에 박은 표준적 형태를 취했으며, 따라서 그 문장들과 그 사람 자신의 성격, 생각, 느낌 사이에 어떤 의미있는 관계가 존재한다고 믿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구체적인 두 인간 사이의 대화라기보다는 오히려 두대의 녹음기가 말을 주고 받는 그러한 것에 가까웠다.

마침내 그가 내 곁을 뜨자, 내 불편한 모습을 짐짓 즐기면서 지켜보고 있던 한 사나이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일본말로 점잖게 이렇게 말했다. "저런 식으로 영어를 하는 일본인들은 사실 일본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 신경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그의 이 지적에 마음이 개운해졌다. 그리고<ㅉ=206>웃음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쇄국의 벽이 다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영어회화의 전형적 특징은 추종적 태도와 판에 박은 어투, 지독히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단조로움, 그리고 화자(話者)의 정체나 개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언어심리학 분야에서 많은 연구를 한 나카오 하지메의 이야기에 의하면, 적어도 극단적인 경우에는 영어회화가 강박성까지 띠게 되는데, 이 강박성은 말하는 사람에게서 자신의 경험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게 하는 실어증과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나카오(中尾)는 이런 이야기 끝에 내게 다음과 같은 폴 굿맨(Paul Goodman)의 한 글귀를 소개해주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정확히, 표준적 어투를 자신의 구체적 상황이나 목적에 따라 변화시키지 못한 채 앵무새처럼 그대로 암송하는 강박당한 인간 역시 실어증 환자이다. 그는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다루듯 언어를 다룬다. 그가 말하는 모든 문장은 사전과 문법책에서 따온 판에 박은 문구들이다. 따라서 만약 상대방의 대답이 그의 예상과는 달리 살아있는 표현으로 다가오거나 또는 그의 충동적 욕구가 너무나 강렬해서 그 딱딱한 언어사용에 질식감을 느낀다면, 그는 스스로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설명에 아주 딱 들어맞는 사람들이 보통 가장 부지런한 영어회화반 수강생들이라는 점이다.

미국식 개성을 끊임없이 강요

영어회화를 하면서 이처럼 극단적으로 소외된 언어사용방식에<ㅉ=207>빠지는 사람들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도 극도의 개성 변화 ― 아마 개성의 상실이라는 표현이 더욱 적합할지도 모른다 ― 를 강요받게 된다. 의기(意氣), 기지(機智), 노여움, 존경, 애정을 나타내는 일본적 표현양식이라든가 일본적 형식 같은 것 역시 영어로는 쉽게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영어회화 교재들은 수강생들에게 체질에도 맞지 않는 '미국식' 개성을 끊임없이 강요한다. 그런 어색한 상태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라는 것이다. 더욱이 이 교재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인간적 개성을 별로 느낄 수 없는 그러한 모습들이다. 그들의 모습은 중산층 백인 미국인들의 캐리커쳐일 뿐이다. 막연하고 딱딱한 인상만 풍기는 이 주인공들은 가족이나 친지에게 마땅히 내보여야 할 친절함도 나타내지 않으며타인들에게 마땅히 내보여야 할 존중심도 나타내지 않는다. 이런 공허한 개성의 소유자들이 영어회화 교재에서 주인공들로 등장하기 때문에, 그속에서는 인간적 교호관계가 차단될 수밖에 없다. 이 점이 바로 영어공부를 가로막는 중요한 장애요인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존심 때문에 영어회화를 기피하게 된다. 이런 문제점은 엄격한 언어훈련을 한다고 할지라도 쉽사리 극복될 수 없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일본이 외국인들을 대하는 데 익숙치 못한 섬나라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결코 아니라, 내가 앞에서 계속 거론해온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어회화라는 하위문화 바깥에서 영어를 배운 사람들 ― 예컨대, 전전(戰前)에 영어를 공부한 사람들이라든가 미국으로 이민해서 생활하는 사람이라든가, 미군기지 같은 데서 일 때문에 영어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익히게 된 노동계급 사<ㅉ=208>람들 ― 이 쓰는 영어는 그 성격이 아주 판이하다. 더욱이, 영어회화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이데올로기를 자각하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면서 영어를 공부한 사람들의 경우는 훨씬더 자연스럽고 원활한 형태의 영어를 사용한다. 영어회화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일수록 문화적 장벽이라는 것을 더욱더 찾아보기 힘들다. 예컨대, 내가 외국인들과의 접촉이 별로 없는 시골에 가보았을 때, 나는 그곳 사람들이 영어회화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더 자연스럽고 개방적이고 당당한 태도로 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서는 늘 내가 그들과 똑같은 사람으로 대해졌다. 예컨대, 내가 일본음식을 잘 먹는다든가 일본말을 술술 한다든가 해도, 그들은 아무런 놀라움도 나타내지 않는다. 나 역시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당연시하기 때문이었다. 노동계급의 사람들 역시 그 대다수가 마찬가지다.

다시 한번 분명히 밝히지만 나는 영어회화의 세계가 유용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동시에 나는 서구의 거친 공격으로부터 자국문화의 보다 섬세한 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강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도 아주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을 방문하는 영어상용권의 많은 방문객들의 경우는 사정이 나와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거의 전적으로 영어를 쓰는 하위문화 속에서 지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하위문화라는 사실도 모르며, 그들이 일본적이라고 생각하는 문화와 개성적 특징과 태도가 기실은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적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이 점이 바로 숙제이다.

<ㅉ=209>아시아와 제3세계의 연대를 위한 언어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서 서구의 방문자들과 의사소통을 더욱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서구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를 척결하면서 영어를 문화지배의 언어로서가 아니라 아시아와 제3세계의 연대를 위한 언어로 변화시키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인들이 느끼는 그 모든 영어에 대한 '특별한 어려움들'이 정말이지 마치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게 될 것이다. 백인 선생들만을 고용하는 외국어학원들에 대해서는 보이콧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영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은 서로들 앞장서서 동남아시아인들과 스터디그룹을 조직하여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와 정치 그리고 아시아적 표현을 반영하는 새로운 아시아판 영어를 창출해야 한다. 그리하여 만약 아시아를 방문하는 미국인들이 새로운 아시아판 영어를 제대로 못 알아듣겠다고 투덜거리게 된다면, 그때는 외국어학원에 나가야 할 사람은 바로 그들이 될 것이다. (천희상 옮김)

* 출전 ― Y. Kurokawa, ed., Essays on Language, Tokyo: Kirihara Shoten (1973)
Posted by 엔디
쥐의 똥구멍을 꿰맨 여공
L'Encyclopedie du savoir relatif et absolu
Bernard Werber,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2001년 6월 15일 초판 1쇄.

꿈의 부족

1970년대에 미국의 두 민족학자가 말레이시아의 깊은 숲 속에서 세노이라는 원시 부족을 발견하였다. 그 부족은 꿈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고 있었다. 그래서 <꿈의 부족>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매일 아침 불가에 둘러앉아 식사를 할 때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오로지 간밤에 꾼 꿈에 관한 것뿐이었다. 만일 어떤 세노이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꿈을 꾸었다면, 그는 꿈속에서 해를 입은 사람에게 반드시 어떤 선물을 주어야만 했다. 또, 꿈에서 남을 때린 사람은 맞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역시 선물을 주어야 했다.

세노이 부족은 현실 세계에서보다 꿈의 세계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아이가 호랑이를 만나 도망치는 꿈을 꾸었다고 얘기하면, 사람들은 아이에게 다음날 밤에 다시 호랑이 꿈을 꾸고 호랑이와 싸워 그것을 죽이라고 시켰다. 노인들은 아이에게 그 방법을 일러 주었다. 아이가 호랑이와 싸워 이기지 못하면 부족 사람들이 모두 아이를 나무랐다.

세노이 부족의 가치 체계에서는, 만일 성 관계를 갖는 꿈을 꾸면 반드시 오르가슴에 오를 때까지 가야 했고, 그런 다음 현실 세계로 돌아와서는 꿈속에서 갈망한 여자나 남자에게 선물로 감사를 표시해야 했다. 악몽 속에서 적의를 품은 상대를 만나면 반드시 이겨야 하고, 나중에는 그 적을 친구로 삼기 위해서 그에게 선물을 요구해야 했다. 세노이 부족 사람들이 가장 꾸고 싶어하는 꿈은 하늘을 나는 꿈이었다. 비상하는 꿈을 꾸었다는 사람이 있으면 온 공동체가 그에게 축하를 보냈다. 또 아이가 처음으로 비상하는 꿈을 꾸는 것은 기독교 세계의 세례와도 같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이에게 선물을 듬뿍 주었고, 어떻게 하면 꿈속에서 미지의 나라로 날아가 신기한 물건들을 가져올 수 있는지 가르쳐 주었다.∥

세노이 부족은 서양의 민족학자들을 매혹시켰다. 그들의 사회에는 폭력도 질병도 없었고, 스트레스와 정복의 야망도 없었다. 노동은 생존에 꼭 필요한 만큼만 하면 되었다. 세노이 부족은 그들이 살고 있던 숲이 개간되면서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그들의 지식을 활용할 수 있다. 먼저 아침마다 간밤의 꿈을 기록한 다음, 거기에 제목을 달고 날짜를 써넣으라. 그러고 나서 세노이 부족처럼 그 꿈에 대해서 아침 식사 시간 같은 때에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라. 그 다음엔, 이른바 항몽학(航夢學)의 기본 법칙들을 적용해서 훨씬 더 멀리 나아가 보자. 이를테면 잠들기 전에 어떤 꿈을 꿀 것인가를 미리 생각하고, 그 생각대로 꿈을 꿀 수 있다록 해보라는 것이다. 산을 솟아오르게 하는 꿈, 하늘의 색깔을 바꾸는 꿈, 낯선 땅을 찾아가는 꿈, 자기가 좋아하는 동물들을 만나는 꿈 등 어느 것이라도 좋다.

꿈에서는 누구나 전능하다. 항몽학의 1차 관문은 비행술이다. 팔을 벌려 활공(滑空)하다가 급강하한 다음 다시 상승해 보라.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항몽학은 점진적인 수련을 요구한다. <비행>시간이 길어지면 자신감이 생기고 미립이 난다. 일반적으로 아이들은 다섯 주만 훈련하면 자기들의 꿈을 다스릴 수 있다. 어른들의 경우에는 때로 여러 달이 걸리기도 한다. (21-22쪽)


엘리우시스 게임

고대 그리스의 도시 이름을 딴 이 게임은 어떤 법칙을 찾아내는 것으로 승부를 겨룬다.

이 놀이에는 적어도 네 사람이 필요하다. 먼저 놀이꾼 가운데 하나가 <신>으로 결정된다. 그는 어떤 법칙을 만들어 내어 종이 조각에 적는다. 그 법칙은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고 <세계의 법칙>으로 명명된다. 그런 다음, 52장[으]로 된 카드 두 벌이 놀이꾼들에게 골고루 배분된다. 한 놀이꾼이 선을 잡고 카드 한 장을 내놓으면서 <세계가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선언한다. 신으로 정해진 사람은 <이 카드는 합격이야> 혹은 <이 카드는 불합격이야>하고 알려준다. 퇴짜 맞은 카드들은 한쪽으로 치워놓고, 합격된 카드들은 한 줄로 나란히 늘어놓는다. 놀이꾼들은 신이 받아들인 일련의 카드들을 관찰하면서 그 선별에 어떤 규칙이 있는지를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누구든 그 법칙을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고 스스로를 <예언자>로 선언한다. 그때부터는 그가 신을 대신해서 카드의 합격 여부를 다른 놀이꾼들에게 알려 준다. 신은 예언자를 감독하고 있다가 예언자의 말이 틀리면 그를 파면한다. 예언자가 10장의 카드에 대해 연속으로 맞는 대답을 제시하면, 그는 자기가 추론한 법칙을 진술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진술이 종이에 써놓은 문장과 일치하는지를 비교한다. 두 가지가 맞아떨어지면 예언자는 승리자가 된다. 그러나 두 진술이 어긋나면, 그는 파면된다. 만일 104장의 카드를 다 내놓았는데도, 예언자가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무도 없거나 예언자로 자처한 사람들이 모두 틀린 진술을 하면, 승리는 신에게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세계의 법칙을 섭리를 너무 복잡하게 만들면 안 된다. 간단하면서도 찾아내기 어려운 규칙을 생각해내야 게임이 재미있다. 예컨대, <9보다 높은 카드와 9이하의 카드를 번갈아 가며 받아준다>는 규칙은 밝혀 내기∥가 아주 어렵다. 당연한 얘기지만 놀이꾼들은 킹이나 퀸 같은 그림 패와 빨간색과 검은색의 교체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 <오로지 빨간색 카드로만 이루어진 세상을 만들되, 열 번째, 스무 번째, 서른 번째로 나온 카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라든가, <하트 7을 제외한 모든 카드를 수용한다>와 같은 규칙은 금지된다. 밝혀 내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에 가서 세계의 법칙이 도저히 밝혀낼 수 없을 만큼 어려웠던 것으로 판명되면, 그 법칙을 만든 신은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놀이에 참가할 자격을 잃게 된다. 따라서 신은 <쉽게 떠올릴 수 없는 단순성>을 겨냥해야 한다. 이 놀이에서 승리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전략은 무엇일까? 설령 파면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되도록 빨리 예언자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유리하다.(105-106쪽)


타인의 영향

1961년에 미국의 아쉬라는 교수는 어떤 실험을 위해 자기 방에 일곱 사람을 모았다. 그는 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자기가 그들을 상대로 지각에 관한 실험을 할 거라고 알려 주었다. 그런데 그 일곱 명 중에서 진짜 실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고, 나머지 여섯 명은 돈∥을 받고 교수를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그 보조자들의 역할은 진짜 피실험자가 실수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 실험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이러했다. 피실험자가 마주보고 있는 벽에 직선 두 개를 그려 놓는다. 직선 하나는 길이가 25센티미터, 다른 하나는 30센티미터이다. 두 직선은 나란하기 때문에 30센티미터가 더 길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 아쉬 교수는 방에 모인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어느 직선이 더 긴가 하고 묻는다. 여섯 명의 보조자들은 한결같이 25센티미터짜리가 더 길다고 대답한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진짜 피실험자에게 묻는다. 그런 식으로 실험을 한 결과, 진짜 피실험자들 중에서 25센티미터 짜리의 직선이 더 길다고 응답하는 경우가 60%에 달하였다. 또, 30센티미터짜리가 더 길다고 응답한 사람들도, 여섯 보조자들이 비웃으며 놀려 대면, 그 중의 30%는 다수의 기세에 눌려 처음의 응답을 번복하였다. 아쉬 교수는 대학생과 교수 1백여 명을 상대로 같은 실험을 했다. 남의 말을 쉽게 믿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본 거였다. 그 결과는 그들 중의 90%가 25센티미터 짜리 직선이 더 길다고 응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 놀라운 것은 피실험자들에[게] 그 실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면서 다른 여섯 명은 교수와 미리 짜고 실험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피실험자들에게 알려 주어도, 그들 중의 10%는 여전히 25센티미터짜리 직선이 더 길다고 고집을 부린다는 거였다. 또 어쩔 수 없이 자기들의 실수를 받아들인 사람들도 남들이 다 그러기에 자기도 따라 했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기보다는, 자기들의 시력이나 관찰 각도를 문제 삼으면서 갖가지 변명을 늘어놓더라는 것이다.(179-180쪽)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방법

스페인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아이디어를 찾거나 복잡한 문제의 해답을 구하고자 할 때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시토 수도회 수사들의 묵상법을 본떠서 달리 자신이 개발한 방법이다.

수프 접시 하나와 작은 숟가락 하나를 갖다 놓고, 큼직한 팔걸이가 달린 의자에 앉는다. 잠귀가 어두운 사람에겐 큰 숟가락이 필요하다. 팔걸이에 팔을 얹은 채 엄지와 중∥지로 숟가락을 살며시 잡고, 그 아랫바닥에 접시를 놓는다.

해결해야 할 문제를 생각하면서 잠을 청한다.

숟가락이 접시 위에 떨어져 갑자기 잠에서 깨어날 때,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문제가 해결된다.(202-203쪽)


마리엔바트 놀이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음식이 바로 나오지 않고 시간이 걸릴 때, 우리는 이다금 따분함을 느낀다. 특히 자기와 마주앉아 있는 사람이 재미난 이야깃거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바로 그러한 때에 식당 종업원이 음식을 가져다 주기를 기다리면서 심심풀이로 할 수 있는 간단한 놀이가 있다. 바로 마리엔바트¹의 게임에서 유래한 놀이이다.

 *¹ 체코 어로는 마리안스케 라츠네. 체코의 서보헤미아 지방에 있는 온천 휴양 도시.∥

성냥개비나 궐련이나 이쑤시개 따위를 식탁 위에 다음과 같이 옆으로 늘어놓는다.

I
III
IIIII
IIIIIII


각자 번갈아 가면서 자기가 원하는 만큼 성냥개비를 집어가되, 반드시 한 줄에서만 집어 가야 한다. 상대에게 마지막 하나 남은 성냥개비를 가져가게 하면 이기는 것이다.

필승 비결 한 가지 상대에게 두 줄의 성냥개비를 남겨 주되, 아래의 예와 같이 양쪽의 개수가 똑같이 되도록 만들어 놓는다.

III
III


(208-209쪽)


웬다트 부족

캐다다의 휴런 족 인디언인 웬다트 부족 사람들이 사냥을 할 때면, 짐승을 죽이기 직전에 자기가 왜 죽이려 하는지를 그 동물에게 설명한다. 그들은 짐승을 잡아먹을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짐승을 죽이지 않으면 자기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큰 소리로 이야기한 다음에 방아쇠를 당긴다. 사냥꾼이 그렇게 짐승의 살과 가죽이 없으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면, 그 짐승이 그것들을 제공하기 위해 너그럽게 자기 목숨을 내놓을 거라고 그들은 믿고 있다.(210-211쪽)


회문

<Dis beau lama, t'as mal au bide?>¹와 <Elu par cette crapule>²은 회문(回文)³이다. 앞뒤 어느 쪽에서 읽어도 같은 말이 된다. 이런 말을 녹음한 다음, 녹음기를 가

 *¹ <어이 잘생긴 라마승, 배 아파?>라는 뜻. 여기서는 의미보다는 <디 볼라마 타 말로비드>라는 소리가 중요함.
 *² <저 천박한 것들에 의해 선출된>이라는 뜻. 소리를 적어 보면, <엘뤼 파르 세트 크라퓔>.
 *³ palindrome. 앞뒤 어느 쪽에서 읽어도 같은 말이 되는 어구.∥

지고 반대 방향으로 재생을 한다 해도, 제 방향일 때와 똑같은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216-217쪽)


본원적인 의사 소통

13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인간이 타고나는 <자연 그대로의> 언어가 어떤 것인지를 알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했다. 그는 아기 여섯 명을 영아실에 넣어 놓고, 유모들에게 아기들을 먹이고 재우고 씻기되 절대로 아기들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그 실험을 통해 아기들이 외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언어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내고 싶어했다. 그는 그 언어가 그리스 어나 라틴 어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엔 오로지 그것들만이 순수하고 본원적인 언어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실험은 황제가 기대한 결과를 보여 주지 않았다. 어떤 언어로든 말을 하기 시작하는 아기가 하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여섯 아기들 모두 날로 쇠약해지다가 결국은 죽고 말았다. 아기들이 생존하는 데는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젖과 잠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커뮤니케이션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다. (217쪽)


세 조약돌 놀이

이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옛 놀이이다. 이 놀이는 몇 명이서 하기를 원하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고, 놀이에 필요한 도구라고 해봐야 조약돌 세 개만 있으면 된다. 조약돌이 없으면, 성냥개비나 동전, 종이 조각 따위를 이용해도 무방하다. 이 놀이의 장점은 무엇보다 규칙이 아주 간단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놀이를 하면 할수록 전술이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포커에서 나쁜 패를 가지고 상대를 속이는 책략이나 체스의 전술에 못잖게 까다로운 점이 있다.

놀이에 참가할 사람들은 각기 조약돌 세 개를 쥐고 손을 등뒤로 감춘다. 0에서 3까지 각자 원하는 개수만큼 조약돌을 오른손에 쥐고, 정해진 신호에 따라 주먹을 앞으로 내민다. 그런 다음, 각자 돌아가면서, 모든 주먹 안에 들어 있는 조약돌을 합하면 모두 몇 개가 될 것인지를 말한다. 가령 두 사람이 노는 경우라면, 0에서 6까지 부를 수 있고, 세 사람이 노는 경우에는 0에서 9까지, 넷이 노는 경우에는 0에서 12까지 부를 수 있다.

한 사람이 어떤 수를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 판이 끝나고 다음 판이 되기 전에는 똑같은 수를 제시할 수 없다. 이를테면, 그것은 주차장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것과 비슷하다. 저마다 돌아가면서 수를 말했으면, 모두가 손을 펴고 조약돌의 수를 더해서 누가 맞혔는지 확인한다. 만일 맞힌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놀이를 다시 시작한다. 반대로, 수를 맞힌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자기의 세 조약∥돌 중에서 하나를 버리고 이제부터는 두 개만 가지고 놀이를 한다. 또 그 사람은 다음 판에서 가장 먼저 수를 부르게 된다.

세 판을 이겨서 조약돌 세 개를 가장 먼저 버리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219-220쪽)


욕설

욕설들의 어원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욕설들의 어원은 종종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결 덜 모욕적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이디오(idiot, 백치) 그리스 어 이디오테스idiotes에서 온 것∥으로 <특별하다>, <남과 다르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여기에서 나온 <이디오티슴idiotisme>이란 말은 어떤 언어의 고유 어법을 가리킨다.

앵베실(imbécile, 바보) 라틴 어 임베킬루스imbecillus에서 온 말. 이는 다시 지팡이를 뜻하는 라틴 어 바킬룸bacillum에서 나온 것. 따라서 <임베킬루스>는 지팡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앵베실이란 지팡이를 사용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걸음걸이가 불안한 사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외부의 도움을 빌지 않는 독립적인 사람이다.

스튀피드(stupide, 멍청이)라 틴 어 스투피두스stupidus에서 온 말. <놀라운 일을 당해서 어리둥절하다>는 뜻. 그러니까 스튀피드란 모든 것에 놀라고 모든 것에 경이로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세파에 닳고닳아서 모든 것에 흥미를 잃은 사람의 반대인 셈이다.(221-222쪽)


인류의 기원에 관한 몇 가지 전설

그리스의 전설
데우칼리온과 피라는 청동 시대의 인류를 몰살시킨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단 두 명의 의인이다. 신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인류를 만드는 의무를 부여한다. 방주를 타고 파르나스 산 정상에 다다른 데우칼리온과 피라는 자기들의 어깨 너머로 돌을 던진다. 그 돌들은 조각상으로 변하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데우칼리온과 피라는 인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노래 중에서 어떤 하나를 선택하라고 명령을 받은 바 있다. 그들은 그리스 영웅들의 이야기를 선택한다. 바로 테세우스와 헤라클레스와 다른 모든 반신∥반인들의 이야기이다. 그러자 인류가 다시 지상에 생겨난다. 데우칼리온과 페[피]라는 죽지만 선택받지 못한 조각상 무리는 부당함을 호소하며 신들에게 재판을 요구한다. 신들은 저울을 이용하여 데우칼리온과 피라가 선택한 이야기의 무게를 달아 본 다음, 두 사람이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판정을 내린다. 그리하여 그리스 영웅들을 노래하는 인류가 지상의 유일한 인류가 된다.

터키의 전설
인류는 검은 산에서 태어났다. 어떤 동굴 속에 사람 형상을 한 구덩이가 파이고 빗물이 흘러 그 구덩이에 진흙이 쌓인다. 진흙은 9개월 동안 햇살을 받으며 그 구덩이에 머문다. 9개월이 지나자 동굴에서 최초의 인간 <아이 아탐>이 나온다.

멕시코의 전설(17세기)
이것은 고대의 신앙과 가톨릭 신앙이 혼합된 전설이다. 하느님이 찰흙을 빚어 사람을 만든 다음, 가마에 넣고 굽는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굽는 바람에 사람이 까맣게 타서 나온다. 그러자 하느님은 작업을 망쳤다고 생각하고 그 생산물을 땅에 던진다. 그것은 아프리카에 떨어진다. 하느님은 일을 포기하지 않고 두 번째 사람을 빚어 가마에 넣고 굽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너무 살짝 굽는 바람에 사람이 아주 하얗게 되어 나온다. 또 실패다. 하느님은 그것을 다시 던져 버린다. 그것은 유럽에 떨어진다. 하느님은 굽는 데에 만전을 기해서 다시 한번 해보기로 한다. 이번에는 딱 알맞게 구워져서 사람이 구릿빛이 되어 나온다. 마침내 성공했다! 하느님은 그 사람을 아주 조심스럽게 아메리카에 내려놓는다. 멕시코 사람들은 그렇게 생겨났다.∥

수 족 인디언의 전설
수 족의 전설에 따르면, 인간은 어떤 토끼가 길을 가다가 주운 핏덩이에서 태어났다. 토끼는 핏덩이를 발견하자마자 다리로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치기 시작한다. 그러자 핏덩이가 창자로 변한다. 토끼는 장난질을 계속함에 따라, 창자에서 심장이 자라고 눈이 생겨나더니 마침내 사내아이 하나가 나타난다. 최초의 인간이 태어난 것이다. 그가 바로 수 족의 조상이다.

아라비아의 전설
아라비아에는 구약 창세기의 변이형이 존재한다. 그곳의 전설에 따르면, 하느님이 사람을 빚는 데 파랑, 검정, 하양, 빨강 등 네 가지 색깔의 흙이 필요했다. 하느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어 그 흙을 가져오게 했다. 가브리엘 천사가 흙을 가져가려고 몸을 숙이자, 땅이 그에게 말을 걸며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하느님이 사람을 빚는 데에 필요한 흙을 가지러 왔다>고 가브리엘 천사가 말하자, 땅이 다시 말했다. <흙을 가져가게 할 수 없다. 인간은 통제할 수가 없을 것이고 나를 파괴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땅의 말을 하느님에게 전했다. 하느님은 미가엘 천사를 대신 보냈다. 그러나 다시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땅은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즈라엘 천사를 보냈다. 죽음의 천사인 아즈라엘은 땅의 주장에 설복당하지 않고 흙을 가져왔다. 결국 인류는 이 죽음의 천사 덕분에 존재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인류는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하느님은 아즈라엘 천사가 가져온 흙으로 아담을 만들었다. 그런데 아담은 40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내 땅바닥에 누워 있기만 했다. 한 천사가 아담이 꼼짝 않고 있는 까닭을 궁금하게 여겼다. 그 천사는 아담의 몸속에∥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볼 양으로 아담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확이냏 본즉, 아담이 움직이지 않는 게 당연했다. 아담의 몸속이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천사는 그 사실을 하느님에게 알렸고, 하느님은 아담에게 영혼을 주기로 했다. 그리하여 아담은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느님은 아담이 땅과 자연과 풀나무와 짐승들을 다스릴 수 있게 하기 위해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권한을 아담에게 주었다. (9세기의 아라비아 사가(史家) 타바리의 기록에 의한 것임.)

몽골의 전설
하느님은 땅에 사람 모양의 구덩이를 판 다음, 천둥비가 내리게 했다. 그러자 진흙이 흘러 사람 모양의 구덩이를 채웠다. 비가 그치고 모든 것이 마르고 나자 구덩이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나바호 족 인디언의 전설
태초에 반인 반수의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리석은 짓을 한 탓에 하늘에서 쫓겨났다. 그들은 세 개의 하늘을 지나 마침내 땅에 다다랐다. 땅의 네 신, 즉 청신(靑神), 백신(白神), 흑신(黑神), 황신(黃神)이 그들을 보러 왔다. 신들은 손짓 발짓으로 그들을 가르치려 했지만, 어리석은 그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신들은 가르치는 것을 포기했다. 다만, 흑신은 그들이 너무 더럽고 역겨운 냄새가 난다는 것을 일깨우면서, <다른 신들은 나흘 후에 다시 올 것이다. 몸을 깨끗이 하고 기다려라. 우리는 인간을 만들기 위한 의식을 거행할 것이다>하고 일러 주었다.

신들은 사슴 가죽과 옥수수 두 개(흰 것 하나, 노란 것 하나) 등 여러 가지 물건을 가져왔다. 그들은 마술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러자 하얀 옥수수에서는 남자가, 노란 옥수수에서는 여자가 나왔다. 두 사람은∥울타리가 쳐진 땅 안으로 들어가 사랑을 나누고 쌍둥이 다섯 쌍을 낳았다. 반음양(半陰陽)인 맏이는 자식을 낳을 수 없었지만, 나머지 자식들은 모두 자식을 낳았고, 다시 그 자식들은 신기루 부족 사람들과 결혼하였다. 그 결합에서 현재의 인류가 태어났다.(251-255쪽)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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