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위기를 조금씩 극복해나가던 2001년 한 카드사의 신년 광고는 어느 여배우를 등장시켜 아주 단순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여러분, 부자되세요. 꼭이요." 무차별 카드 발급의 여파로 신용불량자가 매해 증가하던 시절이었다. 광고는 대박을 쳤다. 카드사의 이미지도, 배우의 이미지도 덩달아 올라갔다. 카드사로서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지점을 정확히 공략한 셈이었다.

소비자들은 모두 부자가 되기를 원했다. 적어도 그런 말이라도 듣기를 바랐다. "부자되세요."

그래서…… 그때부터였던 듯하다, 친한 사람들끼리 발랄하게 "새해 복 많이 받아" 대신 "새해 돈 많이 받아" 하고 인사를 주고 받았던 것은. 그 말은 묘하게도 위악爲惡스러운 매력이 있었고, 또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는 그런 욕심이 있었으므로 '진실'한 말이기도 했다.

은밀한 내면의 욕구를 드러내는 데 점점 사람들은 망설이지 않았고, 또 그런 태도를 상찬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전 사회가 동참한 '조용한 혁명'이었다.

진실과 구라#

개그맨 김구라가 지상파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어쨌든 황봉알 등과 함께 인터넷 방송에서 '막말'을 일삼던 김구라는 본래 지상파에 어울리지 않던 인물이다. 지상파 방송사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했지만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김구라는, 욕설과 비방 등 거의 무한정의 자유가 가능했던 인터넷 방송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인기를 끌었다.

그는 지상파에 나와서도 (표현의 수위는 다소 낮췄지만) 이 당시의 기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돈과 여자를 밝히고, 뭐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럭' 하고 화를 낸다. 상대방에게 면박을 주거나 인신공격 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이를 그의 매력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김구라와 대비되는 인물로는 최진실이 떠오른다. 최진실은 1988년에 데뷔했고, 한 전자회사의 광고를 통해 폭발적인 대중의 인기를 얻는다. 그것은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부르주아 가정의 화목함을 강조한 카피 덕분이었다. 고종석(2009, 23)은 한국일보에 연재한 '여자들' 연작의 두번째 글 최진실-21세기의 제망매(祭亡妹)에서 그 모습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최진실은, 다른 자살자들과 달리, 내 가족이었다. 내 안쓰러운 누이였다. 그녀는 '만인의 연인'이었다기보다 '만인의 누이'였다.

최진실의 첫 메인 모델 작품인 VTR 광고가 떠오른다. 남편이 퇴근해 돌아오자마자 아내에게 축구경기를 녹화해놓았느냐 묻자, 아내가 살짝 토라져 "나보다 축구가 더 좋다는 거죠?" 라고 항변한다. 남편은 쩔쩔매며 사과하고, 시청자를 향해 아내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한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그 광고 속의 최진실은 단번에 대중을 사로잡았다. 파릇한 나이의 그녀가 행복에 겨워하며 상큼하고 야무진 새댁 역할을 하는 그 광고 덕분에, 그 전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최진실은 웬만한 TV드라마 주인공 못지않은 대중 스타가 됐다.

그러나 최진실은 생애의 마지막까지 그 '부르주아 가정의 화목함'이라는 잣대 때문에 심한 마음고생을 겪게 된다.

남편과의 불화와 폭력, 이혼 후 자녀의 성본(姓本)변경 등으로 이목을 끌었고 사망 후 최근까지도 생전에 광고 모델로 활동했던 한 건설회사의 손해배상 청구가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져 2억원을 배상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화목한 가정 생활을 보여줘 아파트 광고에 적합한 이미지를 유지했어야 하는데, 거꾸로 가정 불화로 멍든 얼굴과 충돌현장을 공개해 품위 유지 약정을 위반했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그러므로 어쩌면 고종석(2009, 24)의 이어지는 이 말을 우리는 일정 부분 긍정하게 된다:

화장품회사 사장이든 전자제품회사 회장이든 아파트 건설업자이든, 최진실과 광고로 이어졌던 자본가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를 상품미학의 한 톱니바퀴로 만든 이 자본주의체제를 나는 어쩔 수 없이 지지한다.

그것이 인간의 비천한 심성에 가장 들어맞는 체제이므로. 나는 최진실이 나온 드라마나 영화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흔히 과장된 비장함이나 비윤리적 희극성, 비현실성에 감염돼 있었다. 그러나 그 영화들과 드라마들에 나온 최진실이라는 누이를 나는 은근히 좋아했다.

김구라가 '진실'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연예 활동을 하고, 최진실은 '구라' 곧 화목한 가정의 환상을 유포함으로써 인기를 유지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컬하다.

최진실은, 그러니까 '구라'와 환상은 이제 이 땅에 없다. 김구라의 '진실'은 여전히 살아남았고. 그러나 김구라의 '진실'은 과연 진실일까.

'솔까말'의 폭력성: '진실'은 진실인가#

'88만원 세대'의 저자인 박권일은 주간지 『시사인』에 실은 「끔찍하다, 그 솔직함」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누리꾼들의 은어인 '솔까말'을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솔까말'은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의 준말로 거짓과 위선을 폭로하는 통쾌함을 주지만, 반대로 솔직함 속에서 돈과 권력을 욕망하는 사회를 그대로 반영하는 폭력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는 이 말이 속마음--그의 표현대로라면 혼네本音--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솔까말'의 폭력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과거 '병신'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을 '장애인'으로 바꿔 부르는 것은, 그들이 진짜 '병신'인데 그걸 그대로 드러내면 예의 없는 표현이라 '장애인'이라는 대체 수단을 마련한 것이 아니다. 장애인은 '병신'이 아니라 단지 신체 어느 부분이 불편한 구석이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여기에 '솔까말'을 대입하면 "솔까말 그게 '병신'이지"가 된다. 이런 것이 진짜 '솔까말'의 폭력성이다.

즉, '솔까말'은 상대방이 어떤 진실을 믿든지, 그것은 위선일 뿐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다. "솔까말 돈이 최고지, 솔까말 SKY대학이 최고지, 솔까말 삼성 없으면 대한민국 굶어죽지…." 이 같은 말들은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라는 허울 속에, 사회의 잘못된 구조를 더욱 고착화시킨다. 돈이 최고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도, SKY대학이 최고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도, 삼성이 없어도 대한민국이 굶어죽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말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열심히 늘어놓아야 하지만 대체로 소용이 없다. '솔까말'은 어떤 근거를 들어 하는 언사가 아니고, 단지 자신의 '믿음'만을 드러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가보자면, 누군가 "솔까말 돈이 최고지"라고 말하면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던 듣는이는 문득 자신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솔까말'은 구체적인 근거가 없이 단지 세상에 횡행하는 '속설'을 기초로 한 말이기 때문에, 이 성찰은 겉돌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부 순수한 사람들은 자신을 혐오하거나 세계를 비관하게 될 수도 있다. '솔까말'은 이렇게 세계를 긍정했던 사람들을 쓰러뜨린다.

'솔까말'은 솔직하게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속설'을 드러낼 뿐이다.

자본주의의 신, 자본주의의 탄생#

공영방송 KBS는 최근 「공부의 신」이라는 드라마에 이어 「부자의 탄생」을 방송하고 있다. 이들 드라마는 공영방송이 어떻게 '솔까말' 식의 '진실'을 전파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지 상세하게 보여줬다.

시청률 면에서 동시간대 최고를 기록했던 「공부의 신」은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국립 천하대' 출신이며, 이런 세상을 고치려면 '천하대'에 가라고 외친다. 천하대는 한국인들에게 '최고 대학'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국립 서울대'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주연 배우인 김수로는 인터뷰에서 '서울대'라는 명칭을 방송에서 쓰지 못하는 데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 '서울대'라는 명칭을 그대로 못 쓰고 '천하대'라는 가상의 대학을 상정해서 제작한다"면서 "그러고 보니 시청자들에게 내용이 다가가는 데 어려움이 많고, 촬영 현장에서도 '서울대'라고 했다가 '천하대'로 고치는 등 NG도 많이 난다"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천하대가 최고대학이라는 어떤 근거도 드라마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냥 모두가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천하대'에 가서 어느 선생님께 무엇을 배우고 싶다는 목표도 없다. 심지어 결말에서는 천하대에 합격하고도 다른 길을 찾아 나서는 등장인물도 나온다.

'부자의 탄생'도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는 '역시 돈이 최고'라는 사회적 인식의 병폐, 곧 '속설'을 강화한다.

재벌과의 '원나이트스탠드'로 태어난 주인공이 성공해 재벌 아버지를 찾는다는 줄거리는, 일종의 '핏줄결정론'을 형성하며 한국 재벌가에 만연한 불법·편법 경영권승계를 정당화할 우려도 있다.

"KBS가 이상의 실현과 올바른 가치관의 확립이라는 건강한 사회관 대신 '천하대'와 '돈'이라는, 현물화된 욕망의 정점만을 추구하는 현대극을 기획하고 있다는데 큰 우려를 표하고 싶다"는 KBS 시청자위원회 보고서도 나올 정도다.

자본주의의 선악과#

글머리에 언급했던 카드사는 '빨간 사과'를 기업 이미지로 쓰고 있다. 이에 걸맞게도 그 카드사는 광고 한 편으로 한국 사회 전체가 자본주의의 선악과 열매를 따먹도록 한 셈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눈이 밝아져' 선과 악, '진실'과 '구라'를 알게 됐다. 그러므로 이를테면 '부자되세요'는 자본주의적 원죄原罪다. 순수한 사람도 닳고닳은 사람도 이 원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극단적인 자본주의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무엇을 찾을 수는 없을까. '눈이 밝아져' 이 원죄를 받아들이게 됐다면, 스스로 우리 눈을 어둡게 하면 어떨까.

그것은 어머니가 내게 사과를 사오라고 돈을 주셨을 때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1그로센짜리 은화를 주셨다. 그런데 사과 값은 6페니히밖에 되지 않았다. 가게 주인 여자한테 1그로센짜리 은화를 내주자, 여인은 내가 보기에 아주 우울한 표정으로 오늘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팔지 못했기 때문에 거스름돈이 한푼도 없노라 말했다. 그리고는 1그로센어치를 모두 사가길 원하는 것이었다. 그때 6페니히짜리 동전이 내 주머니에 있다는 생각이 언뜻 떠올랐다. 그것이면 지금의 곤란한 문제가 풀릴 거라는 생각에 기뻐하면서 그것을 부인에게 내주며 말했었다.

"이제 이걸로 나한테 6페니히를 거슬러 줄 수 있잖아요?"

하지만 그녀는 내 뜻을 영 알아채지 못하고는 1그로센짜리 은화를 내게 되돌려 주고 6페니히짜리 동전을 받아 넣었던 것이다.

막스 뮐러(1987, 34)가 언급한 이 대목은 내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린이가 얼마나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나 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의 뮐러에게는 '돈'보다 중요한 것이 아주 많았다. 무언가 곤란한 일이 자신의 도움으로 풀릴 수 있다면 자신의 돈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 번역자인 차경아는 이 모습을 들어 그를 '귀여운 공산주의자'(143)라고 부르는데, 어린 뮐러가 커 가면서 '솔까말'이라는 자본주의 선악과를 따먹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책에서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눈이 밝은 것이 아닐까.

참고문헌#

고종석. 2009. 『고종석의 여자들』. 서울:개마고원.
Max Müller. 1987. 『독일인의 사랑』. 신역판. 차경아 옮김. 서울: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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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됨'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이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기독교는 위험하다. 그리스도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언급했던 것은 두 사랑의 계명, 곧 여호와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사도 요한은 한 편지에서 다소 충격적인 발언을 한다(요일 4:20):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흔히 이웃 사랑에서 자주 인용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배울 필요가 있다. 도움이 필요한 소외된 자를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모범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돈을 스스로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여호와의 것 혹은 최소한 공동체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정치가 한정된 재화를 어떻게 나누는가를 정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때, 기독교의 정치는 그 재화가 본래 여호와로부터 온 것이라는 철저한 인식 속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1. 기독교와 사유재산

쟝 깔뱅은 그리스도인의 사유재산을 포함한 여러 가지 자유를 인정했다. 모든 신자가 수도원의 탁발승처럼 살 필요는 없고, 각자 자신이 있는 곳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소중한 소명이며, 그로써 정당하게 번 재산은 신의 선물이라는 것이다(Calvin 1994, 332):

분명히 상아나 금이나 재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것이며,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허용되고 지정받기까지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웃거나 배부르거나, 옛 조상의 재산에 새 것을 더하거나, 혹은 아름다운 가락을 즐기거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들을 결코 금지당한 적이 없다.

이에 따라 막스 베버가 '독특한 부르조아 경제윤리'라고 부른 기독교 경제 윤리가 탄생한다(Weber 1987, 242-243):

그리하여 하나의 독특한 부르조아 경제윤리가 출현한 것이다. 부르조아 기업가는 신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서서 그의 축복을 받고 있다고 느끼며, 그가 형식적인 올바름의 틀을 지키는 한, 그리고 그의 도덕생활이 깨끗하며 그의 재산이 온전하게 사용되는 한 금전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며, 또한 그가 그렇게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기독교의 측면에서 보면 그 사유재산이라는 것 역시 '나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을 맡아두고 있다는 의식이 중요하다. 이런 의식의 발전된 형태로 사도행전이 보고하는 위대한 기독교 공산주의 혁명을 들 수 있을 것이다(행 2:44-45; 4:32):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행전 1장은 다락에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12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2장에서 성령이 임한 오순절 사건 이후 41절은 3000명의 제자가 늘었다고 보고 하고 있으며, 4장에서 말씀을 들은 자 가운데 5000명의 남자가 새로 믿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당시에는 성인 남자만 세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보수적으로 잡아도 족히 2만 명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만 명의 공동체가 사유재산 없이 서로 필요에 따라 물건을 통용했던 것이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의 정치라면 이 정도의 이상은 꿈꾸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자본주의의 시대를 접고, 기독교 공산주의의 시대로 나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한국의 깔뱅주의 프로테스탄트라면 재산과 관련해서 세속 법이 규정하는 것 이상으로 엄격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가령 깔뱅 역시 사유재산은 인정했지만 무차별적인 재산권 행사의 자유는 그르다고 보았으며, 이자利子는 인정했지만 무차별적인 취리는 옳지 못하다고 보았다(손봉호, 칼빈의 사회 사상).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이고, 첫 내각의 상당수가 재산과 관련하여 엄청난 비리가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대학 등록금도 없던 이명박 대통령의 가계는 현대건설을 거치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탄탄해졌다. 개발독재 시대의 건설사에 몸담고 있으면서 땅값의 시세차익으로 얻어진 부다. 그는 이 부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대통령 후보시절 선언했지만,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면 지키려는지 아직까지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한 장관 내정자는 땅 투기 의혹에 "땅을 사랑했을 뿐 투기는 아니다"라는 군색한 변명을 내밀었고, 다른 장관도 투기 의혹이 불거지자 한겨울에 트렉터를 끌고 밭을 가는 쇼를 했다. 굳이 헌법에 명시된 '밭 가는 자가 밭을 소유한다耕者有田'는 원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앞서 희년과 나그네됨: 이명박과 예레미야서 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런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율법 규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수많은 노동자가 다치고 죽어가는 상황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명시적으로 부자를 위한 정치, 기업가를 위한 정치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당선자 시절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전경련이라는 점이나, 최근 기업가들을 위한 직통 핫라인을 개설한 점 등만 봐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점이다. 이 땅의 나그네들을 소외시키고, 재산을 여호와의 것이 아니라 기업가의 것 혹은 자신의 것으로 고착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요컨대, 이명박이 펴려는 정치는 단순히 가진 자의 정치나 우파의 정치는 될 수 있어도 그리스도인의 정치라고는 결코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기대에 훨씬 못미쳤을 망정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가 (그들 자신의 종교와는 관계 없이) 그나마 더 여호와의 뜻에 합당한 정치였다.


2. 이명박과 예레미야서

많은 교회가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선거 과정에서 알게 혹은 모르게 이명박을 지지했고,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감사 기도를 드린 곳도 많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적籍을 두고 있는 소망교회에서는 주일 낮 예배에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에 당선시켜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리고, 매주 수요일에 이명박 대통령의 성공을 기원하는 기도회가 열린다(『한겨레21』 제699호).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생략된 것은 이명박이 과연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평가와 과연 항상 그리스도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만이 여호와의 뜻인가 하는 판단이다. 이명박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인가 혹은 그의 정부가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정부인가 하는 문제의 해답은 앞서의 절을 통해서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보고, 과연 항상 그리스도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만이 여호와의 뜻인가 하는 판단에 대해서 살펴보자.

선지자 예레미야는 분열왕국 남유다가 망하는 것을 지켜본 예언자이다. 슬픔 가득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남유다가 망할 것이며 다윗의 왕위가 폐하여질 것이고, 여호와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무너지리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가 남유다의 백성들에게 권고한 것은 여호와의 도성을 지키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바빌로니아에 항복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라는 것이다(렘 27:8-10).

그러니 바빌론 왕이 씌워주는 멍에를 메어라. 그 왕 느부갓네살을 섬겨라. 그러지 않는 민족과 나라가 있으면, 나는 그 민족을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벌하여서라도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주고 말 것이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너희의 예언자들과 박수들과 해몽가들과 점쟁이들과 마술사들이, 우리가 바빌론 왕을 섬기게 될 리 없다고 하더라도 곧이듣지 마라. 그자들이 하는 예언은 거짓이다. 그 말을 듣다가는 고향을 멀리 떠나게 되며, 나에게 쫓겨나 망하고 말 것이다.

남유다의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고, 다윗의 왕위가 공고하리라는 거짓 예언만을 믿었다. 그러나 패역하고 여호와의 뜻에서 돌아선 남유다의 왕좌는 유지되지 못하였고, 바빌로니아에 결국 멸망하고 만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유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여호와가 그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구약의 세계관에서 바빌로니아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여호와는 바빌로니아의 왕을 종從이라고 부르며, 유다가 영원히 망할 것이 아니라 70년 후에 귀향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기도 하다(렘 25:9, 12):

나는 내 종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을 시켜 북녘의 모든 족속들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주위에 있는 모든 민족을 전멸시키고 이 땅을 영원히 쑥밭으로 만들게 하리라. 사람마다 그 끔찍한 모습을 보고 빈정거리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 그 칠십 년이란 시한이 차면 나는 바빌론 왕과 그 민족의 죄를 벌하여 바빌론 땅을 영원히 쑥밭으로 만들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적어도 당시 남유다에게 있어서는 다윗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아니었고, 죄악의 상징 바빌로니아가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느 대통령 후보가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혹은 장로라고 해서 앞뒤 재지 않고 그에게 표를 주는 몰지각한 시민의식이 여호와의 관점에서도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태도는 솔로몬처럼 선과 악을 분별할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서는 안 되고, 여호와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이 부분을 혼동하면 예레미야 시절의 남유다 백성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보유

이명박 장로는 결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절차와 의혹이야 어떻든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이것 역시 여호와의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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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손봉호. '칼빈의 사회 사상'. 실린 곳: http://lloydjones.org.
Calvin, Jean. 1994. 『기독교 강요(초판)』. 12판. 세계기독교고전14. 양낙흥 옮김.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Weber, Max. 1987.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학술총서1. 박종선 옮김. 서울:두리.

Posted by 엔디

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가벼운 이야기로 우리는 이지형의 장편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를 알고 있다. 문학평론가 도정일이 "만화적 상상력"이라고 부른 이지형의 '모던 보이' 이야기는 무척 유쾌했다. 40년대의 경성도 30년대만큼 날렵했을까. 대동아 전쟁이 발발하고, 반도에서는 소위 민족 말살정책이 서슬퍼렇던 그 총력전의 시대에? 하지만 이 실용주의의 시대에 그런 실증주의적 분석은 허랑하다. 확실히 사람들은 민족이니 독립이니 하는 무게감을 뺀, 날렵한 시대물을 원하는 면이 있다.

정용기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은 그런 사람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만한 영화다. 독립운동의 비장함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독립운동을 빙자한 도둑질이나, 희화화된 독립운동가들만이 남아 있다. 이 영화 속에서 소위 독립운동가라고 하는 친구들은 지나치게 우둔하거나, 지나치게 영리하다.


1-1. 안티내셔널리즘? - 우둔한 독립운동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이름을 딴 카페 상호가 무색하게도, 이 까페의 사장과 요리사는 영화에서 가장 우둔한 쪽에 속한다. 이들은 까페를 운영하여 번 돈을 상부(아마 임정)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갖다 바치는 한편, 종종 내려오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일제 유력 인사나 중요 시설에 대한 태러를 감행(시도)한다.


이를테면 '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넣는다, 냉장고 문을 닫는다' 식의 허무한 계획을 세우고서 엄청난 테러를 기획하는 그들의 모습은, 독립운동이라는 큰 거대담론 자체를 희화화시키고 만다. 거기서 독립운동의 존재이유는 사라지고, 우리편/상대편 식의 단순한 2분법과 웃음만 남는다. 여기서 웃음이 유발되는 요인은 '거대담론'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져버리는가에 있다. 김기림(1988, 142)은 '비소법比小法bathos'을 통한 '유머'를 단순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가령

"군대는 새벽거리를 국경으로 향하여 이동하기 시작했다. 중화기重火器가 이에 따르고 치중부대가 뒤를 따랐다"고 말하여 무슨 비상 사태인 줄만 알게 해놓고 끝에 가서 "이리하여 군대는 연습지로 향하였다"

라고 하는 식이다. "상부에서 '동방의 빛' 고것을 탈취해 오랴." "계획은 있고?" 계획이 있을 리가 없다. "뭐 별로 계획할 것두 없겠구먼." 이런 식이다.

예고편에서는 사장은 열혈 독립투사로, 요리사는 '생계형 독립운동가'로 소개되었지만, 실상은 사장이나 요리사나 모두 빠듯한 생계生計 곧 살 궁리 속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그것은 요리사 희봉의 "그럼 이번에는 다이아만 훔치고, 정무총감은 담에 한가할 때 좀 죽이면 워뗘?"와 같은 대사나 사장의 "해서 독립운동도 까먹지 않게끔 좀 정기적으로 꾸준히 해야 되는겨."에서 잘 드러난다.


1-2. 안티내셔널리즘? - 영리한 독립운동

봉구는 지나치게 영리하고, 제멋대로인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온갖 문화재들을 일본인들에게 고가를 받고 팔아넘긴다. 영화에서 액션 장면을 가장 많이 보여주는 그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테러리즘을 통한 독립운동을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아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는 독립운동가연한 적이 없다. 그가 독립운동에 관련이 있었음을 보여준 것은 오로지 그가 가져온 금괴 10궤짝이 독립운동 자금 대신 건국 자금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말하는 내레이션뿐이다.

그러나 봉구라는 캐릭터는 코미디 영화의 등장인물로서 상당히 매력적인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1999, 31, 1448a)가 말한 대로 "희극은 실제 이하의 악인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실제 이상의 선인을 모방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가 문화재를 팔아넘기는 것에 대해 전당포 주인은 "그게 다 민족혼인데." 하고 혀를 찬다. 하지만 봉구는 태연하게 말한다: "민족혼이 밥 멕여 줍니까. 오까네お金가 아리마센ありません인데."

봉구가 외모나 체격, 그리고 영리함 등 많은 면에서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우월한 캐릭터임에도 그의 행동이 코미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그가 도덕률에 있어 우리보다 낮은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저는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은 아니에요. 전 불의를 보면 그냥 쭉 봐요."라고 장난스럽게 대답해서 웃음을 유발한 한 잘생긴 연예인처럼, 봉구도 모든 면에서 멀쩡한 사람이 문화재 뒷거래를 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쿨한 답변을 할 줄 안다는 것이 코미디의 조건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1-3. 안티내셔널리즘? - 춘자와 하루꼬와 해당화의 사이

춘자는 미네르빠에서 인기 있는 가수이면서, 해당화라는 이름을 걸고 일본인이나 친일파의 사저를 뒤지는 도둑이다. 그는 "한국인이지?"라는 질문에도 "일본인이지?"라는 질문에도 도리질을 한다. 식민지인과 내지인 사이에서 태어난 상황은 한 여자의 삶을 이중적으로 만들어냈다. 가수/도둑의 사이, 한국인/일본인의 사이, 곧 춘자/하루꼬/해당화의 사이에 그가 존재한다.

특히 유명한 테러리스트 독립운동가인 안중근의 마디 없는 손도장과 해당화라는 이름은 춘자가 독립운동가일 것이라는 심증을 굳게 하지만, 그건 시쳇말로 낚시다. 여기서도 역시 춘자의 존재는 독립운동이라는 거대담론을 우습게 만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1-4. 안티내셔널리즘 < 내셔널리즘

하지만 이런 세목들에서 내셔널리즘이 희화화되는 중에도 오히려 관객은 복류하는 내셔널리즘의 강력함을 체험하게 된다. 미네르빠의 사장과 요리사는 결국 정무총감을 암살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내용이나, 봉구가 빼돌린 돈이 결국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였으며, '동방의 빛' 사건으로 빼돌린 돈은 건국 자금으로 쓰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장면이 그렇다. 여기서 미네르빠의 사장과 요리사는 단순한 마음의 소유자로 방법은 졸렬하지만 우직한 충성심을 가진 그들 나름대로 탁월한 독립운동가라고 다시 자리매김하게 된다. 봉구 역시 탁월한 사기꾼 기질을 독립을 위해 쓴 것이었다는 사실이 직소퍼즐의 완성을 통해 밝혀지면서 그에 대해 가졌던 관객의 의구심은 풀리고 만다. 그는 기지 넘치는 독립운동가의 자금책으로 재포장된다. 열 궤짝의 금괴를 '해방된 조국'에 그대로 갖다바쳤다는 설정은 잠깐 스치듯이 지나가지만, 현재 정치권의 부패에 질린 관객들에게는 반드시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에서 보여주는 내셔널리즘의 희화화는 관객들이 내셔널리즘에 침윤되어 있을 때라야 빛을 발하는 이중 장치라는 것이 밝혀진다. 가령 봉구의 경우를 보자: 민족혼을 팔아먹는 그의 윤리 의식이 웃음을 유발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객들은 그보다 고상한 윤리 수준, 곧 좀더 강한 내셔널리즘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주인공 봉구가 악한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미에 금괴 열 궤짝을 건국 자금으로 바쳤다는 설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미네르빠의 사장과 요리사도 역시 희화화된 테러리즘적 독립운동에서 웃음을 유발하지만, 그들이 실패한 독립운동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무총감 테러에 성공하여 '해피 엔딩'을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춘자에 이르면 좀더 재미있어진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니라는 춘자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경계인의 눈물 자국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니라던 춘자는 결국 해방 이후에도 별다른 설명 없이 조선, 아니 미군들이 모인 남쪽의 한국에 남는다. 패전국 일본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승전국 로시아로 가서 멋진 재즈 바를 차리지도 않고 말이다. 그도 아니면 로시아에 더 가까운 이북이나 김기림이 "아라사의 소문이 자주 들리는 곳"이라고 노래했던 곳으로도 가지 않고 말이다. 바로 몇 분 전까지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그 '사이'에 있으면서 내셔널리즘을 비웃을 준비를 하고 있던 춘자는, 조금의 고민도 보이지 않고 '해방된 조국' 남한을 택한다. 걸출한 도둑이었던 해당화가 어느 새 의존적 여성 춘자가 된 것은, 그가 '사이'에서 '남한'으로 삼투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한다. 그런데 관객들은 그런 춘자의 변화를 별다른 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데, 여기서 작용하는 것이 내셔널리즘이다. 한국인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춘자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 하고 놀랐을 것이다. 춘자春子라는 촌스러운 이름부터가 그렇다. 본인이 아무리 하루꼬春子라고 불러 달라고 애써도 민족혼을 들먹이는 전당포 주인은 그를 춘자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엔딩 크레딧에서조차 하루꼬가 아니라 춘자로 등장한다.)

춘자와 하루꼬 사이, 혹은 그 둘과 해당화 사이에서 머물던 그는 어느 사이인게 해당화를 먼저 지워버리고, 그 다음에는 하루꼬를 지워버렸다. 그렇게 그는 안티내셔널리즘에서 내셔널리즘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된다.


2. 전당포의 자본주의

《원스 어폰 어 타임》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전당포이다. 모든 음모는 전당포를 기점으로 시작되고, 독립운동이라든가 하는 중요한 의제는 전당포에서 드러난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위기 상황 역시 전당포에서 드러난다. 그 말은, 이 영화가 자본주의를 밑바탕에서부터 깔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자본주의를 세상의 모든 것에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간명하게 정의한다면, 전당포야말로 초기 자본주의의 총아라고 할 만한 것이다; 온갖 물품들이 금액, 곧 숫자로 환산되어 나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박태원(1987, 56)의 「피로」와 오장환(1989, 24)의 「古典」은 전당포를 이렇게 언급한다:

나는 그 고무장화의 피곤한 행진을 보며, 그것을 응당 물로 닦고 솔질을 할 그들의 가엾은 아낙들을 생각하고, 또 그들의 아낙들이 가끔 드나들어야만 할 전당포를 생각하고, 그리고 그곳에 '삶'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전당포에 고물상이 지저분하게 늘어슨 골목에는 가로등도 켜지지는 않았다. 죄금 높다란 포도鋪道도 깔리우지는 않었다. 죄금 말쑥한 집과 죄금 허름한 집은 모조리 충충하여서 바짝바짝 친밀하게는 늘어서 있다. 구멍 뚫린 속내의를 팔러 온 사람, 구멍 뚫린 속내의를 사러 온 사람. 충충한 길목으로는 검은 망또를 두른 쥐정꾼이 비틀거리고, 인력거 위에선 차車와 함께 이미 하반신이 썩어가는 기녀들이 비단 내음새를 풍기어가며 가느른 어깨를 흔들거렸다.

그런데 《원스 어폰 어 타임》의 전당포는 박태원이나 오장환이 언급한 곳보다 더 다이내믹한 공간, 곧 장물아비의 집으로 묘사된다. 확실히 "민족혼이 밥 먹여 줍니까. 오까네가 아리마센인데."라고 봉구가 전당포에서 말했을 때 그는 도굴꾼의 마인드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독립운동을 위한 운동 자금을 위해 문화재를 팔아 넘겼던 것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드러나는 당연한 결론은 독립에도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기실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독립운동가들은 기본적으로 운동의 자금책이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미네르빠의 수익금은 분명 임정으로 들어가고 있고, 전당포 주인의 역할 역시 마찬가지다. 봉구는 문화재를 팔아먹거나 사기를 쳐서 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있다.

여기서 그들의 저항적 내셔널리즘과 자본주의의 끊지 못할 인연이 드러난다. 미네르빠의 사장과 요리사가 남쪽에 남은 것은 임정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에서 충분히 보이지만, 봉구와 춘자가 남쪽에 남은 것 역시 이와 같은 자본주의와의 연관 관계를 통해 이미 드러나 있던 것이라는 점이다.


내셔널리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원스 어폰 어 타임
《원스 어폰 어 타임》은 1940년대를 정확하게 그리지 못하고 있다. 이 영화는 시대물도 아니며, 비장한 각오로 봐야 하는 영화도 아니고, 그저 오락꺼리일 뿐이다. 문제는 그런 영화일수록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시장 논리다. 영화의 포스터는 "독립군의 시대는 가고 사기꾼의 시대가 왔다!"고 우스꽝스럽게 주장하고 있지만, 이 영화는 독립군의 내셔널리즘에서 한 발짝도 옮기지 않고 있다. 더구나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는 극단적 자본주의가 횡행하는 21세기 초 남한의 관점을 그대로 영화에 투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화에서 1940년대의 경성이 아니라 2000년대 첫 10년의 서울을 보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 영화에서 내셔널리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긴밀한 커넥션을 느낄 수 있다면, 그대와 나 역시 자본주의의 총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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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기림. 1988. 『金起林 全集』. 4: 文章論. 서울:심설당.
박태원. 1987. 『小說家 仇甫氏의 一日』. 기민근대소설선10. 천안:기민사.
오장환[최두석 엮음]. 1989. 『오장환 전집』. 1: 詩. 서울:창작과비평사.
Aristoteles et al.. 1999. 『詩學』. 천병희 옮김. 서울:문예출판사.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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