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전 25

후세를 위해 노무현의 치수를 잰 영화 '변호인'

양우석 감독의 데뷔작인 영화 '변호인'은 성공한 영화다. 개봉한 지 불과 한 달여 만에 관객 수가 1000만 명을 넘어섰다. 일반적인 서사 예술의 문법으로 봐도 변호인은 별다른 흠을 잡을 수 없는 영화다; 아니 흠을 잡을 필요가 없는 영화다. 학벌이나 환경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던 한 사내가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고, 그 다음에 보다 의미있는 일을 위해 사회적인 성공을 저버리는 이야기.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 굳이 작은 흠을 찾자면 '속물 변호사' 송우석이 갑자기 '인권 변호사'가 되는 모습이 너무 급작스럽다는 점 정도가 될 것이지만 줄거리 자체는 수백 번도 더 들어본, 매끈한 것이다. 거기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덧칠하는 순간 관객은 구름처럼 몰렸다.지금까지 관객 1000만 명을 넘은 한국 영화는 모두 9편..

극장전 2014.02.04

이 어두운 극장 밖에선 도대체…: 『작은 연못』

그래, 먼저 가만히 작고 어두운 영화관 하나를 떠올려보자. 시인 기형도가 죽었다던 허름한 종로의 극장도 좋고, 사람들이 데까메론을 알건 모르건 매년 그해의 '보카치오'를 동시상영으로 마구 틀어댔던 동네의 3류 극장도 좋다. 예술영화를 자주 틀어주는, 그래서 관객은 별로 없는 조용한 극장도 괜찮다. 사실 꼭 작고 어두운 극장일 필요도 없다. 푹신푹신한 의자에 음료 거치대까지 있는 최신식 멀티플렉스 영화관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내가, 당신이, 그리고 사람들이 영화를 본다는 것이다. 자, 영화가 끝났다. 영화란 건 늘 금세 끝나는 법이니까.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대다수 극장에서는 환하게 불도 켜준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어디로? 세상으로. 커다란 박스 속에 들어가 한두 시간을 어둠 속에 머..

극장전 2010.04.12

길의 지식, 거리의 지혜: 보라 《로드 스쿨러》

미투데이를 통해 보라 감독의 《로드 스쿨러》를 접하게 되었다. 흔히 '탈학교청소년' 또는 '홈스쿨러homeschooler'라고 불리는 이름을 거부하고 '로드 스쿨러roadschooler'라는 새 이름을 원하는 청소년-청년들의 이야기였다. 예술가들조차 거리를 버리는 이 시대에! 1 기형도는 한 시작詩作 메모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전집, 333): 「밤눈」을 쓰고 나서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만약 시 속에 존재와 삶의 비밀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단 몇 퍼센트만이라도 믿는다면, 우리는 이 '로드스쿨..

극장전 2008.09.24

나르시즘과 글쓰기: Michel Gondry 《수면의 과학》

도스또예프스끼는 병에 걸린 상태에서 꾸는 꿈은 무척이나 선명하고 강렬해서 뿌쉬낀이나 똘스또이 같은 작가들이라도 평상시에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라고 말했다(Dostoevskii 2002a, 85; 2002b, 1116). 이를 뒷받침하듯 프로이트는 일관되게 꿈은 소원성취라고 말했다(Freud 2003, 162). 그에 따르면 꿈의 유일한 목적은 소원성취이며, 그것도 순전히 이기적인 소원성취라는 것이다(Freud 2003, 384). 그렇다면 병에 걸린 사람처럼 현실에 불만이 많고, 고통을 많이 겪는 사람일수록 꿈도 강렬하고 생생할 것이다. 꿈은 현실을 뛰어넘고자 하는 ‘나’의 소원이나 욕망에서 비롯된다.글쓰기 또한 이런 소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청준은 언어사회학서설 연작의 「지배와 해방」에서 작중 인물의 입..

극장전 2008.08.01

진실의 가능성과 가치: Milos Forman《고야의 유령들》

문학이 문체를 통해 독자를 유혹하듯이, 영화는 영상을 통해 독자를 유혹한다. 하지만, 문학은 문체만으로 떨어질 수 없고, 영화 역시 영상만으로 떨어질 수 없다. 화려한 수사나 미사여구가 문학 텍스트가 가진 메시지의 해석decoding을 방해--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할 수 있듯이 하드코어 혹은 하드고어한 영상도 마찬가지다. 밀로스 포만 감독의 영화 《고야의 유령들Goya's Ghosts》은 그런 점에서 오해할 소지가 많은 영화다; 이 영화는 단순한 시대극도 아니요, 종교 재판을 비난하려는 영화도 아니요, 야만의 시대를 고발하려는 영화도 아니다. 《고야의 유령들》은 '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영화다. 이 영화는 한 편의 예술가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구성을 취하면서도, 영화에서 주인공이자 관찰자인 그..

극장전 2008.04.03

죄의식과 인류의 기원: 홍상수《밤과 낮》

홍상수의 영화는 '리얼'하다; 이창동의 영화가 현실의 비루함을 드러내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간직한 것과는 달리 홍상수의 영화는 습기 가득찬 현실을 그대로 비춰줄 뿐이다. 그러므로 시작할 때부터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영화는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가진 한 중요한 장점이다. 우리는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박은 그의 영화를 보면서, 현재 습도를 정확하게 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짧은 글에서 우리는 최근작인 《밤과 낮》의 한 주제thème를 이루는 죄의식에 대해 살펴보자. 여기 '인류의 기원L'origine du monde'이라는 그림이 있다. 19세기 사실주의 화가 귀스따브 꾸르베Gustave Courbet는 얼굴을 가린 한 여성의 하체를 그리고 '인류의 기원'이라는 제..

극장전 2008.03.15

내셔널리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정용기《원스 어폰 어 타임》

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가벼운 이야기로 우리는 이지형의 장편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를 알고 있다. 문학평론가 도정일이 "만화적 상상력"이라고 부른 이지형의 '모던 보이' 이야기는 무척 유쾌했다. 40년대의 경성도 30년대만큼 날렵했을까. 대동아 전쟁이 발발하고, 반도에서는 소위 민족 말살정책이 서슬퍼렇던 그 총력전의 시대에? 하지만 이 실용주의의 시대에 그런 실증주의적 분석은 허랑하다. 확실히 사람들은 민족이니 독립이니 하는 무게감을 뺀, 날렵한 시대물을 원하는 면이 있다. 정용기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은 그런 사람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만한 영화다. 독립운동의 비장함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독립운동을 빙자한 도둑질이나, 희화화된 독립운동가들만이 남아 있다. 이 영화 속에서..

극장전 2008.02.24

착한 아마데우스의 엄마 찾아 삼만 리: K. Sheridan《어거스트 러시》

1. 천재 이야기 나는 천재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는다. 매번 대선에 출마하는 누군가가 "IQ 430인 나의 공약은 보통의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재가 만약에 있다고 해도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천재는 우리 같은 범인凡人에게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일 뿐이다. 가령 살리에리가 정말 모차르트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다. 아인슈타인이 도서관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범인들은 늘 천재 이야기에 열광하고 그 이야기를 가슴 깊이 믿는다. 그럼으로써 자기의 현재 상황에 대해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천재는 아인슈타인과..

극장전 2007.12.12

자동차와 군수기계의 나라, 미국의 토테미즘: Michael Bay《트랜스포머》

1 어린 시절, 누구나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살아있다고 믿는다. 내가 자고 있을 때 내 장난감들이나 인형이 살아 움직일 것이라는 상상력은 상당히 많은 동화나 만화의 기본적인 설정으로 되어 있다. 특히 철강과 거대 기계가 찬양받던 지난 세기에는 일단 무엇이든 로봇으로 변하는 독특한 생각이 만화영화의 기반 상상력이 되었다. 전투기나 탱크에서 라이터까지 로봇으로 변신했고, 초능력으로 불러내는 존재도 귀여운 여자친구나 다정한 말벗이기보다는 로봇이었다. 언젠가부터 만화 영화들은 거대 로봇 만들기를 그쳤다. (아마도 일본) 경제에서 '중후장대重厚長大' 시대가 가고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시대가 온 탓이다. 워크맨이라고 불리는 소형 카세트라디오가 그 신호탄이었다면 작고 가벼운 mp3 플레이어와 얇은 휴대전화는 나름대로..

극장전 2007.07.07

젖은 머리칼: Gronenborn《알래스카》OST

젖은 머리칼이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고교 시절, 여자애들은 매일 아침 머리를 감고 묶으면 하교할 때까지 머리가 마르지 않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 적이 놀랐었는데. 그러고보면 나 스스로가 머리를 감고 나서 수건으로 대충 문지르고는 제대로 말리지 않고 나오기도 한다. 어쩌면 는개 같은 가는 비는 그냥 맞는 것도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알래스카》는, 씨네큐브에서 韓과 《스파이더 릴리》를 봤을 때였거나 아니면 혼자 《스틸 라이프》를 봤을 때--혹은 둘 다일지도--예고편을 접했던 것 같다. 고교 시절 이후 설어버린 독일어가 나오는 영화라는 것과 함께, 주인공은 젖은--혹은 젖은 듯한--머리칼이 인상적이었다. 응, 나는 이마 앞으로 흩뜨려진 그런 머리칼을 좋아한다. 인생에는 긴 게임과..

극장전 2007.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