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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됨'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이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기독교는 위험하다. 그리스도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언급했던 것은 두 사랑의 계명, 곧 여호와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사도 요한은 한 편지에서 다소 충격적인 발언을 한다(요일 4:20):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흔히 이웃 사랑에서 자주 인용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배울 필요가 있다. 도움이 필요한 소외된 자를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모범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돈을 스스로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여호와의 것 혹은 최소한 공동체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정치가 한정된 재화를 어떻게 나누는가를 정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때, 기독교의 정치는 그 재화가 본래 여호와로부터 온 것이라는 철저한 인식 속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1. 기독교와 사유재산

쟝 깔뱅은 그리스도인의 사유재산을 포함한 여러 가지 자유를 인정했다. 모든 신자가 수도원의 탁발승처럼 살 필요는 없고, 각자 자신이 있는 곳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소중한 소명이며, 그로써 정당하게 번 재산은 신의 선물이라는 것이다(Calvin 1994, 332):

분명히 상아나 금이나 재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것이며,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허용되고 지정받기까지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웃거나 배부르거나, 옛 조상의 재산에 새 것을 더하거나, 혹은 아름다운 가락을 즐기거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들을 결코 금지당한 적이 없다.

이에 따라 막스 베버가 '독특한 부르조아 경제윤리'라고 부른 기독교 경제 윤리가 탄생한다(Weber 1987, 242-243):

그리하여 하나의 독특한 부르조아 경제윤리가 출현한 것이다. 부르조아 기업가는 신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서서 그의 축복을 받고 있다고 느끼며, 그가 형식적인 올바름의 틀을 지키는 한, 그리고 그의 도덕생활이 깨끗하며 그의 재산이 온전하게 사용되는 한 금전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며, 또한 그가 그렇게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기독교의 측면에서 보면 그 사유재산이라는 것 역시 '나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을 맡아두고 있다는 의식이 중요하다. 이런 의식의 발전된 형태로 사도행전이 보고하는 위대한 기독교 공산주의 혁명을 들 수 있을 것이다(행 2:44-45; 4:32):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행전 1장은 다락에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12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2장에서 성령이 임한 오순절 사건 이후 41절은 3000명의 제자가 늘었다고 보고 하고 있으며, 4장에서 말씀을 들은 자 가운데 5000명의 남자가 새로 믿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당시에는 성인 남자만 세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보수적으로 잡아도 족히 2만 명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만 명의 공동체가 사유재산 없이 서로 필요에 따라 물건을 통용했던 것이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의 정치라면 이 정도의 이상은 꿈꾸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자본주의의 시대를 접고, 기독교 공산주의의 시대로 나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한국의 깔뱅주의 프로테스탄트라면 재산과 관련해서 세속 법이 규정하는 것 이상으로 엄격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가령 깔뱅 역시 사유재산은 인정했지만 무차별적인 재산권 행사의 자유는 그르다고 보았으며, 이자利子는 인정했지만 무차별적인 취리는 옳지 못하다고 보았다(손봉호, 칼빈의 사회 사상).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이고, 첫 내각의 상당수가 재산과 관련하여 엄청난 비리가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대학 등록금도 없던 이명박 대통령의 가계는 현대건설을 거치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탄탄해졌다. 개발독재 시대의 건설사에 몸담고 있으면서 땅값의 시세차익으로 얻어진 부다. 그는 이 부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대통령 후보시절 선언했지만,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면 지키려는지 아직까지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한 장관 내정자는 땅 투기 의혹에 "땅을 사랑했을 뿐 투기는 아니다"라는 군색한 변명을 내밀었고, 다른 장관도 투기 의혹이 불거지자 한겨울에 트렉터를 끌고 밭을 가는 쇼를 했다. 굳이 헌법에 명시된 '밭 가는 자가 밭을 소유한다耕者有田'는 원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앞서 희년과 나그네됨: 이명박과 예레미야서 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런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율법 규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수많은 노동자가 다치고 죽어가는 상황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명시적으로 부자를 위한 정치, 기업가를 위한 정치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당선자 시절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전경련이라는 점이나, 최근 기업가들을 위한 직통 핫라인을 개설한 점 등만 봐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점이다. 이 땅의 나그네들을 소외시키고, 재산을 여호와의 것이 아니라 기업가의 것 혹은 자신의 것으로 고착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요컨대, 이명박이 펴려는 정치는 단순히 가진 자의 정치나 우파의 정치는 될 수 있어도 그리스도인의 정치라고는 결코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기대에 훨씬 못미쳤을 망정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가 (그들 자신의 종교와는 관계 없이) 그나마 더 여호와의 뜻에 합당한 정치였다.


2. 이명박과 예레미야서

많은 교회가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선거 과정에서 알게 혹은 모르게 이명박을 지지했고,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감사 기도를 드린 곳도 많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적籍을 두고 있는 소망교회에서는 주일 낮 예배에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에 당선시켜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리고, 매주 수요일에 이명박 대통령의 성공을 기원하는 기도회가 열린다(『한겨레21』 제699호).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생략된 것은 이명박이 과연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평가와 과연 항상 그리스도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만이 여호와의 뜻인가 하는 판단이다. 이명박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인가 혹은 그의 정부가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정부인가 하는 문제의 해답은 앞서의 절을 통해서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보고, 과연 항상 그리스도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만이 여호와의 뜻인가 하는 판단에 대해서 살펴보자.

선지자 예레미야는 분열왕국 남유다가 망하는 것을 지켜본 예언자이다. 슬픔 가득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남유다가 망할 것이며 다윗의 왕위가 폐하여질 것이고, 여호와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무너지리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가 남유다의 백성들에게 권고한 것은 여호와의 도성을 지키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바빌로니아에 항복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라는 것이다(렘 27:8-10).

그러니 바빌론 왕이 씌워주는 멍에를 메어라. 그 왕 느부갓네살을 섬겨라. 그러지 않는 민족과 나라가 있으면, 나는 그 민족을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벌하여서라도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주고 말 것이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너희의 예언자들과 박수들과 해몽가들과 점쟁이들과 마술사들이, 우리가 바빌론 왕을 섬기게 될 리 없다고 하더라도 곧이듣지 마라. 그자들이 하는 예언은 거짓이다. 그 말을 듣다가는 고향을 멀리 떠나게 되며, 나에게 쫓겨나 망하고 말 것이다.

남유다의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고, 다윗의 왕위가 공고하리라는 거짓 예언만을 믿었다. 그러나 패역하고 여호와의 뜻에서 돌아선 남유다의 왕좌는 유지되지 못하였고, 바빌로니아에 결국 멸망하고 만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유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여호와가 그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구약의 세계관에서 바빌로니아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여호와는 바빌로니아의 왕을 종從이라고 부르며, 유다가 영원히 망할 것이 아니라 70년 후에 귀향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기도 하다(렘 25:9, 12):

나는 내 종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을 시켜 북녘의 모든 족속들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주위에 있는 모든 민족을 전멸시키고 이 땅을 영원히 쑥밭으로 만들게 하리라. 사람마다 그 끔찍한 모습을 보고 빈정거리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 그 칠십 년이란 시한이 차면 나는 바빌론 왕과 그 민족의 죄를 벌하여 바빌론 땅을 영원히 쑥밭으로 만들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적어도 당시 남유다에게 있어서는 다윗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아니었고, 죄악의 상징 바빌로니아가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느 대통령 후보가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혹은 장로라고 해서 앞뒤 재지 않고 그에게 표를 주는 몰지각한 시민의식이 여호와의 관점에서도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태도는 솔로몬처럼 선과 악을 분별할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서는 안 되고, 여호와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이 부분을 혼동하면 예레미야 시절의 남유다 백성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보유

이명박 장로는 결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절차와 의혹이야 어떻든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이것 역시 여호와의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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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손봉호. '칼빈의 사회 사상'. 실린 곳: http://lloydjones.org.
Calvin, Jean. 1994. 『기독교 강요(초판)』. 12판. 세계기독교고전14. 양낙흥 옮김.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Weber, Max. 1987.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학술총서1. 박종선 옮김. 서울:두리.

Posted by 엔디

자리에 외투를 두고 회사 앞 식당에서 비빔밥을 사 먹는다. 혼자 먹는 저녁이라 부러 TV 앞자리를 골라 앉는다. 창밖엔 가난한 눈이 내리고 있다. TV는 이명박을 비추고 있다, 두 손을 번쩍 든. 문득 술이 마시고 싶어진다.

아니, 실은 낮부터 저녁 술 약속을 잡으려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회식이나 야근의 칼날을 비껴갈 수 있었던 친구들은 많지 않았다. 그런 밤이었다. 신촌이라면, 아마 신촌이라면 함께 술을 마실 마음 맞는 친구들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저 미끈거리는 눈물을 밟고 신촌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마침, 다행이었을까. 일이 진척을 보이지 않아 결국 야근이었다. 하마터면 공허한 약속을 하나 더 만들 뻔했다.

747공약이 공약空約이라고 특히 외국에서 말들이 많다. 괜찮다. 나는 이명박이 747 공약을 안/못 지켰다고 그를 비난할 생각이 없다. 말하자면, 나는 그가 말한 것보다도 그가 침묵하고 있는 것들을 더 걱정하는 편이다. 그는 가난한 이웃들에 대해 침묵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침묵하며, 다른 생각들에 대해 침묵한다. 말할 수 없는 부분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 것은 비트겐슈타인이었다. 언론은 너무 정확하게도 말할 수 있는 부분만을 보여준다.


1. 희년과 나그네됨

숫자로만 본다면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지난 1998년은 한국이라는 나라의 '희년禧年jubliee'이었다. 희년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제 50년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희년에 남북 정상이 처음으로 대화를 했고, 희년에 이루어진 정권 교체를 계기로 이 땅에 최소한의 복지 정책이 시작되었다. 레위기 25장은 여호와가 희년을 제정하는 목소리를 기록하고 있다:

오십 년이 되는 이 해를 너희는 거룩한 해로 정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킬 해이다. […] 이 해를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

희년에는 모든 빚의 탕감, 땅의 소유권 반환, 종의 해방 등이 이루어졌다(레위기 25:23-28, 39-55). 자본주의의 눈으로 보면 가히 혁명적인 이 규정들은 본질적으로 이 세상의 소유자가 인간 개개인이 아니라 여호와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개역한글판, 레 25:23):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레위기 25장 특히 레위기 시절, 모세의 지도를 받고 있는 유태인들은 이런 규정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만한 배경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얼마 전까지 이집트에서 노예로 생활했고, 그들을 그런 상태에서 해방시켜 준 것은 바로 여호와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하는 명령이 종종 나온다. 가령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설교를 보자: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이 말을 듣고 그들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언제 나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또 언제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기에 저희가 모른 체하고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면 임금은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회적 약자에게 한 일이 곧 그리스도에게 한 일이고, 사회적 약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자신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설교는 단순히 '착한 일을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가 유명한 '달란트 비유'에서 바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설교의 본질적인 의미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잠시 맡겨둔 것이므로 그것을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곳에 써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그네에게 대접하라고 하는 말이 가장 처음 나오는 것은 출애굽기에서이다(개역한글판, 출 23:9):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

이 율법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여호와는 신명기에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한 번 더 확인시킨다(개역한글판, 신 10: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이것이 몇 천년 전의 유태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야곱이 나이를 묻는 이집트의 파라오 앞에서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라고 대답했던 것처럼, 우리는 여기 다만 나그네로 있는 것이다. 가수 최희준은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노래했고, 시인 이성복은 "삶이란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규정지었다. 꾸란(13:26)에도 이런 세계관이 보인다:

불신자들은 현세의 생활을 기뻐하나 현세의 생활은 내세의 기쁨에 비하여 순간의 기쁨에 불과하니라

그러나 기독교에 있어서는 특히 나그네됨의 인식이 소중한데, 그것은 여호와가 이 땅 전체를 만든 신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노예였다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그네됨'의 인식이 확고할수록 우리 스스로가 나그네임을 자각하여 이 땅에 다른 나그네를 사랑하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

나그네라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이 땅의 이방인들, 곧 한국 사회의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우리가 영접하고 맞아들여야 할 이 땅의 나그네다. 또 한편, 이 땅의 소외되고 박해받는 노동자들과 집이 없는 세입자들 역시 우리의 나그네다. 우리는 그동안 '법과 원칙'을 부르짖으며 그들을 짓밟았고, 그들을 착취했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아주 잘 지켰다고 자부하는 의기양양한 청년에게 이렇게 말한다(마태복음 19:21):

예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셨다.

성경은 그 청년이 재물이 많은 탓에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전한다. 어리석은 그 청년은 자신이 나그네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 모든 재물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것이라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어리석다는 것은 그 청년이 물욕物慾이 너무 많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 청년이 이재에도 능하지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가 직접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했거니와 그보다 훨씬 더 전에 모세는 계산을 잘 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적이 있다(시편 90:12):

우리에게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지혜에 이르게 하소서.

천상병 시인이 약간은 슬프게 읊었던 것처럼, 우리는 이 땅에 다만 '소풍' 왔을 뿐이다. 이땅의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전도서의 지혜이다.


2. 우리 곁의 나그네

눈발이 2월 25일의 저녁을 싸늘하게 덮어 주고 있었다. 밤늦게 사무실에서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저마다의 고통을 간직한 여남은 눈망울들이 거기서 떨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사내가 울고 있었다.

"아니, 젊은 사람이 뭐가 걱정이야. 괜찮아, 괜찮아.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 하다못해 어디 가서 경비 노릇을 해도 백오십은 받어, 백오십은 받는다고. 괜찮아. 아니, 젊은 사람이 뭐가 걱정이라고 이렇게 울어. 울지 말어. 나도 경비 노릇도 해보고 다 해본 사람이야. 다시 시작하면 못할 게 뭐 있어. 나이가 젊잖아."

사내 옆에서 한 노인이 위로인지 꾸짖음인지 알 수 없을 목소리를 하고 사내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를테면 그 목소리는 이런 것이었다: 호통은 쳤으되 하나도 위협이 되지 않는 목소리, 내가 너와 함께 고통을 겪는 사람이라는 목소리, 내가 너에게 줄 것이라고는 이 위로하는 말 몇 마디 뿐이라는 목소리. 이곳 버스 정류장에서 처음 만난 것이 분명한 그들 사이에서 나는 그리스도가 말한 이웃을 보고 있었다. 사내는 그 노인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절박한 심정으로 듣고 있었다. 약간은 술기운을 빈 그는 울먹이며 노인에게 되물었다, 그것이 무슨 신탁이라도 된다는 듯이:

"어르신, 정말 다시 시작하면 될까요?"
"아, 그럼, 그럼. 젊은 사람이 뭐가 걱정이야. 나이도 오십줄 초반 밖에 안 되어 보이는구만."
"아니요, 어르신, 제가 사십댑니다."
"아, 그러면 더 걱정할 것 없어. 금방 다 극복하고 잘 될 거야. 젊은 사람이 말이야."

눈발이 그들을 싸늘하게 덮어 주고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버스가 도착했고, 나는 위로받으려는 사십대와 위로하려는 어르신을 두고 버스에 올랐다. 그 순간, 내 앞에 전경foreground이었던 그들은 갑자기 배경background으로 변했다. 버스 바깥의 온 세상이 배경화하는 순간 나는 약간 두려워졌고, 블레이크를 생각했다.

I wander through each chartered street,
Near where the chartered Thames does flow,
And mark in every face I meet
Marks of weakness, marks of woe.

In every cry of every man,
In every infant's cry of fear,
In every voice, in every ban,
The mind-forged manacles I hear.

How the chimney-sweeper's cry
Every black'ning church appalls
And the hapless soldier's sigh
Runs in blood down palace walls.

But most through midnight streets I hear
How the youthful harlot's curse
Blasts the new born infant's tear
And blights with plagues the marriage hearse.

특권의 탬즈 강이 흐르는 그 곁으로,
나느 특권의 거리거리를 정처없이 걸으며,
지나는 모든 이의 얼굴에서 본다,
약함의 자국들을, 비애의 자국들을.

모든 사람의 모든 울음에서,
모든 갓난아기의 두려운 울음에서,
모든 목소리에서, 모든 금지 속에서,
나는 마음이 벼린 수갑 소리를 듣는다.

굴뚝청소부의 울음 소리가 어떻게
모든 검은 죄 저지르는 교회를 창백하게 하는지를
그리고 불운한 병사의 한숨이
궁궐의 벽을 따라 한숨으로 흐르는가를.

그러나 한밤중 거리의 많은 것들에서 나는 듣는다
젊은 창녀의 저주가 어떻게
갓 태어난 아기의 눈물을 이울게 하는지를
그리고 결혼의 묘지를 역병으로 마르게 하는지를.

William Blake, London.

나는 날리는 눈발이 검고 검은 아스팔트를 하얗게 덮는 것을 보았다. 검은 연탄 위에 하얀 눈이 쌓이던 그의 대선 광고가 생각났다. 나는 버스에서 손잡이를 잡고 서 가면서도 간간이 졸았다. 꿈에서 이 땅의 고통받는 나그네들이 겪을 검은 현실을 누군가 거꾸로 흰 크레파스로 덧칠하는 모습을 본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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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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