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7.07.31 로스쿨과 사법 민주화
  2. 2007.07.09 올림픽과 국가주의
로스쿨이 바꿀 수 있는 사법의 세계

1. 손 무덤

로스쿨이 이토록 큰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것은, 그 동안 법조인들과 변호사들의 삶이 평탄했기 때문이다. 시민의 손발인 판검사가 편했다는 것은 시민들이 그간 겪은 고통이 크다는 뜻이고, 말을 팔아 돈 버는 서비스업종 변호사가 편했다는 것은 아직까지 그들 앞에서 '손님'들이 '왕'인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 말은... 대다수의 시민들에게 법은 아직 먼 존재라는 말이다. 가령 단병호 의원의 딸인 단정려 씨가 사법고시에 합격하고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고 싶다는 소망"은 아버지와 같다고 밝힌 것(한겨레)이 이례적인 것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은 법의 보호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박노해 시인은 시 「손 무덤」의 일절을 통해 노동자가 느끼는 법과의 거리를 보여준 적이 있다. 프레스에 노동자의 손목이 날아갔는데, 그를 타이탄 트럭으로 병원에 실어주고 나서 동료 노동자들이 찾아간 곳은 변호사가 아니라 종로의 큰 서점이었다.

훤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 눈 까뒤집어도 없고

- 박노해, 「손 무덤」부분

노동자에게 변호사는 그토록 어려운 존재였고, 그래서 찾아간 서점에서도 노동자는 책에 의해 소외를 당하는 현실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 장면은 묘하게 같은 시집에 실린 「지문을 부른다」와 겹쳐져서, 노동자의 법적 소외가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평생토록 죄진 적 없이
이 손으로 우리 식구 먹여살리고
수출품을 생산해 온
검고 투박한 자랑스런 손을 들어
지문을 찍는다

없어, 선명하게
없어,
노동 속에 문드러져
너와 나 사람마다 다르다는
지문이 나오지를 않아
없어, 정형도 이형도 문형도
사라져 버렸어
임석 경찰은 화를 내도
긴 노동 속에
물 건너간 수출품 속에 묻혀
지문도, 청춘도, 존재마저
사라져 버렸나봐

- 박노해, 「지문을 부른다」부분

요는 지금까지 법은 꼭 필요한 사람들 곁에 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 이유는, 역시 돈 때문이다.


2. 로스쿨과 변호사의 수

로스쿨이 사법 개혁의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일단 자본주의적 논리에 기초한 해법이다: 고시라는 형식을 통해 법조인을 뽑으면 한정된 숫자로 뽑을 수밖에 없는 반면, 로스쿨 졸업생들을 간단한 자격 시험을 통해 변호사로 만들면 변호사 자격증 소지자를 보다 쉽고 빠르게 양성할 수 있는 것이다.변호사 공급에 비해 수요가 너무 많은 현재 상황의 타개책으로 공급을 늘리는 정책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모델은 미국인 셈인데, 우스개소리로 미국에는 길거리에서 돌을 던지면 변호사가 맞는다고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인구 대비로 1만 명당 37.3명 정도 되는 모양인데, 한국은 1만 명당 1.7명이다(2005년 기준, 한국경제 칼럼). 미국은 인구 10만 명당 352.1명인데, 한국은 17.4명이다(한국경제 기사, 2007년 8월 24일)



일단 공급을 늘리는 방안은 가장 확실하고도 강력한 방안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변호사들이 적은 수임료를 주는 사건도 맡게 될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일정 자격을 갖춘 법 전문가들이 보다 많아짐으로써 쉽게 법의 일상화가 진행되고 일반인들도 법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 이를테면, 허위 사실의 유포뿐 아니라 특정 사실의 공공연한 적시도 명예훼손이 된다는 것과 그것이 공공복리에 이바지한다면 위법성이 조각된다는 정도의 기본적인 법 지식을 몰라 피해를 보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라는 말이다.


3. 로스쿨 대 고시

프레시안은 로스쿨 제도가 확립되면 상고만 졸업하고 독학으로 고시를 패스하여 변호사가 되는 이른바 '노무현 신화'는 사라진다고 적고 있다:

비싼 등록금도 문제로 꼽힌다. 이번에 통과된 로스쿨법이 모델로 삼고 있는 미국, 일본의 경우 로스쿨의 학비는 천문학적 수준이다. 국내 로스쿨의 등록금 수준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한 학기 학비가 1000만 원을 훌쩍 넘으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런 전망대로라면 서민 가정에서 자란 학생이 법조인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지적에 대해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로스쿨 졸업 후, 공익 변호사가 되려는 이를 위한 장학금 제도를 강화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비싼 등록금 때문에 로스쿨 재학 중 과도한 빚을 진 변호사들은 아무래도 인권, 환경, 노동, 복지 등 공익성이 강한 분야를 기피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런 방안이 마련되지 않는 한, 농촌에서 태어나 상고만 졸업하고 독학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해 판사가 된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사례는 더 이상 나올 수 없다.

하지만, 기사는 동시에 수만의 '고시 낭인'을 양산하는 현행 시스템을 옹호하고 있지도 않다. 다른 외부 필자의 기고는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숫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공급 규모가 중요하지 양성 시스템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발 방법은 '일정 수준의 자격'을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이고, 내가 보기에 로스쿨 제도야말로 보다 많은 변호사들을 공급하면서도 '일정 수준의 자격'을 갖추도록 하기 적당한 시스템이다.

또한 현재의 고시 시스템은 법조인의 선발 방식만을 규정하고, 그들이 어떻게 학습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고시 학원 등의 무분별한 사교육에 의존하도록 만든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로스쿨은 대학원 코스로 편입된다는 점에서 선발 방법과 함께, (변호사들로부터) 수업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학습 방법까지 규정된다는 점이 장점이라고 할 만하다. (비록 로스쿨 입학 시험에 대한 학원 의존이나 졸업 후 자격 시험에 대한 학원 의존이 생길 수 있지만, 그 부분은 한국의 사교육 '문화'에서 단칼에 없애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로스쿨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통하는 높은 등록금도 장기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을 수 있다. 로스쿨 졸업자의 대다수가 변호사가 되는 현실에서, 은행권은 회수가 거의 확실할 채무자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국가나 대학에서 편성할 장학금도 적지 않을 것이다. 4년제 대학 졸업생만 입학 자격을 준다는 점을 우려할 수는 있겠지만, 법조인에게 대학 졸업 정도의 학력을 요구하는 것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얼마나 정확한 통계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고시 시스템을 채용하고 있는 현재도 고졸 이하 변호사의 비율은 전체의 1%가 안 된다(직업).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돈이 없어서 대학을 못 갈 정도의 사람이 고시 공부에 올인하고 있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http://www.jigup.co.kr/job/bpjob33_view.php?code=750의 자료로 구성)

4

로스쿨이 완벽한 제도라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이란 완벽으로 점근선을 그어가는 것이지 완벽한 시스템이라는 것은 없다. 다만 로스쿨이 현재의 시스템보다 합리적이고, 사회적으로 낭비가 적으며 보다 많은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제도라는 것이다. 나타날 부작용들은 어느 정도 예견 가능하며 그것은 제도적으로 보완하면 된다. 로스쿨은 지나치게 자본주의적이고 지나치게 미국적임에도 한국의 현재적 상황에서는 서민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제도라고 생각된다.

* 2007년 8월 27일 인구 x명당 변호사수 자료 업데이트. (via xChart)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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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라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대한민국을 노래했을 때, 나는 대한민국의 일원임이 자랑스러웠다. 나는 동남아시아나 인도 따위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불쌍하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네들은 그런 나라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학 시절 나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그 명제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별다른 고생을 하지 않고 살아온 내 20년도 나름 꽤나 괴로운 시간이었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도록 해주지도 않고, 해줄 수도 없는 나라라는 생각이었다.

저 노랫말의 의미를 지금은 조금 깨달을 것 같다: 저 명제는 확실히 참이고, 다만 교묘하게 주체를 숨겼을 뿐이다. 대한민국은 어떤 사람에게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나라인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과 그렇지 않은 다른 많은 사람들간의 격차를 고착화시킨 것이 바로 1988년의 서울 올림픽인 것이다.


1

1988년은 신기한 일이 많이 일어난 해였다: 전국민 직선제에 의해 뽑힌 '보통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고, 월북 또는 납북된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출판 금지 조처가 해제되었고, 백무산의 『만국의 노동자여』가 출간되었다. 그리고 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솔직히 서울 올림픽에 대한 기억은 이제 거의 없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개막식 행사 마지막 부분의 굴렁쇠 굴리는 소년, 세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성화를 점화하는 모습, 그 때 날아오른 흰 비둘기들, 가장 먼저 입장한 '가나'라는 나라와 '대한민국'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이름을 달고 맨 마지막으로 등장한 한국, 김수녕을 비롯한 여자 양궁수들의 개인전 금·은·동 '싹쓸이', 칼 루이스의 당시 100미터 달리기 세계 신기록 9초86, 벤 존슨의 도핑 테스트 양성 반응 소식, 금메달 12개로 세계 4위에 오른 한국의 성적... 정수라가 부른 '아, 대한민국'... 그 정도다.

아마 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보여지는 것'에 민감한 한국인의 속물 근성 때문에 밀려나야 했던 판잣촌의 사람들. 분명 서울 올림픽 유치 소식에 함께 기뻐했음이 틀림없는 그들은, 난장이였기 때문에 기쁨 대신 슬픔을 얻었을 것이 분명한. ...88 올림픽은 시작부터가, 80년 5월 사건을 거쳐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이 밀어붙인 3S 정책의 일환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더 쉬워질는지도 모른다.

최근 영국 일간지 가디언 기사에서 올림픽과 개발 그리고 소외에 대한 기사가 있었나보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서 해당 기사를 번역하여 올렸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 대회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군사독재 세력은 올림픽을 통해 민중들이이 소유한 토지를 빼앗아 소수의 엘리트가 주인이 되는 기업도시로 서울을 만드는 기회로 이용했다. 72만명의 주민들이 자기 집에서 쫓겨났고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폭력배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구금됐다. 세입자들은 사전 공지도 없이 퇴거조치 됐고 일부는 고속도로의 뚝 밑에 굴을 파서 살게 됐다. 노점상은 금지됐고, 노숙자, 알코올중독자, 거지, 정신장애자들은 한데 모아져 수용소에 갇혔다. 세계는 그런 장면을 보지 못했다. 단지 번듯한 사람들이 활보하는 번듯한 새 도시만 보았다." (프레시안)

어쨌든 그 한두 해 뒤 정태춘은 다른 '아, 대한민국'을 발표한다.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이 뛰어난 곡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곡은 사람들이 보지 못한... 혹은 보려 하지 않은 한국 사회의 이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이색적이라는 것이다.



정태춘 - 아, 대한민국 가사 열기


노래를 듣다보면 우리는 아주 익숙함을 느낄 수 있는데, 뉴스나 신문의 사회면과 노래 가사가 닮아 있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계몽적이지 않다. 불어에 기반을 둔 '계몽enlightenment'이란 낱말이 진리가 없는 어두운 곳에 빛lumière을 비추이는 것이라면, 정태춘의 이 노래는 사람들이 다 아는 사건들을 몽타주 식으로 이어붙인 것에 불과하다. 누구나 사회면을 보고 잊어버리는 것들을 상기시키는 효과를 보여주는데,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올림픽의 화려한 모습에 비해 그런 사건들을 쉬이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

러시아 태생의 박노자 교수는 소치 "승리"를 한탄한다...라는 글에서 소치의 동계올림픽 유치 소식을 비보로 받아들인다. 그는 소치라는 땅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 땅의 아름다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데, 이제 곧 그 땅이 사라지는 것이다. 가령 침엽수림의 나이테로 가늠했던 소치의 나이는 이제 철근과 콘크리트의 녹과 부식 정도로나 가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

평창도 그렇다. 나는 평창에 누가 살고 있는지, 어떤 생태가 있는지 모르지만... 아름다운 설원에서 눈의 아름다움보다는 돈의 아름다움이나 정권의 아름다움만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만은 치가 떨린다.

그러니까 말이지, 이 땅에는 참 많은 천성산 도롱뇽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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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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