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한동안 『어린 왕자』를 못 보게 될 거라고 한다. 이유인즉, 생떽쥐뻬리가 그린 그림 몇 장과 '어린 왕자'라는 한국어 제호, 그리고 'Le Petit Prince'라는 프랑스어 제호가 상표권 등록이 되어 있는데, 상표권 소유자인 SOGEX(생떽쥐뻬리 유족 재단)가 이를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그림과 제호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가장 먼저 이루어진 상표권 등록은 1996년부터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제서야 상표권을 문제 삼은 것은 최근 '아르데코7321'이라는 국내 업체가 해당 상표권 관련 독점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르데코7321은 각종 공예품과 공책, 메모장 등을 만드는 회사다. 최근 주변에 '어린 왕자'가 들어간 노트나 연습장을 쓰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는데, 모두 이 회사의 것이었다. 해당 제품은 교보문고, YES24, 알라딘 등 유수 인터넷 서점에 모두 상위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아르데코7321이 상표권 관련 계약을 체결한 것은 지난 10월인 모양으로, 이 회사는 2007년 10월 10일 당사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통해 '저작권 계약' 사실을 다음과 같이 알렸다(현재는 '저작권'이라는 낱말을 모두 '라이센스'라는 낱말로 바꾼 상태다. 2008. 5. 4. 20:53 추가):

2007년 10월.
잊고 지내온 중요한 진실들을 깨워주는
순수한 어린왕자가 드디어 7321과 만났습니다.

ART DECO 7321이 어린왕자의 프랑스 정식 저작권 소유자인
SOGEX의 공식 라이센싱 에이전트(GLI컨설팅)를 통해
1년여의 긴 협의 끝에 계약을 체결,
국내 최초로 어린왕자 원화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10월 5일에는 작은 간담회를 개최하여
어린왕자와 7321의 시작을 알렸답니다.
국내 최초로 저작권 구입과 함께
새롭게 태어난 어린왕자를
아르데코 7321에서 만나보세요~

저작권인가 상표권인가#

앞서 언급한 조선일보 기사는 해당 사안이 저작권 문제가 아니라 상표권 문제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런데, 아르데코7321의 홈페이지에는 이상하게도 자신들이 "저작권 구입"을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당사의 홈페이지에 링크된 서울경제, 연합뉴스(네이버 링크), 매거진 정글의 기사에서도 역시 아르데코7321이 '저작권 구입'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기사들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쓰여진 ‘어린왕자’ 디자인은 저작권 계약 없이 불법으로 쓰여졌다."거나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소개된 <어린왕자>가 그 어느 것 하나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은 불법제품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라고 쓰기도 서슴지 않는다. 해당 언론사들이 모두 아르데코7321의 보도자료를 받아서 기사를 썼을 것을 고려하면 아르데코7321의 주장은 조금 이상하다. 어쩌면 저작권인지 상표권인지 잘 구분하지 못한 것은 아르데코7321이 아닐까?

하지만, 어린 왕자의 경우 저작권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린 왕자』 저작권의 문제#

먼저 조금 특이한 프랑스의 저작권 보호 기간을 살펴보자: 프랑스의 저작권법(영어)상 저작재산권의 만료 기한은 일반적으로 저작자 사후 70년이며, 1차 또는 2차 세계대전 중에 발표된 저작물의 경우 그 기한이 연장되는 것이었다. 이른바 전쟁 정회prorogation de guerre라고 부르는 것으로 1차 대전 중인 1914년 8월 2일에서 1921년 1월 1일 사이에 발표되었으며 1919년 2월 3일까지 저작권 만료domaine publique가 되지 않았다면 14년 272일이 연장되고, 1939년 9월 3일에서 1948년 1월 1일 사이에 발표되었으며 1941년 8월 13일까지 저작권 만료가 되지 않았으면 8년 120일이 연장되었다. 또 프랑스를 위해 죽은 저자를 위한 특별 정회라는 제도가 있어서 저작자가 '프랑스를 위해 죽었다mort pour la France'면 추가로en outre 30년이 연장된다. (다만 전쟁 정회 제도는 2007년 2월 27일 프랑스 최고법원인 취소법원la Court de Cassation의 결정으로 사라졌다.)

어쨌든 앙뚜안 드 생떽쥐뻬리의 경우에는 전쟁 정회와 특별 정회 두 가지 모두에 걸린다; 생떽쥐뻬리의 '어린 왕자'가 처음 출간된 것은 1943년 미국에서였고, 그가 비록 비시 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공군 정찰 임무를 수행하다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사라진 전쟁 정회 제도를 빼고 보더라도 프랑스법상 생떽쥐뻬리의 작품은 저자의 사후 100년(70년+30년)이 된다.

그러나 한국법상으로는 저작자 사후 50년까지밖에 보호하지 않기 때문에 저작권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 더구나 50년은 베른 협약의 원칙에도 부합한다. 그런데, 문제는 생떽쥐뻬리의 사망한 해를 어떻게 추정하느냐 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생떽쥐뻬리는 1944년 실종되었다. 비록 "내가 그의 정찰기를 요격했다"는 독일군 전투기 조종사의 증언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가 사망한 해를 확정하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그렇지만 1944년에 실종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돌아오지 않았음을 감안해 볼 때 길게 잡더라도 생떽쥐뻬리 작품의 저작권은 한국 내에서는 소멸되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상표권 제도의 목적과 상표권의 존속기간#

결국 문제는 다시 상표권으로 돌아온다. 상표권이란 "일정한 사업자가 자기의 상품을 타사업자의 상품과 구별하기 위하여 문자·도형·기호·색채 등을 결합하여 만든 상징을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권리"이다(이한상 2001, 30). 상표권의 목적은 상표법 제1조에 드러나 있다:

이 법은 상표를 보호함으로써 상표사용자의 업무상의 신용유지를 도모하여 산업발전에 이바지함과 아울러 수요자의 이익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보면 먼저 "상표사용자의 업무상의 신용유지", 그리고 그 다음으로 "수요자의 이익 보호"이다. 흔히 '짜가'나 '짝퉁'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가령 '나이키'라는 회사의 정품이 아니라 '짜가'나 '짝퉁'이 시장에 유통되면 먼저 '나이키' 회사가 손해를 보는 것이 되고, 그 다음으로는 그 '짜가'나 '짝퉁'을 정품으로 알고 산 소비자 역시 손해를 보게 된다. 상표권을 법으로 보호하는 것은 그 두 가지 손해를 모두 막기 위해서다.

한편, 상표권은 저작권과 달라서 존속기간은 10년이지만, 존속기간갱신등록출원에 의해 10년간씩 갱신할 수 있다(상표법 42조). 상표권은  상표권자가 사망한 날부터 3년 이내에 상속인이 상표권의 이전등록을 하지 않으면 소멸된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상표권은 원칙적으로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상표권이 영원해야 하는 것은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래야 사업자의 권리와 수요자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목적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귀뚜라미'라는 보일러 회사가 있는데 일정 시기 이후에는 상표권이 소멸되어 아무 보일러 회사나 다 '귀뚜라미'라는 상표를 사용할 수 있다면, '귀뚜라미'사도 손해를 볼 것이고 '귀뚜라미'사의 제품인 줄 알고 보일러를 산 수요자도 피해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표권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상표권자가 원하는 대로 영원히 보장해주는 것이 맞다. 여기 한 사례를 보자.

웹스터 사전과 상표권#

웹스터Webster's 사전은 미국에서 손꼽히는 사전이다. 1806년 노아 웹스터Noah Webster가 출간한 『간략영어사전A Compendious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을 태두로 하는 웹스터 사전은 오래도록 권위를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1917년 법정에서 웹스터Webster라는 이름이 공공 영역public domain으로 규정되어 권리가 소멸되었다; 웹스터라는 이름은 아무 사전에나 다 붙일 수 있는 권리가 소멸된 상표genericized trademark가 된 것이다.

결국 오리지널 웹스터 사전을 만들던 G. & C. 머리엄 회사는 회사 이름을 머리엄-웹스터Merriam Webster로 바꾸게 된다. 머리엄-웹스터 사는 홈페이지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The net effect of the proliferation of Webster's dictionaries is a reference-book marketplace in which the consumer is either unaware of or confused about what differentiates these books.
웹스터 사전이 확산된 결과 참고도서 시장의 고객들은 (웹스터라는 제목을 단) 책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기만 하게 됐다.

이것이 머리엄-웹스터 사의 푸념만은 아닐 것이다. 대다수의 소비자는 분명히 웹스터라는 이름이 아니라 웹스터라는 기표signifiant 저 너머의 '150년 전통의 사전'을 원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표로서의 상표#

웹스터 사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상표는 기의signifié가 아니라 기표다. 이 명제는 상표의 특징에 관해 꽤 중요한 것을 담고 있다. 상표가 기표라면 우리는 드 소쉬르de Saussure를 원용하여 기표인 상표와 기의인 상품의 관계가 자의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자의적이라는 것은 어떤 상품을 다른 상표로 붙였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그 상품의 가치가 전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룰루' 비데가 '랄라' 비데였더라도 비데 자체의 기능이 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를테면 '거원'이라는 상표의 MP3 플레이어에서 우리가 기실 원하는 것은 '거원'이라는 상표 자체가 아니라, 그 상표를 달았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그 MP3 플레이어라는 상품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원'이라는 상표가 '코원'이라는 상표로 바뀌었을 때에도 '거원'이라는 이름을 단 제품과 똑같은 신뢰를 '코원'이라는 이름을 단 제품에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기업이 일반적으로 브랜드 네임 바꾸기를 꺼리고 브랜드 네임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브랜드 홍보의 용이성 때문이지, 그 브랜드 자체가 특별히 독창적이거나 뛰어나서가 아니다. 이한상(2001, 31)도 "상표보호의 본질은 창작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상표의 선택이나 구성에 있어서 신규성이나 독창성은 불필요하다."고 쓰고 있다.

독창성이 중요한 저작권의 경우 다른 사람의 생산물에 내 이름을 달아서 배포하는 '표절'이 중대한 범죄인 반면, 독창성이 중요하지 않은 상표권의 경우 거꾸로 나의 생산물에 다른 유명한 이름을 달아 배포하는 것이 중대한 범죄가 된다. 우리가 '버버리'라고 씌인 '짜가' 코트를 생산하여 판다고 했을 때, 우리는 '버버리'라는 독창적인 문양을 함부로 써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진짜 '버버리' 사에서 만든 제품보다 질이 떨어지는 제품에다 '버버리'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버버리' 사의 신용을 떨어뜨리고, '짜가' 상품을 산 소비자는 그 품질에 만족하지 못하므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린 왕자와 상표권#

『어린 왕자』로 돌아가자: 우리는 상표권 보호의 목적에 비추어 출판사들이 '어린 왕자'라는 제호 또는 삽화를 씀으로써 생떽쥐뻬리의 유족 재단이나 아르데코7321의 신용에 피해를 입혔는지를 살펴보고, 출판사들이 '어린 왕자'라는 제호 또는 삽화를 씀으로써 소비자들의 상품 선택에 손해를 입혔는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

1973년 김현의 번역으로 처음 『어린 왕자』를 출간한 문예출판사를 필두로, 수많은 출판사에서 나온 『어린 왕자』들은 유족 재단의 명예를 높였고, 지금 아르데코7321에서 내는 '어린 왕자' 노트류가 잘 팔리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우리는 거의 의심 없이 말할 수 있다. 한편, 소비자들이 어린 왕자의 삽화나 제호 때문에 앞서 언급한 웹스터 사전과 같은 곤란을 겪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르데코7321이 기존의 출판사들이 일군 성과를 도용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온당할 것이다.

도서 『어린 왕자』에서 제호와 삽화는 기표가 아니라 기의이다.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며 그것들 스스로가 이미 '어린 왕자'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책들이 해당 상표를 하나의 '상표'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르데코7321의 상품에 끼칠 손해는 더더구나 없다.

나는 상표권 제정의 기본 목적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이 '어린 왕자' 관련 상표등록에 대한 취소가 온당하다고 믿는다. '어린 왕자' 캐릭터가 그려진 '짜가' 다이어리가 생겨날까 걱정된다면, 생떽쥐뻬리의 작품을 상표등록하기보다는 아르데코7321의 상표를 등록하는 것이 옳다. 실제로 아르데코7321은 앨리스와 도로시 등 이전 제품들의 경우 저작권 만료된 작품을 가지고 아르데코7321의 이름을 걸고 판매해서 좋은 효과를 얻기도 했기 때문에 이런 방식에 문제가 없다. 실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어린 왕자' 역시 한국 내에서 저작권이 만료되었기 때문이다. (2008. 4. 17. 13:36 추가)

결론을 대신하여: 상생의 경제학#

나는 아르데코7321이나 유족 재단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삽화와 표제에 대한 로열티를 바라는 것인지, 새로운 번역서 출간을 위한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존의 출판사들이 생떽쥐뻬리의 명예를 높였으며, 아르데코7321의 매출도 높여 주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문구류는 도서 『어린 왕자』를 읽은 사람들이 사는 것이므로 이런 상생의 시너지 효과가 무척 활성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표등록 취소와 관계 없이 아르데코7321와 유족 재단의 결단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는데, 만약 생떽쥐뻬리의 작품들이 저작권 시한 만료 후에도 상표권 등록을 통해 영원히 그 권리를 보장받게 된다면 다른 모든 저작물 역시 상표권 등록만 해 놓으면 영원히 그 재산권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문화 발전에 비추어 보아도 전혀 바람직하지가 못하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이한상. 2001. 『지식재산권의 생활법률』. 서울:제일법규.

Posted by 엔디
『어린 왕자』의 여러 한국어판 번역본들과 불어판 또는 영어판을 비교해 보면 조금 이상한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아마도 쓸쓸했던 날의) 어린 왕자가 자기 행성 B612에서 본 해넘이의 수가 한국어판과 불어판 또는 영어판이 다른 것이다 한국어판은 대개 마흔세 번으로, 영어나 불어판은 마흔네 번으로 기록하고 있다:
« Un jour, j'ai vu le soleil se coucher quarante-quatre fois! »
-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 폴리오folio 문고판, 31쪽. (1999년 문고판 간행)

"One day," you said to me, "I saw the sunset forty-four times!"
- 하비스트북A Harvest Book하코트 브레이스Harcourt Brace판 캐서린 우즈Katherine Woods 옮김본, 21쪽.

"언젠가는 마흔 세 번이나 해지는 걸 봤지."
- 구舊 문예출판사판 김현 옮김본, 32쪽. (1973년 초판 간행)

「어느 날, 난 마흔 세번이나 석양을 보았어!」
- 혜림출판사판 황현산 옮김본, 29쪽. (1986년 초판 간행)

「어느 날인가는, 해 지는 걸 마흔 세 번이나 봤지요!」
- 고려원판 오증자 옮김본, 28쪽. (1987년 초판 간행)

"어느 날 나는 해가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보았어!"
- 신新 문예출판사판 전성자 옮김본, 26쪽. (1999년 간행)

"어느 날은 해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본 적도 있어."
- 문학동네판 김화영 옮김본, 35쪽. (2007년 간행)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1999년 출간된 갈리마르 출판사의 폴리오folio 문고판에는 이런 일러두기avertissement가 붙어 있다: "우리는, 앙뚜안 갈리마르와 함께, 폴리오 문고판의 하나로 출간하게 되어서, 그리고 어린 왕자의 완전판l'édition intégrale을 처음으로 출간하게 되어서 기쁘다." ...무슨 소리인가. 『어린 왕자』는 1943년 작가가 살아 있을 당시에 이미 초판이 간행되었는데!

1943년 쌩떽쥐뻬리는 미국에 있었고, 아마 전시戰時였기 때문이겠지만 프랑스 출판 편집자들과는 연락을 취할 길이 없었다. 해서 그는 '레이날과 히치콕Reynal & Hitchcock'이라는 출판사에서 『어린 왕자』의 초판을 발간하게 된다. 정작 프랑스에서는 약 3년 뒤 1945년에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첫 판이 발간된다. 문제는 이 때 갈리마르에서는 작가의 원본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상태에서 작업했다는 것이다.

폴리오 문고판의 일러두기는 그래서 그간 불어판에 있었던 오류의 목록을 보여주고 있다: 천문학자가 망원경을 통해 바라보는 별이 사라져 있고, 사업가와 천문학자의 노트나 그림에 차이가 있으며, 어린 왕자 목도리의 윤곽에서부터 꽃들의 꽃잎과 꽃받침, 가로등 아래의 태양 광선, 바오밥 나무의 뿌리에서부터 야자수의 가지가 다르다; 또한 어린 왕자가 본 해넘이의 횟수가 다르다.

한편, The Publication History of The Little Prince는 각국의 번역 판본들과 떽스뜨, 이미지의 차이를 상세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폴리오 문고판에서 지적하지 않은 두 가지 사항들을 더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어린왕자가 입은 가운의 색깔이 초록색green이냐, 어두운 파랑dark blue이냐, 아니면 바다색navy blue이냐 하는 논란이 있어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소행성 B612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천문학자들이 별에 이름을 붙이는 방식을 설명하면서 '소행성325'를 예로 드는데 이 숫자가 일부에서는 '소행성3251'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린왕자의 가운 색깔

불어판과 영어판, 그리고 두 한국어역본 사이의 가운 색깔이 모두 다르다


Il l'appelle par exemple : « l'astéroïde 325 ».
- 갈리마르 출판사 폴리오 문고판, 22쪽.

He might call it, for exemple, "Asteroid 325."
- 하코트 브레이스판 캐서린 우즈 옮김본, 11쪽.

예를 들자면 <소혹성(小惑星) 3251>하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 구舊 문예출판사판 김현 옮김본, 23쪽.

이를테면, '소혹성 3251호'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 신新 문예출판사판 전성자 옮김본, 17쪽.

가령, '소혹성 제325호'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다.
- 문학동네판 김화영 옮김본, 23쪽.

어린 왕자가 해가 지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는가와 '나'가 예로 든 소행성 이름이 무엇이었는가는 그래도 단순한 편집 판본 상의 차이일 뿐이다: 마흔 세 번과 마흔 네 번이라는 차이가 작품 내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상한 일은 '신원'이라는 출판사에서 내 놓은 책은 엉뚱하게도 어린 왕자가 본 해넘이의 수를 "46번"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민한 작가가 언젠가 고쳐 쓴 뒤 어느 판본에 적용을 하지 않았거나 무던한 편집자가 실수를 했거나 했을 것이다. 물론, 어린 왕자에게 있어서 해넘이가 갖는 의미는 무척 각별하다. 슬픈 날에 마흔 몇 번이나 해넘이를 보았다는 것이나, 왕이 소원을 빌라고 하자 망설임 없이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한 것, 그리고 24시간 동안 해가 1440번 진다는 이유로 점등인의 별을 떠나고자 하지 않은 점, 그리고 조종사인 '나'에게 해지는 것을 보러 가자고 무의식 중에 떼를 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텍스트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린 왕자가 해넘이를 43번이 아니라 44번 보았다는 것을 확정해주는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어린 왕자는 별들이 즉각 복종한다는 왕의 권능을 부러워하며 이렇게 생각했다고 화자는 전한다:

어린 왕자는 그토록 대단한 권능에 감탄했다. 만약 자기에게도 이러한 권능이 있었다면 의자를 뒤로 물려놓을 것도 없이 해지는 광경을 하루 마흔네 번만이 아니라 일흔두 번, 아니 백 번 이백 번이라도 구경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문학동네판 김화영 옮김본, 55쪽.)

그럼에도 이것은 작자가 처음에 의도한 해넘이의 숫자를 밝혀주는 것일 뿐 44라는 숫자 자체가 어떤 고도의 시적 울림이나 상징성을 가진 유의미한 것이 아님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에 있어서는 문제가 좀 다르다: 그림이 좀더 바랜 것에서 시작해서 그림 자체에 있어야 할 것이 빠진 것도 있다. 이는 작가의 원판 그림이 미국 출판사들에서 프랑스 출판사들로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문학자①"

천문학자가 망원경을 통해 별을 보고 있는 것이 맞는 그림인데, 별이 아예 빠져서 편집되어 있다.

"천문학자

천문학자가 설명하는 칠판의 도형이 조금 다르다. 가령 원의 중점에서 1사분면으로 나가는 선의 각도가 누락되어 있다.

"바오밥나무"

바오밥나무의 뿌리가 좀더 단순화되어 있다.

"점등인"

가로등 아래의 태양광선 하나가 없다.

서점에서 살펴본 결과, 해넘이 떽스뜨와는 달리 대부분의 책에서 작가가 그린 그림의 문제는 없었다. 몇몇 번역 판본이 예전 그림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어린 왕자가 해넘이를 마흔세 번 보았나 마흔네 번 보았나가 아니라, 어린 왕자의 떽스뜨가 어떻게 정확히 확정될 것인가이다. 마흔세 번과 마흔네 번이 갖는 차이는 크지 않겠지만, 어린 왕자가 느꼈을 쓸쓸함을 표현하기 위해 마흔 몇 번을 100번이나 200번으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어린 왕자 - 8점
생 텍쥐페리 지음, 김화영 옮김/문학동네

어린왕자 - 8점
생 텍쥐페리 지음, 전성자 옮김/문예출판사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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