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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Journalisme은 말 그대로 하루하루jour의 일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시사 프로그램이나 뉴스 뿐만 아니라 오락 프로그램까지도 포괄하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오락 프로그램까지도 시대를 관통하는 흐름을 담고 있다. 그들은 항상 대립되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데, 지금은 '성장 대 분배', '개혁 대 보수'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언론을 흔히 개에 비유하여 감시견watch dog, 애완견lap dog, 경비견guard dog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우리는 5공시절에 철저하게 애완견의 역할을 수행했던 언론을 보아왔다. '보도지침'이나 '땡전뉴스'는 이제 유명한 얘기가 되었다. 또 이를테면, 《누가 한강의 자갈을 보았는가》라는 프로그램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저 프로그램에 따르면 한강의 자갈을 본 사람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며, 한강종합개발은 그의 공로다. 여기에 대해서는 좀더 깊은 검토와 성찰이 필요하겠지만 애완견의 대표적인 사례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심지어 그때는, '거리의 편집인'이라는 말까지도 등장했을 정도다. '거리의 편집인'들은 신문을 꼼꼼히 훑어보고 팔릴 만한, 이슈가 될 만한 기사들에 빨간 색연필로 표시해두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가리키는 기사를 보고 신문을 샀다. 실제 신문의 편집인들은 허수아비였기 때문이다. 신문의 편집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는 언론이 경비견의 역할로 이행된 상태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즉, 언론이 체제수호의 역할을 맡으며 기득권에 편입되었다는 주장이다. 김중배 전 MBC 사장은 수년 전에 "지금부터 언론이 싸워야 할 대상은 정치권력이 아니라 자본이다"라고 말했다. 나도 그 당시엔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충분히 동의할 만한 내용이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의 언론은 잠자는 개sleeping dog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프로그램이 오락화되어가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무서운 동질화이다. TV 연속극들의 '불륜의 강도强度'는 점차 높아지고 있다. 점차 쇼프로그램이나 연예인들의 토크쇼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오락 프로그램'으로 구분된 것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시사프로그램이나 교양프로그램도 뚜렷한 오락화·연질화軟質化 현상을 보이고 있다. 《미디어비평》이 《신강균의 사실은…》으로 바뀐 것에서 우리는 그 한 예를 볼 수 있다. 자연 도큐멘트리들도 점차 극화劇化되고 있고, 《경찰청 사람들》류의 비교적 오락성짙은 교양프로그램도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

《손석희의 시선집중》이나 《100분 토론》역시 청취율/시청률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다시말해 오락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시선집중》의 공격적인 질문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것이 청취율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100분 토론》에서 그것은 특히 토론자를 정할 때나 토론 주제를 정할 때 고민의 핵으로 작용한다. 인기있는 토론자를 세우고자 하는 욕심은 늘 있지만, 그러면 또 항상 같은 사람을 세우게 된다. 또, 교육이나 사회 현안에 대해 토론을 하고 싶지만, 정치 문제가 아니면 시청률이 높게 나오질 않는다.

스스로는 '정도定道'와 '금도禁道'를 지켜야 하지만, 시청률이 지나치게 낮으면 프로그램이 '의미'를 잃게 되기 때문에 무작정 오락성을 배척할 것만은 아니다. 그 중간점을 열심히 찾아가는 것이 《…시선집중》이나 《100분 토론》의 목표가 될 것이며, 언론의 목표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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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MBC의 존재 양상은 모순적이다. '공영방송'이라는 직함은 갖고 있지만, 운영은 모두 광고로 충당된다. 그래서 나는 한참을 MBC도 시청료 받아야 한다고 여러 곳에서 언급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름뿐인 '공영방송'이 있다면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진짜 공영방송화 시키는 방법과 아주 민영화를 시켜는 방법이 있지만, 나는 시청료 등의 지원을 통해 좀더 공영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진하게' 생각해보면 시청료 2000원 내면, MBC의 광고 의존도가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광고 단가를 낮출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 15초짜리 광고 하나 단가가 700만원정도다. 더구나 이것은 하루만 하거나 한달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훨씬 더 장기계약을 해야만 광고 계약을 맺을 수 있는데, 이를테면 이것은 중소기업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광고 단가가 낮아지면 중소기업도 공중파 방송에 광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말로만 중소기업 육성 운운하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더 사실적이지 않은가.

또 대기업의 경우도 광고 단가 인하로 얻은 실질적인 생산비 저하를 통해 제품 가격을 동결하거나 낮출 수 있을 것이다. '순진하게'만 생각하면 소비자들은 시청료의 얼마쯤은 이런 가격 인하를 통해 돌려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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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특강 내용은 인터넷에 무분별하게 올리지 말아달라. 예전에도 내가 한 말이 인터넷에 오른 적이 있는데, 큰 소동이 일어났었다. 지금 내가 한 특강 중에서 몇몇 부분만 오려서 신문이나 인터넷에 게제가 되면, 사람들은 맥락을 모르기 때문에 흥분할 수 있다. 나는 인터넷의 문제점도 거기에 있다고 본다.

말을 잘라서 게시하면 맥락context은 사라지고 문장text만 남고, 역사history는 사라지고 얘기stroy만 남는다.
Posted by 엔디

문자를 읽지 못하는 것이 '문맹' 이라면,
책 읽지 않는 사회는 '책맹사회' !!
'책맹사회'는 '문맹사회'보다 위험합니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데에 어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우리는 볼 수 없다. 책은 '읽어야 하는 것'으로 모두에게 받아들여지면서도 정작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은 주변에서 그다지 볼 수 없다. 자신의 무식함을 반 자랑삼아 (농담이겠지만)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책을 읽는다'는 사람도 종종 있다. 과연 책은 무척 지겹지만 보아야 할 것인가?

책을 읽어야 한다는 모토 아래 MBC의 '!느낌표' 프로그램의 한 코너로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가 계속 방송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그 프로그램에서 읽자고 제안한 『괭이부리말 아이들』과 『봉순이 언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오가다 그 책을 읽는 사람들도 많이 목격할 수 있었다. 좋다. 사람들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일단은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은 이제 책에 대한 어떤 빚같은 부담을 떨치고 한 권씩 책을 읽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일까? 책을 '읽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앞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물음은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이다. 여기에 대한 진지한 생각없이 무조건 책을 읽어야 한다는 데에만 생각이 미친다면 그는 (혹은 그 사회는) 건강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책은 가령 옷걸이나 비누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옷걸이는 옷을 걸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비누는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것들의 용도는 단 하나이다. 반면 책은 책이라고해서 다같은 책이 아니다. 이 말은 옷걸이와 비누보다 책이 더 위대하고 고귀한 것이라는 함의를 갖고 있지 않다. 단지 책은 옷걸이에 대한 책, 비누에 대한 책, 책에 대한 책 등을 포함해서 무척이나 다종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때문에 덮어놓고 '책을 읽자'고 하는 말은 공허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무슨 책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새로운 물음이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덮어놓고 책을 읽자는 사람을 이끌고 가령 종로의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삼성동의 서울문고(반디앤루니스)를 찾아가서, 아니 귀찮게 그럴 것도 없이 조그만 동네 서점이라도 찾아가서 어떤 책을 볼 것인지를 물으면 난감해하며 이 책 저 책을 기웃거리고만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서 서점주인에게나 이끌고 간 사람에게나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를 물을 것이다. (물론 서점 주인이라면 요즘 유행하는 책 『괭이부리말 아이들』과 『봉순이 언니』,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추천해 줄 것이다. "이 책 잘나가요, 요새. 좋은 책이죠. 흐뭇")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중요한 또다른 이유는 그것을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는 점이다. 편의상 주어를 생략해서 써왔지만 그 물음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주어이다. 그러니까 원문原問은 '나(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누군가가 대신 생각해 주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책 좀 추천해 주세요'라는 요청은, 요청하는 사람이 관련 분야에 관한 자세한 서지 정보를 갖지 못해서 전문가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라면,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바로 그런 경우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하도 많아서 드디어 TV에서 두 팔 걷어붙이고 책 추천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비롯하여 '!느낌표'에서 추천한 책들이 베스트셀러에까지 오르며 잘 팔리는 것은 여기에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느낌표'의 모토를 다시 한 번 볼 필요가 있다. <문자를 읽지 못하는 것이 '문맹' 이라면, 책 읽지 않는 사회는 '책맹사회' !! '책맹사회'는 '문맹사회' 보다 위험합니다.> 시청자들에게 섬뜩한 협박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한 이 모토에서 우리는 또다시 가령 이광수의 『무정』같은 데서 볼 수 있는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교육으로! 실행으로!>를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다 대고 "왜 책을 읽어야 하지요?"라고 묻는다면 "당신이야말로 책맹이다, 우리 프로그램 열심히 좀 봐라."는 답변이 나올 것이 뻔하다. 그러면 왜 TV는 이렇게 <우나로드>적으로 되었을까?

강홍구의 「도망자」는 철거중인 동네의 뒷산으로 달아나는 도망자의 전체 모습과 그의 얼굴만이 나온 TV를 대비시킨다. 그 대비를 통해서 그가 보여주는 것은 TV가 어떤 왜곡을 통해 실체를 가공하는가이다. 그림에 따르자면, 그 왜곡은 배경의 삭제, 부분의 과장, 그리고 언어적 지시라는 절차를 가리고 있다. 도망자는 철거중 동네 뒷산으로 달아나고 있는 중이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를 물을 것이다. 그러나 TV는 내력을 삭제하고 사건만을 보여준다. 책상은 책상이다, 라는 식으로 도망자는 범인이라는 식이다. 정황의 삭제는 부분의 과장을 필연적으로 낳는다. TV는 얼굴만을 클로즈업시킴으로써 도망자에게, 거칠게 찍힌 현상 수배범의 사진 효과와 비슷하게, 흉악범의 이미지를 입힌다. 그리고 '범인 강홍구'라는 자막이 그 조작도니 이미지를 완성한다. 최후의 심판을 내리듯이, 도망자 당신의 인생은 끝장이라는 듯이, 자막은 단숨에 한 사람의 생을 언어의 감옥 속에 넣고 봉인해 버린다.

정과리「이미지로 이미지를 쏜다-강홍구 외, 'TV전(展)'」,『문명의 배꼽』문학과지성사, 98-99쪽.

다소 긴 이 인용문은 TV가 어떻게 사실을 왜곡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TV는 시각 매체이기 때문에 최소한 거짓을 말할 수는 없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지만 TV는 사람들의 그런 믿음을 교묘히 이용하여 역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특히 부분을 전체인 것처럼 과장하는 것은 무척 흔한 경우이다. 예를 드는 것이 허용된다면, TV가 자주 전체가 아닌 부분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축구경기를 보면 알 수 있다. 가령 가장 결정적인 슛은 카메라의 시야를 벗어난 곳에서 이루어지곤 하지 않던가? 오죽하면 '숨어있는 1인치'를 찾으려고 그토록 애를 쓰겠는가?

'!느낌표'의 '좋은 책 읽기'에서의 '좋은 책'이 바로 그 부분의 과장에 해당한다. '!느낌표'는 매달 책 한 권을 선정해서 온국민이 읽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데 그 책이 과연 온국민이 꼭 읽어야만 할 중요한 책이라거나 수많은 종류의 책들 중에서 대표성을 획득한 책이라고 하기에는 좀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이것은 좀 심각한 문제이다. 축구경기에서의 문제는 '숨어있는 1인치'를 찾으면 어느 정도 해결된다지만 책을 고르는 일은 생각 외로 사회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제한된 TV브라운관에서는 그만큼 재생해내기 힘들다. 1인치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물론 TV는 <이 책들만이 좋은 책>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TV가 책임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TV라는 매체에 보내는 신뢰는 대체로 전폭적이기 때문에 TV는 굳이 힘들여 '이것만이'라고 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TV는 <이것만이 좋은 책>이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TV가 말하길 그 책들이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책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이제 좀더 지켜보자. 모르긴 모르되, 한두 해가 지나지 않아 TV가 추천한 그 좋은 책들은 전국에 산재한 헌책방에 하나씩 둘씩 얼굴을 들이밀게 될 것이다. 설령, 헌책방으로 쓸려나오지 않는다 손 치더라도 그 책들이 계속 읽히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여기서 '!느낌표'가 가장 TV스러운 프로그램 중의 하나라는 점은 분명한 일이고,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코너는 특히 그 TV스러움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더 기만적인 코너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Posted by 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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