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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8.04 이성과 상상력: 박기현『프랑스 문화와 상상력』
  2. 2004.04.02 『르 몽드』- 최연구
데까르뜨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외쳤을 때, 그의 목소리에는 자못 흥분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는 이성을 가지고 세계의 한 부분을 정확하게 설명했던 것이다. 헬라인처럼 로고스logos를 원했던(고전1:22) 데까르뜨는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거기서 보았던 것이다.

대학 시절, 박이문 선생님의 교양 철학 수업을 들을 때 참 의아했던 일이 있다. 이성의 신뢰자를 자청했던 그 수업의 이공계열 친구들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세계의 모든 데이타를 알게 되면 이후 세계의 진행 방향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목적론téléologie보다는 기계론méchanisme의 입장에 선 셈이었는데... 나를 의아하게 했던 것은 그들이 쓰는 서술어였다. 결국 그들은 객관적인 자료data를 필요로 한다고 하면서도 가장 주관적인 말 '믿습니다'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그들의 '믿음'을 이상하게 여기며 친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관해 대화했다.) 라플라스나 하이젠베르크에 대한 수학사/과학사적 지식은 부족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젊은 이공학도들의 열정이라 볼 수 있겠다.



여기 또다른 열정이 있다: 상상력의 열정이다. "합리주의가 이성에 의해 세계를 분석·파악하는 반면에 낭만주의는 상상력에 의한 세계 자체의 변모를 꾀한다."(23쪽) 상상력과 이미지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뛰어넘어 세계를 변모시키려고 한다. 시인 브르통Breton의 말을 들어보자:

언젠가는 과학들이 처음 보기에는 자신들과 대립적으로 보이는 이 시적 정신에 접근할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지금 그 과학들의 쇠사슬을 끊고, 여러 측면에서 부드럽게 휩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바로 발명이라는 천재이다. (38-39쪽)

그는 일종의 돈오론을 설파하는데, 그에 따르면 "우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항의 접근에서 독특한 빛, 즉 이미지의 빛이 뿜어 나오는 것"(46쪽)이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상상력이 세계를 이해하는 도구가 된다. 가령 바슐라르는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la psychanalyse de la connaissance objective을 방해하는 이미지들을 배제하고 보다 정확한 세계 이해를 위한 책을 쓰다가 거꾸로 그 이미지들에 매혹당한다. 그는 『불의 정신분석』의 서문에서

우리는 불에 대한 직관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무거운 오류들에 억눌리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줄 작정이다. 그 직관이야말로 경험과 측정만이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 직접적인 확신을 형성하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Bachelard, 11)

라고 쓰고 있으면서도 책의 끝부분에서는 그 이미지의 몽상에 빠질 것을 권하기도 한다(59쪽).

한편 곽광수 교수는 『가스통 바슐라르』에서 바슐라르의 『공기와 꿈』은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은 상상력으로 나아가는 통로라고 보고 있기도 한데(곽광수, 49-50), 앞서의 '돈오론'과 연결시킬 수 있다면 이런 상상력은 열반nirvana의 경지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브르통과 바슐라르, 그리고 보들레르와 뒤랑을 읽어나가면서 상상력이라는 것이 삶을 이루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는 알아차리게 된다. 이 책의 매력은 바로 그 희망의 긍정이다. 우리는 상상력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 삶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잠에서 깨자마자 꿈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우리의 상상적 몽상rêverie도 매일 기록한다면 하나의 체계와 세계 이해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것은 또 다른 상상력과 몽상의 열정이다.


Bachelard, Gaston. 1977. 불의 精神分析. 삼중당.
곽광수. 1995. 가스통 바슐라르. 민음사.


프랑스 문화와 상상력
박기현 지음/살림

Posted by 엔디
르몽드
『르 몽드』
최연구, 살림.
2003년 12월 30일 초판.

<ㅉ=69>르 몽드 광고 수입은 38%

르 몽드의 1년 매출액은 1999년 기준으로 2억3천5백만 유로(약 2,700억 원) 규모이다. 그런데 르 몽드 총매출액 중 신문 판매를 통한 수입은 2000년 기준으로 전체 수입 중 62%이다. 반면 광고 수입은 38%이다. 이 수치는 장-마리 콜롱바니 회장이 르 몽드를 이끌면서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광고 비중을 대폭 늘린 이후의 수치이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르 몽드의 수입 구조는 구독료 수입(지대)과 광고가 각각 70%, 30% 정도였다. 어쨌거나 광고 수입보다 신문 판매 수익이 절대적으로 많다는 것은 이 신문이 광고주인 대기업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의 언론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일 수는 있어도, 광고주인 기업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르 몽드는 이런 자본주의 언론의 한계를 처음부터 자각했고, 경제권력(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광고보다 판매 수익을 우선으로<ㅉ=70>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초지일관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 권력으로부터의 재정적 독립은 르 몽드의 독립성을 뒷받침하는 토대이다. (한편 우리나라 신문은 어떤가. 우리나라는 그 구성 비율이 정반대이다. 우리나라 주요 일간지의 재정구조를 보면 광고 수입이 평균적으로 신문 재정의 약 70%를 웃돈다.)

이처럼 광고 수입을 제한하여 언론의 독립성을 견지하고 있는 르 몽드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1985년부터는 광고 업무를 아예 자회사로부터 분리시켜 편집과 광고의 유착 관계를 근원적으로 '단절'시켰다. 르 몽드는 이런 면에서 여러 가지로 독립 언론의 모델이 되고 있다.

그러나 르 몽드가 최고의 지성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독특한 소유 구조나 재정적인 독립성 때문만은 아니다. 르 몽드는 분명한 색깔과 논조를 가지고 있는 소신 있는 언론이다. 기사의 깊이와 세련된 분석은 단연 타 신문의 추종을 불허한다.

르 몽드는 '모든 권력(정치권력과 금권)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한다. 하지만 독립성과 중립성은 다른 개념이다. 르 몽드는 양비론처럼 모호한 입장을 표방하거나, 중립성을 내세우는 회색 언론은 결코 아니다. 르 몽드의 입장은 오히려 분명하고 명확하다. 특히 인종주의나 극우 이데올로기에 대한 르 몽드의 입장은 비타협적이기까지 하다.

프랑스 언론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정치적 색깔을 분명히 갖고 있고 사설의 논조도 일관성을 갖는다. 르 몽드의 목소리는 진보적이다. 르 몽드는 프랑스 지성들이 그러하듯 자신과<ㅉ=71>다른 의견에 대한 정치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언론이 정치인이나 정당, 정치 세력에 대해 색깔 공세를 퍼붓는다는 것은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상상할 수도 없다. 프랑스 문화와 지성을 유지해 온 가장 큰 힘은 다양성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적 다양성, 문화적 다양성은 프랑스 사회가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가치이다. […]

<ㅉ=75>중립 표방 않는 프랑스 언론

프랑스 언론은 결코 중립을 표방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나라 언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이다. 우리나라 언론은<ㅉ=76>저마다 정론직필의 정론지를 자처하고 있고 언론의 객관성, 중립성을 내세운다. 보수적인 신문이든 진보적인 언론학자이든 모두 같은 논지를 펴고 있다. 가령 언론학자 김동민 교수는 오마이뉴스에 실린 글을 통해 "나는 거듭 강조하거니와 언론의 생명은 '도덕성'과 '비당파성'이다"라고 말했다. 언론의 중립성을 통한 공정성을 주장하는 것은 진보적인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프레시안에 실린 다음의 글은 '새 언론포럼'에서 프레시안의 한 간부가 발표한 발제문의 일부이다.

언론이 현실의 특정 정치 세력과 일체화되는 것은 위험하다. 현실의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진리와 정의를 독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은 항상 옳다'는 공산당의 무오류 선언은 오류였음에 드러났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한 세력이 절대선을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며 이에 동조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현실의 특정 세력은 정당성의 일부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누가 더 정당성의 비율이 많은가'이다. 언론의 역할은 공정한 심판자로서 현실 세력의 시시비비를 냉정하게 가려내는 것이다.(「프레시안」, 2003년 11월 21일.)

언론이 공정한 심판자로서 현실 세력의 시시비비를 객관적으로 가려낸다는 것이 가능한가? 정치적 사안에 대한 공정한 심판이 과연 가능한가? 이런 객관성, 가치중립성의 주장<ㅉ=77>은 막스 베버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보수건 진보건, 한국 언론들이 하나같이 공정성과 중립성을 표방하는 것은 한국 언론이 그동안 너무 편파적이거나 친권력적이었음을 반증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론이 중립성, 비당파성, 객관성을 견지한다는 것 또한 관념적인 신화에 불과하다. 프랑스 언론은 도덕성, 진실성은 표방하지만 비당파성을 표방하지는 않는다. 하니리포터 김승열은 언론은 오히려 당파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프랑스 언론에 비추어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다.

현재 한국 언론은 당파성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한국 언론 대부분이 무당파성, 정론, 객관성, 균형을 강조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프랑스에는 오히려 이러한 당파성을 근거로 논쟁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극우에서 극좌에 이르는 언론들이 무지개처럼 늘어서 있고, 누군가가 사회에 대한 발언을 할 때는 그가 지지하는 정당, 그 정당을 지지하는 언론을 보아야만 올바로 발언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으며, 미국도 마찬가지도 명백히 공화당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언론이 나누어져 있다.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라면 다양성을 토대로 하여야 하고, 이는 언론의 당파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언론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과 진실이지 비당파성이 아니다. 피하여야 할 것은 왜곡이지 당파성이 아니다.(김승열, 「하니리포터」, 2001년 7월 5일.)

<ㅉ=78>언론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은 언론의 독립성이다. 한 나라가 독립을 잃으면 자유를 잃듯이, 언론도 독립성을 잃으면 자유를 잃게 된다. 언론의 역사는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언론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현대 사회에서 언론은 입법, 행정, 사법부에 버금가는 제4의 권력(제4부)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주필인 이냐시오 라모네(Ignacio Ramonet)는 자신의 저서 『커뮤니케이션의 횡포』에서 미디어를 제4부가 아닌 제2부로 규정하고, "제1부로 뛰어오른 경제, 제3부로 밀려난 정치와 함께 새로운 '삼권 분립'을 이루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하지만 그래도 이 막강한 펜의 힘은 때로는 정치권력 앞에, 때로는 자본의 위력 앞에 굴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프랑스의 언론도 처음부터 자유 언론이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던 나폴레옹 시대의 언론만 보더라도 프랑스의 언론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신문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기는커녕 정치권력 앞에서 해바라기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권력 앞에서 신문 편집이 굴절된 고전적인 예가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최대 일간지 모니퇴르(Moniteur)이다. 지금은 사라진 언론이지만 모니퇴르는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시민혁명을 옹호하면서 최대의 일간지로 부상했다. 하지만 반혁명적인 나폴레옹이 집권하자 이번에는 나폴레옹을 적극적으로 지<ㅉ=79>지하면서 시민세력의 기대를 저버린다. 나폴레옹이 패전한 뒤 엘바 섬으로 유배되자, 이 신문은 다시 나폴레옹을 비판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15년 3월 1일 엘바 섬을 탈출해 다시 파리로 입성한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파리로 들어오는 20일간에 드러난 모니퇴르의 논조 변화를 보면 언론이 권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고 친권력적이었는지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모니퇴르 머리기사의 제목 변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살인마 소굴에서 탈출
-코르시카의 아귀 쥐앙 만에 상륙
-괴수 카프에 도착
-괴물 그르노블에 야영
-폭군 리용을 통과
-약탈자 수도 60마일 지점에 출현
-보나파르트 급속히 전진! 파리 입성은 절대 불가
-황제 퐁텐블로에 입성하시다
-어제 황제 폐하께옵서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거느리고 궁전에 듭시었다(손석춘, 『신문읽기의 혁명』(개마고원, 1997) 재인용.)

전두환 장군이 집권하자 조선, 동아일보가 보여주었던 용비어천가식의 보도 기사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ㅉ=80>언론은 권력과 긴장 관계 유지해야

물론 오늘날의 프랑스 언론에서 이런 권력에 대한 아부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그만큼 시민 사회가 탄탄해졌고, 언론이 투쟁을 통해 '자유'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쟁취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언론이 사회의 공기(公器)로서 제 기능을 다하자면 언론은 권력과 부단히 긴장 관계를 가져야 한다.

언론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라고 해서 언론의 독립성이 완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경제권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언론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언론은 여전히 '광고'라는 경제권력으로부터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르 몽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르 몽드는 자본주의의 언론도 충분히 경제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때문에 르 몽드는 정치권력과 금권으로부터의 독립성이야말로 신문의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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