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까르뜨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외쳤을 때, 그의 목소리에는 자못 흥분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는 이성을 가지고 세계의 한 부분을 정확하게 설명했던 것이다. 헬라인처럼 로고스logos를 원했던(고전1:22) 데까르뜨는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거기서 보았던 것이다.

대학 시절, 박이문 선생님의 교양 철학 수업을 들을 때 참 의아했던 일이 있다. 이성의 신뢰자를 자청했던 그 수업의 이공계열 친구들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세계의 모든 데이타를 알게 되면 이후 세계의 진행 방향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목적론téléologie보다는 기계론méchanisme의 입장에 선 셈이었는데... 나를 의아하게 했던 것은 그들이 쓰는 서술어였다. 결국 그들은 객관적인 자료data를 필요로 한다고 하면서도 가장 주관적인 말 '믿습니다'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그들의 '믿음'을 이상하게 여기며 친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관해 대화했다.) 라플라스나 하이젠베르크에 대한 수학사/과학사적 지식은 부족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젊은 이공학도들의 열정이라 볼 수 있겠다.



여기 또다른 열정이 있다: 상상력의 열정이다. "합리주의가 이성에 의해 세계를 분석·파악하는 반면에 낭만주의는 상상력에 의한 세계 자체의 변모를 꾀한다."(23쪽) 상상력과 이미지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뛰어넘어 세계를 변모시키려고 한다. 시인 브르통Breton의 말을 들어보자:

언젠가는 과학들이 처음 보기에는 자신들과 대립적으로 보이는 이 시적 정신에 접근할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지금 그 과학들의 쇠사슬을 끊고, 여러 측면에서 부드럽게 휩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바로 발명이라는 천재이다. (38-39쪽)

그는 일종의 돈오론을 설파하는데, 그에 따르면 "우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항의 접근에서 독특한 빛, 즉 이미지의 빛이 뿜어 나오는 것"(46쪽)이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상상력이 세계를 이해하는 도구가 된다. 가령 바슐라르는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la psychanalyse de la connaissance objective을 방해하는 이미지들을 배제하고 보다 정확한 세계 이해를 위한 책을 쓰다가 거꾸로 그 이미지들에 매혹당한다. 그는 『불의 정신분석』의 서문에서

우리는 불에 대한 직관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무거운 오류들에 억눌리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줄 작정이다. 그 직관이야말로 경험과 측정만이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 직접적인 확신을 형성하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Bachelard, 11)

라고 쓰고 있으면서도 책의 끝부분에서는 그 이미지의 몽상에 빠질 것을 권하기도 한다(59쪽).

한편 곽광수 교수는 『가스통 바슐라르』에서 바슐라르의 『공기와 꿈』은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은 상상력으로 나아가는 통로라고 보고 있기도 한데(곽광수, 49-50), 앞서의 '돈오론'과 연결시킬 수 있다면 이런 상상력은 열반nirvana의 경지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브르통과 바슐라르, 그리고 보들레르와 뒤랑을 읽어나가면서 상상력이라는 것이 삶을 이루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는 알아차리게 된다. 이 책의 매력은 바로 그 희망의 긍정이다. 우리는 상상력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 삶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잠에서 깨자마자 꿈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우리의 상상적 몽상rêverie도 매일 기록한다면 하나의 체계와 세계 이해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것은 또 다른 상상력과 몽상의 열정이다.


Bachelard, Gaston. 1977. 불의 精神分析. 삼중당.
곽광수. 1995. 가스통 바슐라르. 민음사.


프랑스 문화와 상상력
박기현 지음/살림

Posted by 엔디
오래 이 책을 묵혀두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객관성이었다. 동물학자의 인간론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무언가를 기대했던 것이다. '털없는 원숭이'라는 제목은 내게 그런 기대를 품게 했다.

책을 다 읽고난 지금은 무척이나 실망스럽다. 처음 머리말을 읽을 때부터 심상치않았다.

초기의 인류학자들은 우리의 본성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진리를 해명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엉뚱한 곳만 찾아다녔다. 그들이 부지런히 달려간 곳들은, 이를테면 전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성과가 나빠서 거의 소멸해 버린 문화적 오지들이었다. [……] 그러나 그것은 전형적인 털없는 원숭이의 전형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이것은 주요 문명권에 속해 있는 정상적이고 성공적인 개체들―즉, 절대 다수를 대표하는 표본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공통된 행동양식을 조사해야만 알 수 있다. (8쪽)

그리하여 그가 선택한 샘플은 유럽에 사는 '털없는 원숭이'이다.

동물학자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코끼리를 연구할 때 사라져가는 코끼리 집단보다 번성하는 코끼리 집단을 연구하는 것이 일반적일테니까. 하지만 그가 잊고 있는 것은, 오지의 문명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파괴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최소한 그가 유럽의 '털없는 원숭이'가 전형적이고 정상적인 개체라고 말하려면, 그들이 '오지'에서 저지른 만행도 함께 '털없는 원숭이'의 특성으로 언급했어야 한다.

이 책의 결점은 방금 지적한, 얼마간 '도덕적'이고 얼마간 '전제적前提的'인 것 외에 또 있다. 이 책은 과학적 증거들로 가득찬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가설과 가정 투성이이다. 자연 과학에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을 가설로만 채우는 것은 과학자로서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물론 그가 가설을 내세웠을 때, 그에 해당하는 방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털없는 원숭이'가 털을 벗어던진 이유를 가정하면서, 사냥감을 추격할 때 나타나는 체온상승을 막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하는 설명은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개연성 그 뿐이다.

저자는 처음부터 과학 서적을 저술하려는 의도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대중을 상대로 한 서적이지 논문이 아니기 때문일수도 있다. 꼭 시치미를 뚝 떼고 '털없는 원숭이'를 동물로만 바라봐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글 사이 간간이 등장하는 '우리'나 '우리 인간'이라는 용어가 갖는 책 제목과의 간극은 엄청나다. 문맥이 턱 막히는 느낌이다.


털없는 원숭이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문예춘추(네모북)

Posted by 엔디
프랑스말 '쟝르genre'는 본래 다만 '종류'를 뜻하는 말이다. 이를테면 "J'aime ce genre de fille."라고 하면 "나는 이런 유의 여자를 좋아합니다."라는 뜻이다. 프랑스말 '쟝르'가 현재의 "문예 작품의 형태상의 분류"라는 뜻을 가진 국제어, 장르로 더 많이 인식되면서 말의 쓰임은 상당한 정도로 변한 셈이다. 그러나 프라이의 지적대로라면 "장르의 비평이론에 손을 댈 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기고 간 그 이론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음을 발견한다."(64쪽) 우리가 이 지금 '장르의 이론'을 보아야 하는 이유는, 세미나 꺼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르의 이론이 프라이의 비평이론의 씨눈이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의 문장에서 홀로 이름씨固有名詞를 지우고 그 문장을 일반화시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도 주목에 값한다. 유기룡은 국어국문학회가 엮은 『국어국문학과 구미이론』에 실린 「신화문학론의 수용과 그 과제」의 둘째 장章에서 "이 신화적 원형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신화 가운데서도 가장 전형적 신화가 문학의 관례인 장르를 이루게 된다는 관점에서 문학 장르의 이론까지 확대하게 된다."고 적고 있다.

비평을 스스로 선 인문과학의 하나로 세우기 위한 프라이의 의도는 원시적인, 소박한 귀납법에서 이른바 '귀납적 비약'을 거쳐 보다 연역적인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는 데까지 나아간다.(67-69쪽) 그는 가장 연역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쓸모있는 수학을 예로 들어 "수학에서 우리는 세 개의 사과에서부터 '3'으로, 또 직사각인 밭에서부터 '작사각형'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653쪽)이라고 말한다. 하므로 그가 『비평의 해부』의 도식적인 성격을 무릅쓰고 "비평에도 분류가 필요하다"(92쪽)고 말하는 데에까지 이르면 그의 비평이론에서 '장르의 이론'이 얼마나 높은 위치를 갖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이상섭은 『문학 연구의 방법』의 「신화 비평의 방법」의 둘째 마디節에서 "신화 비평은 최대의 중요성을 부여하는 종류의 개념, 즉 쟝르(genre=종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그러나 역사주의에서 말하는 쟝르의 개념과는 무척 다르다. <쏘넷>, <2막극>, <단편소설> 등등 역사적 쟝르는 단지 외형적 관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라고 풀이한다.


프라이는 스스로의 '장르의 이론'을 '수사비평'이라고 이름했다. 그 점 말해주는 바 크다. 그의 장르론은 "기본적인 제시의 방식에 의거하고 있"(470쪽)다. 그러나 네 장르―에포스, 산문(즉, '픽션'), 극, 서정시―를 설명할 때 그는 리듬 분석으로 일관한다. 아마도 리듬이 '제시의 기본형식radical of presentation'과 반드시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 옛 문학과도 얼마쯤 관련되어 있다. 상허尙虛 이태준은 『문장강화』 제1강의 「이미 있어온 문장작법」에서 "활판술이 유치하던 시대에 있어서는, 오늘처럼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 자연히 한 사람이 읽되 소리를 내어 읽어 여러 사람을 들리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소리를 내어 읽자니 문장이 먼저 낭독조로 써지어야 할 필요가 생긴다. […] 쓰는 사람은 내용보다 먼저 문장에 난조투어(亂調套語)를 대구체로 많이 넣어 […] 아뭏든 낭독자의 목청에 흥이 나도록 하기에 주의하였을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3・4, 4・4조 낭독조의 우리 옛 문학이 투박하나마 특수한 한 예例가 되어주는 바, 리듬과 '제시의 기본형식'의 관련성은 시인・지은이作者와 듣는이聽者/聽衆・읽는이讀者의 관계양상에 의지한다고 프라이는 보고 있다. 극의 경우는 "작자가 청중의 눈으로부터 숨어 있"고, 에포스에서는 "작자가 직접 청중과 대면하며, 작중의 가상적인 인물은 숨겨"지고, 씌어진 문학記錄文學/written literature(즉, '픽션')에서는 "작자도 작중 인물도 독자로부터 숨겨져 있"(이상 473쪽)고, 서정시는 "청중이 시인으로부터 숨겨진 경우"(474쪽)라는 식이다. 장르들 사이에서 보이는 중요한 변화는 시인・지은이의 듣는이・읽는이에 대한 태도이다. 그 태도에 따라 에포스는 '계기되풀이recurrence의 리듬', 산문(즉, '픽션')은 '지속continuity의 리듬', 극은 '데코럼걸맞음decorum의 리듬', 서정시는 '연상association의 리듬'으로 갈리는 것이다.

그것은 장르에 따라 글투文體가 흔히 바뀌는 모습에서 잘 볼 수 있다. 뷔퐁Buffon이 "글은 사람이다Le style est l'homme même."라고 말했을 때, 그는 글투의 중요함을 말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프라이는 "장식적인 변론과 설득적인 변론"을 수사修辭가 처음부터 가진 두 뜻이라고 말하면서 "장식적인 수사는 문학 자체―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가설적인 언어구조라고 우리가 일컫는 것―로부터 분리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장식적인 수사야말로 시의 렉시스, 즉 말의 결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라고 높이 추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학적인 문학 연구로서의 비평이 결국은 '장르의 이론'으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장식적) 수사는 리듬과 가장 큰 관계를 갖는데, 그 수사가 문학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면 문학 연구에서 리듬의 연구는 무척 큰 범위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리듬은 장르와 연관되므로 문학 연구는 장르와 관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운문과 산문의 관계에 있어서도 셰익스피어가 하층신분의 등장인물은 산문으로 말하게 하고 상층신분 등장인물은 운문으로 말하게 하고, 상층신분 등장인물이라도 술에 취해 있을 때나 정신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에는 산문으로 말하게 하고 있다고 유종호가 「스타일 분리에서 혼합으로」의 '걸맞음' 항목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시극詩劇이라는 장르와 엮이어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에서의 글투를 중요시하여 리듬을 강조한다고 했을 때, 음악적인 면은 그런대로 풀리겠지만 실제 문학이 갖고 있는 시각적(미술적)인 면은 어떻게 풀이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의 여섯 요소'에서도 영어로는 spectacle로, 우리말로는 장경場景 또는 영상으로 옮겨지는 옵시스ὄφις가 있음에도 프라이는 이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고전시에서는 음의 패턴 즉 음의 장단은 반복적인 요소이며 따라서 시의 멜로스의 일부였는데, 현대에서 그것은 옵시스의 일부가 되고 있다"고 한 번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며, 그나마도 근거는 함께 쓰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또 프라이가 말하고 있는 옵시스의 리듬은 무엇일까.

프라이의 이론이 도식적이라는 것은 그 비판자들은 물론이고 프라이 스스로도 인정한 바이다. 사실 연구를 위해서는 얼마쯤 추상화와 도식화를 피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도식화가 비판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도식에서 벗어난 사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준오는 그의 유고집 『문학사와 장르』의 「원형적 방법과 다원적 체계 시학」의 둘째 장章에서 "토도로프는 프라이의 장르론을 '이론적 장르theoretical genre'라고 규정하고 그의 이론의 연역적 성격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 토도로프에 의하면 장르는 순전히 사변적으로 연역적으로 규정된 이론적 장르의 개념과 구체적 작품을 관찰한 결과로서 귀납적으로 규정되는 '역사적 장르historical genre'라는  두 개념이 있다"는 말로 일면 프라이의 한계를 지적했다.

또한 리듬에 관해서도, 김준오 역시 지적한 바이지만, "운문과 산문의 차이가 그대로 장르의 구분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471쪽)고 말하고 있으면서도 에포스를 결국 운문일 수밖에 없는 '되풀이의 리듬'으로 설명하고 '픽션'을 산문이기가 쉬운 '지속의 리듬/의미의 리듬semantic rhythm'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의 이론의 혼란된 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픽션'이라는 말로 가리키기도 하고 때때로 '기록문학'이라고 일컫기도 하는 "서적을 통해서 독자에게 이야기를 거는 장르"(472쪽)를 '산문'이라고도 바꾸어 쓰고 있음을 보아도 그렇다.


프라이가 도식적이라는 것은, 또다른 뜻으로서 그가 형식주의적이라는 뜻도 될 것 같다. 그가 '서술적 작품'과 '주제적 작품'을 나누고는 있지만 실제로 주제에 대해 깊이 파고드는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문학에서 큰 부분을 갖는 상상력과의 관련성은, 원형상징archetype을 다루는 신화와의 관련성에도 불구하고,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와 그 '장르의 이론'의 논지가 거의 갖지 못하고 있는 부분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만 그런 것일까, 실제로도 그런 것일까. 만약 실제로 그런 것이라면 「도전적 서론」에서 우려한 대로 비평은 문학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네번째 에세이, 「수사비평: 장르의 이론」만을 대상으로 한 글입니다.



덧말> 프라이가 "아리스토텔레스도 『시학』에서 렉시스의 문제에 이르게 될 때, 이 문제는 수사학에 속하는 것이 한층 더 적당하다고 말하고 있다."(467쪽)고 한 부분은 오류인 것 같다. 천병희가 옮긴 『시학』의 6장에서는 "제 3은 사상이다. 사상이란 상황에 따라 해야 할 말과 적당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대사에 관한 한, 이 능력은 정치학과 수사학의 연구분야에 속한다."(1450b)고 하고 있으며 19장에서는 "사상에 관해서는 «수사학»에서 말한 바를 여기서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왜냐하면 사상에 관한 연구는 시학보다는 수사학의 연구분야에 속하기 때문이다."(1456a)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보다 수사학에 적합하다고 말한 것은 렉시스가 아니라 디아노이아이다.

프라이가 464쪽에서 밝힌, 아리스토텔레스가 섬긴 비극의 여섯 요소는 뮈토스, 에토스, 디아노이아, 멜로스, 렉시스lexis/言辭, 옵시스인데 천병희는 이것을 플롯, 성격, 사상, 노래, 조사措辭, 장경으로 옮기고 있다. 보다 확실하게 말하자면, 천병희는 그가 옮긴 『시학』 52쪽 본문 아래의 옮긴이 주註에서 "조사의 원어는 λέξις인데 대부분의 영역본에서는 「diction」으로 번역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구텐베르크 기획(http://www.gutenberg.net/)' 에서 새뮤얼 버틀러Samuel Butler가 영어로 옮긴 Poetics를 찾아봐도 6장의 것은 "Third in order is Thought,--that is, the faculty of saying what is possible and pertinent in given circumstances. In the case of oratory, this is the function of the Political art and of the art of rhetoric"이라고 되어 있고 19장의 것은 "Concerning Thought, we may assume what is said in the Rhetoric, to which inquiry the subject more strictly belongs."라고 되어 있다.


비평의 해부
노스럽 프라이 지음, 임철규 옮김/한길사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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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유종호가 보기에 한국 문학의 가장 큰 문제는 전통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결여의 인식은 단절의 인식에서 온다: "초서로부터 딜런 토머스까지의 앤솔로지에는 「청산별곡」에서 「청록집」까지의 앤솔로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적어도 근본적인 의미의 단절은 없다."(20쪽) 외적인 단절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청록집」의 시인들이 「청산별곡」을 전통으로 보지 않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화전민이 하듯이 전통이라는 새로운 밭을 일구어 나간다.

유종호가 일구려는 화전火田은, 의욕적인 그의 데뷔작에서부터 드러난다. 주로 저쪽의 문학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언어에 대한 자의식의 유곡幽谷"(157쪽)을 살펴본 뒤 그는 그 유곡이 "전통의 문제까지도"(158쪽) 포괄하는 근본적인 문제라고 선언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사조나 발표지를 중심으로 문학을 판단하던 선대의 비평가 그룹에서 벗어나 문학성을 판단하는 비평으로 직진할 수 있었다. 그가 전통의 결여를 뼈아프게 인식했던 이유는 그것이 우리 문학인들에게 "괴로운 자유"(21쪽)를 부과했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백지에서 출발함으로써 말라르메와는 다른 의미의 백지의 공포"를 느끼게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전통의 압력의 부재가 누구나 손쉽게 시를 쓸 수 있다는 무모성을 낳게 했"기 때문이다(22쪽).

5,60년대라고 전통 논의가 없었을 리 없다. 모르긴 몰라도, 서기보다도 단기를 애용했던 당시의 전통 논의는 오히려 더 뜨겁고 열정적이었을 것이다. 일례로 『한국문학사』(1949)를 쓴 조윤제는 그 서문에서 "실로 감개무량한 일이다. 나는 국문학사 강의의 첫 시간을 마치고 내 연구실로 들어가 뜨거운 눈물이 방울방울 내 옷깃에 떨어지고 있는 것을 뒤에 알았다"는 류의 애국애족의 센티멘틀리즘을 선보이면서, 그 센티멘틀을 "국문학사의 사명은 […] 그것이 현대국문학을 위함"이라는 전통-명제로 귀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유종호가 보기에 그런 전통론은 "명확한 개념규정 없이"(244쪽) 함부로 쓰여진 것이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1960년대의 문학의 과제가 소박한 전통개념의 수정과 이에 따른 시야의 확장에 있어야 한다고 믿고 싶다"(245쪽)고 고백한다. 그 수정과 확장은, 짐작 가능하듯이, 언어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한국어의 특색은 토착어와 (일산日産)한자어가 뚜렷이 구분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토착어가 그리는 전근대적 세계와 한자어가 그리는 근대적 모습 역시 뚜렷이 구분된다. 토착어가 가지는 심미적인 특색은 그가 계속해서 강조해오고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는 이를 두고 "손쉬운 토착어의 조직과 세련은 결국 토착어의 전근대적 인간상의 형상에만 안주하게 될 위험성이 많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현대 한국의 진면목을 일실하고 일면적인 한국만을 고집하는 보수에의 길로만 일편단심 걸어가게 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한국 문학의 가능성을 한자어에서 보았던 것 같다: "우리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은 토착어의 자리를 대치하여 가고 있는 생경한 언어군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형상해 가느냐는 점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송욱의 「하여지향何如之鄕」에 대한 그의 평가는 이와 같은 추론 과정에서 얻어진다. 「하여지향」이 주로 한자어를 통해서 씌어진 것을 두고 "우리말의 성격을 암시하는 중요한 사실"(71쪽)이라고 설명하는 그는 「하여지향」 속에서 엘리엇이 말한 '일상생활의 산문'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가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 시의 끈, 시의 존재이유raison d'être는 음악성이다: "그는 시의 음악성으로 산문에의 전락을 예방하고 있습니다."(64쪽) "김구용 씨에게서 보게 되는 산문에의 절대적인 굴종은 시의 영토를 확대해 보자는 의욕이 결국은 시 자체를 부정해 버리고 만 전형적인 예다."(309쪽) 그런 점에서 유종호는 시와 산문의 경계의 흩뜨림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그 사이의 경계를 더욱 분명히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언어의 자의식을 매개로 한 전통론의 하나가 되어있다.

유종호가 시와 산문의 경계로 언급한 음악성의 정체는 「산문정신고」에서 드러나 있다: "운율이나 리듬을 위해서 때로 현실의 사실의 왜곡이나 기피나 방기적放棄的 생략을 불사하는 정신, 바로 여기에 우리가 시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의 요체가 있다. 정말의 산문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현실 관찰의 내용이나 그 전달의 충실을 위해서 운율이나 리듬을 희생시키는 정신을 말한다. 아니 처음부터 운율을 개의치 않는 정신을 말한다."(162쪽) 이것은 시 작품이라는 "어떤 고립된 세계의 독자적 질서를 위해서 현실 사실들의 개입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것이 시요, 사회의 "전면적 진실"을 노리는 것이 산문이라는 설명으로(170-171쪽), 나아가서는 사례로 든 황순원의 시적 소설이 우수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산문정신과는 떨어진 것이라는 선언에까지 이어진다(174-175쪽).

그가 세우려는 전통의 윤곽은 여기서 좀더 분명해진다. 그가 바라는 전통이란, 시와 산문이 '음악성'이라는 기준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정도를 지키면서 균형을 잡아가는 모습이다. 그것은 당시의 "시단에는 시도 산문도 될 수 없는 문자의 집단이 너무나 많이 범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구용의 실험이 갖는 의미에 공감하면서도 그것을 문제삼고, 김승옥의 소설을 상찬하다가도 마지막에서 우려를 표명하고, 서정인의 소설을 상찬하다가도 마지막에서 걱정의 한두 마디를 삽입하는 것이다.

2

청년 유종호의 또다른 빛나는 부분은 그의 휴머니즘의 거부에서 드러난다. 「인간 부재―한국 문학에서의 휴머니즘」, 「오열하는 휴머니즘―한 상투 문구에의 의혹」 등의 두 글은 휴머니즘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있고, 「화해의 거부―하근찬」는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휴머니즘으로 경도되지 않은 하근찬을 상찬하는 글로 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의 휴머니즘은 도식적이고 편견적인 휴머니즘이다. 그는 한국 문학에서의 휴머니즘은 ① 일편단심 선의의 인간 ② 그 배율背律로서의 악한 ③ '돌아온 탕자'의 셋 가운데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고 설명한다.

편견적이고 도식적인 휴머니즘이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조잡한 "예정조화"(420쪽)에 있다. 모든 갈등과 번민은 다가올 "예정조화"를 위한 장치일 뿐인 것이다. 이것은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문학이 사회의 문제를 진지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거짓으로 잠시 해결해버리려는데서 그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동족방뇨凍足放尿식 해결은 사회의 문제가 기실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달려 있다는 식으로 쉽게 전이된다. 이 사이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세계관을 우리는 근대 초부터 일찍이 겪어왔던 것이다: "이광수가 똘스또이를 통해서 휴머니즘을 표방한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그의 똘스또이 이해는 어쨌든 '자기의 곤궁상태의 원인이 자기들 자신 속에 있지 않고 외부의 여러 조건 속에 있다는 생각처럼 인간에게 유해한 것은 없다'는 수긍할 수 없는 똘스또이 만년의 명제를 그대로 채용하고 있음은 사실이다."(362쪽)

이것은 특히 지식인들이 갖는 특질이다. 지식인들이 항시 모델로 삼은 것은 일본이나 일본을 통해 본 서구였기 때문에 그들은 서구와 한국(조선)의 "낙차"가 절망적인 낙차로 보인다(366쪽). 여기서 지도자적인 면모를 띠는 사람은 이광수류의 '민족'론자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효석류의 '초속주의'로 떨어진다는 것이다(362쪽). 이 묘한 새것 콤플렉스는 지식인이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요지이다.

3

그러나 생각해보자. "동양 최고의 고전의 하나인 『시경』이 민요를 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사관仕官으로 실패한 서생이 전란의 시대에 남긴 단장斷腸의 시편들"(456쪽)을 들어 사르트르류의 시 인식을 거부하고 시와 참여의 문제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비교적 뒤의 입장과 비교해보자. 서구의 문학자들을 계속해서 바라보아 얻어낸 '언어의 자각'이나(「언어의 유곡」), "우리의 당장의 의무는 오히려 저쪽에서 시험이 끝난 것이라 할지라도 한번쯤 완벽의 극치까지 가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247쪽)는 식으로 지각생을 자인하면서 전통을 마련하려는 조바심을 내는 모습은 새것 콤플렉스의 다른 모습이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청년 유종호의 전통 확립의 의욕과 새것 콤플렉스의 경계는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혹은 우리는 그것을 4월 혁명 이후의, 유종호의 변모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휴머니즘에 관한 두 편의 글은 1961-62년에 씌어진 것이고 지식인론과 하근찬론은 모두 둘째 책인 『문학과 현실』에 실린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 현재까지의 그가 보여주는 완강한 시의 옹호는 그 같은 가설을 세우기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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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한 것은 하이데거였다. 언어가 먼저인지 '존재'가 먼저인지가 '닭과 달걀의 변증법'과 같은 쓸모없는 싸움이라 일컫더라도, 우리 '근대'사 속에서 등장한 서구어의 번역어들을 보면 하이데거 쪽의 손을 은근히 들어줄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존재'나 '근대'가 바로 그 번역어들이다. '사회,' '개인,' '권리'와 같은 것들이 바로 그 번역어들이다. 이들 번역어들의 특징은 시쳇時體말로 '썰렁하다'는 것이다. 뜻과 맛은 다르지만 '지나치게 학구적이다'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서구어에서 être, moderne, société, individu, droit같은 낱말들은 평소에 자주 쓰이는 말들이다. 대표적으로 '사회'같은 낱말은 우리 현실에서는 거의 글말文語에서만 쓰인다고도 볼 수 있지만, 영어의 society는 입말口語과 글말에 두루 쓰이는 말인 것이다. 2003년 출간된 4판 『롱맨현대영어사전Longman Dictionary of Contemporary English』의 society 항목을 보면 이 낱말이 글말written에서 자주 쓰는 1000낱말 중의 하나인 동시에, 입말spoken에서 자주 쓰는 1000낱말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부터 생긴 것일까. 대개의 번역어들을 '근대' 일본에게 빚지고 있는 우리는 일본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바로 '근대' 일본에서 번역어들이 어떻게 생겨나고 정립되었는가를 추적하는 글이다. 말하자면 번역어의 계보학을 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각 낱말의 세세한 계보는 책 자신에게 맡겨두고 그 맨 아래층에 깔린 저자의 생각을 읽어보면 이렇다. "일반적으로 어떤 번역어가 선택되고 남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문자의 뜻으로 보아 가장 적절한 말이 남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가장 번역어다운 말이 정착한다." (177쪽)

지금은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한겨레 신문 이상수 기자는 『창작과 비평』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말 철학 용어에서 생소한 한자가 지나치게 많아 우리에게 '가짜 어려움'을 주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최근에 '우리말로 철학하기'의 운동이 일고 있는 것도 실로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윤구병 선생 같은 분도 싸르뜨르의 L'Être et le néant의 우리말 제목은 '있음과 없음'이 훨씬 더 적합하고 원어의 뜻에도 가까운데 『존재存在와 무無』로만 옮겨지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고민은 사실 일본에서도 일찍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소개하고 있다. 후쿠자와는 그의 벗과 대화하면서 "자네와 같은 이들은 서양 원서를 번역하는 데 한결같이 네모난 문자(한자를 뜻함)만 사용하려 하는데 그것은 어째서인가?"(45-46쪽)라고 물으며 서양어를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옮겨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했던 것이다.

우리도 '피투성被投性의 존재'같은 말을 버리고 '던져진 존재'로 가려고 하고 있다. 후쿠자와는 후년에 할 수 없이 스스로의 소신을 꺾고 '사람들이 많이 쓰는' 번역으로 전회했다고 하는데 우리의 이번 시도는 어떨까. 언젠가 우리말을 대상으로한 '번역어가 생긴 유래'라는 책이 나오길 기대한다.


번역어 성립 사정
야나부 아키라 지음, 서혜영 옮김/일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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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와의 싸움은 지금의 현실에서 소중하다. 이 시대에도 아직 신비주의가 횡행하고 있는 탓이다. 지금 우리가 가진 신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를테면 '죽음'이 있다. 어느 시인을 두고, 그의 죽음이 그의 시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이나 그가 스스로의 죽음을 시에서 예견했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신비주의다. 그런 식의 신비주의는 문학을 정치하게 보려는 노력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그것은 올바른 문학이론이나 문학비평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현대비평이 혐오해마지 않는 실증주의와 인상주의의 단점만을 수용한 최악의 읽기다.

수잔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은 질병이 가지고 있는 신비주의를 하나하나 검토해본 책이다. 친인척들을 병으로 잃은, 그리고 스스로도 유방암을 비롯한 여러 병들을 겪은 저자는 '병은 고쳐야할 그 무엇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특히 결핵과 암과 관련된 문학작품에 대해서 저자는 깊숙이 고찰하고 있는데, 그 대상이 문학작품이라는 점은 주목에 값한다. 저자에게 있어서 문학은 신성한 어떤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병에 대한 오해만 증폭시켜온 기제일 뿐이다.

실제로, 문학은 오래 전부터 사실과는 구별되는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때문에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왼손잡이가 유전되는 것으로 설정된 과학적 오류라든가, 블레이크가 「갓난이의 기쁨」에서 난 지 이틀밖에 안 된 아이가 미소짓는 것을 묘사한 것이라든가, 윌리엄 골딩이 『파리대왕』에서 근시 안경으로 불을 피우도록 한 것은 전체적인 진실과 대비해서 지극히 사소한 거짓이라 그다지 중요한 사항으로는 여기지 않는 것이 보통인 것이다(유종호 1994, 48-51). 하지만 위의 예들에서는 확실히 그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다 할지라도, 손택의 여러 예들을 우리가 쉽게 멀리 물리칠 수 있을지는 생각해보아야할 일이다.

이를테면, 카프카가 자신의 결핵을 두고 '정신의 병이 넘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을 보자. 카프카의 이런 생각은 지극히 신비주의적이다. 결핵은 결핵일 뿐이지, 문학을 위한 선물도 기제도 아니다. 그에게 결핵이 없었다면 그의 문학은 훨씬 치졸했을 것이라는 인식도 마찬가지로 신비주의다. 카프카의 질병이 그의 문학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은 질병 그 자체가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카프카가 그것을 '정신의 병이 넘친 것'으로 은유화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탄생시킬 수 있었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결국 자신을 치료할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문학의 본질적인 목적과 같은 것과 만나게 된다. 예술은 본래 치료를 위한 행위였던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아름다운 작품이라 해도 그것이 인간의 치료의지를 박탈하고 그것을 신비적인 것이나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진실에 반反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이 과연 진정한 아름다움일까, 하는 점을 깊이 숙고하게 한다.

물론, 이런 이분법적 사고로는 카프카의 문학에 대한 일면적인 평가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카프카의 문학이 일관되게 가지고 있는 질병의 모티프와 그 은유가 사실은 어디에 기대고 있는지를 아는 일은 오히려 그의 떽스뜨texte를 다양하게 볼 수 있기 위한 원동력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를 평가해주어야 할 것이다.

* 유종호(1994),『문학이란 무엇인가』개정판, 민음사.


은유로서의 질병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이후(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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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바뀌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체로 '사회의 변화'가 그 원인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언어학자 울만Ullmann은 말의 의미변화 원인을 언어적, 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원인, 그리고 외래어의 영향에 의한 원인 등 다섯 가지로 나누었지만 그 다섯 원인들이 무자르듯 정확하게 갈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우리네 근대화 과정을 생각하면 일본을 통해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외래어 혹은 외국어의 영향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은 또한 사회적 원인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음이 비슷한 것들은 의미혼동을 겪게도 된다. 역사적 원인이라는 것은 이런 사실들을 통시적으로 보았을 때의 변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근한 예를 찾느라 우리네 근대화 과정을 예로 들었지만, 사실 그만큼 심각한 언어변화를 찾기도 힘들다. 해서 우리말 속에는 일본말들이 상당히 많이 들어왔는데, 지속적인 '국어순화'를 통해 일본말은 많이 사라진 상태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말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말 낱말책에 실린 일본말과 일본식 한자어를 합치면 30%정도가 된다고 한다. 과연 책을 읽다보면 독자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사실들이 많이 있다. "이것도 일본말이었어?"

본전이라는 의미의 '똔똔,' 어린이들이 주로 배우는 놀이인 '셋셋세(세세세),' 감청색이나 짙은남색을 뜻하는 '곤색'은 물론이고 일생一生을 뜻하는 '생애生涯'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힘'의 전남 방언으로 등록되어 있는 '히마리' 등이 모두 일본말이라는 것이다. ('생애'는 물론 정극인의 「상춘곡」에도 등장하지만, 그때의 '생애'는 지금과 같은 일생의 뜻은 전혀 담지 않고 처한 환경 혹은 생활 환경을 뜻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테레비television, 리모콘remote controller, 레미콘ready-mixed-concrete, 도란스trans 등에서 보듯이 본래 일본어가 아닌 것들까지도 우리는 일본식으로 자주 읽는 것이다. 책에는 없지만 밧데리battery와 같은 낱말은, 일본에서 영어를 배워 발음이 어색한 윗 세대들의 표기법을 비웃는, 요즘 젊은 층들도 아무 거리낌없이 쓰는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주장을 완전히 수긍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말이 된 낱말들까지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말의 순수함은 혈통의 순수함만큼이나 검증하거나 보장하기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말이 다른 말들 속으로 들어갈 때는 각자의 자리매김을 다시 하기 때문이다. 복거일은 '사라さら'라는 말을 없앨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 사라는 접시와 완전한 동의어는 아니다. 사라는 큰 접시를 뜻한다. 그래서 그 말을 몰아내면, 다른 말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에 따르는 사회적 비용은 언뜻 보기보다 크다
- 복거일『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문학과지성사, 1998, 132쪽.
이렇듯 개개의 말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는 복 씨가 어떻게 "사회적 비용"이 엄청나게 큰 영어공용어화를 주장하게 되었는지 그 복잡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위의 글만은 우리가 새겨 읽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말 속에서 걸러내야 할 일본말이나 한자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계주라는 말보다는 이어달리기라는 말이 훨씬 좋다. 공사판의 수많은 일본말들은, 최근 '순화'의 노력을 하고 있듯이, 우리말로 바꾸어써도 전혀 지장이 없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모든 일본말을 우리말로 바꾸어써야 한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실질적으로 저자 박숙희씨도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哲學이나 기차汽車와 같은 낱말은 일본식 한자말이지만, 우리말로 정착이 된 것이라고 보고 이는 책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말로 정착되었다'의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가령 '와사비'와 같은 낱말은,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끔 '겨자'라는 말을 쓸 뿐, 우리말 언중들이 다같이 쓰는 말인데 이를 꼭 '고추냉이 양념'이라고 고쳐야 하는가말이다. 더구나 와사비는 초밥 등의 일본음식을 먹을 때 주로 쓰는 말인데말이다.

그 밖에 사소한 문제들도 있다. 이를테면, 이해를 돕기 위해 넣은 예문이 일본말을 쓰면 "불량한 사람"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자네들이 무슨 불량배인가, 좋은 우리말을 놔두고 왜 일본말이야."라는 예문이 가진 문제점은 명확하다. 그건 일제강점기의 낱말인 "불령선인不逞鮮人"의 현대판 민족주의적 번안어이다. 또한 부부인듯한 두 사람이 등장할 때, 남자쪽은 대개 '해체'나 '하오체'를 쓰고 여자쪽은 '해요체'를 쓰는 것도 바른 묘사는 아니다.

반드시 바꿔 써야 할 우리말 속 일본말
박숙희/한울림어린이(한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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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의 사회도 근대 이전의 사회만큼이나 소수자가 억압된 사회이다. 여기서 근대가 시대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그 시기가 스스로를 '이성理性의 시기'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는 이성에 윗점을 찍으면서 그것이 중심이 되면 '인권'과 같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믿는다. 꽁뜨 이후의 이성중심주의 혹은 과학주의는 '사실fait'을 중요시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실증성'을 강조하게 된다.

그것은 역사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실증주의자들은 "역사가들이 도달한 결론은 자연과학자들이 도달한 결론과 마찬가지의 객관성을 지녀야 한다고 믿고 있"어 일종의 '과학적 역사관'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차하순, 62). 물론 학자가 사료를 접했을 때에는 '사료검증'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상식에 속하는 것이고, 김영한 교수도 같은 글에서 "실증사학과 실증주의 사학과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며 "우리나라에서 흔히 '실증사학'이라고 말할 때의 '실증'은 […] 사료와 문헌에 대한 철저한 고증이라는 단순한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채택하는 입장이 '문서사료 중심주의'(우에노 찌즈꼬, 158; 앞으로 쪽수만 기입)인 만큼 '실증사학'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차하순, 61, 276-277).

그러나 실증주의가 붙잡고 있던 '사실'이라는 것이 실상은 유럽·백인·남성 위주로 편향된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글쓴이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역사란 항상 현재로부터의 '재심'의 대상"(우에노, 1)이므로 "일단 '정사(正史)'나 '정설(定說)'이 씌어졌다고 해도 그것으로 마무리되는 일은 없"(우에노, 2)다. 상대주의사관의 입장에서 보면 '원래 있던 그대로'의 역사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록이니 사료니 하는 것도 결국은 생기했던 사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 […] 영상이나 관념을 정신 속에 가졌던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차하순, 127). 바로 이런 점에서 마이너리티의 역사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지점이 상대주의이다. 글쓴이 스스로도 "니힐리즘이라기 보다는 그렇기 때문에 소리 높이는 것을 단념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마이너리티의 권한을 위한 주장"(우에노, x)이라고 역설力說하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마이너리티는, 제목에서 나타내고 있는 바대로, '민족' 혹은 '여성'으로 환원되어버리는 '나'를 체험하는 사람들이다.

마이너리티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했다. 글쓴이는 I장에서 '전후사의 패러다임 전환', '여성사의 패러다임 전환' 등이 절을 따로 마련해 '사학 혁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고찰했다. 또 II장에 와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패러다임들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그 안의 가부장적 요소들을 정밀하게 지적하는 작업을 해냈다. 그러나 이러한 패러다임들을 글쓴이가 살피면서 느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페미니즘은 역사상 국민 국가를 초월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우에노, vi)는 것이었다.

'국민 국가nation state'라는 개념은 역시 근대의 소산으로 '하나의 네이션nation'을 전제하고 있다. 민족이나 국민에 대한 관념은 절대로 마이너리티를 고려하지 않으므로 그 안에서 모든 마이너리티는 전체 속으로 귀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는 본질적으로 가부장제와 그 패러다임을 같이 하고 있으므로 여성의 정체성은 더욱 억압된다. 가령, '위안부' 피해 여성의 개인청구권을 '국가'가 '남편이나 부친'의 역할을 하여 '가해자'와 합의했다는 것을 이유로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우리는 국민 국가가 가부장제의 국가적인 확대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여성'이야말로 근대=시민 사회=국민 국가가 만들어 낸 바로 그 '창작'이라고. '여성의 국민화', 즉 국민 국가에 '여성'으로 '참가'하는 것은 그것이 분리형이든 참가형이든 '여성≠시민'이라는 배리를 짊어진 채 국민 국가와 운명을 함께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우에노, 95)는 주장이나 "개인 청구권 논리는 국가가 개인(의 이해)을 대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국민 국가를 초월하는 성질을 갖는다. 따라서 피해 여성과 그 지원 그룹이 싸워야 할 상대는 동시에 한일 양국의 가부장제이기도 하다"(우에노, 108)는 글쓴이의 지적은 이에 대한 부연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글쓴이가 "근대·가부장제·국민 국가라는 틀 안에서 '남녀 평등'이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우에노, 94)다고 했을 때, 그는 이음동의어를 세 번 이야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민족'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개념이다. 르낭(64-79)은 민족 개념이 종족, 언어, 종교, 이익공동체, 지리의 어느 것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단언하며 조목조목 그 반례를 든다. 르낭은 민족을 만들어진 것이라고 단언한다(81).

저는 조금 전에 '고통을 함께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함께하는 고통은 기쁨보다 훨씬 더 사람을 단결시킵니다. 민족적인 추억이라는 점에서 애도가 승리보다 낫습니다. 애도의 기억들은 의무를 부과하며, 고통의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민족은 이미 치러진 희생과 여전히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희생의 욕구에 의해 구성된 거대한 결속입니다.

비록 르낭은 일단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긍정하고 이를 이용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 개념을 고찰하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민족이라는 개념이 순간순간 변하는 의지와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한 것은 뛰어난 의견이라 할 만하다.

강상중(160-163)도 민족과 에스니시티를 다루는 자리에서 "이들 '인민'의 형태가 지닌 공통점은 '과거의 기억'이라는 정체성"이라고 발언하고 곧 이를 발리바르의 '상상의 기억imaginary memory',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월러스틴의 '과거의 기억', 그리고 사이드의 '심상역사imaginative history'와 연관시킨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민족 혹은 국민의 개념이 게마인샤프트적인 모습을 지닌다는 것이다. 국민 국가는 의심할 수 없는 근대의 산물인데, 그 전제가 되는 네이션은 합리성을 강조하는 근대에 걸맞지 않게 게마인샤프트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근대가 지지하는 이성중심주의 혹은 과학중심주의가 얼마나 허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근거가 될 것이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이데올로기인 한은 절대로 보편적일 수 없다. 민족 혹은 국민에 대한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로 절대로 보편적이지 않다. 이데올로기는 필연적으로 마이너리티를 억압하는 기제로서 작용한다. 임지현(79)은 한영우와 소설가 이인화의 민족주의가 "유신적 민족주의와 에토스를 같이함으로써 박정희의 민중 억압적 조국 근대화론에 대한 역사적 정당화에 기여하고 있다"며 민족주의 담론에서 '민중'이 배제되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민중'이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민족'이라는 개념 아래 복속되는 형태로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의 근대화 시기에 서양인들이 조선 여성을 교육하는 것에 대한 조선 남성의 반발은 우리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김진송(207)은 "「서양인의 조선여자교육방침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라」에서 오천석은 서양인이 조선여자를 교육하는 것에 대하여 '감사感謝의 염念과 수치羞恥의 염念'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가 "'민족의 치욕'이라는 가부장제 패러다임"(우에노, 103)으로 가장 먼저 해석된 것은 텍스트에도 제시된 것이지만, 서양인의 조선여성교육까지도 '수치의 염'을 느껴야 하는 가부장제의 패러다임은 근대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세계관을 주지는 않는다는 뼈저린 인식을 가능하게 해 준다. 물론, 이광수의 『무정』에서 여성해방의 중요한 일단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것도 결국은 "여성을 여성적인 것으로부터 거세시키면서 끈내 개화 사상의 이념 구현의 대행자로서만 장치시키려 들고 있는 것"이며, 역시 남성 입장에서 여성에게 교육을 '주는' 것이다(이재선, 229). 근대화 조선 남성들이 가졌던 이런 의식들은 민족 속에 여성을 귀속시키면서 동시에 혹은 귀속시킴으로써 여성을 배제했던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여성은 '근대주의'를 거부해야 하고 그 소산인 국민 국가를 초월해야 하는 것이다. 글쓴이도 "페미니즘은 국가를 초월해야 하며,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우에노, 93)다고 쓰고 있다. '페미니즘이 국민 국가를 초월해야 한다'는 명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두 국민 국가간의 패러다임이 모두 가부장제 패러다임의 변종이거나 최소한 가부장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던 점에서 명백해졌다. 문제는 '페미니즘이 국민국가를 초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부분인데, 텍스트에서 우리는 희망적인 언설들을 많이 볼 수 있게 된다.

글쓴이는 "더 이상 누구도 "자매 연대의 전지구화Sisterhood is global"라는 낙천적 보편주의 입장에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가진 상징성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페미니즘이 마이너리티로서의 여성에 대한 연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나 억압받는 자 모두를 대변하는 모습으로 확대될 수 있다면 '국민국가의 초월'은 더 이상 구호로서만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여성들은 그 일을 해내고 있다. WAW(Women Against War)는 최근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들』이라는 책을 냈다.(
링크:일다로ildaro) 그들은 "그동안 전쟁이나 평화, 국가에 대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남성의 것이었다. 여성과 소수자의 시선으로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지거나, 흩어져 버렸다."며 여성의 눈으로 전쟁을 바라보는 것의 중요함을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여성'과 '소수자'가 혼용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에코페미니즘은 생태적인 것에 대한 여성적 시선을 드러내고 있다. 나희덕(56)은 "생태적 지향을 지닌 시들조차 계몽적 한계로부터 그다지 자유롭지 못"한 가운데서도 "근대적 의식의 견고한 외피를 뚫고 내려가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새로운 현실을 발굴해낸 여성시인들의 활동은 그 한계를 넘어설 새로운 가능성으로 주목할 만하다"며 에코페미니즘과 관련해 여성생태시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더구나 "'여성'의 해체"를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그 자체로 "'남성'의 해체와도 같은 것이다."(우에노, 96) 왜냐하면 "'위안부' 문제가 여성의 '인권 침해'라는 언설로 구성된다고 한다면 '병사'로서 국가를 위해 살인자가 된 것 또한 남성의 '인권 침해'라고 입론하는 것도 가능"(우에노, 207)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목적은 다만 '남녀동권주의'가 아니라 '나'의 해방이다. 나를 구성하는 것은 "'국민'도 아니고 '개인'도 아니다. '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젠더나 국적, 직업, 지위, 인종, 문화, 에스니시티 등 각양 각색으로 존재하는 관계성의 집합이다. '나'는 그 어느 것도 피할 수 없지만 그 어느 하나만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우에노, 205)

글쓴이는 I장과 II장에서 2차 대전 당시의 일본내 페미니즘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국민 국가와 젠더를 분석하였다. 그리고 III장에 이르러 ''기억'의 정치학'을 주장하면서 실증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과 상대화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글쓴이도 인식하고 있듯이 상대주의는 늘 니힐리즘을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모든 역사가 진실일 수 있다면 모든 역사가 허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다수자의 입장이 항상 더 힘이 셀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 책에서 III장은 가장 큰 공헌이기도 하고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하다.

역사적 상대주의만 가지고는 다수자의 입장이 더 셀 수밖에 없다면, 페미니즘은 "정사(正史)라는 이름의 남성사"(우에노, 185)를 오히려 뒤집어엎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엎는다'고 할 때의 근거는 또다시 모호하다. 이성과 합리성으로 그것이 성공할 수 있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그것은 결국 또다시 근대에의 종속일 수밖에 없다. 국민 국가 안에서의 페미니즘이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이 책 I장의 진단은 정확하지만, 이 책 이후에도 페미니즘은 여전히 딜레마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참고문헌

1. 단행본
강상중. 1997.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이경덕·임성모 옮김. 서울:이산.
김진송. 1999.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 서울:현실문화연구.
르낭, 에르네스트. 2002. 『민족이란 무엇인가』, 신행선 옮김. 서울:책세상.
이재선. 2000. 『한국소설사―근.현대편I』. 서울:민음사.
임지현. 1999.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서울:소나무.
차하순 엮음. 1980. 『史觀이란 무엇인가』. 증보판. 서울:청람.

2. 연속간행물
나희덕. 2000. 「생태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그리고 시」, 『창작과 비평』 110호.

3. Referenced Web Site
일다로



내셔널리즘과 젠더
우에노 치즈코 지음 | 이선이 옮김/박종철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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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재미있는 언어학 강의'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언어학 강의라 하기에 깊이도 없을 뿐더러 재미도 없다. 아니, 본제부터가 잘못되었다. 이 책은 '영화마을'에 있지 않고 그 언저리에 있을 뿐이다.

거의 60편에 달하는 영화 속에서 언어학을 설명하려고 글쓴이는 애쓰고 있지만, 그것이 영화의 내용과 잘 융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는 영화의 제목이나 아주 사소한 것에 집착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로 한두 페이지를 채우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런대로 괜찮은 몇몇 사례들은 있다. 《쥬라기 공원3》에서 공룡들의 의사소통이 우리의 언어와 달리 무한성을 갖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오로지 추측만을 가지고 한 말이라는 결점은 있더라도, 그런대로 봐줄 만한 언어학적 설명이라고 하겠다. 또, 《인랑人狼》, 즉 '인간늑대'와 '늑대인간'의 차이를 말하면서 어느 언어에서나 합성명사에서는 뒤의 것이 본질적인 것임을 일러주는 대목도, 지엽적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런대로 유용한 부분이다. 그리고, 《수색자The searchers》 항목에서 북미 인디언의 언어가 고립어도 첨가어(교착어)도 굴절어도 아닌 '포합어抱合語'라는 것을 알려주는 부분도, 《수색자》라는 영화에 인디언들이 '나온다'는 점 외에는 내용상의 연관점을 찾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나름대로 도움되는 내용이다. (참고로 저자는 포합어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 예는 다음과 같다. 북미 인디언 언어 가운데 하나인 누트카어에서 <inikw-ihl>은 <fire in the house>이고 <inikwihl'minih'isit>는 <several small fires were burning in the house>라고 한다.)

그렇지만, 《반지의 제왕》을 말하면서 '반지'와 '가락지'의 차이를 말한다든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메탈 자켓Full Metal Jacket》 에서 "Sir, yes, sir."라는 말에서 "서, 예, 서"는 경상도 사람이 들으면 "서라, 여기에 서라"로 들을 것이라며, 사투리에 대해서 설명한다든가, 《시월애時越愛》에서 일 마레Il Mare를 보고 '바다'가 모든 언어에서 남성인지를 조사한다든가, 김성수 감독의 《무사》에서 원나라 장수들이 '몽고어'를 쓰지 않는다고, 자기는 중국어도 '몽고어'도 잘 모르므로 확실치는 않지만 '몽고어'를 만약에 썼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질책하는 장면이라든가, 《천국의 아이들》에서 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는 것만을 지적한다든가,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엉뚱하게도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의 차이만을 보고, 미국에 '해리 포터'가 가면 '해리 파러'가 될 것이라고 쓴다든가, 같은 영화에서 'wand'를 '지팡이'라고 옮긴 그 번역어를 문제삼는다든가,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 이미 인터넷을 통해 화제가 된 숟가락과 젓가락의 맞춤법에 대해 말한다든가, 버나드 쇼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상류 사회의 언어(RP:received pronunciation)와 하층어(Cockney)의 차이가 사회언어학적 설명이 되지 못하고, 단순한 차이―가령, lady의 a가 RP에서는 [ei]로, 코크니에서는 [ai]로 발음된다는 정도의 사례중심의 설명―에만 국한되고 있다든가 하는 점은, 도대체 이 책의 어디에 '언어학'이 숨어있는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이 책은 영화소개와 감상, 언어학적 지식이 종횡무진 섞여있지만 전통 언어학의 영역인 음성학·음운론·형태론·통사론·의미론·화용론뿐 아니라 기계번역·통신언어·음성합성·인공지능 등의 문제, 언어의 본질과 사회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것은 경향신문 기사였다. 이 책을 다 읽은 다음에 이 기사에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심히 의심스럽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 '언어학'은 거의 없고, 그 대신 영어학원의 수업시간이나 국정 국어맞춤법 시간에나 어울릴 한담들로 채워져 있는 것 같다.


영화마을 언어학교
강범모 지음/동아시아

Posted by 엔디
상허 선생의『문장강화』는 '文章强化'가 아니라 '文章講話'다. 초판(1940)으로 치면 63년, 증정판增訂版(1947)으로 쳐도 50년은 족히 넘게 오래된 이 책을 다시 읽은 이유는 여러 미디어에서 꽤나 칭찬을 해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기에라도 남겨두는 이유는 충분히 그 칭찬에 값하는 것 같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에 대한 칭찬은 해제를 쓴 임형택 교수가 다 한 셈이니, 무엇보다 이 책은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보여주는 글인 것이다. 부록의 예문 색인만 네 쪽이 되니 그것은 수치로도 증명되지만 어느 쪽이고 책을 펼쳐봐도 예문이 없는 장면은 볼 수 없다시피 하다. 어느 곳은 아주 예문이 왼쪽-오른쪽 두 쪽을 꽉 채우고 있기도 하다. 임 교수는 "예문의 풍부함은 신문학 20년이 도달한 우수한 성과를 집결해놓았다 할 것이다."(4쪽)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하나도 과장이 아니게 생각된다. 알게모르게, 아니 전연 모르면서 근대문학을 아래로 보았던 내게 반성의 기미가 보일 듯도 하다.

이태준은 또한 당시에 이미 언어예술로의 문학에 대해 상당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책이라고는 '책'보다 '冊'자가 더 책 같다."(224쪽)는 부분은 흔히 한자어의 장점으로 꼽히는 함축이나 축약의 쉬움에다 중요한 한 가지 점을 더하고 있다.


내친 김에 기림의『문장론신강文章論新講』도 읽었다. 88년에 심설당에서 아마 초판을 내고 말은 것 같은 기림 전집의 넷째 권이다. 본래는 50년 4월에 낸 글이라, 잠시 멈칫했다. 전쟁 직전에 문장론을 쓰다니.

이태준의 『문장강화』가 '보여주기'식의 글이라면 기림의 『문장론신강』은 설명하기 식이다. 서양 문학과 철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은 기림은 아리스토텔레스, 리처즈, 소쉬르, 가디너 등을 인용하며 거의 일반언어학 수준의 '이론편'과 역시 외국 이론의 수입이 많고, 실무에 닿아있긴 하지만 상허에 비하면 거의 없다시피한 실용성을 지닌 '실천편'을 두고 있었다. '문장론'이라는 제목으로는 꽤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부록으로 실린 「새 문체文體의 갈 길」, 「새 말 만들기」, 「한자어漢字語의 실상」 이 세 편의 글은 '한글오로지쓰기'와 관련해 중요한 부분들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번잡한 대로 이태준의 한자어에 대한 입장과도 함께 읽으면 좋을 글인 것 같다.


이태준은 김두봉 선생의『말본』머리말에서

길이 없기어든 가지야 못하리요마는 그 말미암을 땅이 어데며 본이 없기어든 말이야 못하리요마는, 그 말미암을 바가 무엇이뇨. 이러므로 감에는 반드시 길이 있고, 말에는 반드시 본이 있게 되는 것이로다.

와 같은 책 본문의

쓰임
ㅏ, 몸은 다른 씨 위에 쓰일 때가 있어도 뜻은 반드시 그 아래 어느 씀씨에만 매임
ㅓ, 짓골억과 빛갈억은 흔히 풀이로도 쓰임

을 문제삼으며 "무슨 암호로 쓴 것 같이 보통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26쪽)고 적고 있다.

그는 또 염상섭의 단편 「전화」와 「제야除夜」의 일부를 각각 인용하여 순우리말 중심인 「전화」를 "성의일원적聲意一元的"인 문장이라 하고 한자어가 많이 섞인 「제야」를 "성의이원적聲意二元的"인 문장이라 지칭하면서, 묘사에는 앞의 것이 좋고 학문이나 논설, 이론에는 뒤의 것이 낫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그도 황진이의 유명한 「동지달 기나긴 밤을-」의 "서리서리"와 "굽이굽이"를 각각 "곡곡曲曲"과 "절절折折"로 신자하가 옮겼다는 데 가서는 "능역能譯"이긴 하지만 "'서리서리' '굽이굽이'의 말맛을 도저히 따르지 못하는 것"(63쪽, 강조 인용자)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반면 기림은 기본적으로 '한글 오로지 쓰기'에 상당히 가까운 면을 보이면서도 이른바 '순수주의'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어떤 한자어는 아주 "사생아私生兒"라고 부르고 있기도 하면서, 어떤 고유어는 한자어보다 더 어려운 고유어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 당시를 기준으로 하였으니 지금에 와서는 조금 우스운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생물生物'이나 '무생물無生物'을 '산것' '안산것'이라고 고친 것은 "어린이들에게 쉬운 말로부터 가르치려는 좋은 의도가 보"(203쪽)인다고 하고 '암염岩鹽'을 "거의 우리가 쓰지 않는 일본말 한자어"(204쪽)라고 일컬으며 '돌소금'으로 옮겨놓은 것을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적고 있다. 또 '변성암變成岩'을 '변해 된 바위'라 하고 '火成岩'을 '불에 덴 바위'라고 한 것은 시일이 지나면 순우리말이 한자어를 물리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상사형相似形'을 '닮은꼴'로 바꾸는 것이나 '대각선對角線'을 '맞모금'으로, '반경半徑'을 '반지름'으로 바꾸는 것을 두고는 "우리는 과연 새말을 낡은 한자어보다 더 변호할 정열을 느끼게 될까."(205쪽)라고 묻고 있다.

게다가 '파충류爬蟲類'를 '길동물'로 '포유동물哺乳動物'을 '젖빨이 동물'로 옮기는 데는 동의하면서 '양서류兩棲類'를 '물뭍동물'이라고 멋지게 옮긴 것에는 반대하고 있다.


어쨌든 '우리말 오로지 쓰기'와 '국한문병용론'을 포함하여 두 문장론 책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은 바로 문체론이다. 어문일치語文一致 혹은 언문일치言文一致를 모든 글의 중심으로 하고 딛고 일어설 든든한 반석으로 여기는 것에서는 당대의 문장가들의 무거운 역할들이 눈앞에 보이는 것이다. 특히 이태준은 책의 앞부분에서

"벌써 진달래가 피었구나!"를 지껄이면 말이요 써놓으면 글이다. 본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듯이, 본 대로 생각나는 대로 문자로 쓰면 곧 글이다. (12쪽)

라고 하다가도 책의 마지막에 가서는

언문일치의 문장은 틀림없이 모체문장, 기초문장이다. 민중의 문장이다. 앞으로 어떤 새 문체가 나타나든, 다 이 밭에서 피는 꽃일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언문일치 문장은 민중의 문장이다. 개인의 문장, 즉 스타일은 아니다. 개성의 문장일 수는 없다. 언문일치 그대로는 이 앞으로는 예술가의 문장이기 어려울 것이다. (296쪽)

라고 쓰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물론 기림도 뷔퐁Buffon의 "글은 사람이다Le style est l'homme même."(80쪽, 277쪽)를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도 하다.


문장강화
이태준 지음, 임형택 해제/창비(창작과비평사)

Posted by 엔디
애들러의 『독서의 기술How To Read a Book』은 기술적인 독서법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여기서 독서를 초급 독서, 점검 독서(골라 읽기 혹은 예비독서), 분석 독서, 신토피칼 독서로 나누고, 신토피칼Syn-topical 독서의 유용성을 말하고 있다. 능동적인 면을 갖고 있지만 대개 수동적이기 쉬운 독서활동이 신토피칼 독서에 이르면 거의 능동적인 태도로 바뀐다고 한다.

그의 독서론이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다. 가령, 논문이나 에세이를 하나 쓴다고 할 때, 누구나 그가 말하는 신토피칼 독서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독서는 대개가 그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도 그것을 '신토피칼 독서의 패러독스'라고 하며 인정하고 있다.

신토피칼 독서의 패러독스(역설)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하였다. 즉, 읽어야 할 책을 모르면 신토피칼하게 읽을 수는 없으며, 신토피칼하게 읽지 못한다면 무엇을 읽어야 좋을지를 모른다. 이것은 신토피칼 독서의 근본 문제이다.



덧) '신토피칼 독서'라는 용어는 '주제통합적 독서' 정도로 옮겼으면 좋았을 것이다.


독서의 기술
모티머 J.애들러 외 지음, 민병덕 옮김/범우사

Posted by 엔디
2, 3일간 틈나는 대로 복거일의 『소수를 위한 변명』을 읽었다. 아마 출판해인 1997년 이전에 신문이나 잡지에 게제된 글을 모은 책일 것이고, 그런 글들이 시사時事적인 부분과 관련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현재적으로도 꽤나 중요한 글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각각 독립된 글들이라 중복되는 부분도 얼마간 있었지만 책 전체를 꿰뚫는 생각은 자유주의와 합리성이었다.

모든 분야를 경제적 자유주의와 합리주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일관성이 있고, 끌리기까지 했다. 교장의 권위주의적인 태도가 문제가 되어 기간제 교사가 피해자인 것이 분명한 사건임에도 죽음 앞에서는 시야가 흐릿해지는 사회를 보면서 많이 답답해져 있던 터라 그런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화는 더 잘 이루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거부감이 드는 측면도 있었다. 교육도 수능점수를 토대로한 배급제에서 완전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나, 대통령 후보로 외국인은 어떤가 하는 의견들은 쉽사리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부분이다. 사회의 구성원들을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합리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경제인으로만 구분짓는 것 같아서 조금 기분이 나쁜 면도 있었다.

아마 그의 '영어공용어화'는 그런 의미에서 접근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어를 배우는데 엄청난 비용이 듦에도 그것이 국제사회에서의 통용율은 거의 0%에 가까운 상황이니 경제적인 측면만 생각하면 그것은 낭비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 것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거기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그런 생각이 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합리적인 사고인 이상 비판할 수는 있지만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런 선택은 그가 제목으로 내세운 '소수'를 배제하기 쉽다는 생각은 든다. 어떤 재화가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만 소비된다는 것은 그 재화가 효율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재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적은 것이다. 때문에 수익성만을 가지고 그것을 재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닐까 한다. 물론 그는 그렇다면 그 수요가 적은 재화는 가격을 올리면 된다고 시장의 논리를 말하겠지만, 생필품이 아닌 이상 그 재화가 가격탄력성이 적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정치나 사회준거에 관계된 글들은 무척 재미있게, 탄복하면서 읽었지만 뒤로 갈수록 경제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와 지루하긴 했다. 그것은 내가 경제에 무관심하다기보다는 무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때가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복거일의 『소수를 위한 변명』은 약간의 거부감을 인정하고서라도 좋은 책이고 이 시점에서 꼭 필요한 책이라고 하고 싶다.

소수를 위한 변명
복거일 지음/문학과지성사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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