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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1.13 율격의 방기放棄: 김용택『그 여자네 집』 (2)
좋은 시집이 가져야만 하는 덕은 사색과 운율과 새로움이다. 그 중에서 시를 시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운율이다. 운율韻律은 그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운韻과 율律이다. 운韻을 쓰지 않는 우리시에서는 율律로만 보더라도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은 좋은 시집이 가져야만 하는 사색과 운율과 새로움을 모두 방기放棄하고 있는 시집이다. 그 중에서도 운율을 깡그리 망각하고 있다. 그의 시가 이른바 산문시poème en prose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산문시도 훌륭한 운율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여자네 집』의 산문시는 그런 운율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방금, "『그 여자네 집』의 산문시"라고 말했다. '김용택의 산문시'가 아닌 이유는 그가 이미 훌륭한 산문시를 우리에게 보여준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 여자네 집』에 실린 사진과 머리의 모양 및 길이와 입은 옷과 옷에 펜 꽂은 모습과 배경이 같고 표정까지 비슷하여, 한날 한곳에서 찍은 게 분명한 다른 사진이 실려있는, 그의 첫 시집 『섬진강』에는 이런 시가 있다.

강 건너 산밭에 하루 내내 스무 번도 더 거름을 져 나르셨단다. 어머님은 발바닥이 뜨겁다며 강물에 발을 담그시며 자꾸 발바닥이 뜨겁단다. 세상이야 이래도 몸만 성하면 농사 짓고 산느 것 이상 재미있고 속 편한 게 어디 있겠냐며 자꾸 갈라진 발바닥을 쓰다듬으시며 자꾸 발바닥이 뜨겁단다.
-「섬진강9」부분

마침표까지 턱턱 찍어가며 거침없이 쓰인 줄글이지만, "자꾸," "발바닥"과 같은 낱말들의 되풀이와 "-단다"로의 종결어미 통일로 운율감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일종의 보격步格pied도 적극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보다 더 산문에 가까운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피와 땀과 살을 섞었던 땅, 버림받고 무시당하면서도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다 했던 땅, 그래도 정 붙여 살았던 땅, 나이 서른다섯에 이사라니.
동 구 정자나무를 빠져나간 차는 새마을 신작로길을 잘도 달리며 불빛을 여기저기 쏘아댔다. 차 꽁무니의 빨간 불빛이 동구길을 아주 사라진 후에도 사람들은 회관 마당에 덩그렇게 남아 서로 얼굴들을 외면한 채 앉거나 서서 담뱃불을 빤닥이며 캄캄한 앞산을 바라보거나 땅을 내려다보며 그와 살 비벼 살아온 날들을 생각하며 헤성헤성한 마음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하나둘 헛기침을 하며 어둑어둑 헤어졌다.
-「섬진강16 -이사」부분

여기서는 "헤성헤성한 마음"이나 "어둑어둑 헤어졌다"에서 보듯이 모양을 흉내낸 말들과, "[……] 땅, [……] 땅, [……] 땅"에서 보이는 점점 세지는强化 말들의 사용으로 운율감을 얻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도 읽으면 어떤 보격이 느껴진다. 특히 "차는 […] 잘도 달리며"에 주목해보자.

사람들은 차를 타고 씽씽 잘들도 달린다. 그러나 나는 천천히 걸어간다. 아침에 올 때 강물에 둥둥 떠 있던 오리, 빨간 발을 허공에 내저으며 자맥질을 하던 오리 없다. 틀림없이 누군가 총질을 했을 것이다. 새들과 나무와 꽃과 물이 하늘과 바람과 물과 어울려 노는 꼴을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들판은 텅 비어 있다.
-「나는 집으로 간다」부분

"잘도 달리며"와 "잘들도 달린다"의 운율상 차이는 명백하다. 앞엣것은 읽히며 뒤엣것은 읽히지 않는다. 여기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좀 문제를 갖고 있다. "잘들도 달린다"는 말이 "씽씽 […] 달[리]"지 않기 때문이다. 좀더 읽어보면 "나는 천천히 걸어간다"고 쓰여 있다. "천천히." 하지만 이 시를 소리내 읽어보면 결코 느리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줄글이 뭉텅이씩 지나간다. 왜 그러냐 하면, 율律이 없기 때문이다. 율은 멈춤休止에서 생기고, 그 멈춤은 자연스러운 숨呼吸이다. 그것이 없으면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이 글이 아주 산문으로 쓰였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자맥질을 하던 오리 없다"는 토씨가 없어서 (산문으로서는) 이상한, 시문장이다. 그러나 "틀림없이 누군가 총질을 했을 것이다. 새들과 나무와 꽃과 물이 하늘과 바람과 물과 어울려 노는 꼴을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에서 우리는 어떠한 운율도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은 어절로 잘게 쪼개지거나 문장으로만 있어 전혀 쪼개지지 않는다.

그건 이야기histoire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책끝에 붙은 이문재 시인의 "시에서 이야기가 승하면 언어는 죽는다, 라고 나는 믿어왔"지만 이 시집을 보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는 고백은 과장이거나 좀 우스운 말이다. 지겹도록 들어온 세계 문학의 첫 페이지 호메로스에서부터 우리는 이야기가 승한 예를 보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이야기가 승하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이야기가 승하든 죽든 어떻게 그러하느냐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는 이 시집에서 드물게 만날 수 있는 좋은 시 중 하나인데, 우리는 여기서 사색과 운율과 새로움이 함께 어울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별은 손끝에 있고 /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고 시인은 툭 잠언aphorisme을 던지고 왜 그런지를 물을 독자들에게 풀잎이나 햇살 따위를 보여준다. 어떤 독자는 풀잎이나 햇살이 나오자마자 답을 찾을 것이고, 어떤 독자는 "아픈 데서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가 나오기까지 답을 유보한다. 다른 독자는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불편했던 마음의 평안함을 느낀다. 이 시의 중요한 매력은 행갈이인데, 운율과 의미구조가 하나가 된 듯한 모습을 보인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는 구절은 특히 그렇다.

표제시이기도 한 「그 여자네 집」은 행갈이가 엉망이다. 무슨 기준으로 행갈이를 했는지 알 수 없다.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 그 여자 / 아버지와 그 여자 / 큰오빠가 / 지붕에 올라가"와 같은 구절은 이 시와 어울리지 않게 1000미터 오래달리기를 하고 와서 헉헉거리며 읽는듯한 모습이고,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 그 / 여 / 자 / 네 집"에서 마지막 행 "네 집"은 '너의 집'이라는 의미로 오해될 여지가 있는데 그런 모호성ambiguïté은 이 시와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이다.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 가 / 있던 집 / 그 / 여자네 / 집 /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은 감정을 제멋대로 발산시키면서 고삐질을 제대로 못해서 감정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모양이다. "생. 각. 을. 하. 면……"이 왜 어색한지를 우리는 생. 각. 해. 볼. 필. 요. 가. 있. 다. 그건 생경하고 쓸모없는, 아니 잘못된 과장일 뿐이다. 생각은, 여기서는 거닐면서 뒤를 자근자근 밟아가는 생각이지, 악몽같은 생각이나 충격적인 생각이 아닌 까닭이다.

아침밥 먹고
또 밥 먹는다
문 열고 마루에 나가
숟가락 들고 서서
눈 위에 눈이 오는 눈을 보다가
방에 들어와

밥 먹는다
-「눈 오는 집의 하루」전문全文

『섬진강』과 달리 이 시집에서는 오히려 짧은 시가 힘을 갖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눈 오는 집의 하루」는 짧은, 좋은 시다. 여기서는 사색이 보인다. "또 / 밥 먹는다"에서는 새롭지 않음의 새로움이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시의 백미白眉는 "눈 위에 눈이 오는 눈을 보다가"이다. "눈"이 뒤에 오는 홀소리에 따라 각각 [누뉘], [누니], [누늘]로 바뀌는 모습이 입술을 즐겁게 해준다. 더구나 [눈]은 울림소리와 둥근입술홀소리圓脣母音가 합한 형태라 더욱 그렇다.

물론 같은 짧은 시라도 「춥지요」와 같은 시는 힘이 하나도 없다. 잠깐의 감상주의에 빠지고 말 시다. 이 시의 하나뿐인 메시아는 "당신 뺨에 / 따스한 온기"가 눈물을 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역설뿐이다.


그 여자네 집
김용택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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