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분별한 한자어나 외래어의 사용은 분명히 언어의 양극화를 심화시켜 정보의 불균형을 낳는다. 정보가 민주적으로 배포되지 않는 곳에서 세계는 평평하지 않다. 때문에 한자어나 서양 외국어 독해에 어려움을 겪는 대중들에게 외래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운동은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이를테면, '국어순화' 운동의 가장 큰 성과로 생각되는 '갓길'이 그렇다. 숄더shoulder나 노견路肩이라고 하면 썩 잘 다가오지 않는 개념이 갓길이라고 하면 한눈에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게다가 갓길은 숄더나 노견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말이다. 정과리(1998, 38)는 "'노견'이라는 가금家禽 종자 같은 이름을 벗어던지고 새로 차려 입은 우리말이 상큼한 여성성을 연상케"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립국어원에서 운영하는 우리말 다듬기 사이트에서는 매주 외래어 하나씩을 골라 한국어 갈음말(대체어)을 내놓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갈음말이 그대로 표준어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 말이 널리 쓰이면 표준어의 지위를 획득하여 사전에 실리게 되는데, 이 때 최초 제안자의 이름도 함께 넣는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낱말들은 이미 상당한 정도로 쓰이고 있다. 예를 들어, 댓글reply이나 누리꾼netizen, 다시 보기vod 등은 일반은 물론 몇몇 언론에서도 쓰이고 있으며, 영화헤살꾼spoiler이나 참살이well-being, 늘찬배달quick service도 적지 않게 사용되고 있다.

아름다운 말과 알맹이가 없는 말

문제는 우리말 다듬기에서 다듬은 말 가운데 '갓길'처럼 아름다운 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갓길이 아름답다는 것은 단지 그 말의 말맛語感이 좋다는 뜻만은 아니다. 갓길은 그 사이시옷의 매력을 한껏 돋우는 발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번 들으면 누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 만한 직관성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설명적이지 않고, 길이도 짧다.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자랑차게 뽐내는 낱말로 손색이 없다.

우리말 다듬기에서 '갓길'처럼 아름다운 말을 찾으라면 '댓글'이나 '다시 보기' 따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은 직관적이고 짧으면서도 '댓거리'처럼 알려진 말과 조화가 맞는다. '다시 보기'는 VOD보다 긴 듯하지만, 음절 수는 같으며 video on demand로 풀지 않으면 의미를 알 수 없는 VOD에 비해 훨씬 직관적이다. 또 AOD를 '다시 듣기'로 표현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등 활용도도 높다. 하지만 이런 낱말들은 기실 우리말 다듬기에서 순화하기 이전에도 널리 쓰였던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말 다듬기의 존재 의의는 상당히 축소된다.

어떤 말은 외양은 화려한데 알맹이가 없는 것도 있다. '행사빛냄이'가 그렇다. 한국인들이 격식을 차릴 때 주로 쓰는 '(자리를) 빛내다'라는 동사를 써서 꽤나 화려해보이는 말이지만, 사실 저 말은 '레이싱걸'을 순화한 말이다. 무엇보다 레이싱걸이 행사를 빛내는 사람인지는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는 '-이' 접사를 국립국어원도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본래 '-이' 접사는 명사나 용언의 어간, 어근, 의성·의태어 뒤에 붙어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다. 절름발이는 명사 뒤에 붙은 예이고, 높이는 형용사 어간 뒤에, 먹이는 동사 어간 뒤에, 홀쭉이는 의태어 뒤에, 딸랑이는 의성어 뒤에 '-이'가 붙은 예이다. 요즘 흔히 보이는 '지킴이'나 우리말 다듬기에서 선정한 '…빛냄이'처럼 용언의 명사형에 '-이'가 붙는 경우는 없다. 외래어를 우리말로 아름답게 다듬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알맹이가 사라지거나 규칙이 무분별하게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규칙이 무시되는 것이 외래어의 유입보다 한국어에 더 나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외래어는 한국어 속으로 들어오면서 기존 언어의 규칙보다는 한국어의 규칙 속에 편입된다. 이 경우 외래어는 어휘 수준에서 한국어 속으로 편입되지만, 형태론적 차원이나 통사론적 차원에서는 한국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가령 영어 동사인 lead가 이미 '이끌다'는 뜻을 가진 동사임에도 한국어 내에서는 '리드하다'는 식으로 '-하다'를 붙여서 나타난다. '픽업하다', '프린트아웃하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 '내츄럴하게'에서 볼 수 있듯이 natural은 본래 영어에서의 부사접미사인 -ly를 포기하고 한국어의 문법을 따라 '-하게'라는 어미를 채용하게 된다. 때문에 외래어의 유입이 한국어의 문법을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all-in을 '다걸기'로 옮긴 것도 문제가 있다. 보통 '올인하다'라는 동사형으로 쓰이는 이 말을 '다걸기'라고 옮기면 '올인해'는 '다걸기해'가 된다는 말인가? '다 걸어'면 족할 일이다. 국어의 형태론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무분별한 순화의 사례라고 하겠다.

깁더와 붙갈이소리

해방 이전에 주시경 선생의 제자로 외솔 선생과 쌍벽을 이루었던 김두봉은 아름다우면서도 정확한 말을 만드는 데 뛰어났다. 그는 자신이 지은 문법책 『조선말본』의 증보판增補版을 내면서 『깁더 조선말본』이라 이름붙였다. '깁더'는 '깁고 더한'을 줄인 말이다. 이 '깁더'라는 말은 2007년 김진우 선생이 『언어: 이론과 그 응용』의 새판을 『언어: 이론과 그 응용 깁더본』이라 이름하면서 후대에 이어지기도 했다.

김두봉이 지은 다른 말로는 붙갈이소리가 있다. 언어학의 음운론 용어인데, 파찰음破擦音을 토박이말로 바꾼 것이다. 붙었다가 터지면서 소리가 나지만, 완전히 터지지 않고 갈아서 나는 소리인 'ㅈ', 'ㅉ', 'ㅊ'을 일컫는 말이다. 파찰음보다 얼마나 더 쉽고 얼마나 더 아름다운지 보라.

푸른 바다의 은유와 샹글릴라의 이상향

우리말 다듬기가 다듬었다는 말 가운데 정말 실소를 금할 수 없는 것은 대안시장이라는 말이다. 대안시장은 연전에 널리 인기를 끌었던 블루오션을 다듬은 말이다. 블루오션 전략은 모두 알다시피 경쟁이 많은 피바다 레드오션이 아니라 경쟁이 없는 푸른 바다 블루오션을 찾자는 마케팅 전략이다. 블루오션 전략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은 대안시장이 블루오션 전략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전체를 갈음하기는 어렵다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대안시장이란 마치 기존의 시장과는 전혀 다른 시장을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블루오션 전략은 '비고객을 고객으로 만들라'고 주문하는 등 '대안시장'과 전혀 관계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블루오션 전략의 적지 않은 부분은 기존 고객의 많은 수가 별로 신경쓰지 않는데 원가만 많이 드는 고정관념 속의 재화나 용역을 버리고 고객의 진정한 필요를 찾아 거기에 투자하라는 데에 바쳐진다. 가령 태양의 서커스라는 시르크 뒤 솔레이유는 서커스에서 동물이 등장하는 부분을 버리고 이야기와 곡예를 강화하거나 창조하여 새로운 서커스를 만들어내어 세계적인 인기를 끈다는 식이다. 그러므로 블루오션이 전혀 다른 새로운 대안 시장을 만들어내는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블루오션은 어떻게 한국어로 다듬으면 좋을까? 영어를 처음 배우는 초등학생에게 물어봐도 답은 금방 나온다. '푸른 바다'다. '블루오션 전략'은 '푸른 바다 전략'이라고 부르면 된다. 본래 '블루오션 전략'은 가치혁신value innovation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었던 전략인데, 김위찬 교수와 르네 마보안 교수가 책을 내면서 은유적인 의미를 더해 '블루오션 전략'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이것을 다시 '대안시장'으로 다듬는다면 원뜻에서 한참 멀어지고 만다. '국어순화' 운동이 이런 간단한 은유조차 담지 못하는 것은 확실히 문제다. 원어에서 은유가 도입되었다면 갈음말에서도 은유를 쓰는 것이 당연하다.

또, 아름다운 이름의 고유명사 샹그릴라를 굳이 '꿈의 낙원'이라는 설명적인 용어로 바꾼 것도 문제다. 샹그릴라는 무릉도원, 유토피아, 엘도라도, 그리고 율도국과 함께 사람들이 오래 생각한 이상향의 한 종류인데, 저 이상향들은 각기 다른 문화적 전통과 초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샹그릴라는 샹그릴라일 뿐이다.

맺음말: 민족주의와 심미주의

말이란 관념이나 이념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가는 곳이 곧 길이 되듯, 모든 말무리言衆들이 쓰는 것이 곧 말이다. 외래어를 '순화'시켜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상허 이태준으로 되돌아가 보아야 한다(이태준 1988, 27):

그는 클락에서 캡을 찾아 들고 트라비아타를 휘파람으로 날리면서 호텔을 나섰다. 비 개인 가을 아침, 길에는 샘물같이 서늘한 바람이 풍긴다. 이제 식당에서 마신 짙은 커피 향기를 다시 한번 입술에 느끼며 그는 언제든지 혼자 걷는 남산 코스를 향해 전차길을 걷는다.

이 문장에서 클락, 캡, 트라비아타, 호텔, 커피, 코스 등의 외래어를 굳이 안 쓴다고 해보라. 이 외에 무슨 말로 '그'라는 현대인의 생활을 묘사해낼 것인가? […]

새 말을 만들고, 새 말을 쓰는 것은 유행이 아니라 유행 이상 엄숙하게, 생활에 필요하니까 나타나는 사실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커피를 먹는 생활부터가 생기고, 퍼머넨트 식으로 머리를 지지는 생활부터가 생기니까 거기에 적응한 말 즉 커피, 퍼머넨트가 생기는 것이다.

말은 말무리의 것인데, '국어순화'론자들은 말을 민족의 것으로 치환해버린다. 한국어가 한국어 말무리들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것이 되면, 한국어는 외래어나 한자어를 배격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말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심미적 욕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민족주의는 너무나도 무겁고 심각하기 때문이다.

가령 김우창(1977, 385-386, 388-389)은 '얼'이나 '슬기'와 같은 민족주의적 고유어가 강요하는 외경감에 대해 말한다. '얼'이라는 말 한 마디에서 우리는 자랑스러운 한민족임을 느끼면서 자못 종교적인 열락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런 민족주의 열락에 빠지게 되면 고유어는 하나의 가짜 '심미화'를 형성하게 된다. 발터 베냐민에게 '정치의 심미화'가 그랬던 것처럼(신형기 2003, 180), '얼'이라는 억압적인 말이 가짜 아우라를 갖게 되면서 우리는 그 억압적인 말과 화해하게 된다. 여기서 '얼'이 본래 '어리석어 빠지다'는 뜻의 '얼빠지다'를 잘못 분석해서 생긴 말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민족주의의 가짜 '심미화'에서 벗어나 진짜 한국어의 아름다운 맛을 느낄 수 있는 언어 운동이 생기기를 바란다. 뷔퐁이 "문체(스타일)는 곧 그 자신이다Le style est l'homme même."라고 말한 것은 그저 한 말이 아니다. 언어 심미주의야말로 언어 운동에서 가장 소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우창. 1977. "말과 現實: 國語醇化運動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수록처: 『궁핍한 시대의 詩人』. 김우창전집1. 서울:민음사. 378-390쪽.
신형기. 2003. "남북한 문학과 '정치의 심미화'". 수록처: 『민족 이야기를 넘어서』. 동시대인 총서12. 서울:삼인. 171-197쪽.
이태준. 1988. 『문장강화』. 창비교양문고10. 서울:창작과비평사.
정과리. 1998. "대한국인이 갓길을 침범할 때". 수록처: 『문명의 배꼽』. 문지스펙트럼4-009. 서울:문학과지성사. 38-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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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 하는 이명박 댓글 놀이가 유행이다. 알다시피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에 이은 두 번째 정치 패러디 댓글이다. 민노씨.네 블로그를 통해 이 댓글 문화에 대한 반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명박 댓글 놀이가 찌질한 이유는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 댓글이 이명박이 아니라 이명박을 찍은 유권자들을 향한 풍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찌질하다고 주장하는 글이다. 하지만 나는 이 논의에 동의할 수 없고, 이와 같은 댓글 놀이의 한계는 인정하고서라도 재미있으면서도 일말의 의미가 있는 이 놀이는 계속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표절하면 어때 책 많이 팔아서 경제 살리면 그만이지

경제 살리면 그만이지 댓글



1.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vs. "경제만 살리면 되지."

원문에서 "노무현 때문이다."가 수구 언론을 향한 것인 반면 "경제만 살리면 되지."가 유권자를 향한 것이라고 했는데 무엇보다 나는 거기에 100% 동의할 수 없다. 원문에서 두 풍자의 차이를 판단한 근거는 나타나 있지 않다. 추측컨대 "노무현 때문이다."의 문장에는 노무현이 들어가지만 실은 수구 언론을 향한 풍자인 반면, "경제만 살리면 되지."는 이명박의 언어 자체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아서 언어의 객체와 풍자의 객체가 동일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추측이므로 확신할 수 없다.) 기실 지금껏 "노무현 때문이다."의 풍자성을 오독하고 실제로 그것이 노무현을 비난하는 것으로 인식한 사람들도 꽤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명박 댓글 놀이를 해서는 안 될 이유는 될 수 없다. 무엇보다 "경제만 살리면 되지."가 이명박을 찍은 유권자를 향한 것이므로 찌질하다면,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역시 수구 보수 언론인 조중동을 구독하는 대다수의 국민들을 조롱하는 것이 될 뿐이기 때문에 그 민주주의적 마인드에서의 찝찝함은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두 풍자의 층위는 똑같은 것이다.


2. 풍자의 힘?

나는 풍자가 큰 힘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본래 풍자라는 것은 패배자의 소극적 저항일 뿐이다. 현실 정치에서 패배한 이가 승리자에 대하여, 그래도 나는 너보단 이러이러한 면에서 낫지, 하고 자위하는 것 정도가 일반적인 풍자의 모습이다. 이상섭 선생은 『문학비평용어사전』의 '풍자Satire' 항목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1997, 280-281):

이처럼 풍자하는 사람은 풍자의 대상에 대하여 우월한 태도를 유지한다.
[…]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의 도덕적, 지적 표준은 특수한 교리에 근거하거나 보통사람들이 올려다 보지 못할 만큼 높은 것은 아니다. 풍자가의 수준은 그의 독자들이 암암리에 자연스럽게 수긍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고, 그가 공격하는 대상은 독자들도 역시 불찬성, 경멸하는 대상이다. 즉 풍자가는 자신의 입장을 변호함이 없이 독자들을 자기 편으로 갖고 있다. 독자는 풍자가의 공격에 자연스럽게 기꺼이 합세한다.
[­…]
현실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통하여 사회악을 제거시키겠다는 풍자의 목적은 실제로 실현되지는 않았으니, 그런 의미에서 풍자는 언제나 실패작인 셈이다.

즉 좀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풍자는 ① 내가 대상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에서 출발하지만 ② 실제로 풍자가인 내가 그렇게 높은 수준인 것은 아니고, ③ 풍자의 독자 역시 새로이 유입되기 보다는 같은 편끼리의 낄낄거림에 불과하며 ④ 그런 점에서 풍자는 현실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데에는 항상 실패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령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수준 높은 풍자 예술의 경우는 예외이다.)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자신이 있는 정권은 풍자를 크게 탄압하지 않는다. 김지하가 김수영(1981, 184)의 「누이야 장하고나! - 新歸去來7」의 "누이야 / 풍자諷刺가 아니면 해탈解脫이다"를 (아마 의도적으로) 오독하여 「풍자諷刺냐 자살自殺이냐」를 씀으로써 풍자를 비장하게 만들어버렸지만(김지하 1993, 141-159), 사실 풍자는 잠깐의 웃음만 줄 뿐 전망이 부재한 양식이다. 그러니까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나 "경제만 살리면 되지." 모두 그런 풍자의 약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잠깐 촌철살인의 웃음이나 '썩소' 한 방 날려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되는 것이 풍자다. 풍자의 역할은 거기에서 마치는 것이다. 전망을 보고 비전을 보려면, 미안하지만 누리꾼들 스스로가 풍자에서 더 나아가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3. 그럼에도 풍자의 힘!

쓰다보니 풍자를 너무 깎아내린 셈이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이만한 풍자만으로도 일단 만족한다. 아직 누리꾼들이 (어느 정도는 재미로 빠져들기도 하겠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판단하고 있거나, 최소한 이 풍자 댓글 놀이를 통해 사후에라도 판단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쥐띠해인데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되지...

ⓒ여름하늘, http://skysumm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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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수영. 1981. 『김수영 전집』. vol. 1. 詩. 서울:민음사.
김지하. 1993.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시선집』. 개정판. 창비시선 33. 서울:창작과비평사.
이상섭. 1997. 『문학비평용어사전』. 신장판. 서울: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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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댓글, 국내 포털은 흉내낼 수 없는 그 무엇


1

한국 포털의 댓글은 이제 아는 사람 사이에선 유명하다. 박노자 교수는 "악플"의 문화라는 글을 통해서 유별난 한국의 악플 문화에 대한 진단을 내린 적이 있는데... 진단 내용은 또 그렇다 치고 가령

한국 문화를 공부하려는 외국 학생에게는 - 어느 정도 성숙된 학생이 이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논문을 써야 할 일만 아니라면 - "네이버에서의 기사 댓글들을 읽어보라고" 교원의 양심을 걸고 권고할 수 있습니까? 저 같으면, 학생에게 "한국" 그 자체가 싫어질 것 같아서 절대 권고 못할 것입니다. 특히 "외국"이 개입되면 아예 입에 올리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하도 많이 나오기에 저만 해도 참아 못읽지요. 예컨대 한국 여성들과 가끔가다 추잡한 일을 벌이는 일부 영어 강사 관련의 기사가 나간 적이 있었는데, 상당수의 댓글은 "양넘에게 ... 벌려주는 우리 나라.... 문제야! 대한민국의 진정한 남성들이여, 저 ...들을 정신차리게 교육시키고 혼내주라!"는 식이었어요. 예컨대 외국 여성이 이와 같은 문구를 읽어서 우리 국내 마초주의의 깊이를 여실히 느끼게 되면 계속 한국학하기가 쉽겠습니까? 제 학생에게도 몇 번 현실적 문제로 나타난 부분이고, 저로서 아주 두려운 부분입니다.

라고 걱정하는 부분을 보면서는 악플의 심각성이 극에 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동네 창피하다.', '국가적 망신이다.'와 같은 유교적 국가주의의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바깥에서 보는 한국의 댓글 문화가 저렇다면, 저게 바로 한국에 대한 선입견 없는 객관적 판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득해졌던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속한 공동체의 수준이 이 정도구나 하는 생각의 확인remind이었다고 할까. (박노자는 다른 글에서 아프간 피랍 사태에 대한 한국 누리꾼들의 반응을 실은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지誌의 기사를 링크하고 있기도 했다.)

한국의 댓글 문화가 아주 건전하지는 못하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정부에서도 고심 끝에 대형 포털 등에서는 '제한적 본인 확인제'라는 반半실명제를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2

이번에 구글 뉴스(미국판)에서는 메일을 통한 코멘트(댓글과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 게시라는 방식을 시도한다고 한다. 전문가나 관계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고 하는데, '네이버보다 못하다.'라든지 '웹web적이지 않다.'라는 평가도 있고 심지어는 '구글이 뭐만 하면 찬탄하는 건 사대주의가 아닌가?'하는 조금 다른 범주의 평가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상당히 괜찮은 방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와 같은 형태의 구글 뉴스의 코멘트는 실제로 악성 댓글의 부작용을 개선할 뿐만 아니라 매체media의 기능을 어느 정도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도 있다:

1) 먼저 구글 뉴스의 코멘트는 악플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이것은 구글에서 모든 코멘트를 확인한 후에 게시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구글 뉴스에 코멘트를 게시하려면 특정 주소로 관련 메일을 전송해야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번거로운 작업이다. 개개의 악플은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을 통해 이루어진다기보다는 순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번거롭다'는 점에서 이미 악플은 차단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번거로움'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2) 전문가나 관계자의 코멘트만을 게시하므로 코멘트의 질이 높을 수밖에 없다. 구글 검색을 통해 가끔 해외의 포럼forum을 열람하면 상당히 질 높은 대화가 오가는 것을 가끔 볼 수가 있는데, 이와 같은 코멘트 게시의 방식은 이 수준 높은 대화를 통해 그 자체로 하나의 추가 기사나 박스 기사를 읽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줄 수 있다.

3) 만약 기사에 오류가 있거나, 명예훼손 등의 사안이 관련된 경우 구글 뉴스의 코멘트는 상당한 정도로 관련된 문제를 경감시킬 수 있다. 이 경우 언론을 상대로 정정보도청구권이나 반론보도청구권 등을 행사해서 정정 기사 또는 반론 기사를 게제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겠지만, 그 경우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므로 구글 뉴스의 코멘트가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것이다.


3

국내 포털의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댓글 문화의 자유도나 편의도를 중요시하고 있거나, 댓글 문화의 자정 작용을 믿는 사람들일 것으로 짐작된다. 당장 생각해도 구글 뉴스의 코멘트처럼 불편하고 부자유스러운 데다, 일일이 '검열'을 거치는 모양새는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악해지지 말라Don't be evil."는 구글의 모토에는 상당히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글의 모토는 중국 내 서비스를 하면서 중국 정부의 검열 방침을 수용하면서 수난을 받기 시작했지만, 정부의 검열을 받는 것과 뉴스 코멘트의 내용을 확인 후에 게시하는 것은 다르다: 중국 정부와의 타협은 중국 내 서비스를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노린 것이지만, 코멘트에 대한 자체 검열 정책은 말초적인 댓글에 대한 봉쇄를 통해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한국에는 종이 신문이나 TV 뉴스를 보면서 이에 대한 댓글은 어떤 게 달렸을까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건전한 호기심을 넘어 때로는 선정적이고 말초적인 폭력적 댓글을 즐기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그만큼 말초적인 인터넷 댓글은 중독성이 있다. 구글은 그런 식으로 페이지 트래픽을 증가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요컨대, 다소 이상해보이는 구글이 이번 코멘트 정책은 한국적 댓글 문화에 대한 연구를 통해 나온 고육책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덧.

이와 함께 구글 뉴스의 코멘트는 웹페이지의 캐시와 블로거 이외에 사용자생산콘텐츠(User Generated Contents)를 구글의 서버에 저장한다는 점에서 이채로운 서비스로 판단된다. 세계일보 기사에 따르면 저장 기간은 약 30일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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