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6

비논리적 설득: M. Moore 《화씨 9/11》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의 «화씨 911»은 다 알다시피 깐느에서 처음으로 황금종려상la palme d'or을 받은 첫 기록documentaire 영화다. 드림웍스의 야심작 «슈렉»조차 빈 손으로 돌려보낸 '오만한' 깐느가 선택한 기록 영화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그 속에 엄청나게 극적인dramatique 폭로가 있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 정도일까. 혹은 이라크 침공의 도덕적·절차적 문제를 조목조목 파고들어 부시 대통령이 직접 그 영화를 보더라도 승복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까. 아니다. 이 영화에 가득찬 것은 반어와 풍자다. 여러 번 기사화된 무어 감독의 발언에서 짐작할 수 있는 그의 비판방식 그대로를 이 영화에 담은 것이다. 그리고, 그 비판방식은 사실 길고 긴 ..

극장전 2004.08.02

디테일의 힘: 홍상수《강원도의 힘》

홍상수의 영화는 건조하다. 영화가 줄거리삼은 것들이 결코 건조하지 않고 오히려 '질펀'하거나 축축한데도 건조하게 느껴지는 것은 '홍상수 어법'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야기를 푸는 방식탓이다. 식당에서 날아드는 파리를 쫓는 모습이나 금붕어에게 가만가만 먹이를 주는 모습같이 아무렇지 않은 행동들 하나하나가 한 편의 영화를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 실제로 세밀한 언행, 혹은 그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오! 수정》은 이어서 보다 자세히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부터 이미 홍상수 감독의 중요한 관심거리였음이 분명하다. 《강원도의 힘》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공간이다. 직소퍼즐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우리는 그 영화를 짜맞추어야 한다. 하지..

극장전 2004.01.06

거시기들의 힘: 이준익《황산벌》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 이용악「오랑캐꽃」 사투리를 줏대로 하여 황산벌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겠다, 는 발상으로 만든 영화, 라는 문구가 《황산벌》의 주된 광고전략이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황산벌》은 웃음을 주기 위한 오락영화에서 조금쯤 비켜서 있었다. 《황산벌》은 일단 무엇보다 '전쟁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몇몇 '리얼'하다는 전쟁영화에서 쓰인 '들고 찍기hand held'의 방법이 여기에서도 쓰였는데, 그것은 꽤 희화화 되긴 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참혹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전쟁의 장면들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희화화된 전쟁도 여전히 잔혹스러움을 드러내고 있으니, 그것은 온갖 성적인 코드들로 무장한 두 진영의 '욕' 싸움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어느 나라나 성적인 의..

극장전 2003.10.19

아이가 아이였을 때: Wim Wenders《베를린 천사의 시》

Als das Kind Kind war... 아이가 아이였을 때… 《베를린 천사의 시》의 원제는 '베를린의 하늘Der Himmel über Berlin'이다. 영어 제목은 '욕망의 날개Wings of desire'다. 아무데나 詩를 갖다붙이는 행태는 비난받을 것이지만, 이 영화의 번역과 이 당시의 영화제목의 번역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내용과도 잘 부합하고 있다. 적어도 《식스 센스》, 《나씽 투 루즈》, 《어댑테이션》따위보다는 훨씬 낫다. 역사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천사는, 영화에서 색맹이다. 그들은 지하철, 도서관, 누군가의 집, 길거리…… 어디에나 있지만 사실은 아무 데도 없다. 가령 그들에겐 모든 역사가 TV이다, 환상이다. 감정도 얼마간 가질 수 있고 사람들의 생각도 마음대로 읽어내지..

극장전 2003.06.17

건조한 울음의 낭비: 이원세《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전양자, 안성기, 김추련, 금보라, 전영선 등의 캐스트로 지금으로 봐서는 상당한 스타캐스팅인 것 같다. 그러나 내용은 원작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영화였다. Rendez-vous de Séoul의 '서울프랑스영화제'에 포함되어 상영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보았다. 무엇보다도 조세희의 원작은 연작소설임에도 마치 장편소설처럼 일관된 무언가가 있어 그 짜임새를 잘 느낄 수 있게 하였는데, 이 영화는 장편영화임에도 장면과 장면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분산된 느낌을 주었다. 영수(안성기 分)를 중심으로 영화 줄거리가 이끌어지기는 하는데 그것이 아버지와 동생들, 명희 등의 에피소드들로 나뉘어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영화는 또, 비루함을 가지고 원작의 정신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난장이네 가족들..

극장전 2003.06.14

복잡함의 단순화: Kassovitz《제이콥의 거짓말》

영화 《제이콥의 거짓말Jacob the Liar》는 유렉 베커Jurek Becker의 소설『거짓말쟁이 야콥Jakob der Lügner』를 영화화한 것이다. 로빈 윌리암스가 아니면 못할 제이콥 역이 훌륭하게 소화되는 것을 오늘 보았다. 적어도 선/악이 그렇게 단순한 구도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멋진 영화같다. 단순화함으로 복잡함을 드러내는 것은 이 영화의 장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베커의 소설을 잘 영상에 옮겨놓았다. IMDB 링크

극장전 2003.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