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책/詩 18

현대시와 우리: 노혜경『뜯어먹기 좋은 빵』

現代詩는 낭만을 배반합니다. 近代의 詩는 낭만을 긍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면서 이중적인 태도를 취해 왔지만, 현대시에서 그런 것은 통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제 똑.똑.해졌기 때문이죠. 센티멘틀이 바로 낭만임을 알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낭만, 즉 로망roman이란 말은, 사실 불어에서는 소설, 즉 이야기란 뜻이거든요. 낭만은 통속적 이야기, 전개가 뻔한 이야기, 그것입니다. 삶은, 삶은 그것과 어떤 관계일까요. 그것은 인환의 말대로 "(인생이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것일까요?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이 대목에서 인환에게 박수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인환은 그렇다면 이미 시인은 아닙니다. 詩는 새로운 삶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혁.명.시.란 419, 518, 1789..

타오르는책/詩 2004.10.01

나르시시슴과 그 확장: 김혜순 시 다섯 편의 분석

김혜순의 시는 '몸의 시'이다. 인간이 육체와 욕망을 발견하게 된 것이 르네상스 이후라고 한다면 그때부터 생산되었을 수많은 시들에 몸의 묘사나 언급이 안 나올 리 없지만, 김혜순의 시를 '몸의 시'라고 하는 것은 그보다 더 나아간 의미에서이다. 대개의 경우, 시에서 나타나는 몸은 주체이거나 대상이다. 1인칭의 몸이 다른 대상을 욕망할 때, 그 '몸'은 주체의 몸이다. 또 1인칭이 3인칭의 몸을 욕망할 때, 그 '몸'은 대상의 몸이다. 그런데, 김혜순의 시에서 '몸'은 주체이자 곧 대상이다. 이 강렬한 나르시시슴narcissisme, 그것이 김혜순 시의 본질이다. 김혜순 시에서는 특징적으로 물의 이마쥬가 무척 강렬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거기서 물의 이마쥬는 자세히 살펴보..

타오르는책/詩 2004.09.04

유쾌한 여담: 정민『한시 미학 산책』

정민 선생님의 『한시 미학 산책』을 읽었다. (『정민 선생님과 함께 읽는 한시 이야기』를 지하철에서 하도 많이 발견한 탓에 '정민 선생님'이 굳어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대개 '선생' 정도로만 이를텐데. 하지만, 훌륭한 책을 쓴 사람은 '선생'보다는 '선생님'이 옳다. 고등학교 시절 은사님은 중국에서는 존경의 뜻으로 '子'를 붙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선생님'을 붙인다고 하셨다.) 한자와 한문문법에 익숙지 않아 보다 깊은 독서를 하기는 힘들지만, 그런 나에게도 이 책은 재미있으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책이다. 일주일에 한 편씩 한자 공부를 겸해 한시 한 편을 보면 좋겠다. 잊지 않으면 말이다. 여담이지만, 『한시 미학 산책』에 모란과 고양이에 얽힌 설명이 나온다. 이야기의 시작은 당 태종이 선덕여왕..

타오르는책/詩 2004.08.04

율격의 방기放棄: 김용택『그 여자네 집』

좋은 시집이 가져야만 하는 덕은 사색과 운율과 새로움이다. 그 중에서 시를 시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운율이다. 운율韻律은 그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운韻과 율律이다. 운韻을 쓰지 않는 우리시에서는 율律로만 보더라도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은 좋은 시집이 가져야만 하는 사색과 운율과 새로움을 모두 방기放棄하고 있는 시집이다. 그 중에서도 운율을 깡그리 망각하고 있다. 그의 시가 이른바 산문시poème en prose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산문시도 훌륭한 운율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여자네 집』의 산문시는 그런 운율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방금, "『그 여자네 집』의 산문시"라고 말했다. '김용택의 산문시'가 아닌 이유는 그가 이미 훌륭한 산문시를 우리..

타오르는책/詩 2004.01.13

분석된 시: Brecht『시의 꽃잎을 뜯어내다』

브레히트가 시에 대해 가진 생각은 아주 독특하다. 문학과 예술의 무용성無用性을 강조하는 일군의 예술가와는 달리 브레히트는 문학 역시 써먹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브레히트의 첫 시집인 『가정기도서』는 "이 가정기도서는 독자들이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이 시집은 아무 의미없이 처먹혀서는 안된다"라는 사용지침서를 가지고 있다. 브레히트가 시의 사용가치를 중요시하는 것은 그의 서사극 이론의 핵심인 '낯설게하기효과Verfremdungseffekt'와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사실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의 소중한 점 가운데 하나는, 모든 면에서 신비주의를 배격한 브레히트가 시인들에게 하는 충고이다. 책의 표제로도 쓰인 '시의 꽃잎을 뜯어내는 일'은 시를 하나하나 분석하는 일이다. 그는 꽃이 꽃..

타오르는책/詩 2003.05.29

죽음의 시, 시의 죽음: 허만하『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김구용 선생이 옮긴 『삼국지 연의』를 사러 헌책방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보니 나올 당시 신문에서 꽤 많이 떠들어댄 것 같은데, 왜 내 기억속엔 남아있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몰랐던 처음에는 그저 책꽂이에 꽂힌 걸 보고 제목이 좋았고, 꺼내서 겉을 살펴볼 때는 책의 디자인과 장정이 마음에 들었다. 문학동네나 민음사에서 나오는 하드커버 시집과는 달리 품격이 있어보였다. 표지에 다른 유치한 디자인 없이 시를 넣어, 그 시만으로 표지가 되게 하는 것도 좋았고, 그걸 제목 그대로 수직성있게 배열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무턱대고 살 수는 없었다. 책장을 넘겨 몇 편의 시를 보았다. 느낌이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이지만, '흉내내는' 시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늦가을 투명한 바람..

타오르는책/詩 2003.05.24

『살아남은 자의 슬픔』- Brecht (나의 어머니)

김광규 시인이 옮긴『살아남은 자의 슬픔』(한마당)을 읽었다. 널리 알려진 그의 여러 시편들보다 오히려 내 마음을 끄는 것은 다른 것들이었다. 「울름의 재단사」는 몇 달 전에 읽고서 멋지다고 생각해오던 것이지만, 오늘은 새로운 좋은 시를 발견(!)했다. 시가 좋다는 것은, 함축성이 뛰어나 여러 가지로 읽힐 수 있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라, 그 수많은 읽힘이 모두 타당하도록 진실성이 있다는 뜻이다. 나의 어머니Meiner Mutter (1920)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여기서 '가볍다'는 것은 물리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

타오르는책/詩 2003.04.19

아름다움으로서의 시: 서정주의 초기시

- 정소남은 난의 노근을 드러내어 亡宋의 한을 그렸고, 조맹부는 훼절하여 元에 출사했지만, 정소남의 난초만 홀로 향기롭고 조맹부의 송설체가 비천하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未堂徐廷柱西紀二千年十二月二十四日聖誕節前夜死去. 當時我年二十一也. 서정주는 흔히 '생명파'로 명명되는 시인이다. 과연 그의 시에서는 생명에 대한 집착과 열의가 지속적으로 나온다. 생명이라는 것에 대한 계속되는 탐구는 우리 삶의 의미를 밝혀줄 것도 같다. 그의 초기시에 보이는 여러 시어들은 젊은 날들의 타오르는 생명에서 점차로 나이먹어가는 생명의 모습을 보여준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뿐이었다. 어매는 달을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밑..

타오르는책/詩 2001.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