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욕망이란 이 곳에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 실재로서 현재하는 것을 바란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면 사실 '그대'는 곁에 없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 봐야 한다.

삶의 영원한 항등식처럼,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은 행복한 삶이다. 여기까지 인정한다면, 그 다음 행복의 각론에서 저마다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순서가 남아 있다. 뒤라스의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안 데바레드 부인이 바랐던 것은 그가 속한 곳의 정원과 무도회와 파티에는 없는 것이었다. 데바레드 부인의 행복이란 무엇이었을까. 데바레드 부인은 무엇을 바랐고, 무엇을 욕망했을까.


2

르네 지라르는 모든 욕망은 주체와 대상 이외에 또다른 타자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중세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롤 모델role model인 기사 이외에 스스로 숭배하는 부인dame이 제각기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시각각 자신의 승전보와 결투 결과를 부인에게 인편으로 알리기에 바빴던 기사들에게 있어서 부인이라는 타자는 무척 중요한 삼각형의 꼭짓점이 되는 것이다.

데바레드 부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집은 감옥과 같은 것이다. 데바레드 부인은 그것을 약간 알고 있었다. '약간'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가 아주 미약한 방법으로 그 감옥에서의 정기적인 탈주를 실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매일같이 엄마와 함께 그 도시를 돌아다니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데바레드 부인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감옥이라고 느낀 보다 정확한 계기는 아이가 모데라토 칸타빌레로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 있었던 사건이다.아마 어떤 치정 사건에 관계된 살인 사건임이 분명한데, 어쨌든 이것이 삼각형의 한 꼭짓점이 되어 데바레드 부인의 곳의 감옥에 대한 자의식을 성장시키게 된다.

(여성의 자의식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의 「누런 벽지The Yellow Wallpaper를 알고 있다.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의 데바레드 부인은 안락한 삶 속에서 '누런 벽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3

『모데라토 칸타빌레』가 아름다운 것은 한 부르주아 부인의 일탈이 온전히 말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부인은 한 사내에게 자신의 감옥에서의 일상을 말하고, 자신이 있는 감옥이 얼마나 아름답고 무서운지를 이야기한다(65-66):

"나무가 없는 도시에서 살아야만 해요 바람이 불면 나무들이 울부짖어요 여긴 언제나 줄곧 바람이 불죠 1년에 이틀을 빼놓곤 말이에요 제가 당신이라면 그래요 떠나가겠어요 여기 머물지 않겠어요 폭풍우가 지나간 뒤 바닷가에 죽어 있는 새들은 거의 다 바다새들이죠 폭풍우가 그치면 나무는 더 이상 울부짖지 않아요 목이 졸리는 것처럼 꽥꽥 비명을 지르는 새소리가 해변에서 들려와요 아이들은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지만 전 아니에요 떠나가야겠어요."

마침표도 없이 이어진 문장에서 부인이 말하는 것은 자신의 감옥이다. 그것은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맺고 있으며, 더 이상의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부인의 생각은 끊임없이 피와 죽음과 사랑의 일탈로 치닫는데, 그걸 알아챈 쇼뱅이라는 사내는 이렇게 묻는다(66):

"혹시" 하고 그가 말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는 더 일찍 그 여자를 죽이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이미 말입니다. 말씀해보세요."



4

여자의 감옥은 7장에 가서 절정이 된다. 거기에서는 만찬이 벌어지고 있었고, 10년 동안 남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없는 여자는 술에 취해 만찬에 늦게 도착한다.

7장에서는, 다른 장에서와 달리, 여자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파티란 원래 그런 것이기도 하겠거니와, 여자의 변화나 그 날 밤의 이상한 행동들이 금세 소문이 되어 퍼지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106-107):

안 데바레드는 조금 전 오리 요리를 사양했다. 그렇지만 음식 접시는 아직 그 여자 앞에 멈추어 있고, 그 짧은 순간은 추문이 시작되기에 충분하다. 그 여자는 예전에 배운 대로 거절 의사를 분명히 알리기 위해 손을 치켜든다. 더 이상 권하지 않는다. 식탁 주변에 침묵이 자리잡는다.

[…]

주방에서는 그 여자가 오렌지 소스를 곁들인 오리 요리를 거절했고, 몸이 아프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5

여자의 일탈은 소설 마지막에 와서 완성된다; 여자는 자신을, 죽은 여자와 동일시한다. 두려움 속에서 그 여자가 한 일은 한 남자와 입을 맞추고는 언어적으로 죽는 일이다(118-120):

"전 두려워요." 안 데바레드가 속삭였다.
쇼뱅은 테이블로 다가가 그 여자를 더듬어 찾았다. 찾다가 포기해버렸다.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그 여자가 했다. 여자는 입술이 서로 닿을 만큼 가까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차디찬 그들의 입술은 조금 전 그들의 손과 같이 죽음의 의식을 따라 서로 포개진 채 떨면서 그렇게 머물렀다. 이루어졌다.

[…]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쇼뱅이 말했다.
"그대로 되었어요." 안 데바레드가 말했다.

장-자끄 아노 감독의 영화 탓에 메콩 강가의 '독신자의 방'과도 오버랩되는 이 장면은, 하지만 이미 좀더 위험하고 에로틱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따옴표 안과 밖을 삼투시키는 문장 "그대로 되었다"는 역시 그대로 창세기의 첫 장을 연출하고 있다: "그대로 되니라."

세계의 시작과 소설의 끝, 그 지점에서 어떤 욕망은 끝나고 다른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모데라토 칸타빌레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문학과지성사
Posted by 엔디
책장에서 오랫동안 잠자던 시집을 한 권 꺼내본 적이 있는가. 종이가 바스러질까 조심스럽게 꺼내서, 어딘지 색이 바랜 것 같은 모습에 눈을 껌뻑거린다. 그리고는 촛불 끄는 시늉을 하듯 조용히 입김을 불어본다. 더께앉은 먼지가 날아오르면서 눈을 따갑게 한다. 그렇게 한참을 눈을 비비고 나면, 별 무늬도 없는 장정인데도 제 색을 찾은 시집은, 미켈란젤로의 천정화처럼, 선명하게 윤기가 흐른다. 그러나 그 윤기를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선연하게 물이 흐른 흔적이 있다.



1


제비가 떠난 다음날 시누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제비집을 헐었다. 흙가루와 함께 알 수 없는
제비가 품다 간 만큼의 먼지와 비듬,
보드랍게 가슴털이 떨어진다. 제비는 어쩌면
떠나기 전에 집을 확인할지 모른다.
마음이 약한 제비는 생각하겠지.
전깃줄에 떼지어 앉아 다수결을 정한 다음날
버리는 것이 빼앗기는 것보다 어려운 줄 아는
제비떼가, 하늘 높이 까맣게 날아간다.

- 「제비집」全文

시인은 곳곳에서 먼지 앉은 시집을 발견한다. 그 위에 얹힌 먼지의 두께는 시집이 견딘 시간의 무게를 의미한다. "만큼"이라는 말이 의비하는 바가 그것이다. 그리고 "품다"나 "가슴털"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삶은 따뜻한 삶이다. "마음이 약한 제비"가 아마도 미련을 갖고 몇 번이고 둘러본 제비집의 모습이다. 집이란 기억을 담는 장소이고, 이를테면 몽상의 고향이다. 그리고, 기억은 먼지, 비듬, 터럭, 그리고 가루와 같은 입자로 등장한다.

서정주의 「新婦」에서 우리는 이미 이 '입자의 상상력'을 보았다. 우리는 "매운재"가 "초록 재"나 "다홍 재"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을 때로 받지만, 매운재의 사전적 정의가 "진한 잿물을 내릴 수 있는 독한 재"라는 것을 상기하면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가 견디어야 했던 시간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고, 거기서부터 매운재의 말맛을 다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리의 새가 죽어갔다. 한 가지 표정으로
굳어 있다. 응달에 흩어져 있는 새가 남긴 털들
한때는 새털이었던 털들이 흩어지고
털을 잃은 몸이 웅크리고 있다. 털들은 더 넓은 곳으로
흩어지고, 새의 죽음은 더 넓은 곳으로 퍼진다.
오그라든, 틀이 안 맞는 발가락들, 빛을 잃은 발톱들이 남긴
검은 그림자, 높은 곳에서 반들거리던 털들이 흩어지고
새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문을 열고 줄지어, 뿔뿔이 흩어지는
수십 마리의 구더기…… 검은 점을 하나씩 달고…… 날아다니던
구더기, 엉금엉금 기어간다. 너무 오래 갇혀 지냈다.

- 「구더기」全文

하나의 삶이 다만 많은 입자들로 바뀌어버리는 이 놀라운 환원은, 그 흩어짐을 통해서 더욱 세상에 편재하는omniprésent 것이 된다.

그런데 화자話者는 그 제비집을 헐었다고 했다. 제비가 몇 번이고 아쉬워했던, 자신의 몸을 품어주었던 제비집을 화자는 떠난 다음날 헐어버린다. 여기서 그가 빗자루를 들고 제비집을 허는 이유를 설명해야 할까. 그의 빗자루는 흙가루와 먼지와 비듬, 그리고 제비의 가슴털을 위한 것이다. 그는 마음이 약한 제비의 "상처", 그 기억들을 쓸어버린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비집은 사라지지 않는다. 화자가 제비집을 헐어버렸는지 모르지만, 제비의 기억은 화자가 쓸어버린 제비집 속에 남아있다. 다만 흩어질 뿐이다.


나는 매달려 생을 다 허비하고 말 거야
[…]
나를 가두는 것이 있다면
밑으로 끌어내리는 힘이었다. 알 수 없는 끝내 느낄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천천히 지워져갔다 단단해지면서.

- 「좀약」부분

좀약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흩어지지만 좀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죽어가는 좀약은 자신의 몸뚱아리를 흩으면서 자신의 몸을 퍼뜨린다. 이 시는 「구더기」와 함께 죽음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 시로서 중요성을 가진다. 시간이 우리를 지운다는 것은 쉽게 인식 가능하지만, 지움으로써 단단해진다는 것은 얼핏 이해하기 힘든 명제다.

봉현이 형은 방위병이었다. 그는 한 마리 개구리였다.
죽은 다음에 강해졌다. 강해지기 위해
죽었다. 입을 닫고 눈을 부릅떴다. 살아 남은 者는
약하다, 그래서 울음 주머니가 필요하다


- 「개구리」부분

「개구리」에서도 그와 같은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 "죽은 다음에 강해졌다"는 진술은 그 다음 행의 "입을 닫고 눈을 부릅떴다"는 근거를 딛고 있다. 그는 이제 더이상 울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좀약은, 좀약은 죽음으로써 다만 사라져 없어지지 않는가. 그러나 오래된 장롱을 열었을 때 흠씬 풍겨오는 좀약 냄새를 생각해보자. 그 좀약은 기화氣化됨으로써 더욱 단단해진 것이 아닌지.

「그 노인」에서는 제비가 노인으로 바뀌어 다시 등장하고 있다. 노인이 살던 집 처마끝의 제비집에 시선을 멈춘 화자는, 거기서 다시 노인의 생전 모습을 그려본다.

봄이 왔다. 담쟁이넝쿨 뻗어나와 그 집
흙벽을 덮는다. 봄에 얼어 죽은 노인이 살던 집
처마끝 제비집, 바람에 검불들 흔들린다. 백발의 노인은
꺼칠한 수염을 달고, 마루 끝에 서서 먼 산을 바라보곤 했다.


- 「그 노인」부분

읽는이들는 그 집이 흙벽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유심히 볼 일이다. 흙벽은 그 이름부터가 옛집古家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그 입자인 흙을 쌓아 만들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퇴적형의 기억을 생각하게 된다. 노인이 얼어죽자 담쟁이덩굴은 그 기억의 흙벽을 덮어버린다. 덩굴은, 보아뱀처럼, 기억의 흙벽을 자신의 몸 속으로 완전히 소화시킨다.

우리는 시의 마지막에서 그 노인이 평생을 홀아비로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의 앞부분에 제시된 폐가閉家의 모습으로 봤을 때, 그 노인에게는 후사後嗣가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도 따지 않는 열매들 붉어져갔다."가 갖는 명백한 생식生殖의 의미도 여기서 풀린다. 그 노인은 어쩌면 스스로를 구더기라고 생각했을까.

구덩이에서 알을 깔 수는 없었다
더러운 生을 물려줄 수는 없었다


- 「구더기의 꿈」부분

노인이 얼어죽었다는 데서, 우리는 안락함을 주지 못하는 집의 존재를 새롭게 깨닫는다. 바슐라르의 행복한 상상력과는 달리, 때로는 집도 아무런 구원이 되지 못한다. 자기 집을 얹고 사는 동물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들의 집은 그들에게 힘겨움은 주면서도 진정한 휴식은 되지 못한다.

집이 되지 않았다 도피처가 되지도 않았다

- 「달팽이의 꿈」부분




2

시인에게 진정한 휴식은 오로지 죽음으로만 가능하다. 노인의 죽음 혹은 그 죽음의 공간, 그도 아니면 그 죽음의 기억을 덮은 담쟁이덩굴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 또, 하늘나라를 가리킨다 하더라도 어색하지 않은 따뜻한 남쪽나라를 향해 날아간 제비집에서도 그것은 발견된다. 죽음이 휴식이 된다는 것은, 흔히 지적되듯이 물화物化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물화는, 시인에게는, 결코 어둠에 속한 것이 아니다. 시인이 묘사하는 삶의 모습들이 오히려 어두움에 속한 것이다.

이제 그 눈물 속에서 보낸 밤들을 돌려보낸다
흐르는 강물아, 썩어 흐르는 강물아 그 깊은 밤들은 이제
끝이다
[…]
이제는 추억을 버려야 살 것 같다
[…]
강둑에 앉아 마른
풀을 만지며 흘러가지 않는 구름들을 본다, 전할 말 없느냐


- 「沙金」부분


화자는 눈물 속에서 밤을 보냈다고 고백한다. 흐르는 강물에게 밤의 작별을 고하는 것은, 그 강이 밤과 같은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강물은 추억을, 썩어 흐르는 강물은 썩은 추억을 가리킨다. 앞서 인용했던 「구더기」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보자. 새가 죽고 나서 날아다니던 수십마리의 구더기가 새 가슴의 문을 열고 흩어졌다고 시인은 적고 있다. 사체死體에 파리가 쉬를 슬면 구더기가 나타난다는 인식을 시인은 뒤집고 있는 것이다. 구더기는 살아 있을 때 그 몸 속에 있다가, 새가 죽자 거기서 나와 흩어진다. 시인에게서는 삶과 죽음이 역전되어 있다.

한편 화자는 지금 구름을 동경하고 있다. 그 구름은 이를테면 보들레르의 이방인이 "나는 저 구름을 사랑하오... J'aime les nuages..."라고 고백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이 시의 구름은 고정되어 있다. 흘러가지 않는다. 그 흐르지 않음이 강물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는 것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전할 말 없느냐"는 의문문의 객체가 강물인지 독자인지 밝히기는 힘들지만, 확실한 것은 화자는 이제 곧 구름으로 지칭되는 다른 곳으로 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가 가려고 하는 곳은 과거가 없는 곳이다.

몇몇은 사생아를 낳고
과거 없는 곳으로 떠났다.

- 「1985년」부분


과거가 없다면 그곳은 미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사생아를 낳았기 때문이다. 과거가 없는 곳이란 없으며, 다만 현재화된 과거, 물화된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새하얀 구름이 받쳐주는 색채의 감각에 힘입어 그곳은 밝은 곳이다. 밤의 추억들을 버리고 시인은 밝은 곳으로 떠나고자 한다.

나는 언젠가 이 무거운 몸을 버리고
환해질 것이다
그때는 아무것도 아닐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을 덮어줄 먼지들이
내 주위엔 얼마든지 있다

- 「솜공장에서―먼지」부분


죽으면 그 죽음을 덮어줄 수 있다. 그러면 그 먼지 안에서, 담쟁이덩굴 안에서, 그리고 흩어지면서 죽음은 환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그 죽음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생식을 부정한다는 면에서 삶에의 부정, 세상에의 부정에 다름 아니다. 시인은 시간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죽음 속에서 시간은 더이상 흐르지 않는다.

죽음이란, 단지, 물러가지 않는 어느
튼튼한 벽과 영원히 만나
날개를 가두는 것이라고,

- 「바퀴벌레의 춤」부분

아아아아, 입만 크게 벌리고 있다
갈 곳을 잊고 있다 쓸쓸하고 변하지 않는
공기가 한 줌, 그 크게 벌린 입 안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 「죽음, 변하지 않는―노가리」부분

더듬어 무덤 하나를 찾고 있다, 타버린 돌들로 뒤덮인 작은 무덤. 죽음은 늙지 않는 것이리.

- 「판교리2―무덤」부분


그러므로 시인에게 있어 죽음은 없어짐은 아니다. 죽음은 그대로 있음이다. 아, 이제 드러났다. 시인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을 송두리째 가두고 싶은 것이다. 가엾은 사랑을 빈집에 가두는 몸짓으로, 시인은 자신의 사랑의 기억을 가둔다.

앞으로도 그런 배꽃은 피지 않을
거다. 배꽃은 녹지 않는 눈이다. 내리지 않는 눈이다. 그리고
배꽃은, 배나무집 女子가 안겨주는 작은 혹이다. 눈 한 번
맞추지 못한 女子, 나 혼자 쳐다보고 感電된 그 女子의 먼
눈이다.

- 「배나무집 女子」부분





3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이다. 그는 자식을 낳는 족족 잡아먹었다. 크로노스는 시간이라는 뜻이므로 대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은 시간'이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크로노스의 막내 아들인 제우스가 어머니 레토와 함께 크로노스를 속여 죽인 다음, 배를 갈랐더니 거기에서 하데스와 포세이돈을 비롯한 그의 형제·자매들이 뛰쳐나왔다는 사실은 모두 간과하고 있다. 시간은 모든 것을 삼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은 그 삼킨 것을 그 안에 보존한다. 시간에 의해 소화된 과거는, 현재로서의 과거이다. 하데스와 포세이돈이 제우스보다 형임에도 제우스가 맏형 노릇을 하게 된 것은, 크로노스의 뱃속에 있었던 그들이 갓난아이의 모습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점을 보다 명확하게 해 준다.

먼지의 집에서 먼지 속에 쌓여 있던 모든 것들은, 그러므로 항상 부활의 조짐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그곳에 죽어 있음에 틀림없지만, 그럼으로써 보존된 것이다. 이를테면, 「그 노인」은 노인이 평생 홀아비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끝나고는 있지만, 그 바로 앞 연에서 까치가 집을 지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까치는 텃새라는 점에서나 노인이 죽은 다음 덩굴과 함께 들어왔다는 점에서나 노인의 적자嫡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미 부활의 단초가 보이고 있다. 특히 시집 뒤편에 실린 나무 시편들에서 그런 부활의 모습은 쉽사리 관찰된다.

그가 온다, 밤이 되기 전에 와서
가시가 되는 것이다. 두툼한 가시가
기다림의 가시가, 그대로 있다. 그가
다녀간 흔적들이, 혹 같은 열매들이
맺혀 있다.
 
불 속에서만 타오르는 연기의 냄새를 숨기고,
늙고 병든 여자가 숨어산다.
숨어산 지 오래 되었다.


- 「향나무」全文


열매와 불이 사실은 하나임을 지각하고, 여자가 타오른다는 진술을 잘 생각해보면 이 시는 부활의 시편이 되는 것이다. 향나무, 그 여자는 그를 기다리며 혹 같은 열매를 맺으며 숨어산다. 향나무의 향내를 생각해보자. 그것이야말로 죽음으로 단단해진 좀약의 인식이 아닌가. 그러므로 향나무의 향내야말로 부활이 아닌가 말이다.

참아보거라 참아보거라, 검은 흙에서 싹이 돋아나고
깍지를 풀고 콩이 커진다.

- 「측백나무1」부분


코로 숨쉬면 아픈 기억이 생생하고 입을 벌리면 썩은 이의 아픔이 구역질을 내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어머니는 담에 걸렸다. 그러나 이토록 어려운 시절과 함께 화자는 식물이 가진 생명력에 주목한다. 흙은 세월에 썩은 검은 입자이지만, 거기에서 콩은 더욱 잘 자라는 것이다. 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열매는 저 혼자 떨어지고, 그 안의 씨는 또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다.

나는 죽지 않았다. 나는 자식을 낳았다. 검은 피부의 아버지가
불쌍해졌다.
[…]
나는 죽을 순 없어, 베어져도 남길 것이
있어, 다시 살아나야 할 이유가 있어.
잘린 부분에서 자, 새로 태어나는
싹을, 두 눈 꼭 감고 지켜보아라.

- 「측백나무4」부분


늘 푸른나무인 측백나무는 시간 속에 갖힌 것처럼 늘 같은 색이다. 시간이 덮어버린 탓일까. '나'는 죽지 않고 자식을 낳았다. "검은 피부의 아버지"가 '나' 자신을 지칭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나면, 그 고통스러운 삶이 실은 부활의 삶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두 눈 꼭 감고 지켜본다.

그 아이 돌아오지 않고 기다렸네
[…]
그 아이 무덤 위에
억센 조선잔디 보름처럼 입히고 싶었네
그 자리 억새 사이 빛 고운
잔디씨, 누런 봉투 가득 훑어
나만 홀로 학교에 갔었네


- 「잔디씨」부분


두 눈 꼭 감고 지켜보았다. 기다려보았다. 그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긴 그렇다. '나'는 노란 단무지처럼 늘 아팠고, 어머니는 담이 결렸다. 그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아이 무덤 위에서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거기에는 억센 조선잔디가 있다. 누런 봉투 가득히 그 고운 잔디씨를 받아가는 '나'. '나'가 시인이 된다면 분명히 이 입자의 크로놀로지chronologie를 한 권의 시집으로 써내지 않을까.


먼지의 집
이윤학 지음/문학과지성사


Posted by 엔디
김혜순의 시는 '몸의 시'이다. 인간이 육체와 욕망을 발견하게 된 것이 르네상스 이후라고 한다면 그때부터 생산되었을 수많은 시들에 몸의 묘사나 언급이 안 나올 리 없지만, 김혜순의 시를 '몸의 시'라고 하는 것은 그보다 더 나아간 의미에서이다. 대개의 경우, 시에서 나타나는 몸은 주체이거나 대상이다. 1인칭의 몸이 다른 대상을 욕망할 때, 그 '몸'은 주체의 몸이다. 또 1인칭이 3인칭의 몸을 욕망할 때, 그 '몸'은 대상의 몸이다. 그런데, 김혜순의 시에서 '몸'은 주체이자 곧 대상이다. 이 강렬한 나르시시슴narcissisme, 그것이 김혜순 시의 본질이다.

김혜순 시에서는 특징적으로 물의 이마쥬가 무척 강렬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거기서 물의 이마쥬는 자세히 살펴보면 실은 거울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의 경우에는 나르키소스 자신이, 그리고 거울의 경우에는 이상李想이 예증적으로 그렇듯이 물과 거울은 자기 자신과 만나게 하는 동시에 이를 단절시키는 기능을 주로 한다. 때문에 나르시시슴의 끝은 늘 불행하다. 그러나 이처럼 불행으로 끝나는 나르키소스 이야기는, 벌써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상정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김혜순의 시에서 보이는 나르시시슴과는 거리가 있다.

「물 속에 잠긴 TV」는 그 징후가 보이는 작품이다. 첫째 연 맨 앞에서 화자는 "TV 욕조 속에서 하루 종일 나오지 않는 그녀를 들여다"본다. 그런데, 셋째 연 첫 행에서 화자는 앞서의 진술을 조금 바꾸고 있다. "나는 이어서 그녀라는 이름의 TV를 들여다보네." 그녀가 "TV 욕조 속"에 있다는 진술과 "그녀라는 이름의 TV"라는 진술은 거울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엇바뀜이다. 거울은 항상 자기자신을 '주인공'으로 비추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울은 주체와 대상 사이를 단절시키기도 하지만, 주체와 대상이 있는 문맥contexte을 희석화시키는 기능도 한다. 그래서 나르시시슴은 생산성이 없는, 망각의 시학이 될 가능성이 짙다. 더구나 목욕이라는, 가장 강조된 자기애自己愛가 그 중심에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나르키소스는 아사餓死했던 것이다.

하지만 김혜순의 위의 시에서 물(거울)과 등치되는 매개로서 'TV'가 관련되고 있다는 것은 시사적이다. 거울과 TV는 주체와 대상을 만나게 하면서 동시에 단절시키는 유사점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밖의 기능은 모두 서로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거울이 자기자신을 비추는데 비해 TV는 자기자신이 아닌 것을 비추고, 거울이 문맥을 희미하게 만드는데 비해 TV는 문맥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울 속에서 우리는 자신 속에 함몰되는데, TV 속에서 우리는 TV로 표상되는 세계 속에 함몰되어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화자는 그 TV를 거울삼아 그 속에서 자기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정 뉴스가 끝나면 그 뉴스에 이어서
그 뉴스를 견뎌내는 건 바로 그녀
오늘밤 자정 뉴스는 오십 명의 넥타이 맨 남자들을 보여주었지만
여자들이 맡은 배역은 불에 타 죽은 아이를 껴안고
몸부림치며 우는 역할뿐

화자는 TV속에 등장하는 "여자들" 속에서 자기자신을 보는 것이다. 본래 TV의 특성은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그래서 마치 우리가 TV를 지배하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하는 데에 있는데, 이 시의 화자는 그렇게 TV를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그 뉴스를 견뎌내"고 있다. 그녀의 TV 시청은 "점점 더 깊은 땅속으로 끌려들어가서는 / 묻혀서도 숨쉬는 허파처럼 / 끝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TV 속에는 "여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의미심장한 2연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3연에서 앞서 인용했던 '주인공'이 된 "그녀"가 TV속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계속 "이어서" TV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시에서 TV가 거울역할을 대신했다는 것은 김혜순의 나르시시슴이 개인차원을 넘어선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거울은 자의식만을 강조하고 TV는 문맥만을 강조하는데 비해, "물 속에 잠긴 TV"는 두 가지 역할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이 TV에서부터 김혜순의 사회학적 상상력은 시작된다. télévision의 télé-가 본래 '원격遠隔의-'라는 뜻을 가진 접두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여기서 김혜순이 표현한 여성의 자의식이 사실은 보다 넓은 파문을 통해 퍼질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얼음 비단, 얼음 아씨」는 바로 그 점을 집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시이다. 길을 걷고 있는 화자를 누군가 안는다. 그 '누군가'는, "천사"로 지칭되고 있는데, "아주아주 멀고 먼 곳"에 있는 이다. 그는 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을 환하게 밝히며 들어"오고, "핏줄마다 살결마다 스며[든]"다. 그런데 여기서, "천사"들이 내 속에 있다는 것에서 사실은 나도 "천사"들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함께 안고s'embrasser있는 것이다. 생각을 더 진전시켜보면, "천사"들이 사실은 화자 자신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사"들은 화자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곧, 화자의 자의식 속에 있기 때문이다.

"천사"와 화자를 연결시켜주는 것은 "氷蠶"이다. "氷蠶"은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누에인데, 서리와 눈 속에서 나며 이 누에고치에서 나온 실로 짠 천은 젖지도 않고 타지도 않는다고 하는 전설상의 동물이다. 더불어 얼음 빙氷자가 예비하고 있는 것은 화자의 눈물이다. 화자의 눈물은 "효모"로, "솜털"로 "가볍고도 환한" 이마쥬로 제시되어 있다. 눈물이면서 환하고 눈물이면서 젖지도 타지도 않는다고 하는 진술은, 그 눈물이 결코 소모적이고 자기 함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그 눈물은 생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눈물(곧, "氷蠶")로 화자와 "천사"가 튼튼하게 엮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눈물의 이마쥬는 「자욱한 사랑」에서는 "눈보라"로 바뀌어 나타난다. "이토록 자욱한 눈보라" 때문에 화자는 "헤집고 갈 수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눈보라"가 부정적인 이마쥬만이 아닌 것은 바로 이어서 나온다.

세상에! 돌림병처럼 자욱한 눈보라!
이 병 걸리지 않고는 네 몸을 건너갈 수가 없겠구나

여기서 우리는 "눈보라" 역시 거울처럼 만남과 단절을 함께 주는 매개체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눈보라"는 거울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매개체이다. 거울은 만남을 주는 척하면서 실은 단절을 주는 매개체라면, "눈보라"는 단절을 주는 것 같은데, 사실은 만남을 주는 매개체인 것이다. '눈보라 돌림병'에 걸리기만 하면 "네 몸 속"으로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돌림병"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돌림병"이란 말 자체와 "결핵"이 피를 상기시키고 있고, "어린 새"와 "아가의 심장을 만들어오시는 그분이 / 아무도 몰래 넣어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주머니"가 자궁(子宮)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월경menstruation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여성성을 말하는데 있어서 월경이 갖는 위상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것이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것, 곧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레위기Lévitique 이래로 늘 부정하다고 여겨졌고 그것이 여성이 열등하다는 증거로까지 쓰여왔던 것이다. 여기서 월경을 일종의 병病으로 지칭하는 것은 '월경'이라는 단어가 종종 갖는 사회적 문맥과 관계가 깊다. 화자가 "나 어떻게 이 숨찬 눈보라 건너가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러나 모든 여성들은 그 눈보라를 건너가야만 하며, 그 눈보라, 곧 "氷蠶"을 통해서 먼 곳에서도 서로를 안을 수 있는 것이다.

여성의 이와 같은 형상화는 '어머니로서의 여성'이라고 불릴만 하다. 바로 그 점에서 「어머니 달이 눈동자 만드시는 밤」은 좀더 상세하게 이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어머니는 "달"로 표상되고 있는데, 이것은 앞서 서술한 '월경'과 관계가 깊다. 월경을 '달거리'라고도 하는 것이다. 달에서 어머니를 보는 것은 아르테미스 신을 상기시킨다. 아르테미스 신은 달의 신이며 수렵의 신인데, 달의 둥근 굴곡이나 활의 둥근 모습이 만삭의 배와 같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아르테미스 여신은 달의 신이자 출산의 여신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문맥은 좀더 넓게 펼쳐지고 있다. 화자가 "걸어들어"가는 곳이 바다이기 때문이다. 왕왕 모성성을 드러내는 바다의 모티프들이 여기에 드러나고, 밀물과 썰물을 두고 "우리 어머닌 한 천 년째 바다를 휘젓고 계시다"고 쓰고 있는데서 볼 수 있듯이, 여기서의 어머니는 개인적인 어머니가 아니라 세계의 어머니, 생명의 창조자로서의 신이다. 되짚어보면, 「자욱한 사랑」에 나왔던 바로 그 "네가 태어나기 전 먼먼 옛날부터 / 뜨거운 손길로 아가의 심장을 만들어오시는 그분"이 바로 어머니인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라노스에서부터 시작되는 남신들의 계보는 "바다 깊이 잠들어"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아버지'에게 배꼽이 있다는 것이다. 배꼽은 탯줄의 흔적이므로, 남신인 '아버지'도 실상은 '어머니'로부터 온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와 아퀴나스의 제1원인으로서의 신의 우주론적 증명에서 보이는 남신의 역사도, 사실은 여신이 없다면 있을 수 없다는 거대한 인식의 전환이 여기에 보이는 것이다. 아퀴나스를 풍자하여, 제1원인으로서의 '어머니'는 "바다를 휘[저]"어서 생긴 "파도란 파도 / 그 모든 파도의 물방울 방울마다" 맺히는 "영롱한 눈망울"을 만들고 있다.

그 '어머니'는 '할머니'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혜순은 일찍이 씌어진 「딸을 낳던 날의 기억」에서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거울 안에 어머니가 앉아 계시고
거울 열고 다시 들어가니
그 거울 안에 외할머니가 앉으셨고
외할머니 앉은 거울을 밀고 문턱을 넘으니
거울 안에 외증조 할머니 웃고 계시고
외증조할머니 웃으시던 입술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니
그 거울 안에 나보다 젊으신 외고조할머니
돌아 앉으셨고
그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또 들어가니
또 다시 들어가니

와 같이 쓴 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혜순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세계의 어머니, 곧 가이아로서의 대모라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어머니와 할머니와 증조할머니와 고조할머니와 ……로 이어지는 연대기-계보는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우주적 친연성의 필요조건이 된다. 이런 연대기가 있었기 때문에 "氷蠶"의 정신감응télépathie이 가능했던 것이다. 「잘 익은 사과」에서 맨 처음에 들려오는 소리들은 이와같은 우주적 친연성을 예표해주는 장치이다. 그런 우주적 친연성은 특히 화자가 "고향 마을"로 가고 있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는데, 그 "고향 마을"에는 다름아닌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노망든 할머니"가 바로 대모다, 가이아다, 제1원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라 하더라도 이 할머니 역시 언젠가 '어머니'였음에 틀림없다면, 화자가 그 할머니에게 우주적 친연성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처사라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김혜순적인 나르시시슴이다.

그러나 화자는 더이상 "氷蠶"의 이불 속에서 있을 수는 없다. 「어머니 달이 눈동자 만드시는 밤」에서 화자는

그러나 시방은 다시금 내가 그 바다에서 걸어나올 시각
나는 가슴에 나란히 포갰던 손을 풀고
오대양 육대주 넘실거리던
내 두 눈동자의 주름을 거두어 들고
이불 밖으로 몸을 솟구쳐올린다

고 쓰고 있다. 화자가 그 아름다운 친연성의 천국에 "천사"들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이유는, 그녀가 여전히 "자정 뉴스는 오십 명의 넥타이 맨 남자들을 보여주"는 '지금-여기'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여기'를 보여주는 시는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의 다른 시편들에 훨씬 많은데, 특히 표제시인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는 시인이 직접 남신에게 항의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남신의 역사(달력)는 지금껏 본 여신의 역사보다 훨씬 지루하게 그려져 있다. 남신들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며, 지겨운 열두 곡의 노래를 계속해서 틀어댄다. 생명의 탄생과 관계하는 여성성의 환희와 비교해보면 남성의 역사의 권태로움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사실 「물 속에 잠긴 TV」만 보아도 그런 권태는 충분히 드러난다. 넥타이 50개가 쉴새없이 들락날락하는 TV!

권태는 시의 안과 밖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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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지음/문학과지성사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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