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1.02 풍자와 인터넷 댓글 놀이 (7)
  2. 2004.08.02 비논리적 설득: M. Moore 《화씨 9/11》
"~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 하는 이명박 댓글 놀이가 유행이다. 알다시피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에 이은 두 번째 정치 패러디 댓글이다. 민노씨.네 블로그를 통해 이 댓글 문화에 대한 반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명박 댓글 놀이가 찌질한 이유는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 댓글이 이명박이 아니라 이명박을 찍은 유권자들을 향한 풍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찌질하다고 주장하는 글이다. 하지만 나는 이 논의에 동의할 수 없고, 이와 같은 댓글 놀이의 한계는 인정하고서라도 재미있으면서도 일말의 의미가 있는 이 놀이는 계속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표절하면 어때 책 많이 팔아서 경제 살리면 그만이지

경제 살리면 그만이지 댓글



1.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vs. "경제만 살리면 되지."

원문에서 "노무현 때문이다."가 수구 언론을 향한 것인 반면 "경제만 살리면 되지."가 유권자를 향한 것이라고 했는데 무엇보다 나는 거기에 100% 동의할 수 없다. 원문에서 두 풍자의 차이를 판단한 근거는 나타나 있지 않다. 추측컨대 "노무현 때문이다."의 문장에는 노무현이 들어가지만 실은 수구 언론을 향한 풍자인 반면, "경제만 살리면 되지."는 이명박의 언어 자체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아서 언어의 객체와 풍자의 객체가 동일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추측이므로 확신할 수 없다.) 기실 지금껏 "노무현 때문이다."의 풍자성을 오독하고 실제로 그것이 노무현을 비난하는 것으로 인식한 사람들도 꽤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명박 댓글 놀이를 해서는 안 될 이유는 될 수 없다. 무엇보다 "경제만 살리면 되지."가 이명박을 찍은 유권자를 향한 것이므로 찌질하다면,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역시 수구 보수 언론인 조중동을 구독하는 대다수의 국민들을 조롱하는 것이 될 뿐이기 때문에 그 민주주의적 마인드에서의 찝찝함은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두 풍자의 층위는 똑같은 것이다.


2. 풍자의 힘?

나는 풍자가 큰 힘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본래 풍자라는 것은 패배자의 소극적 저항일 뿐이다. 현실 정치에서 패배한 이가 승리자에 대하여, 그래도 나는 너보단 이러이러한 면에서 낫지, 하고 자위하는 것 정도가 일반적인 풍자의 모습이다. 이상섭 선생은 『문학비평용어사전』의 '풍자Satire' 항목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1997, 280-281):

이처럼 풍자하는 사람은 풍자의 대상에 대하여 우월한 태도를 유지한다.
[…]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의 도덕적, 지적 표준은 특수한 교리에 근거하거나 보통사람들이 올려다 보지 못할 만큼 높은 것은 아니다. 풍자가의 수준은 그의 독자들이 암암리에 자연스럽게 수긍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고, 그가 공격하는 대상은 독자들도 역시 불찬성, 경멸하는 대상이다. 즉 풍자가는 자신의 입장을 변호함이 없이 독자들을 자기 편으로 갖고 있다. 독자는 풍자가의 공격에 자연스럽게 기꺼이 합세한다.
[­…]
현실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통하여 사회악을 제거시키겠다는 풍자의 목적은 실제로 실현되지는 않았으니, 그런 의미에서 풍자는 언제나 실패작인 셈이다.

즉 좀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풍자는 ① 내가 대상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에서 출발하지만 ② 실제로 풍자가인 내가 그렇게 높은 수준인 것은 아니고, ③ 풍자의 독자 역시 새로이 유입되기 보다는 같은 편끼리의 낄낄거림에 불과하며 ④ 그런 점에서 풍자는 현실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데에는 항상 실패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령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수준 높은 풍자 예술의 경우는 예외이다.)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자신이 있는 정권은 풍자를 크게 탄압하지 않는다. 김지하가 김수영(1981, 184)의 「누이야 장하고나! - 新歸去來7」의 "누이야 / 풍자諷刺가 아니면 해탈解脫이다"를 (아마 의도적으로) 오독하여 「풍자諷刺냐 자살自殺이냐」를 씀으로써 풍자를 비장하게 만들어버렸지만(김지하 1993, 141-159), 사실 풍자는 잠깐의 웃음만 줄 뿐 전망이 부재한 양식이다. 그러니까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나 "경제만 살리면 되지." 모두 그런 풍자의 약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잠깐 촌철살인의 웃음이나 '썩소' 한 방 날려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되는 것이 풍자다. 풍자의 역할은 거기에서 마치는 것이다. 전망을 보고 비전을 보려면, 미안하지만 누리꾼들 스스로가 풍자에서 더 나아가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3. 그럼에도 풍자의 힘!

쓰다보니 풍자를 너무 깎아내린 셈이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이만한 풍자만으로도 일단 만족한다. 아직 누리꾼들이 (어느 정도는 재미로 빠져들기도 하겠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판단하고 있거나, 최소한 이 풍자 댓글 놀이를 통해 사후에라도 판단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쥐띠해인데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되지...

ⓒ여름하늘, http://skysumm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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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수영. 1981. 『김수영 전집』. vol. 1. 詩. 서울:민음사.
김지하. 1993.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시선집』. 개정판. 창비시선 33. 서울:창작과비평사.
이상섭. 1997. 『문학비평용어사전』. 신장판. 서울:민음사.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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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Michael Moore의 «화씨 911»은 다 알다시피 깐느에서 처음으로 황금종려상la palme d'or을 받은 첫 기록documentaire 영화다. 드림웍스의 야심작 «슈렉»조차 빈 손으로 돌려보낸 '오만한' 깐느가 선택한 기록 영화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그 속에 엄청나게 극적인dramatique 폭로가 있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 정도일까. 혹은 이라크 침공의 도덕적·절차적 문제를 조목조목 파고들어 부시 대통령이 직접 그 영화를 보더라도 승복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까.

아니다. 이 영화에 가득찬 것은 반어와 풍자다. 여러 번 기사화된 무어 감독의 발언에서 짐작할 수 있는 그의 비판방식 그대로를 이 영화에 담은 것이다. 그리고, 그 비판방식은 사실 길고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에서 몰리에르를 거쳐 지금까지 내려온 이 흥미로운 양식은, 그러나 신뢰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이니, 꼭 민감한 폭발물같은 것이다. 가령 우리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에 동의하기 힘든 것이다.



무어 감독은 여기서 20세기 후반 이후에야 생각해낼 수 있는 방법-비디오 편집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특히 미국의 대통령과 행정부에 대한 비판에 무척 적절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보이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찍은 수많은 홍보비디오나 기자회견, 국무위원들의 답변, 보좌관의 발언, 국제회의에서의 주장 등의 자료 수집은 그 자체로 비판의 일부로 기능했다. 왜냐하면 부시 행정부가 너무도 자주 말을 바꾸고 있음을, 그 자료는 여실如實히, 아니 사실 그 자체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 풍자 양식은 ‘그들’의 양복에 담긴 권위주의적 신뢰성을 무너뜨리는 데도 상당부분 공헌하고 있다. 양복을 입은 채 기자회견실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signifié와 상관없이 어떤 특정한 모양signfiant을 갖는다. 우리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은 그 모양이다. 그러므로 권위주의적인 그 모양을 깨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특정한 발화상황과 떼어놓고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풍자는 여기서 큰 힘을 발휘한다.

이상하게도 실패하지 않았던 사업가로서의 조지 W. 부시와 미국의 대통령으로서의 조지 W. 부시 사이의 '유착관계' 역시 감독이 공들여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는 의혹제기 수준이므로 결코 성공적이랄 수는 없다. 풍자 영화는 바로 이런 부분에서 조심해야 한다. 부시 반대파들끼리 웃고 즐기려고 영화를 만든 게 아니라면, 이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설득은 오히려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건 이 영화의 장점이자 약점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이라크전 참전 군인들에 대한, 그리고 이라크전 전사자의 가족들에 대한 인터뷰다. 이 인터뷰들은 상당히 감정적이어서 감독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조차도 스스로의 입장을 지킬 수 없게 만드는 면이 있고, 더구나 거대담론에 흡수되어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을 개개인의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 복원해서, 보다 삶에 밀착한 관점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더구나 그것이 부시의 관점이 아니라는 점까지도 말이다. “부모나 형제, 또는 친척을 잃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슬프군요it pains me.”

그러나 이 영화의 기법과 방식은 무척 단순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영화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들조차 돈만 있다면 만들 수 있는 수준의 영화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의 이 평가가 이 영화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내 스스로의 평가를 보며 오히려 대학생들의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대학생 때의 정신으로 돌아간다면. 무어 감독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 영화는 내게 내가 오래 간직하고 싶은 대학생 정신l’esprit universitaire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였다.

덧.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아픈 부분은, 미국의 ‘대량살상무기’에 의해 숨진 이라크 아기의 모습도, 전사한 미군의 모습도 아니다. 세계무역센터 빌딩의 희생자도, 희생자 가족도 아니다. 전쟁에 참전해 전쟁의 실상을 알게 된, 스스로를 오랫동안 공화당지지자였던 사람이라고 소개한 한 상이 군인이, 앞으로는 민주당 열성당원이 되겠다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기자에게 다짐하는 부분이었다. 그에게는 그 둘 외에 다른 선택이 없는 것이다. Où se trouve la démocratie?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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