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9.24 길의 지식, 거리의 지혜: 보라 《로드 스쿨러》 (14)
  2. 2004.08.02 비논리적 설득: M. Moore 《화씨 9/11》

미투데이를 통해 보라 감독의 《로드 스쿨러》를 접하게 되었다. 흔히 '탈학교청소년' 또는 '홈스쿨러homeschooler'라고 불리는 이름을 거부하고 '로드 스쿨러roadschooler'라는 새 이름을 원하는 청소년-청년들의 이야기였다. 예술가들조차 거리를 버리는 이 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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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는 한 시작詩作 메모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전집, 333):

「밤눈」을 쓰고 나서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만약 시 속에 존재와 삶의 비밀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단 몇 퍼센트만이라도 믿는다면, 우리는 이 '로드스쿨러'들을 주목해야 한다. 지금의 학교 교육은 기형도가 말한 '자연'과 '거리' 가운데 어느 하나도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은 성장이 아니라 경쟁을 말하고, 믿음과 잠언이 아니라 암기暗記를 말한다. 나는 경쟁과 암기가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그 나름대로 중요한 가치일 터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들 속에 매몰되는 다른 소중한 가치들이다.


시 「밤눈」이 묘사하고 있는 거리는 만만치 않다. 시인은 밤눈에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고 말해준다. 거리는 겨울이고, 그곳에 눈보라가 친다. 사시나무가 떨고 있고, 썩은 가지들은 엎드려 있다. 은실들은 엉켜 울고 있다. 그러나 밤눈은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 또 다른 사랑을 꿈꾸"고 있다. 그러면서 밤눈은 춤을 춘다. 시인은 궁금하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이를테면 로드스쿨러들은, 약간은 무책임한 비유이지만, 그 겨울과 눈보라 속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이다. 길의 지식과 거리의 지혜는 눈보라와 무관치 않다. 고통에 기반한 이 아름다운 지혜들은 삶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통 속에서도 춤을 출 수 있고, 그 속에서도 사랑을 꿈꿀 수 있다. 이런 춤과 사랑이 특이하게 보인다면, 오랜 인류의 삶을 조금만 더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본래 모든 축제란 슬픔 속에서,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내 생각에, 보라 감독의 인도 기행은 아마 그 고통과 축제가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볼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야위어 있거나 물에 잠겨 있었으며, 그들은 느릿느릿 살고 있었고 자유로웠다. 보라 감독은 그들을 "친근했다"고 하고 "행복의 속도"에 대해 말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적용될 행복의 공식을 알고 있었고, 그 공식이 옳다는 것을 믿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행복했다. 그것이 거리의 지혜였을 것이다.


거리의 지혜는 자유롭지만, 마찬가지로 책임이 따른다. 보라 감독이 말하고 싶어하는 로드스쿨러는 기성 권력에 반대하는 단순한 우상파괴주의자가 아니다. 그들은 남들이 유예한 자유를 미리 '쟁취'하면서 자유에 따른 책임 역시 함께 '쟁취'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지치면 서가에서 소설을 찾아 읽거나 멀티미디어실에서 영화를 본다는 로드스쿨러도 있었다. 책과 영화 속에 공부한 내용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들은 자유가 분명 통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문예창작, 사회과학, 만화, 애니메이션……. 그들이 하고자 하는 공부의 목록 일부다. 그들은 학교를 뛰쳐 나왔지만, 학업의 목표를 위해 수능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물론 이와 같은 '성실 모드'로만 이들을 평가하는 것은 성급하다. 아직 길을 찾고 있는 로드스쿨러도 있고, 모르긴 해도 잠깐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거리에서 삶과 직접 부딪혀 본 그들이 오히려 더 '책임'에 민감하고, 더 고민을 거듭하는 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밤눈이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듯이.

로드스쿨러들이 명성이나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보라 감독은 책을 출간함으로서 사회적 시선의 방패막이를 하려고 했고, 산은 대학에 감으로써 주변의 시선을 극복하려 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나로서는 이것이 로드스쿨러들의 어쩔 수 없는 인식이라기보다는 아직까지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인식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로서는 그들 가운데 많은 숫자가 대학에 갔으면 좋겠다. 다름을 용인하지 않고, 올바름을 고민하지 않는 이 사회의 주목을 끌면서 그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길을 그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얼마 전부터 공부한답시고 다시 찾아간 대학은 '캠퍼스 리쿠르팅'이 한창이었다. 보라 감독이 말하는 '취업 준비소'의 가장 첨예한 모습이다. 그 가운데 '동아리 리쿠르팅'도 보였다. 후배에게 물었다:

"아니, 동아리도 리쿠르팅을 하나?"
"요즘 신입생 잡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그래? 요새 애들은 동아리를 잘 안 하나 보지?"
"아뇨, 하긴 하는데,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동아리는 잘 하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이 로드스쿨러들이 대학에 적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해보건대 그래도 대학은 사회 다른 부분보다 더 순수한 곳이었고, 세계를 바꾸기 위해서는 대학부터 순수의 모습을 찾아가야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4·19를 믿고, 68을 믿는다. 그래도 거리와 자연의 힘이 살이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3

다큐멘터리가 조금만 더 친절했으면 좋겠다. 굳이 단락를 나눌 필요는 없지만, 대략 주제가 어떻게 흘러간다는 정도만은 자막으로 살려 줬으면 어떨까.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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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Michael Moore의 «화씨 911»은 다 알다시피 깐느에서 처음으로 황금종려상la palme d'or을 받은 첫 기록documentaire 영화다. 드림웍스의 야심작 «슈렉»조차 빈 손으로 돌려보낸 '오만한' 깐느가 선택한 기록 영화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그 속에 엄청나게 극적인dramatique 폭로가 있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 정도일까. 혹은 이라크 침공의 도덕적·절차적 문제를 조목조목 파고들어 부시 대통령이 직접 그 영화를 보더라도 승복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까.

아니다. 이 영화에 가득찬 것은 반어와 풍자다. 여러 번 기사화된 무어 감독의 발언에서 짐작할 수 있는 그의 비판방식 그대로를 이 영화에 담은 것이다. 그리고, 그 비판방식은 사실 길고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에서 몰리에르를 거쳐 지금까지 내려온 이 흥미로운 양식은, 그러나 신뢰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이니, 꼭 민감한 폭발물같은 것이다. 가령 우리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에 동의하기 힘든 것이다.



무어 감독은 여기서 20세기 후반 이후에야 생각해낼 수 있는 방법-비디오 편집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특히 미국의 대통령과 행정부에 대한 비판에 무척 적절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보이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찍은 수많은 홍보비디오나 기자회견, 국무위원들의 답변, 보좌관의 발언, 국제회의에서의 주장 등의 자료 수집은 그 자체로 비판의 일부로 기능했다. 왜냐하면 부시 행정부가 너무도 자주 말을 바꾸고 있음을, 그 자료는 여실如實히, 아니 사실 그 자체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 풍자 양식은 ‘그들’의 양복에 담긴 권위주의적 신뢰성을 무너뜨리는 데도 상당부분 공헌하고 있다. 양복을 입은 채 기자회견실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signifié와 상관없이 어떤 특정한 모양signfiant을 갖는다. 우리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은 그 모양이다. 그러므로 권위주의적인 그 모양을 깨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특정한 발화상황과 떼어놓고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풍자는 여기서 큰 힘을 발휘한다.

이상하게도 실패하지 않았던 사업가로서의 조지 W. 부시와 미국의 대통령으로서의 조지 W. 부시 사이의 '유착관계' 역시 감독이 공들여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는 의혹제기 수준이므로 결코 성공적이랄 수는 없다. 풍자 영화는 바로 이런 부분에서 조심해야 한다. 부시 반대파들끼리 웃고 즐기려고 영화를 만든 게 아니라면, 이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설득은 오히려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건 이 영화의 장점이자 약점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이라크전 참전 군인들에 대한, 그리고 이라크전 전사자의 가족들에 대한 인터뷰다. 이 인터뷰들은 상당히 감정적이어서 감독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조차도 스스로의 입장을 지킬 수 없게 만드는 면이 있고, 더구나 거대담론에 흡수되어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을 개개인의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 복원해서, 보다 삶에 밀착한 관점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더구나 그것이 부시의 관점이 아니라는 점까지도 말이다. “부모나 형제, 또는 친척을 잃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슬프군요it pains me.”

그러나 이 영화의 기법과 방식은 무척 단순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영화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들조차 돈만 있다면 만들 수 있는 수준의 영화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의 이 평가가 이 영화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내 스스로의 평가를 보며 오히려 대학생들의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대학생 때의 정신으로 돌아간다면. 무어 감독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 영화는 내게 내가 오래 간직하고 싶은 대학생 정신l’esprit universitaire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였다.

덧.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아픈 부분은, 미국의 ‘대량살상무기’에 의해 숨진 이라크 아기의 모습도, 전사한 미군의 모습도 아니다. 세계무역센터 빌딩의 희생자도, 희생자 가족도 아니다. 전쟁에 참전해 전쟁의 실상을 알게 된, 스스로를 오랫동안 공화당지지자였던 사람이라고 소개한 한 상이 군인이, 앞으로는 민주당 열성당원이 되겠다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기자에게 다짐하는 부분이었다. 그에게는 그 둘 외에 다른 선택이 없는 것이다. Où se trouve la démocratie?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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