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담은 위즈덤하우스임프린트 출판사로, 예담판 『어린 왕자』는 디자인 문구류 회사인 아르데코7321이 '어린 왕자'의 상표권 계약을 체결한 후 국내 시장을 거의 독점하려는 의도로 위즈덤하우스와 함께 낸 책이다. (세계일보의 조정진 기자는 예담판이 곧 아르데코7321과 계약 하에 낸 것이라는 점을 모르고 스캔들마케팅이라는 딴소리를 하고 있다.)아르데코7321은 상표권을 취득한 후 각 출판사와 서점에 공문을 보내 서점에 깔린 『어린 왕자』 중 (자신들이 상표권 라이센스를 얻은) 특정 삽화 및 서체를 사용한 책을 모두 서점에서 철수시키라고 고지했고 각 출판사는 반발하고 있는 상태다. 여기에는 저작권 또는 상표권과 관련한 복잡한 문제가 있다.

예담판 『어린 왕자』는 불문학 박사이자 전문 번역가인 강주헌이 번역했다. 강주헌은 이미 2001년에 문예당에서 『어린 왕자』를 번역 출판한 적이 있지만, 이번에 옛 번역본을 상당 부분을 새롭게 손질하여 출간했다. 이 책은 겉표지에 "어린왕자 오리지널 삽화가 들어간 정식 한국어판"이라고 명시하고 있고, 표지 안쪽과 속표지면에 "이 책은 국내 최초로 생텍쥐페리의 원본 삽화 저작권을 갖고 있는 프랑스 Sogex사와의 계약을 통한 정식 한국어판입니다."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전반적으로 예담-아르데코7321판은 기존 번역본과 큰 차이가 없어보이고, 부분적으로 기존 번역본의 오류를 개선한 부분이 있지만, 많은 면에서 기존 번역본에 못 미치는 점이 있다. 그 세목들을 삽화 및 텍스트의 정확성과 문체의 성실성, 그리고 번역의 적확성 면에서 살펴보자. 이를 위해서 원문인 프랑스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의 폴리오Folio 문고판과 전성자가 옮긴 문예출판사판, 김화영이 옮긴 문학동네판, 그리고 지금 문제가 되는 예담-아르데코7321판을 함께 살펴보자. 이해를 돕기 위해 영어판인 하코트-브레이스판도 종종 함께 인용할 것이다. (이 글에 인용된 모든 글은 생떽쥐뻬리의 『어린 왕자』 원텍스트와 그 번역본들이므로, 편의상 인용문의 저자 이름은 생략하고 발행년과 쪽수만 명기한다. 대신 인용문의 끝에 출판사의 이름을 밝힌다. 번역본을 지칭할 때에도 번역자의 이름보다는 출판사의 이름으로 부르기로 한다.)


개악된 삽화와 부정확한 텍스트#

『어린 왕자』의 삽화와 텍스트는 오래도록 어려움을 겪어왔다. 전쟁 중이었던 탓도 있고 해서, 저자인 생떽쥐뻬리가 제대로 살피지 못한 탓일 터다. 그래서 오래도록 잘못된 삽화와 잘못된 텍스트가 실려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 갈리마르판 『어린 왕자Le Petit Prince』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갈리마르 출판사는 1999년 폴리오 문고판으로 이 책을 새로 내면서 삽화와 텍스트에 있었던 그간의 오류를 교정했다. 이러한 저간 사정이 폴리오 문고판 앞머리에 작자의 유족으로 보이는 프레데리끄 다게이Frédéric d'Agay가 쓴 "일러두기avertissement"에 나와 있다. 최근에 국내에서 출간된 『어린 왕자』는 대개 1999년 판본을 반영한 것으로 그런 오류가 대개 눈에 띄지 않지만, 아직까지 개정되지 않은 부분도 많다.

예담-아르데코7321판도 이른바 '정식 계약판'답게 오류가 거의 없다. 하지만, 삽화에서 하나, 텍스트에서 하나의 문제가 눈에 띈다. 삽화의 경우 천문학자가 천체망원경으로 우주를 바라보는 그림에서 별이 빠져 있다는 문제가 있다(1999, 22; 2007a, 17; 2007b, 22: 2008, 23):


한편, 텍스트의 경우 '나'가 소행성의 이름을 짓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예로 든 소행성의 이름이 잘못 기재되어 있다는 문제가 보인다(1999, 22; 2007a, 17; 2007b, 23; 2008, 22):

Il l'appelle par exemple : « l'astéroïde 325 ». (갈리마르)

이를테면, '소혹성 3251호'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문예출판사)

가령, '소혹성 제325호'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문학동네)

천문학자는 […] '소행성 3251호'라는 식으로 번호를 붙인다. (예담-아르데코7321)

갈리마르의 정본에서 분명히 '325호'라고 씌어 있는 것이 예담-아르데코7321판에서는 3251호로 바뀌어 있다. 단순히 별 이름의 사례를 든 것이므로 '325호'라고 하거나 '3251호'라고 하거나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 '소행성 325호'는 별 뜻 없이 나온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가 세 봉우리의 화산과 한 봉오리의 꽃을 남겨두고 자기 별을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이 왕이 살고 있는 '소행성 325호'이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에서 '소행성 325호'는 단지 이름의 사례이거나 혹은 어딘가 있기는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곳이 아니라, 어린 왕자가 직접 다녀간 소설의 한 중요한 무대인 것이다. 참고로, 영어판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에서도 아래와 같이 정확하게 쓰고 있다(1971, 11).

He might call it, for example, "Asteroid 325."

개악된 문체#

예담-아르데코7321판은 비교적 유려한 문체를 사용하고 있다. 흔히 하는 말로 이 책은 '읽히'며, 특히 어린이들을 고려한 듯 비교적 쉬운 말을 사용해서 원문을 옮기려고 한 점이 돋보인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다: 어린 왕자가 사용하는 말이 반말tutoyer이거나 높임말vouvoyer이거나 무조건 높임말로 옮겼다는 점이다.

먼저 어린 왕자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보자(Saint-Exupéry 1999, 15; 2007a, 10; 2007b, 13; 2008, 12):

« S'il vous plaît... dessine-moi un mouton !
-- Hein !
-- Dessine-moi un mouton... » (갈리마르)

"양 한 마리를 그려 줘!"
"뭐라구?"
"양 한 마리를 그려 줘." (문예출판사)

"저기……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응?"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문학동네)

"미안하지만, 양 한 마리만 그려줘!"
"뭐라고?"
"양 한 마리만 그려줘." (예담-아르데코7321)

갈리마르판에서 보듯이 어린 왕자는 '나'에게 반말을 하고 있다. 여기서 dessine-moi라고 하면 분명히 너tu에 대한 명령문으로 반말이며, 높임말로 vous에 대한 명령문이 되기 위해서는 dessinez-moi라고 해야 한다. 문예출판사판이나 문학동네판은 이를 모두 반말로 옮기고 있지만, 예담판만은 이상하게도 높임말을 쓰고 있다. '나'가 아저씨뻘이므로 높임말을 쓸 것 같지만 실제로 어린 왕자는 '나'를 tu라고 부른다(1999, 18; 2007a, 13; 2007b, 15; 2008, 15):

« Tu vois bien... ce n'est pas un mouton, c'est un bélier. Il a des cornes... » (갈리마르)

"…… 이건 양이 아니라 염소잖아. 뿔이 있으니까……." (문예출판사)

"아이 참…… 그건 양이 아니라 염소잖아. 뿔이 달렸으니까……." (문학동네)

"아저씨…… 이건 양이 아니고 염소에요. 뿔이 있잖아요." (예담-아르데코7321)

'Tu vois bien'은 직역하면 '네가 보다시피' 정도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린 왕자는 버릇이 없어서 누구에게나 너tu라고 부르고, 누구에게나 반말tutoyer을 쓰는 것일까? 혹은 어린 왕자는 너무나 어려서 반말과 높임말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께도 동네 아저씨에게도 반말을 쓰던 경험이 있으니까 말이다. 소행성 B612에서 혼자 살던 어린 왕자에게는 누구도 그런 높임말을 가르쳐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어린 왕자는 무척이나 분명하게 너tu라고 부를 사람과 당신vous이라고 부를 사람을 구분하고 있다. 가령 어린 왕자는 소행성 325호에서 만난 왕을 분명히 당신vous이라고 부르고 높임말vouvoyer을 쓰고 있다(1999, 43; 2007a, 42; 2007b, 54; 2008, 56):

« Sire, lui dit-il... je vous demande pardon de vous interroger...
-- Je t'ordonne de m'interroger, se hâta de dire le roi.
-- Sire... sur quoi régnez-vous ?
-- Sur tout, répondit le roi, avec une grande simplicité
-- Sur tout ? » (갈리마르)

"폐하, 한 가지 여쭈어 봐도 좋을까요……."
"네게 명하노니, 질문을 하라."
"폐하…… 폐하는 무엇을 다스리고 계신지요?"
"모든 것을 다스리노라."
퍽이나 간단히 왕이 대답했다.
"모든 것을요?" (문예출판사)

"폐하…… 한 가지 여쭈어봐도 될는지요……"
"짐이 명하노니 질문을 하라." 왕이 서둘러 말했다.
"폐하…… 폐하께서는 무엇을 다스리고 계십니까?"
"모든 것을 다스리노라." 왕은 극히 간단하게 대답했다.
"모든 것을요?" (문학동네)

"폐하,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어린 왕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왕이 대답했다.
"네게 명하노니, 질문을 허락하노라."
"폐하…… 폐하는 무엇을 다스리고 계시나요?"
왕은 아주 간단히 대답했다.
"모든 것!"
"모든 것을요?" (예담-아르데코7321)

첫 줄에서 어린 왕자는 왕을 당신vous이라고 부르고 있고, 셋째 줄에서 당신vous에 대한 명령문인 régnez-vous를 쓰고 있다. 어린 왕자는 왕에게 일관되게 높임말vouvoyer을 쓰고 있다. 어린 왕자는 왕 이외에도 허영쟁이와 지리학자에게는 높임말을 쓰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반말을 쓴다. 특정 사람에게 높임말을 쓰는 것은 (떽스뜨 속에서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들의 나이를 고려한 것일 수도 있고, 그들의 지위를 따진 것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상대방이 바라는 바를 환기시켜 주는 것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왕에게 높임말을 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것이고, 허영쟁이에게는 높임말을 써 주면 좋아할 것이다. 지리학자도 권위의식이 있는 학자로서 높임말에 걸맞는다. 이유야 어쨌든 번역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왜 이들에게 높임말을 쓰는가보다는, 이들에게 높임말을 쓴다는 사실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런데 예담-아르데코7321판은 왕자가 하는 모든 대화를 높임말로 옮기고 있다. 어린이가 어른에게 높임말을 써야 한다는 당위 때문이었는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강주헌이 옮긴 2001년판 『어린 왕자』에서는 반말/높임말의 층위가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으니 이상한 노릇이다. 독자들로서는 어린 왕자가 하는 말의 층위를 잘 전달받을 권리를 잃은 것이다.

한편 예담-아르데코7321판의 또다른 문제점은 원문의 괄호를 모조리 풀어놓았다는 것이다. 종종 번역 과정에서 글의 흐름을 고려해서 괄호를 푸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원문의 모든 괄호를 풀어놓았다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독자들은 괄호를 통해 글에서 좀더 주된 부분과 부차적인 부분을 구분할 수 있으므로 이는 무척 위험한 결정이다. 예를 들어, 생떽쥐뻬리가 레옹 베르뜨에게 바치는 헌사에서도 그런 문제점이 나타난다(1999, 11; 2007a, 5; 2007b, 5; 2008, 5):

Tous les grandes personnes ont d'abord été des enfants. (Mais peu d'entre elles s'en souviennent.) (갈리마르)

어른들은 누구나 다 처음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문예출판사)

어른들은 누구나 다 처음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문학동네)

어른들도 처음에는 모두 어린아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예담-아르데코7321)

여기서 생떽쥐뻬리가 '어른도 다 어린이였다'는 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가 이 책을 레옹 베르뜨라는 어른에게 바치는 것에 대해서 어린이들에게 이해를 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어른도 다 어린아이였다'라는 대전제를 언급함으로써 생떽쥐뻬리는 이 책을 레옹 베르뜨라는 사람의 어린 시절에 바칠 수 있는 면죄부를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는 언급은 역시 부차적인 문제로, '어른도 다 어린아이였다'라는 대전제에 대한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예상되는 반발을 미리 수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문장은 역시 괄호로 묶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담-아르데코7321은 이처럼 괄호를 빼버림으로써 주된 부분과 부차적인 부분을 구분할 수 없도록 하였는데, 그럼으로써 한편으로는 또한 원 문장의 매력과 맛조차도 잃어버린 경우가 많다.

예담-아르데코7321판에서 보이는 세 번째 문제점은 올바르지 않은 강조 부사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너무'라는 말을 한국인들은 너무 많이 쓴다. '너무'는 불어로 trop, 영어로 too much의 뜻을 가진 부사로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 것이다. 최근에 연예인들을 포함한 한국인들이 '너무 감사합니다'처럼 어법에 맞지 않게 자주 쓰면서 퍼졌지만, 이는 분명 틀린 것으로 "정말 감사합니다"처럼 '정말', '매우', 또는 '무척' 등으로 바꾸어 쓰는 것이 맞다. 그런데 예담-아르데코7321판은 이 '너무'라는 부사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2008, 17-18, 28, 44, 82):

나는 어린 왕자에게 내가 날아다닌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너무 자랑스러웠다.

"아! 너무 잘됐다!"

아! 정말이었다. 너무너무 예쁜 꽃이었다.

"할아버지의 별은 너무 아름다워요. 바다도 있나요?"

'너무'의 노출은 매스컴을 통해 잘못 알려진 문법을 그대로 고착화시킨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있다. 이런 문제점은 다른 번역본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번역자뿐 아니라 편집자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한 책이라는 느낌을 준다. 편집자의 실력에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상표권 분쟁과 관련한 특정 시기에 책을 내려는 의도로 무리한 일정을 추진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개악된, 번역의 정확성#

예담-아르데코7321판은 분명히 몇몇 지점에서 기존 번역의 오류를 고치고 있다. 후발 주자인 덕도 있고, 강주헌이라는 옮긴이의 능력 덕도 있을 것이다. 가령 문학동네판에 이르기까지 고쳐지지 않은, 어린 왕자가 본 해넘이의 횟수는 예담-아르데코7321판에서는 정확하게 '개선'된다(1999, 31; 1971, 21; 2007a, 28; 2007b, 35; 2008, 36):

« Un jour, j'ai vu le soleil se coucher quarante-quatre fois! » (갈리마르)

"One day," you said to me, "I saw the sunset forty-four times!" (하코트 브레이스)

"어느 날 나는 해가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보았어!" (문예출판사)

"어느 날은 해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본 적도 있어." (문학동네)

"언젠간 하루에 해가 지는 걸 마흔네 번이나 보았어요!" (예담-아르데코7321)

어린 왕자에게 있어서 해넘이는 무척 중요한 것이고, 떽스뜨에서 어린 왕자가 갖는 감수성의 원천이라고도 볼 수 있는 만큼 이 부분은 상당한 중요성을 갖는다. 어린 왕자는 '나'에게 해지는 걸 보러 가자고 떼를 썼고, 소원을 말해보라는 왕에게는 해더러 지금 당장 지라고 명령해 달라고까지 한다. 가로등 켜는 사람의 별에서 떠나면서, 24시간 동안 1440번이나 해가 지는 축복받은 별를 끝내 잊지 못할 것이라고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생각하기도 한다. 어린 왕자가 해지는 것을 마흔세 번이 아니라 마흔네 번 보았다는 것은 떽스뜨의 다른 곳에서도 나온다.

어쨌든 예담-아르데코판이 삽화나 확정 떽스뜨의 문제 그리고 문체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을 정확하게 옮긴 공로는 실은 번역자 강주헌에게 돌려야 옳다. 강주헌의 옛 번역본, 2001년에 출간된 문예당판 『어린 왕자』에도 그 부분은 원문에 충실하게 실려 있기 때문이다(53):

"어느 날 나는 해가 지는 걸 마흔네 번이나 보았어!"

또, 일부 번역본에서 착오 탓인지 '낮'을 '밤'으로 잘못 옮긴 부분도 예담-아르데코7321판에서는 바르게 옮겨져 있다(1999, 20; 1971, 9; 2007a, 16; 2007b, 19; 2008, 19):

« Ce qui est bien, avec la caisse que tu m'as donnée, c'est que, la nuit, ça lui servira de maison.
-- Bien sûr. Et si tu es gentil, je te donnerai aussi une corde pour l'attacher pendant le jour. Et un piquet. »  (갈리마르)

"The thing that is so good about the box you have given me is that at night he can use it as his house."
"That is so. And if you are good I will give you a string, too, so that you can tie him during the day, and a post to tie him to." (하코트브레이스)

"아저씨가 준 상자가 밤에는 집이 될 테니까 잘 됐어."
"그렇고말고. 그리고 네가 착하게만 하면, 밤에 양을 매 놓을 수 있는 굴레를 줄게. 말뚝도 주고." (문예출판사)

"아저씨가 준 상자가 좋은 건 그게 밤에는 양의 집이 될 수 있다는 거야."
"그렇고말고. 네가 착하게 굴기만 하면 낮에 양을 매어둘 고삐도 그려줄게. 그리고 말뚝도." (문학동네)

"아저씨가 준 상자가 밤에는 양의 집으로 쓰일 테니 참 잘됐어요."
"물론이란다. 그리고 네가 착하게 있으면 낮에 양을 묶어놓을 수 있는 고삐도 만들어줄게. 말뚝도 주고." (예담-아르데코7321)

그러나 보다 많은 부분에서 예담-아르데코7321판본의 오류가 눈에 띈다. 먼저 낱말을 잘못 옮긴 것이 종종 있다. 먼저 시적詩的이라는 낱말을 웬일인지 '상징적'이라고 옮긴 부분이 있다(1999, 52; 1971, 46; 2007a, 54; 2007b, 69; 2008, 72):

C'est amusant, […] C'est assez poétique. (갈리마르)

"It is entertaining," […] "It is rather poetic. […]" (하코트브레이스)

그것 재미있는데. 아주 시적(詩的)이고. (문예출판사)

'재미있는데' […] '상당히 시적인걸. […]' (문학동네)

그거 재미있군. 그런데로 상징적이고 말이야. (예담-아르데코7321)

상징이 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시적이라는 것과 상징적이라는 것은 같은 것이라고 보기가 힘들다. 이 말은 어린 왕자가 실업가의 별을 방문했을 때 했던 생각인데, 그 실업가는 별을 '상징적'으로 소유한다기보다는 '실질적'으로 자신이 소유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실질적인 '믿음'이 어린 왕자의 눈에는 우스꽝스러웠고, 낭만적이었기 때문에 시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어쨌든 이상한 것은 강주헌의 이전 번역(2001, 74)에서는 "제법 시적이고."라고 정확히 옮겨져 있었다는 점이다. 편집자나 최종 결재자의 눈에 '시적'이라는 말이 뜬금없는 것으로 보였던 것일까?

다른 부분을 보자. 배움과 연습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어린 왕자의 원문에 분명히 '배운다'고 되어 있는 부분이 번역문에서는 '연습하다'로 뒤바뀐 부분이 많다(1999, 16; 1971, 4; 2007a, 10; 2007b, 13; 2008, 12):

je n'avais rien appris à dessiner (갈리마르)

I never learned to draw anything (하코트브레이스)

아무것도 그리는 연습을 하지 않았으니까 (문예출판사)

그림 그리는 것을 배워본 일이 없었으니 (문학동네)

그림 그리는 연습을 전혀 하지 않았으니까 (예담-아르데코7321)

불어의 apprendre나 영어의 learn에 '익히다'라는 뜻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연습하다'라고 하려면 exercice/exercise나 practice를 쓰는 것이 보통이다. 게다가 여기에서 '연습하다'가 나오면 '나'가 일관되게 끌어온 그림과 관련된 정체성이 깨지게 된다. '나'는 그림 1호와 2호가 실패한 이후, 결국 비행기 조종하는 법을 "배웠appris"기 때문이다(1999, 14; 2008, 9). 여기서 '나'는 그림을 배우는 '대신' 비행기 조종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문학동네판을 따라 옮기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문장 내지는 구가 몽땅 틀린 경우도 있다. 이 부분은 낱말의 선택이 문제가 아니라 문장 구조를 잘못 파악하거나 문법을 잘 몰라서 잘못 번역하는 경우로, 명백한 잘못이다. 가령 "그림 그리는 것을 배워본 일이 없"는 '나'가 어린 왕자의 초상화를 두고 '최고로 멋진 초상화'라고 지칭하는 이상한 번역을 보자(1999, 16; 1971, 4; 2007a, 10; 2007b, 13; 2008, 12):

Voilà le meilleur portrait que, plus tard, j'ai réussi à faire de lui. (갈리마르)

Here you may see the best portrait that, later, I was able to make of him. (하코트브레이스)

훗날 내가 그를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잘 된 것이 여기 있다. (문예출판사)

여기 있는 그림은 훗날 내가 그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 중에서 가장 잘된 것이다. (문학동네)

훗날 나는 그 아이를 모델로 하여 최고로 멋진 초상화를 그렸다. (예담-아르데코7321)

여기서 '가장 잘 된le meilleur portrait/the best portrait'은 que/that절 이하의 수식어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해당 부분은 '최고로 멋진 초상화'가 아니라 내가 그린 것 중에서 제일 나은 것이란 뜻이 맞다. 특히 '나'는 스스로 그림을 잘 못 그린다고 떽스뜨 전체를 통하여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최고로 멋진 초상화'라는 것이 올바른 번역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떽스뜨 전체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지금 해당 본문만을 솜솜 뜯어보면 '그를 그린 것 중에'라기보다는 '그를 그리는 데 성공한 것 중에' 내지는 '그를 그릴 수 있었던 것 중에' 정도로 해석하게 되는데, 이것은 '나'의 능력상 그를 그리는 것이 무척이나 힘든 일이거나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Voilà"나 "Here you may see"는 모두 상대에게 눈앞의 어떤 그림을 가리키며 하는 말인데, 유독 예담-아르데코7321판에서만 이 부분에서 지칭의 동사들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그런데 역시 여기서도 이상한 부분이 있는데, 강주헌의 옛 번역본에서는 "훗날 내가 그르르 그린 것 중 가장 잘 된 그림이 여기 있다."로 정확하게 옮겨져 있다는 점이다(2001, 38).

마찬가지로 문장 자체를 잘못 옮긴 경우로 어린 왕자의 별 B612에 대한 문장이 있다(1999, 24; 1971, 13-14; 2007a, 19; 2007b, 25; 2008, 25):

Mais si vous leur dites : « La planète d'où il venait est l'astéroïde B 612 », alors elles seront convaincues, et elles vous laisseront tranquille avec leurs questions. (갈리마르)

But if you said to them: "The planet he came from is Asteroid B-612," then they would be convinced, and leave you in peace from their questions. (하코트 브레이스)

그러나 "그가 떠나온 별은 소혹성 B612호입니다"라고 말하면 수긍을 하고 더 이상 질문을 해대며 귀찮게 굴지도 않을 것이다. (문예출판사)

그러나 "어린 왕자가 떠나온 별이 B612호 소혹성입니다"라고 하면 어른들은 수긍이 간다는 듯 더이상 질문을 해대며 귀찮게 굴지 않을 것이다. (문학동네)

그러나 "그는 소행성 B612호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질문으로 조용히 넘어갈 것이다. (예담-아르데코7321)

B612는 어린 왕자가 살던 별의 이름이지만, '나'에 따르면 그 이름은 별로 중요한 것이 못된다. 적어도 어린이들에게는 그렇다. 하지만 어른들에게는 B612라는 그 숫자가 바로 본질적인 부분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여기서 laisser는 '내버려 두다'라는 뜻이고 tranquille은 '조용한'이라는 뜻이므로 이 부분 역시 '질문을 하면서 성가시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맞다. 특히 여기서 어른들은 숫자가 본질이라고 믿기 때문에 B612호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더 이상의 질문을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강주헌의 문예당판은 이 부분을 아래와 같이 바르게 옮겼다(2001, 46):

그러나 "그가 떠나온 별은 소혹성 B612호입니다."라고 말하면 이해를 하고 더 이상 질문을 하면 귀찮게 굴지도 않을 것이다.

또, 불어 특유의 접속법을 잘못 해석하여 완전히 반대의 문장이 된 경우도 있다(1999, 37; 1971, 29; 2007a, 36; 2007b, 46; 2008, 47):

Cette histoire de griffes, qui m'avait tellement agacé, eût dû m'attendrir... (갈리마르)

This tale of claws, which disturbed me so much, should only have filled my heart with tenderness and pity. (하코트브레이스)

그 발톱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실은 가엾게 여겼어야 옳았던 거야……. (문예출판사)

그 발톱 이야기에 너무 약이 올랐었거든. 사실은 가엾게 여겼어야 했는데 말이야……. (문학동네)

그 가시 이야기가 짜증스럽기는 했지만 내게는 측은한 마음을 들게 했던 거예요……. (예담-아르데코7321)

프랑스어 원문의 eût dû의 주어는 3인칭인 '그 발톱 이야기cette histoire de griffes'다. 영어에서 must에 해당하는 devoir 동사의 3인칭 접속법 대과거형이 바로 eût dû이다. 접속법 대과거는 과거 사실에 대한 소원을 말하는 것이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그 발톱 이야기는 […] 나를 측은해지게 했어야 하는데." 정도가 되는 것이다. 즉, 어린 왕자는 그 때 장미꽃의 '발톱 이야기'를 듣고 그다지 측은해하지 않았고, 지금 그것을 후회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담-아르데코7321판은 거꾸로 측은한 마음을 들게 했다고 말한다. 완전히 반대의 번역인 셈이다. 역시 강주헌의 문예당판은 이 부분을 아래와 같이 비교적 정확하게 옮기고 있다(2001, 59):

그 가시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오히려 그것 때문에 그를 더 가엾게 생각해야 했어…….

결론을 대신하여#

완벽하고 꼼꼼하지는 않지만 국내 세 출판사의 번역본을 비교함으로써 예담-아르데코7321판이 일부 개선되었음에도 실상은 개악판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법적 논란이 분분한 상표권을 '무기' 삼아 서점에서 경쟁 제품을 뺀 다음, 자사의 책으로 서점가에 진출하는 행태는 도덕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고, 생떽쥐뻬리와 어린 왕자의 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게다가 독점 시장의 지위를 누릴 때의 특수를 노려서 억지로 일정을 맞추어 책을 내는 행위는 생떽쥐뻬리의 이름값에 먹칠을 하는 행위다. 이를 통해 얻은 수익금으로 어린 왕자 박물관을 낸다 한들, 저작자의 글 하나 제대로 못 내는 출판사-문구점의 입장에서 그것이 홍보효과 이외에 또 무엇이겠나 하고 생각해 보면 씁쓸하기만 하다.


어린 왕자 - 2점
생 텍쥐페리 지음, 강주헌 옮김/예담

참고문헌#

Saint-Exupéry, Antoine de. 1943, 1971. The Little Prince. Orlando:Harcourt Brace & Company
---. 1999. Le Petit Prince. Paris:Gallimard.
---. 2001. 『어린 왕자』. 강주헌 옮김. 서울:문예당.
---. 2007a. 『어린 왕자』. 전성자 옮김. 에버그린북스01. 서울:문예출판사.
---. 2007b. 『어린 왕자』. 김화영 옮김. 파주:문학동네.
---. 2008. 『어린 왕자』. 강주헌 옮김. 서울:예담(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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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얼마 전에 쓴 어린 왕자를 소비하는 사회: 어린 왕자 상표권 분쟁에서 나는 "아르데코7321이나 유족 재단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고 적었다. 나는 정말 몰랐다; 그래서 나는 "기존의 출판사들이 생떽쥐뻬리의 명예를 높였으며, 아르데코7321의 매출도 높여 주었을 것"이라고 너무 순진하게 진단했던 듯하다. 그리고 얼마 전 '새 『어린 왕자』'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계일보의 조정진 기자는 예담(위즈덤하우스)판 『어린 왕자』가 아르데코7321과 관련되어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스캔들마케팅이란 글을 쓴 것 같다. 서점에 가서 책 표지만 한 번 봐도 아르데코7321이라는 글자를 볼 수 있었을 텐데. 2008. 5. 6. 11:48 추가)

아르데코7321 측은 처음부터 기존의 책들을 모두 서점에서 몰아낸 다음, 서점에 자신들의 책을 깔 심산이었던 것 같다. 평소에 저작권이 만료되어 공공영역public domain에 편입된 앨리스나 도로시 등 캐릭터 상품을 팔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아르데코7321의, 문제의 공지사항#

아르데코7321은 최근의 저작권 또는 상표권 논란이 부담스러운 듯, 당사 홈페이지 공지사항에 장문의 글을 남겼다. 그 글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현재 소설’어린왕자’는 퍼블릭도메인으로 어느 누구나 소설’어린왕자’를 활용하여 책을 만들 수 있고 제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단, 글(Text)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소젝스(SOGEX)사는 생택쥐페리의 조카인 올리버 다게이(Oliver d’Agay)와 가족이 운영하고 있는 재단으로서, 영리의 목적보다는 ’어린왕자’가 세상에 소중하게 남아 있기를 바라면서 세계 여러나라에 ’어린왕자 박물관’과 같은 ’가치있는 어린왕자의 보전’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미 프랑스와 일본의 하꼬네에 박물관을 오픈하였고 한국에도 곧 박물관이 들어 올 예정입니다.
위와 같은 가치있는 사업을 위하여 소젝스사에서는 일부 영리목적의 수익사업을 하고 있으며, 소젝스사의 가치있는 사업에 부응하기 위하여 아르데코7321™은 소젝스사와 디자인문구 관련 상품과 서적에 대해서 독점 계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사실 관계는 두 가지다: 먼저 『어린 왕자』의 텍스트 저작권은 만료되었다는 것과, 아르데코7321은 소젝스 사와 디자인문구 관련 상품과 서적에 대한 상표권 관련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어린 왕자』 텍스트와 삽화의 저작권#

『어린 왕자』의 텍스트 저작권이 (한국 내에서) 만료되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생떽쥐뻬리는 1944년 사망했고, 한국의 저작권법은 저작자 사후 50년까지 저작권을 보호한다; 생떽쥐뻬리의 저작물은 한국 내에서 1994년까지 보호받을 수 있다. (실제로는 베른 조약 가입 시기 및 저작권법 개정 역사와 관련하여 한국 내에서는 그보다 훨씬 먼저 저작권이 소멸되었다.)

문제는 아르데코7321이 『어린 왕자』의 텍스트만 저작권이 만료되었고, 그림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저작권법에는 글과 그림(삽화)의 저작권 보호 기간을 다르게 규정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이 주장은 사실 관계를 완전히 오도하는 내용이 된다. 이상한 것은 아르데코7321 측의 주장이 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 회사 홈페이지의 질문답변 게시판에 앨리스나 도로시 등 퍼블릭 도메인으로 장사해놓고 이제 와서 퍼블릭 도메인을 사용한 출판사들의 책을 서점에서 몰아내는 행태를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고, 아르데코7321은 이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이번 조선일보의 보도로 인해서 발단이 된 어린왕자 상표권분쟁은 저작권과는 별도로 다른 내용입니다.
먼저 저작권은 한국이 베른조약에 1996년 부터 가입한 이후부터 국제저작권법의 영향을 받아서 작가 사후 50년동안 저작권을 보호 받는 다는 내용으로 그 이 후 부터는 퍼브릭 도메인으로 분류됩니다.
고객님께서 말씀하시는 앨리스와 도로시, 어린왕자는 모두 저작권으로부터 자유로운 퍼블릭도메인입니다.
그리고 이번 사태는 저작권이 아닌 상표권 분쟁으로 아르데코7321이 프랑스의 소젝스사와 디자인문구 관련제품과 출판에 대해서 독점계약을 한 후 소젝스사의 에이전트인 GLI 건설팅으로 부터 소젝스사의 어린왕자 등록 상표를 부당하게 사용하고 있는 출판사들과 이들의 책을 판매하고 있는 유통사에게 판매를 하지 말아 달라는 편지내용 전달하고 나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글과는 분명히 조금 다른 내용이다. 위에서 인용한 글은 텍스트의 저작권만 만료되었다는 내용이지만, 이 성난 고객에 대한 답변에서 아르데코7321은 이건 저작권 문제가 아니라 상표권 문제이므로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먼저 지난번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아르데코7321은 처음부터 공지사항을 통해 "국내 최초로 저작권 구입과 함께 / 새롭게 태어난 어린왕자를 / 아르데코 7321에서 만나보세요~"라고 홍보했고, 언론에도 비슷한 내용의 보도자료를 돌린 듯 서울경제, 연합뉴스(네이버 링크), 매거진 정글의 보도에서도 상표권이라는 말은 아주 찾아볼 수 없고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했다는 내용만 읽을 수 있다. (아르데코7321은 이후 공지사항에서 '저작권'이라는 말을 '라이센스'라는 낱말로 바꾸었다.)

어린왕자 오리지널 삽화가 들어간 정식 한국어판SAMSUNG Electronics | Anycall SPH-B5000 | Normal program | Average | f2.82 | +0.56EV | No Flash | 2008:05:01 21:51:42
그뿐 아니다. 최근 출간된 예담(위즈덤하우스)·아르데코7321 판 『어린 왕자』는 표지에 "어린왕자 오리지널 삽화가 들어간 정식 한국어판LE CHEF D'ŒUVRE DE SAINT-EXUPERY AVEC SES ILLUSTRATION D'ORIGINE"이라는 표시를 금박을 붙여 표시하고 있다.

또, 표지 안쪽과 속표지면에는 "이 책은 국내 최초로 원본 삽화 저작권을 갖고 있는 / 프랑스 Sogex사와의 계약을 통한 정식 한국어판입니다. / LE PETIT PRINCE TM ⓒ SUCCESSION ANTOINE DE SAINT-EXUPERY 2008"이라고 적고 있다(강조 는 인용자).

이 책은 국내 최초로 원본 삽화 저작권을 갖고 있는 / 프랑스 Sogex사와의 계약을 통한 정식 한국어판입니다.SAMSUNG Electronics | Anycall SPH-B5000 | Normal program | Average | f2.82 | +0.56EV | No Flash | 2008:05:01 21:52:23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아르데코7321 측은 일단 '정식 저작권 계약'이라는 식으로 여론몰이를 해서 자사 상품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저작권법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항의하는 경우에만 사실은 문제가 되는 것이 저작권이 아니라 상표권이라는 것을 밝히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것이 회사의 내부 정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드러난 모양새가 그렇다.

(그게 아니라면 아르데코7321측도 처음에는 문제가 상표권인지 저작권인지 잘 몰랐을 거라는 가정도 해볼 수 있다. 설마 그런 단순한 것을 몰랐을까 싶지만, 그간 아르데코7321측의 행동을 보면 그런 가정도 가능하다. 특히 2007년 10월 이후 거의 6개월이나 '저작권'이라고 표시되어 있던 공지사항의 '저작권'이란 낱말을 4월달에 문제가 불거지자 '라이센스'란 낱말로 바꾼 점이나, '저작권' 관련 이슈로 다룬 기사들을 해당 공지사항 아래 링크한 점, 한번 출간되면 돌이킬 수 없는 책에까지 '상표권' 또는 '라이센스'가 아니라 '저작권'이라는 말을 적은 점 등을 보면 특히 그렇다.)

아르데코7321은 한 술 더 떠서 어린왕자를 법정에 세우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글을 공지사항에 올렸다. 여기서 아르데코7321은 자신과 소젝스사의 정당성을 한번 더 주장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국내 출판사들을 법질서를 어지럽힌 당사자들로 몰아붙인다:

세계적으로 어린왕자 도서를 살펴보면 미국 2개(Harcourt , Gallimard), 유럽 1개(Gallimard), 대만 1개, 일본 20개의 출판사에서 어린왕자 도서를 출판하고 있습니다. 어린왕자 책이 한국에서 600여 개 출판사에서 출간했다고 하는데 전세계 출판사를 모두 합쳐도 어린왕자를 출간한 한국의 출판사의 수에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남의 것 이라고 함부로 훼손, 도용하고 또, 법질서를 무시하고 ’그 동안 저작권을 한번도 내지 않고 사용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주욱 사용해도 문제가 없다’라고 생때를 쓰면서 한국의 특허청을 상대로 상표등록 취하소송을 하겠다고 하는 소수의 대형 출판사의 행태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아르데코7321은 사실 관계를 호도한다. 한국의 출판사들, 특히 '소수의 대형 출판사'들은 『어린 왕자』와 관련하 저작권법을 위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출판사들이 이익만을 바라보고 그간 중복 출판 관행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남의 것 이라고 함부로 훼손, 도용하고 또, 법질서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아르데코7321은 긴 잘못을 비로소 척결한 혁명군처럼 정의를 전유해버린다. 그리고 그 다음은?

책 출간을 통한 이윤 창출이다.

아르데코7321의 『어린 왕자』 서적 상표권 계약#

맨 위에 인용한 글에서 아르데코7321은 처음부터 서적에 대한 상표권 계약을 맺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무척 중요한 문제다. 이 회사가 처음 상표권 계약을 맺을 당시부터 서점가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책을 출간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상표권은 동일 범주 내의 상품에만 적용된다. 즉, 나이키라는 상표가 신발이나 스포츠용품 관련 상표로 등록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이키라는 이름의 스넥이나 아이스크림을 출시할 때에는 아무런 법적 영향력이 없다는 뜻이다. 만약 아르데코7321이 서적 관련 상표권 계약을 맺지 않고 문구류 관련 상표권만 맺었다면, 대행사에 요청해서 서점에서 기출간된 책을 빼달라고 요청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아르데코7321은 앞으로 자신들이 책을 출간하겠다는 내용은 빼놓고, 일단 기존 출판사들의 책을 정리하고 기존 출판사들을 비난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시장이 혼란한 것을 틈타 새 책을 내놓았다. '새 『어린 왕자』'의 번역자인 강주헌이 「옮긴이의 말」을 쓴 것이 2008년 2월이고, 그 글에서 『어린 왕자』 번역 부탁을 받은 것은 "올해 초"라고 말하고 있다. 아르데코7321의 공지사항에 따르면 아르데코7321측이 계약을 맺은 것이 2007년 10월이므로, 예담(위즈덤하우스)과 출간 관련 계약을 따로 맺은 시간을 고려하면 대략 시간이 맞아떨어진다.

실업가와 어린 왕자#

어린 왕자가 만난 실업가
『어린 왕자』의 지적재산권 분쟁을 바라보면서 생각난 것은 어린 왕자가 만난 실업가였다. 불어에서도 마땅한 말이 없어 생떽쥐뻬리도 businessman이라고 쓸 수밖에 없었던 이 지극히 미국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Saint-Exupéry 2007, 53; Saint-Exupéry 1999, 52):

"물론이지. 임자 없는 다이아몬드는 그걸 발견한 사람의 소유가 되는 거지. 임자가 없는 섬을 네가 발견하면 그건 네 소유가 되는 거고. 네가 어떤 좋은 생각을 제일 먼저 해냈으면 특허를 받아야 해. 그럼 그것이 네 소유가 되는 거야. 그래서 나는 별들을 소유하고 있는 거야. 나보다 먼저 그것들을 소유할 생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

Bien sûr. Quand tu trouves un diamant qui n'est à personne, il est à toi. Quand tu trouve une île qui n'est à personne, elle est à toi. Quand tu as une idée le premier, tu la fais breveter : elle est à toi. Et moi je possède les étoile, puisque jamais personne avant moi n'a songé à les posséder.

물론, 이 구절이 생떽쥐뻬리 유족들이 모든 저작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럴 가능성이 없을 뿐더러 옳은 일도 아니다. 그러나 생떽쥐뻬리의 어린 왕자가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이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어린 왕자가 소유하는 것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별을 소유한다는 실업가의 말을 듣고 그것이 '아주 시적assez poétique'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곧 무언가를 소유하려면 그 대상에게 유익해야être utile 한다고 자신만의 '소유 철학'을 편다(Saint-Exupéry 2007, 54):

"나는 말이야, 꽃을 한 송이 소유하고 있는데 매일 물을 줘. 세 개의 화산도 소유하고 있어서 매주 그을음을 청소해 주곤 하지. 불이 꺼진 화산도 청소해 주니까 세 개란 말이야.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거든. 내가 그들을 소유하는 건 내 화산들에게나 내 꽃에게 유익한 일이야. 하지만 아저씨는 별들에게 유익하지 않잖아……."

어린 왕자가 다시 돌아와 이 땅에 선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생떽쥐뻬리는 분명히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어른들은 참 이상하군."

어린왕자 - 10점
생 텍쥐페리 지음, 전성자 옮김/문예출판사

어린 왕자 - 10점
생 텍쥐페리 지음, 김화영 옮김/문학동네

어린 왕자 - 2점
생 텍쥐페리 지음, 강주헌 옮김/예담


참고문헌#

Saint-Exupéry, Antoine de. 1999. Le Petit Prince. Paris:Édition Gallimard.
------, 2007. 『어린 왕자』. 에버그린북스02. 전성자 옮김. 서울: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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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서점에서 한동안 『어린 왕자』를 못 보게 될 거라고 한다. 이유인즉, 생떽쥐뻬리가 그린 그림 몇 장과 '어린 왕자'라는 한국어 제호, 그리고 'Le Petit Prince'라는 프랑스어 제호가 상표권 등록이 되어 있는데, 상표권 소유자인 SOGEX(생떽쥐뻬리 유족 재단)가 이를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그림과 제호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가장 먼저 이루어진 상표권 등록은 1996년부터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제서야 상표권을 문제 삼은 것은 최근 '아르데코7321'이라는 국내 업체가 해당 상표권 관련 독점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르데코7321은 각종 공예품과 공책, 메모장 등을 만드는 회사다. 최근 주변에 '어린 왕자'가 들어간 노트나 연습장을 쓰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는데, 모두 이 회사의 것이었다. 해당 제품은 교보문고, YES24, 알라딘 등 유수 인터넷 서점에 모두 상위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아르데코7321이 상표권 관련 계약을 체결한 것은 지난 10월인 모양으로, 이 회사는 2007년 10월 10일 당사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통해 '저작권 계약' 사실을 다음과 같이 알렸다(현재는 '저작권'이라는 낱말을 모두 '라이센스'라는 낱말로 바꾼 상태다. 2008. 5. 4. 20:53 추가):

2007년 10월.
잊고 지내온 중요한 진실들을 깨워주는
순수한 어린왕자가 드디어 7321과 만났습니다.

ART DECO 7321이 어린왕자의 프랑스 정식 저작권 소유자인
SOGEX의 공식 라이센싱 에이전트(GLI컨설팅)를 통해
1년여의 긴 협의 끝에 계약을 체결,
국내 최초로 어린왕자 원화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10월 5일에는 작은 간담회를 개최하여
어린왕자와 7321의 시작을 알렸답니다.
국내 최초로 저작권 구입과 함께
새롭게 태어난 어린왕자를
아르데코 7321에서 만나보세요~

저작권인가 상표권인가#

앞서 언급한 조선일보 기사는 해당 사안이 저작권 문제가 아니라 상표권 문제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런데, 아르데코7321의 홈페이지에는 이상하게도 자신들이 "저작권 구입"을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당사의 홈페이지에 링크된 서울경제, 연합뉴스(네이버 링크), 매거진 정글의 기사에서도 역시 아르데코7321이 '저작권 구입'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기사들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쓰여진 ‘어린왕자’ 디자인은 저작권 계약 없이 불법으로 쓰여졌다."거나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소개된 <어린왕자>가 그 어느 것 하나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은 불법제품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라고 쓰기도 서슴지 않는다. 해당 언론사들이 모두 아르데코7321의 보도자료를 받아서 기사를 썼을 것을 고려하면 아르데코7321의 주장은 조금 이상하다. 어쩌면 저작권인지 상표권인지 잘 구분하지 못한 것은 아르데코7321이 아닐까?

하지만, 어린 왕자의 경우 저작권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린 왕자』 저작권의 문제#

먼저 조금 특이한 프랑스의 저작권 보호 기간을 살펴보자: 프랑스의 저작권법(영어)상 저작재산권의 만료 기한은 일반적으로 저작자 사후 70년이며, 1차 또는 2차 세계대전 중에 발표된 저작물의 경우 그 기한이 연장되는 것이었다. 이른바 전쟁 정회prorogation de guerre라고 부르는 것으로 1차 대전 중인 1914년 8월 2일에서 1921년 1월 1일 사이에 발표되었으며 1919년 2월 3일까지 저작권 만료domaine publique가 되지 않았다면 14년 272일이 연장되고, 1939년 9월 3일에서 1948년 1월 1일 사이에 발표되었으며 1941년 8월 13일까지 저작권 만료가 되지 않았으면 8년 120일이 연장되었다. 또 프랑스를 위해 죽은 저자를 위한 특별 정회라는 제도가 있어서 저작자가 '프랑스를 위해 죽었다mort pour la France'면 추가로en outre 30년이 연장된다. (다만 전쟁 정회 제도는 2007년 2월 27일 프랑스 최고법원인 취소법원la Court de Cassation의 결정으로 사라졌다.)

어쨌든 앙뚜안 드 생떽쥐뻬리의 경우에는 전쟁 정회와 특별 정회 두 가지 모두에 걸린다; 생떽쥐뻬리의 '어린 왕자'가 처음 출간된 것은 1943년 미국에서였고, 그가 비록 비시 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공군 정찰 임무를 수행하다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사라진 전쟁 정회 제도를 빼고 보더라도 프랑스법상 생떽쥐뻬리의 작품은 저자의 사후 100년(70년+30년)이 된다.

그러나 한국법상으로는 저작자 사후 50년까지밖에 보호하지 않기 때문에 저작권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 더구나 50년은 베른 협약의 원칙에도 부합한다. 그런데, 문제는 생떽쥐뻬리의 사망한 해를 어떻게 추정하느냐 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생떽쥐뻬리는 1944년 실종되었다. 비록 "내가 그의 정찰기를 요격했다"는 독일군 전투기 조종사의 증언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가 사망한 해를 확정하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그렇지만 1944년에 실종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돌아오지 않았음을 감안해 볼 때 길게 잡더라도 생떽쥐뻬리 작품의 저작권은 한국 내에서는 소멸되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상표권 제도의 목적과 상표권의 존속기간#

결국 문제는 다시 상표권으로 돌아온다. 상표권이란 "일정한 사업자가 자기의 상품을 타사업자의 상품과 구별하기 위하여 문자·도형·기호·색채 등을 결합하여 만든 상징을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권리"이다(이한상 2001, 30). 상표권의 목적은 상표법 제1조에 드러나 있다:

이 법은 상표를 보호함으로써 상표사용자의 업무상의 신용유지를 도모하여 산업발전에 이바지함과 아울러 수요자의 이익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보면 먼저 "상표사용자의 업무상의 신용유지", 그리고 그 다음으로 "수요자의 이익 보호"이다. 흔히 '짜가'나 '짝퉁'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가령 '나이키'라는 회사의 정품이 아니라 '짜가'나 '짝퉁'이 시장에 유통되면 먼저 '나이키' 회사가 손해를 보는 것이 되고, 그 다음으로는 그 '짜가'나 '짝퉁'을 정품으로 알고 산 소비자 역시 손해를 보게 된다. 상표권을 법으로 보호하는 것은 그 두 가지 손해를 모두 막기 위해서다.

한편, 상표권은 저작권과 달라서 존속기간은 10년이지만, 존속기간갱신등록출원에 의해 10년간씩 갱신할 수 있다(상표법 42조). 상표권은  상표권자가 사망한 날부터 3년 이내에 상속인이 상표권의 이전등록을 하지 않으면 소멸된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상표권은 원칙적으로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상표권이 영원해야 하는 것은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래야 사업자의 권리와 수요자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목적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귀뚜라미'라는 보일러 회사가 있는데 일정 시기 이후에는 상표권이 소멸되어 아무 보일러 회사나 다 '귀뚜라미'라는 상표를 사용할 수 있다면, '귀뚜라미'사도 손해를 볼 것이고 '귀뚜라미'사의 제품인 줄 알고 보일러를 산 수요자도 피해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표권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상표권자가 원하는 대로 영원히 보장해주는 것이 맞다. 여기 한 사례를 보자.

웹스터 사전과 상표권#

웹스터Webster's 사전은 미국에서 손꼽히는 사전이다. 1806년 노아 웹스터Noah Webster가 출간한 『간략영어사전A Compendious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을 태두로 하는 웹스터 사전은 오래도록 권위를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1917년 법정에서 웹스터Webster라는 이름이 공공 영역public domain으로 규정되어 권리가 소멸되었다; 웹스터라는 이름은 아무 사전에나 다 붙일 수 있는 권리가 소멸된 상표genericized trademark가 된 것이다.

결국 오리지널 웹스터 사전을 만들던 G. & C. 머리엄 회사는 회사 이름을 머리엄-웹스터Merriam Webster로 바꾸게 된다. 머리엄-웹스터 사는 홈페이지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The net effect of the proliferation of Webster's dictionaries is a reference-book marketplace in which the consumer is either unaware of or confused about what differentiates these books.
웹스터 사전이 확산된 결과 참고도서 시장의 고객들은 (웹스터라는 제목을 단) 책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기만 하게 됐다.

이것이 머리엄-웹스터 사의 푸념만은 아닐 것이다. 대다수의 소비자는 분명히 웹스터라는 이름이 아니라 웹스터라는 기표signifiant 저 너머의 '150년 전통의 사전'을 원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표로서의 상표#

웹스터 사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상표는 기의signifié가 아니라 기표다. 이 명제는 상표의 특징에 관해 꽤 중요한 것을 담고 있다. 상표가 기표라면 우리는 드 소쉬르de Saussure를 원용하여 기표인 상표와 기의인 상품의 관계가 자의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자의적이라는 것은 어떤 상품을 다른 상표로 붙였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그 상품의 가치가 전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룰루' 비데가 '랄라' 비데였더라도 비데 자체의 기능이 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를테면 '거원'이라는 상표의 MP3 플레이어에서 우리가 기실 원하는 것은 '거원'이라는 상표 자체가 아니라, 그 상표를 달았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그 MP3 플레이어라는 상품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원'이라는 상표가 '코원'이라는 상표로 바뀌었을 때에도 '거원'이라는 이름을 단 제품과 똑같은 신뢰를 '코원'이라는 이름을 단 제품에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기업이 일반적으로 브랜드 네임 바꾸기를 꺼리고 브랜드 네임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브랜드 홍보의 용이성 때문이지, 그 브랜드 자체가 특별히 독창적이거나 뛰어나서가 아니다. 이한상(2001, 31)도 "상표보호의 본질은 창작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상표의 선택이나 구성에 있어서 신규성이나 독창성은 불필요하다."고 쓰고 있다.

독창성이 중요한 저작권의 경우 다른 사람의 생산물에 내 이름을 달아서 배포하는 '표절'이 중대한 범죄인 반면, 독창성이 중요하지 않은 상표권의 경우 거꾸로 나의 생산물에 다른 유명한 이름을 달아 배포하는 것이 중대한 범죄가 된다. 우리가 '버버리'라고 씌인 '짜가' 코트를 생산하여 판다고 했을 때, 우리는 '버버리'라는 독창적인 문양을 함부로 써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진짜 '버버리' 사에서 만든 제품보다 질이 떨어지는 제품에다 '버버리'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버버리' 사의 신용을 떨어뜨리고, '짜가' 상품을 산 소비자는 그 품질에 만족하지 못하므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린 왕자와 상표권#

『어린 왕자』로 돌아가자: 우리는 상표권 보호의 목적에 비추어 출판사들이 '어린 왕자'라는 제호 또는 삽화를 씀으로써 생떽쥐뻬리의 유족 재단이나 아르데코7321의 신용에 피해를 입혔는지를 살펴보고, 출판사들이 '어린 왕자'라는 제호 또는 삽화를 씀으로써 소비자들의 상품 선택에 손해를 입혔는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

1973년 김현의 번역으로 처음 『어린 왕자』를 출간한 문예출판사를 필두로, 수많은 출판사에서 나온 『어린 왕자』들은 유족 재단의 명예를 높였고, 지금 아르데코7321에서 내는 '어린 왕자' 노트류가 잘 팔리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우리는 거의 의심 없이 말할 수 있다. 한편, 소비자들이 어린 왕자의 삽화나 제호 때문에 앞서 언급한 웹스터 사전과 같은 곤란을 겪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르데코7321이 기존의 출판사들이 일군 성과를 도용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온당할 것이다.

도서 『어린 왕자』에서 제호와 삽화는 기표가 아니라 기의이다.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며 그것들 스스로가 이미 '어린 왕자'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책들이 해당 상표를 하나의 '상표'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르데코7321의 상품에 끼칠 손해는 더더구나 없다.

나는 상표권 제정의 기본 목적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이 '어린 왕자' 관련 상표등록에 대한 취소가 온당하다고 믿는다. '어린 왕자' 캐릭터가 그려진 '짜가' 다이어리가 생겨날까 걱정된다면, 생떽쥐뻬리의 작품을 상표등록하기보다는 아르데코7321의 상표를 등록하는 것이 옳다. 실제로 아르데코7321은 앨리스와 도로시 등 이전 제품들의 경우 저작권 만료된 작품을 가지고 아르데코7321의 이름을 걸고 판매해서 좋은 효과를 얻기도 했기 때문에 이런 방식에 문제가 없다. 실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어린 왕자' 역시 한국 내에서 저작권이 만료되었기 때문이다. (2008. 4. 17. 13:36 추가)

결론을 대신하여: 상생의 경제학#

나는 아르데코7321이나 유족 재단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삽화와 표제에 대한 로열티를 바라는 것인지, 새로운 번역서 출간을 위한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존의 출판사들이 생떽쥐뻬리의 명예를 높였으며, 아르데코7321의 매출도 높여 주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문구류는 도서 『어린 왕자』를 읽은 사람들이 사는 것이므로 이런 상생의 시너지 효과가 무척 활성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표등록 취소와 관계 없이 아르데코7321와 유족 재단의 결단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는데, 만약 생떽쥐뻬리의 작품들이 저작권 시한 만료 후에도 상표권 등록을 통해 영원히 그 권리를 보장받게 된다면 다른 모든 저작물 역시 상표권 등록만 해 놓으면 영원히 그 재산권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문화 발전에 비추어 보아도 전혀 바람직하지가 못하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이한상. 2001. 『지식재산권의 생활법률』. 서울:제일법규.

Posted by 엔디
우화fable란 동물에게 사람의 속성을 투영한 이야기로 일종의 알레고리allegorie이다(이상섭, 210-210). 그래서 논자에 따라서는 우화를 의인소설擬人小說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한용환, 333-336). 그런데 우화 가운데 인간이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럴 경우 대개 인간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가령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인간은 사회주의 혁명 이전의 제정帝政 러시아를 의미한다. 또 안국선의 「금수회의록」은 좀더 직접적으로 옳지 못한 인간의 태도를 풍자하고 있다. 이처럼 동물이 등장인물인 이야기에서 인간이 쉽게 부정적으로 묘사된다는 것은, 적어도 문학적 상상력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의 감정을 동물에 이입했을 때 인간이 추악한 존재라고 느끼기 쉽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나는 다소 딱딱하게 우화에 대해서 설명했는데, 세뿔베다의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를 단순히 우화라고 이름붙이기는 좀 망설여진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알레고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직접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갈매기와 고양이는 진짜 갈매기와 고양이이지, 갈매기와 고양이의 어떤 특징을 가진 인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갈매기와 고양이는 고통받고 있다... 조금 길지만 책을 읽어보기로 하자(27-29):

켕가는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기 위해 날개를 쭉 폈다. 그러나 커다란 판도가 몸 전체를 덮어버렸다. 가까스로 물 위로 떠오른 켕가는 머리를 힘차게 흔들어 젖혔다. 눈앞이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 듯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켕가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앞을 볼 수 없는 것은 오염된 바닷물의 기름 탓이라는 사실을.

켕가는 날개에 묻은 기름을 물에 씻어보려고 했다. 머리를 물 속에 담갔다 뺐다 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허공에서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댄 뒤 다시 눈을 떠보았다. 온통 석유 기름으로 뒤덮인 그의 망막 사이로 마침내 가느다란 햇살 몇 줄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끈끈한 얼룩의 검은 기름은 눈에만 붙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날개와 몸통에도 뒤덮여 날개가 몸통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켕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았다. 우선 검은 기름 띠의 한가운데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헤엄을 빨리 치기 위해 다리를 힘껏 움직이기 시작했다.

[...]

켕가의 날개는 몸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이러한 상태의 갈매기들은 커다란 물고기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결국은 천천히 질식해 죽게 될 것이다. 석유 기름이 깃털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모든 기공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켕가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켕가는 생각했다. 차라리 커다란 물고기의 입 속으로 빨리 없어져 버리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검은 물결. 검은 역신.

켕가는 죽음의 종말을 기다리며 인간들을 원망했다. 그 외에 특별한 방법도 없었다.

물론, 최근 충남 태안 반도에서 일어난 원유 유출 사고 이야기는 아니다. 갈매기 켕가는 지금 태안이 아니라 북해의 앨바 강 어귀에서 석유 오염물질을 뒤집어쓰고 허우적거리고 있다. 켕가는 있는 힘을 다해 뭍으로 날아서는 어느 검은 고양이가 살고 있는 집에 추락해서 하얀 알 하나를 낳고는 죽을 것이다; 인간이 켕가를 죽인 것이다.

기름을 뒤집어쓴 채 죽어가는 뿔논병아리Canon | Canon EOS 5D | Aperture priority | Multi-Segment | 1/200sec | f2.8 | 0EV | 14mm | ISO-800 | Compulsory Flash | 2007:12:08 17:14:26

ⓒ최예용, 환경운동연합


검은 고양이 소르바스Zorbas는 동료 고양이들과 함께 하얀 알이 부화해서 어엿한 갈매기가 될 때까지 키운다. 작가 세뿔베다는 인간 대신 고양이에게 한 온전한 한 생명을 맡긴 셈이다. 고양이는 영리하고, 용감하며, 책임감이 있다. 따라서 죽음 이후에 태어난 하나의 삶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권능이 고양이에게 주어진 셈이다. 소르바스가 어떤 인간들이 불운하다고 여기는 검은 고양이인 것은(20), 인간들의 위선을 지칭함으로써 그 추악함을 더 드러내보인다. 인간들의 편견과 달리 소르바스는 불운한 고양이가 아니라 행운의 고양이이다. 그래서 소르바스가 키운 어린 갈매기는 '행운아'라는 뜻의 아포르뚜나다Afortunada라고 이름붙여진다.

소르바스가 켕가에게 약속한 것은 세 가지였다: 알을 먹지 않는다, 새끼가 태어날 때까지 알을 보호한다, 그리고 새끼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이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알을 먹지 않는 것은 조금의 자제만으로 되는 일이고 알을 보호하는 것은 인간에게 들키지 않도록 잘 행동하면 되는 일이지만, 나는 법은 고양이들도 잘 몰랐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들의 '백과사전'을 신봉하는 사벨로또도라는 박물관 고양이도 역시 알을 어떻게 보호하고 어떻게 품는지는 알려줄 수 있었지만, 비행술에 대해서는 백과사전에서 정말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127):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단 말야. 비행 이론은 최선을 다해서 완벽하게 조사했는데. 기체역학에 관한 모든 사전을 다 뒤져가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론과 비교도 했지.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도 매번 실패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세상에! 어째 이런 일이!"

결국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것은 소르바스의 부탁을 받은 한 시인이었다. 비바람이 치는 날 시인은 갈매기를 산 미겔 성당의 탑으로 데려가 폭풍우를 온몸으로 느낌으로써 나는 방법을 체득하게 한다. 여기서 시인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일종의 샤먼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야기 속에서는 고양이들이 자신들의 금기를 깨고 인간의 언어로 시인과 대화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실상 자연과 함께 숨쉬고 생활하는 시인의 샤먼적 특성을 동화적 또는 우화적 감수성으로 풀어낸 것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의 언어다.

소르바스는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줄 사람으로 시인을 지목했다. 왜 그랬느냐는 질문에 소르바스는 이렇게 답한다(135-137):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섰을 뿐입니다. 전에 자신의 글을 직접 낭독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럴 때마다 항상 즐거웠고, 계속해서 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

"새의 날개로 나는 것에 대해서는 아마 모를지도 모르지. 그러나 내가 그의 시를 들을 때면 항상 그의 시구를 타고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느낌이 들었어."

여기서 소르바스는 일종의 역동적 상상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시적 몽상에 대해 역동적 상상력l'imagination dynamique이라고 이름붙이면서, "역동적 상상력은 의지의 꿈이며, 꿈꾸는 의지인 것"이라고 말했다(Bachelard, 177). 여기서 우리는 갈매기란 왜 하늘을 날아야 하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갈매기는 갈매기이기 때문에 난다거나, 엄마 갈매기인 켕가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어린 갈매기가 날기를 원하기 때문에, 곧 그것이 어린 갈매기의 의지이기 때문이다(123-124):

아포르뚜나다는 전사의 모험담을 항상 재미있게 들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유난히 눈빛을 반짝이며 귀를 쫑긋 세우고 관심 있게 들었다.

"갈매기들은 진짜로 폭풍우 속에서도 날아다녀요?"

그가 질문했다.

"물론, 바다장어가 방전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말씀! 갈매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새지. 갈매기보다 더 잘 나는 새는 없다고."

바를로벤또가 확언했다.

바다 전사의 이야기는 아포르뚜나다의 가슴에 깊이 스며들었다. 그의 발은 공연스레 흙을 이리저리 파헤치고 있었고, 부리는 매우 예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꼬마 아가씨! 아가씨도 날고 싶어요?"

소르바스가 지나가는 투로 묻자, 아포르뚜나다는 고양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마침내 대답했다.

"그래, 좋아요! 내게 나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순간 고양이들은 너무 기뻐서 환호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들은 고양이 특유의 인내심을 발휘해서 어린 갈매기가 날고 싶다는 의지를 직접 드러낼 때까지 끈덕지게 기다렸던 것이다. 왜냐하면 난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결정에 달린 문제라는 것을 고양이들은 조상들이 일러준 교훈을 통해 이미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요나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어쨌든 백과사전 지식을 통해 나는 법을 가르치는 데 실패한 고양이들은 소르바스를 시인의 집으로 보낸다. 샤먼인 시인은 베르나르도 아트사가라는 시인의 시 한 편을 들려주는데, 여기서 소르바스는 시인을 온전히 신뢰하게 된다.

그의 작은 용기는
곡예사들의 그것과 같기에
늘 비를 가져오고
늘 해를 몰고 오는
저 어리석은 비 때문에
그토록 한숨을 쉬지는 않지요

갈매기는 이 시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라, 곡예사의 용기를 가지고 비 속에서도 자유롭게 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인은 이로써 샤먼의 역할을 끝내고 탑에서 내려간다. 샤먼이라 해도 결국은 인간이며, 인간은 자연 속에서 일반적으로 '방해'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세뿔베다의 글을 읽고 나서 세뿔뚜라를 떠올린다면 엉뚱할까? 세뿔베다의 이야기가 그래도 동화적인 외피를 갖고 따뜻하게 전개되다보니 그와 세뿔뚜라를 연결하기가 쉽지 않지만, 지구에 대한 문제의식은 둘이 함께 공유하는 것 같다. 칠레의 이야기꾼과 브라질의 스래시 메탈 밴드의 접합점은 단지 비슷한 이름뿐만은 아닌 것이다.

(▼ 잔인한 장면이 많으므로 주의하여 클릭하세요.)

(▲ 잔인한 장면이 많으므로 주의하여 클릭하세요.)

태안 반도의 원유 유출 사고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분명히 이것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고이지만, 인간이 석유라는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한 언제나 문제가 될 수 있었던 사고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화석 연료라고는 전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이용할 때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사고가 났을 때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들 전체가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이다. (말하기가 조심스러운데, 책임이 인간들 전체라는 말은 책임의 분담分擔이 아니다; 모두가 태안 반도에 퍼진 원유 전체의 무게만큼의 짐이 있다는 것이다.)



자, 아래의 사이트에서 힘이든 돈이든 보태도록 하자. 우리가 시인처럼 한 갈매기를 날도록 하기는 힘들지만, 앞으로의 갈매기들이 날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 마침 곧 크리스마스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이 땅에 인간과 온갖 동식물과의 평화도 함께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태안 원유 유출 사고 관련 사이트:
환경운동연합
충청남도청
태안군청
Daum 희망모금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루이스 세뿔베다 지음/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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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섭. 1997. 『문학비평용어사전』. 신장판. 민음사.
한용환. 1992. 『소설학사전』. 고려원.
Bachelard, Gaston. 2000. 『공기와 꿈: 운동에 관한 상상력』. 정영란 옮김. 이학사.
Posted by 엔디
1

욕망이란 이 곳에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 실재로서 현재하는 것을 바란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면 사실 '그대'는 곁에 없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 봐야 한다.

삶의 영원한 항등식처럼,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은 행복한 삶이다. 여기까지 인정한다면, 그 다음 행복의 각론에서 저마다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순서가 남아 있다. 뒤라스의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안 데바레드 부인이 바랐던 것은 그가 속한 곳의 정원과 무도회와 파티에는 없는 것이었다. 데바레드 부인의 행복이란 무엇이었을까. 데바레드 부인은 무엇을 바랐고, 무엇을 욕망했을까.


2

르네 지라르는 모든 욕망은 주체와 대상 이외에 또다른 타자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중세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롤 모델role model인 기사 이외에 스스로 숭배하는 부인dame이 제각기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시각각 자신의 승전보와 결투 결과를 부인에게 인편으로 알리기에 바빴던 기사들에게 있어서 부인이라는 타자는 무척 중요한 삼각형의 꼭짓점이 되는 것이다.

데바레드 부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집은 감옥과 같은 것이다. 데바레드 부인은 그것을 약간 알고 있었다. '약간'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가 아주 미약한 방법으로 그 감옥에서의 정기적인 탈주를 실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매일같이 엄마와 함께 그 도시를 돌아다니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데바레드 부인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감옥이라고 느낀 보다 정확한 계기는 아이가 모데라토 칸타빌레로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 있었던 사건이다.아마 어떤 치정 사건에 관계된 살인 사건임이 분명한데, 어쨌든 이것이 삼각형의 한 꼭짓점이 되어 데바레드 부인의 곳의 감옥에 대한 자의식을 성장시키게 된다.

(여성의 자의식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의 「누런 벽지The Yellow Wallpaper를 알고 있다.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의 데바레드 부인은 안락한 삶 속에서 '누런 벽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3

『모데라토 칸타빌레』가 아름다운 것은 한 부르주아 부인의 일탈이 온전히 말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부인은 한 사내에게 자신의 감옥에서의 일상을 말하고, 자신이 있는 감옥이 얼마나 아름답고 무서운지를 이야기한다(65-66):

"나무가 없는 도시에서 살아야만 해요 바람이 불면 나무들이 울부짖어요 여긴 언제나 줄곧 바람이 불죠 1년에 이틀을 빼놓곤 말이에요 제가 당신이라면 그래요 떠나가겠어요 여기 머물지 않겠어요 폭풍우가 지나간 뒤 바닷가에 죽어 있는 새들은 거의 다 바다새들이죠 폭풍우가 그치면 나무는 더 이상 울부짖지 않아요 목이 졸리는 것처럼 꽥꽥 비명을 지르는 새소리가 해변에서 들려와요 아이들은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지만 전 아니에요 떠나가야겠어요."

마침표도 없이 이어진 문장에서 부인이 말하는 것은 자신의 감옥이다. 그것은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맺고 있으며, 더 이상의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부인의 생각은 끊임없이 피와 죽음과 사랑의 일탈로 치닫는데, 그걸 알아챈 쇼뱅이라는 사내는 이렇게 묻는다(66):

"혹시" 하고 그가 말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는 더 일찍 그 여자를 죽이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이미 말입니다. 말씀해보세요."



4

여자의 감옥은 7장에 가서 절정이 된다. 거기에서는 만찬이 벌어지고 있었고, 10년 동안 남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없는 여자는 술에 취해 만찬에 늦게 도착한다.

7장에서는, 다른 장에서와 달리, 여자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파티란 원래 그런 것이기도 하겠거니와, 여자의 변화나 그 날 밤의 이상한 행동들이 금세 소문이 되어 퍼지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106-107):

안 데바레드는 조금 전 오리 요리를 사양했다. 그렇지만 음식 접시는 아직 그 여자 앞에 멈추어 있고, 그 짧은 순간은 추문이 시작되기에 충분하다. 그 여자는 예전에 배운 대로 거절 의사를 분명히 알리기 위해 손을 치켜든다. 더 이상 권하지 않는다. 식탁 주변에 침묵이 자리잡는다.

[…]

주방에서는 그 여자가 오렌지 소스를 곁들인 오리 요리를 거절했고, 몸이 아프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5

여자의 일탈은 소설 마지막에 와서 완성된다; 여자는 자신을, 죽은 여자와 동일시한다. 두려움 속에서 그 여자가 한 일은 한 남자와 입을 맞추고는 언어적으로 죽는 일이다(118-120):

"전 두려워요." 안 데바레드가 속삭였다.
쇼뱅은 테이블로 다가가 그 여자를 더듬어 찾았다. 찾다가 포기해버렸다.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그 여자가 했다. 여자는 입술이 서로 닿을 만큼 가까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차디찬 그들의 입술은 조금 전 그들의 손과 같이 죽음의 의식을 따라 서로 포개진 채 떨면서 그렇게 머물렀다. 이루어졌다.

[…]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쇼뱅이 말했다.
"그대로 되었어요." 안 데바레드가 말했다.

장-자끄 아노 감독의 영화 탓에 메콩 강가의 '독신자의 방'과도 오버랩되는 이 장면은, 하지만 이미 좀더 위험하고 에로틱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따옴표 안과 밖을 삼투시키는 문장 "그대로 되었다"는 역시 그대로 창세기의 첫 장을 연출하고 있다: "그대로 되니라."

세계의 시작과 소설의 끝, 그 지점에서 어떤 욕망은 끝나고 다른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모데라토 칸타빌레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문학과지성사
Posted by 엔디
『어린 왕자』의 여러 한국어판 번역본들과 불어판 또는 영어판을 비교해 보면 조금 이상한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아마도 쓸쓸했던 날의) 어린 왕자가 자기 행성 B612에서 본 해넘이의 수가 한국어판과 불어판 또는 영어판이 다른 것이다 한국어판은 대개 마흔세 번으로, 영어나 불어판은 마흔네 번으로 기록하고 있다:
« Un jour, j'ai vu le soleil se coucher quarante-quatre fois! »
-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 폴리오folio 문고판, 31쪽. (1999년 문고판 간행)

"One day," you said to me, "I saw the sunset forty-four times!"
- 하비스트북A Harvest Book하코트 브레이스Harcourt Brace판 캐서린 우즈Katherine Woods 옮김본, 21쪽.

"언젠가는 마흔 세 번이나 해지는 걸 봤지."
- 구舊 문예출판사판 김현 옮김본, 32쪽. (1973년 초판 간행)

「어느 날, 난 마흔 세번이나 석양을 보았어!」
- 혜림출판사판 황현산 옮김본, 29쪽. (1986년 초판 간행)

「어느 날인가는, 해 지는 걸 마흔 세 번이나 봤지요!」
- 고려원판 오증자 옮김본, 28쪽. (1987년 초판 간행)

"어느 날 나는 해가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보았어!"
- 신新 문예출판사판 전성자 옮김본, 26쪽. (1999년 간행)

"어느 날은 해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본 적도 있어."
- 문학동네판 김화영 옮김본, 35쪽. (2007년 간행)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1999년 출간된 갈리마르 출판사의 폴리오folio 문고판에는 이런 일러두기avertissement가 붙어 있다: "우리는, 앙뚜안 갈리마르와 함께, 폴리오 문고판의 하나로 출간하게 되어서, 그리고 어린 왕자의 완전판l'édition intégrale을 처음으로 출간하게 되어서 기쁘다." ...무슨 소리인가. 『어린 왕자』는 1943년 작가가 살아 있을 당시에 이미 초판이 간행되었는데!

1943년 쌩떽쥐뻬리는 미국에 있었고, 아마 전시戰時였기 때문이겠지만 프랑스 출판 편집자들과는 연락을 취할 길이 없었다. 해서 그는 '레이날과 히치콕Reynal & Hitchcock'이라는 출판사에서 『어린 왕자』의 초판을 발간하게 된다. 정작 프랑스에서는 약 3년 뒤 1945년에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첫 판이 발간된다. 문제는 이 때 갈리마르에서는 작가의 원본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상태에서 작업했다는 것이다.

폴리오 문고판의 일러두기는 그래서 그간 불어판에 있었던 오류의 목록을 보여주고 있다: 천문학자가 망원경을 통해 바라보는 별이 사라져 있고, 사업가와 천문학자의 노트나 그림에 차이가 있으며, 어린 왕자 목도리의 윤곽에서부터 꽃들의 꽃잎과 꽃받침, 가로등 아래의 태양 광선, 바오밥 나무의 뿌리에서부터 야자수의 가지가 다르다; 또한 어린 왕자가 본 해넘이의 횟수가 다르다.

한편, The Publication History of The Little Prince는 각국의 번역 판본들과 떽스뜨, 이미지의 차이를 상세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폴리오 문고판에서 지적하지 않은 두 가지 사항들을 더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어린왕자가 입은 가운의 색깔이 초록색green이냐, 어두운 파랑dark blue이냐, 아니면 바다색navy blue이냐 하는 논란이 있어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소행성 B612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천문학자들이 별에 이름을 붙이는 방식을 설명하면서 '소행성325'를 예로 드는데 이 숫자가 일부에서는 '소행성3251'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린왕자의 가운 색깔

불어판과 영어판, 그리고 두 한국어역본 사이의 가운 색깔이 모두 다르다


Il l'appelle par exemple : « l'astéroïde 325 ».
- 갈리마르 출판사 폴리오 문고판, 22쪽.

He might call it, for exemple, "Asteroid 325."
- 하코트 브레이스판 캐서린 우즈 옮김본, 11쪽.

예를 들자면 <소혹성(小惑星) 3251>하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 구舊 문예출판사판 김현 옮김본, 23쪽.

이를테면, '소혹성 3251호'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 신新 문예출판사판 전성자 옮김본, 17쪽.

가령, '소혹성 제325호'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 문학동네판 김화영 옮김본, 23쪽.

어린 왕자가 해가 지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는가와 '나'가 예로 든 소행성 이름이 무엇이었는가는 그래도 단순한 편집 판본 상의 차이일 뿐이다: 마흔 세 번과 마흔 네 번이라는 차이가 작품 내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상한 일은 '신원'이라는 출판사에서 내 놓은 책은 엉뚱하게도 어린 왕자가 본 해넘이의 수를 "46번"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민한 작가가 언젠가 고쳐 쓴 뒤 어느 판본에 적용을 하지 않았거나 무던한 편집자가 실수를 했거나 했을 것이다. 물론, 어린 왕자에게 있어서 해넘이가 갖는 의미는 무척 각별하다. 슬픈 날에 마흔 몇 번이나 해넘이를 보았다는 것이나, 왕이 소원을 빌라고 하자 망설임 없이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한 것, 그리고 24시간 동안 해가 1440번 진다는 이유로 점등인의 별을 떠나고자 하지 않은 점, 그리고 조종사인 '나'에게 해지는 것을 보러 가자고 무의식 중에 떼를 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텍스트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린 왕자가 해넘이를 43번이 아니라 44번 보았다는 것을 확정해주는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어린 왕자는 별들이 즉각 복종한다는 왕의 권능을 부러워하며 이렇게 생각했다고 화자는 전한다:

어린 왕자는 그토록 대단한 권능에 감탄했다. 만약 자기에게도 이러한 권능이 있었다면 의자를 뒤로 물려놓을 것도 없이 해지는 광경을 하루 마흔네 번만이 아니라 일흔두 번, 아니 백 번 이백 번이라도 구경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문학동네판 김화영 옮김본, 55쪽.)

그럼에도 이것은 작자가 처음에 의도한 해넘이의 숫자를 밝혀주는 것일 뿐 44라는 숫자 자체가 어떤 고도의 시적 울림이나 상징성을 가진 유의미한 것이 아님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에 있어서는 문제가 좀 다르다: 그림이 좀더 바랜 것에서 시작해서 그림 자체에 있어야 할 것이 빠진 것도 있다. 이는 작가의 원판 그림이 미국 출판사들에서 프랑스 출판사들로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문학자①"

천문학자가 망원경을 통해 별을 보고 있는 것이 맞는 그림인데, 별이 아예 빠져서 편집되어 있다.

"천문학자

천문학자가 설명하는 칠판의 도형이 조금 다르다. 가령 원의 중점에서 1사분면으로 나가는 선의 각도가 누락되어 있다.

"바오밥나무"

바오밥나무의 뿌리가 좀더 단순화되어 있다.

"점등인"

가로등 아래의 태양광선 하나가 없다.

서점에서 살펴본 결과, 해넘이 떽스뜨와는 달리 대부분의 책에서 작가가 그린 그림의 문제는 없었다. 몇몇 번역 판본이 예전 그림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어린 왕자가 해넘이를 마흔세 번 보았나 마흔네 번 보았나가 아니라, 어린 왕자의 떽스뜨가 어떻게 정확히 확정될 것인가이다. 마흔세 번과 마흔네 번이 갖는 차이는 크지 않겠지만, 어린 왕자가 느꼈을 쓸쓸함을 표현하기 위해 마흔 몇 번을 100번이나 200번으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어린 왕자 - 8점
생 텍쥐페리 지음, 김화영 옮김/문학동네

어린왕자 - 8점
생 텍쥐페리 지음, 전성자 옮김/문예출판사

Posted by 엔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어야 했다고, 스스로에게 늘 확인시키곤 했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걸쳐서, 혹은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걸쳐서 후다닥 해치운 대학 생활에 대한 약간의 자괴 같은 것도 있었다. 대학 생활이 내게 준 것은 무척 많았지만, 살펴보면 대개 지나간 것이나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함께 끼어 있었다.

맑스도 레닌도 제대로 읽지 못했고, 노동자의 삶을 위해 시위도 한 번 한 일도 없다. 그렇다고 학문을 깊이 탐구한 것도 아니다. 나는 늘 주위만을 기웃거렸을 뿐이다. 맑스-레닌을 읽기에 나는 너무 늦게 대학엘 들어왔고, 학문 탐구를 위해서는 너무 일찍 대학에 들어온 셈이다. 콤플렉스 탓일까. 내 책장에는 책들이 쌓이어 갔고, 그 책들은 다시금 내게 부담 혹은 콤플렉스로 다가왔던 것이다.

낮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이삼십 권의 책을 쌓아놓고 꽃에서 꽃으로 옮겨다니듯,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독법으로 책을 읽었다.
책에서 가장 관심 가는 부분은 저자의 약력인 것이다. 약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장 주네처럼 도둑이었던 사람, 생 텍쥐페리처럼 비행기 조종사였던 사람, 랭보처럼 스무 살 때까지만 시를 쓴 사람, […]
저자의 살아온 삶을 읽고 난 뒤에는 책의 목차를 본다. 그리고 발행 날짜와 몇 판째 인쇄된 것인지를 본다. 제법 영악하게 책을 대하는 것이다. 목차를 보고 우선 당장 호기심이 가는 부분만 본다. 지금 당장에는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면 한쪽으로 치운다. 책 한 권의 소화는 그렇게 수월하게 끝난다.
(34-35쪽)

그러나, 팔십년대라고 해서 내가 '그곳'에 몸을 맡길 수 있었을까. 나는 집단이 개인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집단을 저버렸다.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개인주의자이고, 리버럴하며, 소부르주아였다.

그러나 끝내 라라는 뛰어난 조직 인자도, 투쟁적인 노동자도 될 수 없었다. 20년 동안 몸에 배인 그녀의 리버럴한 면과 소부르주아 근성이, 팜플렛 몇 권과 몇 달 동안의 단파 라디오 주체사상 강좌로 청산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조직의 선전 대오에서 이탈되었고 당적을 박탈당했다. 그 후, 그녀는 문학이라는 나약한 인문주의적 덕성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숨기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그러나 그녀는 문학판에서도 회의와 갈등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
라라가 죽었다.
(54-55쪽)

소설은 라라가 등장하는 1부와 디디가 등장하는 2,3부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라라와 디디를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한 사람을 시기에 따라 둘로 나누어 놓은 것 같다. 라라는 디디가 되기 위하여 죽었다. 디디는 '살아남은' 주인공과 달리 그 죽음을 담보로 하여 90년대적 삶에 당당한 것이다. (이렇게 보지 않는다면, 놀랍도록 라라의 것과 닮은 디디의 80년대가 이해되지 않는다.)

빨간 라디오! 하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
이럴 수가 있다니!
나는 지금 디디의 얼굴에서 라라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다.
(224쪽)

'살아남은' 것은 주인공만은 아니다. 한 번도 폐간당하지 않은 『현대문학』이나, 일제 협력에도 독재 협력에도 앞장선 미당, 그리고 스스로의 신념을 저버린 386세대 정치인들만이 손가락질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죄는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원죄original sin요, 경제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연대책임 같은 것이다. 나는 베트남의 라이따이한들에게 미안한 것처럼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 미안한 것이다.

나는 80년대를 아무 것도 모른 채 다녔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노동자를 억압했으며, 아무 것도 모른 채 분단 체제 유지에 기여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미국을 찬양하고 제3세계를 비난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숨이 막힌다. 사실 이 시절에 대한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 말이 무서운 것이다: "It's not my fault."


살아남은 자의 슬픔
박일문 지음/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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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서평, 소설
삶은 기억의 축적이다. 기억들은 오늘을 받치는 토양으로 삶의 기저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그 기억들을 나름의 순서로 재구성하는 것이 소설을 비롯한 글의 목적이다. 문제는 흔히 그 기억들은 현실의 힘에 밀리고 눌려 쉽사리 지각변동을 겪게 된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하면,  본래 사람이 가진 기억이라는 것이 사실 온전하지 않아서 우리가 기댈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는 행위 그 자체는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지만 그 기억의 내용은 우리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건을 대할 때 기억에만 의존한다면 우리는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결과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에는 이러한, 기억이 갖는 문제점들이 엿보인다. 황해도 신천의 학살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는 이 소설은 그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작가의 후기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객관성'의 문제에 대한 한 해결방안으로써 주관-객관의 비분리, 시점의 교차 등을 택하여 얻은 효과로 흔히 지적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는 쉽사리 윤색된다는 것을 잊은 것일까, 『손님』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과거를 제대로 재구성해내지 못하고 있다.


『손님』이 소재로 삼은 사건을 드러내는 방식은 무척 독특하다. '객관성'에 대한 고민의 한 결과로 작가가 내어놓은 결과는 빈번한 시점의 이동-교차이다. 하나의 시점을 택하여 이야기를 줄곧 내어놓는 다른 소설들과는 달리 『손님』은 하나의 이야기를 삼인칭을 포함한 여러 화자가 나누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진실에 보다 다가갈 수 있는 한 방편으로 이해된다. 어느 한 사람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개인의 현실의 힘에 눌린 왜곡된 기억의 창으로 바라보는 것이므로 진실과 가깝다고 하기 힘들다. 따라서 빈번한 시점 이동을 통해 진정한 다성성多聲性을 획득하게 되기만 하면 보다 진실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법정에서 하듯 원고와 피고, 그리고 여러 증인의 입장에서 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진실에 보다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소설 속에서도 이런 시점 이동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이 여덟째 마당 '시왕-심판마당'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손님』이 보여주는 '다성성'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성성이 아니다. 여기서의 다성성은 형식, 다시 말해 겉보기만 다성적일 뿐 내용적인 면에서는 단지 하나의 줄기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시점은 여럿이지만 관점은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손님』의 전체 구조 속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여덟째, 심판마당에서도 학살 사건을 각자의 시점에서 서술하는 인물들(주로 죽은 이들) 사이에 어떠한 관점 차이나 의견 대립을 목격할 수 없다.

'신천 학살 사건'은 서로가 각자의 신념을 좇아 행동함에 따라 생긴 사건이므로, 그 당사자들 사이에 의견대립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소싯적부터 사타구니에 거웃이 날 때까지 한 마을에서 뒹굴어온 놈들>(124쪽)끼리의, 거의 근친살해에 육박하는 큰 사건을 겪은 뒤에는 부지중에 죄의식을 덮기 위한 자기합리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자기합리화는, 이 소설 속에서는, 죽기 직전의 류요한 장로에게서 잠깐 관찰되는 듯 하더니,¹ 그의 사후에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북측 정부가 내세운 증인들의 증언(108-111쪽)이 모조리 윤색된 과거인 것과 비교하면² 여기서의 관점의 일치가 무척 투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¹ <“내가 왜 용서를 빌어? 우린 십자군이댔다. 빨갱이들은 루시퍼의 새끼들이야. (…)”>, 22쪽.
*² <그들은 모두 미군이라고 고쳐서 말했지만>, 108쪽.

그렇다면 그 투명성은 어느 평자의 말대로 죽은 자의 말이기 때문에 획득된 투명성¹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죽은 자'의 유언에는 거짓이 없다는 통념>과 나란히 우리는 또한 '망자亡者의 넋이 한恨을 풀지 못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러고보면 죽은 자의 말이 투명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죽은 자들의 불투명성 때문에 이 소설이 씌어지게 된 것이 아닌가. 어디에서도 그토록 투명한 관점의 일치는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의 투명성은 작가가 전지적全知的인 관점에서 서술할 것을 각각의 등장인물의 시점으로 교묘히 환원시키는 과정에서 겉으로 보이는 투명성에 불과하다.

*¹ 오창은, 「억압된 기억의 꿈」, 경향신문 2002년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작.

작가는 후기에서 기독교와 맑시즘이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에 우리가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하여 지니게 된 모더니티>(261쪽)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선사문명에서 고대로, 고대에서 중세로 가는 길에 각각 불교와 유교의 '수입'이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근대로의 전환기에 기독교와 맑시즘이 '수입'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 시기에 우리 사회는 이미 내부의 모순이 점차로 드러나는 과정에 있었다. 그것은 서학西學에 대한 일정한 반발로서 나타났지만 인내천人乃天 사상 등을 통해 '평등'을 내보여 서민층에 널리 퍼졌던 동학東學을 보면 알 수 있다. 실제로 동학이 서민층에 강한 인력引力을 가졌던 요인은 당시 기독교 역시 가지고 있었던 <반봉건 자주의식>¹에 대한 끌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맑시즘 역시 하층민에게 '해방'의 비젼을 보이며 접근하였던 것이다. 기독교와 맑시즘은 당시 사회 내부의 모순 때문에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¹ 강만길, 『고쳐쓴 한국근대사』, 창작과비평사, 1994, 296쪽.

만약 <식민지와 분단> 때문에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말하려면, 왜 우리가 식민지와 분단을 겪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 또한 필요하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 이유도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작가는 자생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규정 아래 우리 사회가 나아갈 이상향을 엉뚱한 곳에서 구하고 있다.

그는 새처럼 화면의 위로 날아가고 있다. 아래로 연이은 언덕과 실개천이 지나간다. 멀리서 소 우는 소리며 목에 걸린 워낭이 딸그랑대는 소리도 들리고 닭이 알을 낳고 꼬꼬댁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들판에는 사람들이 논에서 모심기를 하면서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린다. 풍물을 치는 빠른 북소리에 꽹매기 두드리는 경쾌한 쇳소리가 얹혀있다. 어머니가 아이를 부르는 소리도 들려온다.

얘들아, 밥먹어라. (257쪽)

『손님』의 마무리 넋반 대목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이상적 공동체'이다. 무척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이런 평화로움이나 아름다움이 근대 이전의, 자기 모순에 의해 붕괴된 전근대 사회를 묘사하는 것임은 쉽게 알 수 있다. 과연 소작농들이 이런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까, 머슴들이 이런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이것이 전근대 사회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묘사라는 것은 쉽게 밝혀진다. 전근대 사회를 이상적 공동체로 제시한다는 것 자체가 '윤색된 과거'를 그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과거의 삶을 쉬임없이 참고하는 것은 역사를 하는 궁극적인 목적과도 부합하는 일일 테지만, 무턱대고 과거를 미화하는 것은 일종의 신비화에 빠지고 마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해방이지 과거의 회복이 아니기 때문이다.¹

*¹ 도정일,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민음사, 1994, 167쪽 참조.

그런데 과거가 쉽게 윤색된다는 사실을 잊은 데서 비롯한 이들 '겉보기만의 다성성'과 '과거 회귀 경향'은 이 소설의 형식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이 작품은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하여 씌어졌다.>(262쪽) 작가의 입장을 따라 본다면 넋굿 형식을 채용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소설의 취지가 류요한으로 대표되는 학살 사건 당사자의 죄를 씻기고 그들이 저승으로 떠날 수 있게 하는 데에 있는 만큼 어떤 종교적인 의식은 필연적이다.

류요한의 죄가 문제시되는 것은 소설 초반부에 제시되는 박명선의 회고(45-49쪽)와 <“머 종교야 어두운 시절의 미신이니깐 다 좋다 말입니다. 반동이던 앞잡이던 기것두 거저 넘어갈 수 이서요. 사람은 왜 죽입네까?”>(94쪽)하는 류단열의 항변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죄가 살인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인이 죄가 되는 이유는 아마도 사람이 사람의 생명의 여탈권을 갖는 것이 옳지 않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살인죄를 씻는 데도 역시 사람의 힘을 능가하는 어떤 존재의 힘을 빌려 씻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의 생명에 대한 여탈권을 쥐지 않았다는 말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도 역시 갖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의 입장에서는 기독교는 자생적인 것이 아니므로 그 죄를 씻는데 적합하지 않다. 또, 유교와 불교 등의 종교도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보면 외래적인 것이므로 자생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¹ 때문에 작가로서는 가장 토착적이고 자생적인 것으로 널리 알려진 샤머니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¹ 성민엽, 「이데올로기 너머의 화해와 그 원리」, 『창작과 비평』 2001년 겨울, 244쪽.

그런 샤머니즘의 선택은,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고 오로지 지우는 데에만 기능하고 있다. 본래 <넋굿은 망자로 하여금 생전에 있었던 모든 맺힌 한을 풀어버리고 자유롭게 저 세상으로 떠날 수 있도록 돕는 데>¹ 그 목적이 있다. 때문에 넋굿은 어떤 의미에서 체념을 위한 의식이다. <한을 풀어버>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망자에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고 삶에서 있었던 좋지 않은 사건들에 대한 감정을 버리고 체념하기를 권고하는 것이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도 순남이 아저씨는 <죽으문 자잘못이 다 사라지디만 짚어넌 보구 가야디>(194쪽)라며 문제를 해결하는데 애쓰기보다는 문제를 지우자는 취지의 말을 하고 있다.

*¹ 차옥숭, 『한국인의 종교경험․巫敎』, 서광사, 1997, 272쪽.

해서 『손님』은 한 판의 넋굿을 통해 모든 한恨을 풀고(지우고) 모든 외래의 것을 물리친다. 그런 굿판 끝에,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전근대적인 유토피아요, 그 등장인물들의, 실제로는 불가능할 투명한 말들이다. 샤머니즘의 세계관은 치열한 현실 인식 속에서 사건을 바라보지 못하고, 굿이라는 형식을 통해 죄책감을 씻으려는 의식주의儀式主義ritualism의 성향이 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떠한가? 앞에서 기독교가 서민과 민중들에게 깊이 파고들 수 있었던 이유는 평등과 기회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손님』에서의 기독교는 전혀 민중적이지 않고 평등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것은 이북에서의 부흥기에 기독교가 전혀 다른 기능을 했기 때문이다. 스펜서 J. 파머는 이북의 초창기 기독교 선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독교는 최초의 支持를 北韓지역에서 강하게 받았다. 거기에서 기독교는, 서울에 있는 양반에 대한 그 지역 사람들의 오랜 不平을 이용할 수 있었다. 儒敎原理는 평양에서 그다지 존숭되지 않았다. 이 지역에 있어서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강하게 긍정적으로 반응해간 이유는, 그들이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확고한 旣得的인 利權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부분적으로 의거한다. 또한 기독교는, 서울에 있어서 儒敎의 규칙이 너무나 융통성이 없고 형식적이어서 현대적인 문제에 적용할 수 없다고 느끼고서, 그것을 따라가기 어렵게 생각하는 상당수의 귀족젊은이들의 마음을 끌었다. 이 젊은 양반 개혁자들은 권력의 座에 앉기 위하여 그리고 외국, 특히 미국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이 外國 信仰과 연결되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하는 保守主義者들이었다.¹

*¹ 스펜서 J. 파머, 「東洋社會와 基督敎」, 『思想界』 1966년 12월, 89쪽; 강만길(295쪽)도 <개신교는 당초 서북지방의 자립적 중산층을 중심으로 수용되어 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지극히 기복적祈福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신앙의 양태는 사실 올바른 믿음의 본보기라 할 수는 없다. 종교학자 윤이흠 교수는 믿음을 기복형, 구도형, 개벽형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그 첫째인 기복형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 유형은 생존의 동기를 갖는 믿음으로 이러한 유형은 일률적인 행동 양식과 현세적 조건의 만족에 머물기 때문에 극단적 보수주의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¹

*¹ 김주연, 「사랑의 문화를 위하여」, 김주연 엮음, 『현대문학과 기독교』, 문학과지성사, 1984, 14쪽에서 재인용.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손님』에서 보이는 기독교는 보수주의자들의 기득권유지의 한 방편으로 볼 수 있다. 가령 류요한이 <우리 군에 인민위원회가 생겨난 뒤에 가보니 정말 한심하더라. 어중이 떠중이에 머슴 건달 떠돌이 따위들인데 누가 보아도 제 고장에서 대접 못 받던 놈들을 긁어모은 것이라.>(119쪽)고 했을 때, 류요한의 어머니가 박일랑(이찌로)에게 <“네 이 배은망덕헌 놈 겉으니. 감히 누굴 치느냐?”>(135쪽)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기독교적 평등개념은 찾아볼 수가 없다.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길 것이고 <어중이 떠중이>를 모은 공산주의자들은 축복받지 못한, 사탄의 자식으로 여길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처음부터 그들을 영혼이 있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처음부터 기독교로 이끌림받지 못했다. 순남이 아저씨는 이렇게 말한다.

기러구 보니께 우리집 주인덜 가족이 다니넌 광명교회에 나 겉은 사람언 한번두 얼씬얼 못해서. 소작인이라두 제 식구가 있넌 이덜언 서루 권하구 이끌어서 교회에 더러 나가댔다. 우리 겉은 일꾼덜이나 머슴덜언 일년 사시사철 일만 하거나 하다못해 꼴얼 베구 나무럴 하구 소 멕이기두 하구 있대서. 그낭 먼발치서 예비당에서 들레오넌 종소리나 찬송가 소리럴 듣기만 했대서. (79쪽)

본래 종교가 기복적 성격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여러 성격 중에서 어느 한 편만 강조되는 것은 건강한 신앙이 아닐 것이다. 흔히 한국의 기독교가 샤머나이즈 되었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기복적 성격만 지나치게 강조되어왔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사실 기독교가 한국에서 널리 퍼진 이유를 그것의 샤머니즘과의 유사성에서 찾는 이도 있다.¹

*¹ 파머, 위의 글, 85-86쪽.

작품에서 류요한 등이 보여주는 기독교는 보수적인, 기복형의 기독교인데, 그것은 샤머니즘화된 것으로 알려진 한국의 불교와 마찬가지로 샤머나이즈 되어 이미 어떤 면에서는, 이른바 '자생성'을 획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십자군 전쟁'도 잃었던 기득권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을 뿐, 사회 개혁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류요한이 박일랑을 체포한 직후 <너 이새끼 우리 땅 뺏구 천년만년 리당위원장 해먹을 줄 알았네?>(213쪽)라고 하는데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손님』에서 보이는 초기 이북의 기독교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도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으로 변질된 측면이 많다. 샤머니즘은 개인의 현세적 고민(기억)들을 지우는 데에만 기능하고 있다. 기복신앙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샤머니즘이 그렇듯이 그것이 가진 이기주의적인 발상 때문이다. 마가복음 12장 13절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런 이기주의적인 기복신앙을 극복하라는 말씀이다. 그러한 극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기복적 기독교신앙은, 앞서 생각해보았던 샤머니즘이 그렇듯이 한을 푸는(지우는) 데에만 기능하는 의식주의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참된 믿음은 이상사회와 현존질서의 괴리를 각성하고 그 괴리를 메우기 위해 진실된 기억을 토대로 하여 현세적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차츰 그 행복을 다져가게 될 것이다.


손님
황석영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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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서평, 소설
어린왕자가 지구로 다시 돌아왔다. 그의 별에 어쩌다 호랑이가 머물게 되었고, 호랑이 때문에 양과 장미가 위협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왕자는 호랑이 사냥꾼을 찾고 있다.

워낙 쌩떽쥐뻬리의 『어린왕자』는 동화로 씌어진 것이다. 동화가 소설보다 수준낮은 것이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리라. 쌩떽쥐뻬리는 심지어 『어린왕자』를 어른인 레옹 베르뜨에게 헌정하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사과하고 있기까지 하다. 쌩떽쥐뻬리가, 혹은 그의 어린왕자가 경멸했던 것은 '버섯'같은 어른들의 사고방식이다.

『다시 만난 어린왕자』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어린왕자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별(사실은 행성)을 떠나 지구로 오는 길에 만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보면 금방 나타난다. 어린왕자는 차례로 환경주의자, 광고기획자, 통계학자, 관리인, 편갈라 싸우는 사람, 그리고 소녀, 지구에 와서는 문학평론가를 만난다. 물론, 소녀를 빼고는 모두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그건 쌩떽쥐뻬리의 플롯을 그대로 따온 것이지만, 다비뜨의 묘사는 보다 우리 시대에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다.

김정란은 해설에서 쌩떽쥐뻬리의 '모던'함과 다비뜨의 '포스트모던'함이 어디서 차이를 보이는지 세목들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다비뜨의 글에서 '모던'에 대한 반발이 많이 읽히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생텍쥐페리 선생님, 선생님께서 전에 출간하신 책을 읽어보니까, 선생님께선 비행사의 피를 가지고 계셨더군요. 선생님이셨다면, 그냥 휙 날아가셨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공기보다 더 무거운 걸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게 별로 내키질 않아요. 하늘 높이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세상은 너무나 조그마해서, 마치 지도가 펼쳐지는 것같이 느껴지지요. 어떨 때는 지도를 보는 것보다도 못해요. 풍경은 양떼처럼 흩어져버리고, 형태를 알 수 없는 구름 낀 산정밖엔 보이질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물과 땅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 그들과 하나가 되는 것, 제가 원하는 건 그런 것입니다. (12-13쪽)

그러나 이 책의 단점을 꼽으라면, 그것은 내가 보기에 아주 치명적인 단점인데, 어린이보다는 어른을 위한 글이라는 점이다. 광고기획자나 편갈라 싸우는 사람 정도는 어린이가 읽어서 이해할만하다고 볼 수 있지만, 환경주의자나 통계학자, 지구의 문학평론가에 대한 내용을 어린이들이 읽어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오히려, 뻔한 사실을 '어린이'의 입장에서 본다는 의미의 '낯설게 하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말이다. 『어린왕자』와 비교해보면 그런 차이는 한눈에 보인다. 해서 결과적으로는, '지식인'과 '무식쟁이'의 경계를 허물고 '고급'과 '저급'의 갈림을 모호하게 만드는 '포스트모던'한 글쓰기로서는 어느 정도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다시 만난 어린왕자
장 피에르 다비트 지음, 김정란 옮김/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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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크게 보아 '구원의 역사'이다. 아담의 첫 범죄sin 이후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때를 거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구원'이 올 때까지의. '구원'이 있기까지는 '죄'가 있어야 하므로 성서는 또한 '죄'의 역사이다. 그러나 '죄'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누구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누구든 "신(神)이 부과한 명령을 어기는 것"이 죄라고 주장하려는 이는 '왜 카인이 십계명이 생기기도 전에 스스로를 괴롭게 해야 했는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그 '죄의 역사'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죄의 개념을 보다 명확히 하고 있다. 대개 사람들에게는 죄가 선험성Apriotät을 지니고 나타난다면,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 속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구체Konkretum'를 지니고 나타난다. 여기서 '구체'가 왜 중요한가 하면, 법과 도덕이 항용 만나는 것이 바로 이 '구체'이기 때문이다. '구체'란 늘 법과 도덕의 '반증'으로서 그것들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것들을 '시험'하여 보다 과학적이도록 만든다. 칼 포퍼의 말을 빌리자면, '구체'가 법과 도덕의 '반증가능성'이 되는 것이다. 또한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이 '구체'라는 것은 그것이 다만 개별적인 특수 체험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소설이 가진 상징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풀어 말하면 이 소설이 법제도가 아니라 그 뿌리를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법제도를 문제삼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법제도를 대신하는 잣대로서는 종교가 가장 유력하다. 그것은 세 명의 까라마조프가 갈라지는 분수령이 바로 종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조시마 장로와 관련된 두 가지 에피소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곧 이 소설의 종교관·윤리관과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추악한 지경에까지 이른 장면은 너무나 뜻밖의 상황으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장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장로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혀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던 알료샤는 겨우 장로의 한 팔을 부축할 수 있었다. 장로는 드미뜨리 표도로비치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그에게 다가가자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알료샤는 장로가 기력이 쇠진하여 쓰러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장로는 드미뜨리 표도로비치 앞에 무릎을 꿇더니 그의 발에 대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완전히 조아리며 분명히 의식적으로 절을 했다. 알료샤는 그가 일어날 때 부축하는 것조차 잊을 만큼 얼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장로의 입가에는 가냘픈 미소가 가늘게 빛나고 있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모든 것을 용서해 주세요!」
(140쪽)

장로는 임종하기 직전에 "어제 난 앞으로 그에게 닥칠 위대한 고난을 향해 절했던 것이란다"(504쪽)라고 알료샤에게 일러준다. 장로는 '위대한 고난'이라고 말했다. 드미뜨리가 존속살해의 누명을 쓰고 20년형을 받은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누명을 쓴 것은 '고난'은 될 수 있어도 '위대한 고난'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고난 정도는 되어야 그 말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드미뜨리의 고난 속에 그리스도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 된다.

사실 드미뜨리의 이미지는 소설 내내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이를테면 때때로 알료샤를 만나 선과 악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것이라든지, 누구와도 완전한 심정적 교류에 이르지 못하고 혼자서 표류하고 있다든지 하는 것은 그리스도 생애의 닮은꼴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결과적으로는 드미뜨리의 누명이 소설의 뼈대되는 줄거리라는 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드미뜨리의 누명이 단순한 누명이 아니라 '위대한 고난'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희생'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차근차근 소설을 되짚어보면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미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복음서를 인용하여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의 복음서 12장 24절"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만인의 구원'을 가져왔다면, 드미뜨리의 '희생'은 사람들에게 직관적 양심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두드러지게 받아들인 이는 알료샤다.

인간의 모든 죄를 떠맡고 그 책임자가 되십시오. 벗이여, 바로 그것이 옳은 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에 대하여 만인에 대하여 진정으로 그 책임자로서 처신한다면 그때 여러분은 그것이 진정으로 사실이며, 당신이야말로 만인에 대해, 모든 죄에 대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570쪽)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아도 좋고, 기적이 입증되지도 않고 기대했던 일이 당장 실현되지 않아도 좋다. 하지면 어째서 이런 불명예를, 이런 모욕을 받아야 하며, 어째서 못된 수도사들이 말하듯이 <자연의 법칙을 벗어난> 빠른 부패가 일어난 것일까? (602쪽)

알료샤는 조시마 장로의 아끼는 제자였고, 그래서 소설이 시작할 때부터 이미 종교관이 정립되어 있었다. 이반에게 "반드시 논리 이전에라야만 의미를 깨닫게"(410쪽) 된다고 강조하고 조시마 장로의 연설도 꼼꼼하게 메모하는 알료샤의 모습은 종교적인 측면을 강하게 내보인다. 그는 논리 이전에 그 의미를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조시마 장로가 죽은 후, 그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순간부터 알료샤에게서 종교적인 의무감은 사라져버린다. 처음으로 알료샤는 '왜(어째서)'라는 말을 꺼냈다. 그러나 거기에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결국은 알료샤 자신이 찾아나서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이유는, 알료샤 자신이 잘 알고 있듯이 논리가 아닌 직관을 통해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짧게는 근대주의, 길게는 계몽주의까지 포괄하는 이성(理性)주의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이성에 복속시키고 감성 등의 지표를 소홀히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국에 가서 '죄'의 문제까지를 이성 아래 위치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조시마 장로나 드미뜨리가 보기에 죄는 이성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이성은 죄의 반대자이며, 죄의 은폐자이다. 이성의 입장에서 보면 죄라는 것은 오히려 쉽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죄를 충분히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논리를 두고 상대를 굴복시킬 수는 있어도 설득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은 죄의식의 논리에 굴복당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는 이 이성주의의 최후를 소설 후반부에서 이반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다. 이반은 섬망증이라는 일종의 정신병을 앓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반에게 섬망증이 나타난 경위를 생각해보면, 무신론자의 이성주의가 얼마나 사상누각(砂上樓閣)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섬망증은 두말할 것 없이 이반의 죄의식에서 오는 것이다. 이반이 실제로 아버지 표도르를 죽인 사실이 없다는 것은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렇듯 직관이란 항상 논리보다 선행하기 때문에 가장 철저한 이성주의자였던 이반까지도 어쩔 수 없이 스스로의 직관에 종속적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죄는 이성보다도 마음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드미뜨리는 알료샤에게

이성의 눈에는 치욕으로 보이는 것도 마음의 눈에는 끊임없이 아름다움으로 보이니까. 그러니 아름다움은 소돔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아름다움은 소돔 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넌 그 비밀을 알고 있니? 아름다움이란 무시무시한 것일 뿐 아니라 비밀스러운 것이란 사실은 정말 끔찍스러워. 거기에서는 악마가 신과 싸움을 벌이고 있고 그 싸움터는 다름아닌 인간들의 마음이지. (198쪽)

여기서 아름다움은 '치욕'이나 '죄'와 지나치게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이성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에 아름다움으로 비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소돔" 속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선악의 싸움터에서의 죄를 말하는 것인데, 그 싸움터란 "다름아닌 인간들의 마음"이라고 드미뜨리는 규정한다. 이 철학적인 내용은 드미뜨리가 논리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떠올린 것이다.

그런 직관은 결국 꿈과 같은 것이다. 실제로 드미뜨리는 판결 직전에 가서 '아귀(餓鬼)'와 관련된 꿈을 꾼다. 여기서 '아귀'의 꿈을 다른 사람이 아닌 드미뜨리가 꾸었다는 점은 상당히 중요한 기능을 한다. 가령 이반이나 알료샤가 '아귀'의 꿈을 꾸었다면, 소설의 전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만약 이반이 '아귀'의 꿈을 꾸었다면 그는 오히려 그것을 바탕으로 신없음을 증명하려 들 것이다. 혹은 최소한 무관심한 신(해서 쓸모없는 신)을 상정하려고 할 것이다. 또 만약 알료샤가 '아귀'의 꿈을 꾸었다면 그는 여전히 의심과 고민에 빠져 있을 것이다. 조시마 장로의 임종 이후에 알료샤가 '왜'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던졌음은 아까 지적한 바이지만, 그런 알료샤의 심경은 아직까지도 극복되지 못하고 '경험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미뜨리는 직관과 행동이 사고보다 항상 앞서는 사람이다. 드미뜨리는 그 꿈 속에서 직관적으로 "지금부터는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무언가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890쪽)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드미뜨리가 그들보다 위에 군림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자신을 나눔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일찍이 조시마 장로가 "인간의 모든 죄를 떠맡"(570쪽)으라는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드미뜨리에 이르러 몸으로 (꿈에서나마) 실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드미뜨리는 '희생'했다. 드미뜨리의 희생은 누구보다 알료샤에게 특히 의미있는 것이었다. 신의 존재와 종교의 규율에 대한 알료샤의 풀리지 않던 호기심은 드미뜨리의 희생에 이르러 말끔히 씻겨진다. 알료샤에게 모든 것은 지금껏 선험적으로 존재해왔지만 여기서부터는 경험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예전의 알료샤는 "어쩌면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지도 모릅니다"(393쪽)라는 식의 불명확한 모습을 보였다. 선험적으로 주어져있던 진리는 스스로를 주장하지 못하므로 항상 '의심'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데까르뜨의 회의(懷疑)도 '방법적 회의'라고는 하지만, 그의 전존재의 고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데까르뜨의 경우는 그래도 신뢰할 '이성'이 있었지만 알료샤는 그보다 더 막막한 지경이었다.

그러나 드미뜨리의 '희생'은 알료샤에게 모든 것을 분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왜냐하면 드미뜨리는 모두가 서로에 대해서 죄인이라는 조시마 장로의 설교를 몸으로 체현해냈기 때문이다. 드미뜨리적인 몸의 진리는 조시마적인 말의 진리보다 훨씬 명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거기서 조시마 장로가 드미뜨리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했던 이유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라고 봤을 때, 죄와 더불어 꼭 필요한 개념은 사랑이다. 드미뜨리와 까쩨리나가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 대목이나 이 소설의 또 하나의 줄기였던 꼬마들이 일류샤를 잊지 않겠다고 하는 부분은 결국 '사랑'과 연관될 수밖에 없는 몸이다. 그러나 사랑은 논리로 환원되지도, 추상으로 떨어지지도 않는 구체적인 어떤 것이다. '사랑'은 어디까지나 직관적이면서 경험적인 것이다. 여기에 와서야 얄료샤는 드디어 "그래, 우린 틀림없이 부활할 거야. 그리고 다시 만나 기쁘고 즐거웠던 지난날을 이야기하게 될 거야!"(1354쪽)라고 확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카인이 인류 첫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스스로의 직관으로 그것이 죄임을 깨달았던 것과 유사한 것이다. '죄의 역사'로서의 성서의 역사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보다 직관적이고 경험적인 역사로 바뀐 데서, 우리는 이 책이 지니는 윤리·도덕적 의의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열린책들

Posted by 엔디
이문열 평역 삼국지의 잘못옮긴 부분을 지적하고, 삼국지와 관련된 속설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책 자체의 목적이 앞의것에 있었고 서문이나 책겉의 광고글도 모조리 앞엣것에 대한 것이지만, 뒤엣것도 사실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특히 『유세명언喩世明言』이라는 소설집에 실렸다는, 사마모가 한나라 건국시의 영웅들을 삼국시대에 등장시켰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있는 이야기거리다. 이를테면, 한 고조를 도와 한나라의 건국공신이 되었던 한신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니 후한 말에 조조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한 고조 유방은 헌제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고 사마모가 염라대왕을 대신하여 판결한다는 식이다.

책의 앞부분은 역시 이문열 삼국지의 틀린 부분을 지적하는데 많은 힘을 쏟는다. 이문열이 터무니없게 옮긴 부분은 생각보다 많았다. 가령, 고대 중국어에서 "무장대소撫掌大笑"는 본래 박장대소와 같은 뜻인데 이를 "손바닥을 쓸며 크게 웃었다"라고 옮긴 부분은 현대 중국어에서도 무撫가 애무愛撫와 같이 "쓰다듬다"는 뜻으로 자주 쓰이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춘추 시대 초나라의 성득신成得臣을 "일껏 얻은 신하"라고 한다든가, "예양중인국사지론豫襄衆人國士之論"은 "예양의 중인국사론"이라는 뜻인데 "국사國士"를 아예 빼먹고 "예·양 땅의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고 옮긴 것 등은 옮기는 이의 성실성을 망각한 처사라 할 만하다. 성득신이라는 사람은 본래 중국 역사나 역사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은 나는 모르니까 뭐라고 할 말이 없지만, 예양은 사마천 『사기史記』 '자객열전'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인물인데 이를 잘못 옮긴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유종호 선생은 『시란 무엇인가』의 「숨어있는 부호」에서 '숨어있는 부호'를 읽지 못하면 "두세 겹의 목소리와 울림"을 읽지 못한다고 했다. 유종호 선생이 직접 예를 들고 있듯이 그리스도가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한 것을 당시 사람도 못 알아들었는지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마태복음 27:47)라고 하지만, 사실은 시편 22편 1절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 말을 알지 못하면 이성복의 「정든 유곽에서」의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裸身에 못박혀요 /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 보여 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昇天하면 / 나는 죽음으로 越境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 시집 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다.

또, 나귀의 얼굴에 '제갈자유諸葛子瑜'라고, 얼굴이 길기로 유명했던 제갈근의 성과 자字를 써놓으니 그 아들인 제갈각이 거기다 "지려之驢"라고 써서 아버지의 명예를 구했다는 것이, 나귀를 노새라고 옮기는 바람에 성적인 농담이 되어버렸다는 것도 흥미있는 이문열의 오류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저자는 전문 한학자도 아니고 대학을 나온 사람도 아니지만, 삼국지를 열렬히 좋아하는 재중동포라는 조건이 읽기 괜찮은 책을 낼 수 있게 한 듯 싶다. 사실관계를 밝히거나 새로운 것을 알려주는 책에 적극적인 의미의 '평評'을 하기는 힘들다. 장점이라면, 지나치게 긴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원문을 소상히 인용하여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독자가 어느 부분이 잘못 옮겨진 부분인지를 쉽게 알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상투적인 비유나 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눈감아줄만한 정도다.


삼국지가 울고 있네
리동혁 지음/금토

Posted by 엔디
과감하게 중편이나, 장편이라도 좀더 짧게 압축시킬 수 있는 작품이다. 수많은 옛날 헐리우드 영화가 우리 눈을 어지럽히고, 그 배우들의 이름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 많은 영화제목을 빼고 나면, 이 작품은 그저 옛날엔 참 좋았지 류의 과거를 아름답게 재구성하는 회고소설에 불과해질 것이다.

회고소설? 하긴 어떤 이는 이 소설을 회고소설이라고 부를 것이고 어떤 이는 이 소설을 표절에 대한 소설이라고 부를 것이지만, 이 소설은 기실 그 아무 것과도 관련이 없다. 영화가 삶의 한 부분이었던 그 당시를 애정어린 손길로 재구성해내고 있으면서도, 항상 '지금-여기maintenant-ici'를 잊지 않고있는 작가의 펜은 헐리우드 키드가 느꼈던 '고스트幽靈 현상'과는 정반대되는 방향을 가지는 것이다.

꿈을 이야기하면서 현실을 생각하는 '나'와 현실을 살면서 꿈만을 생각하는 헐리우드 키드의 삶 중에 어느 삶이 더 훌륭하다거나 위대하다거나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째서 '나'는 현실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헐리우드 키드는 어째서 현실을 무시하지도 못하면서 애써 도외시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보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덧) 권성우 씨가 붙인 책끝의 해설은 그야말로 불필요한 해설이다. 초등학생 독후감처럼 줄거리 재구성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1993. 1. 9
안정효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민족과 문학사, 1992)를 읽다. 이 소설의 문제점은 주인공 임병석이 어떻게 '헐리우드' 방식의 삶과 '키드' 상태를 벗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환상과 실제를 구분하지 못하여, 어른이 되어 현실의 삶을 대변하고 책임지지 않으려는 임병석이 어떻게 어두컴컴한 극장(환상과 도피)을 나와 집(현실과 책임)으로 돌아오는가 보여주는 것이 이 소설의 관건이다. 작가는 그러나 '패스티스pastiche'된 시나리오 한 편을 짜깁기해놓고 임병석을 죽이는 것으로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마감시킨다. 그러므로 임병석이 '헐리우드' 방식의 삶과 '키드' 상태를 벗어났느냐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자명해진다. '패스티시'란 '헐리우드' 특유의 문법이며, '패스티스' 자체가 아직은 예술가로 독립하지 못한 상태 즉 '키드'의 예술이겠기 때문이다.



헐리우드키드의 생애
안정효/오늘


Posted by 엔디
TAG 서평,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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