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어릿광대의견해 74

올림픽과 국가주의

0 정수라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대한민국을 노래했을 때, 나는 대한민국의 일원임이 자랑스러웠다. 나는 동남아시아나 인도 따위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불쌍하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네들은 그런 나라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학 시절 나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그 명제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별다른 고생을 하지 않고 살아온 내 20년도 나름 꽤나 괴로운 시간이었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도록 해주지도 않고, 해줄 수도 없는 나라라는 생각이었다. 저 노랫말의 의미를 지금은 조금 깨달을 것 같다: 저 명제는 확실히 참이고, 다만 교묘하게 주체를 숨겼을 뿐이다. 대한민국은 어떤 사람에게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나라인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

시니피앙을 잃어버린 시

인터넷에서 수난받는 시작품들 별이 갈 길을 비추었던 서사시의 시대를 동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의 시는 '향유'된다기보다는 '소비'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나는 늘 절망한다. 나는 좋은 시는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재생산이란 하나의 시가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 속에 다른 울림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재생산 과정에서 원래의 시가 가지고 있는 아우라는 사라지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그 시를 딛고 있는 다른 시를 낳기도 한다. 인터넷과 '미니홈피' 시대의 시의 '소비'는 좀 색다른 경향이 있어서, 시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고치거나 다른 사람의 시에 자신의 시를 덧붙이거나, 시를 마음껏 자기 것으로 이용한다. 그렇게 '가공'된 시는 원작의 분위기를 잃고 대개 감동적인 ..

새 술은 새 부대에: 미터법과 도량형

“미터법, 국제적 추세지만 안쓰면 벌 주겠다는 건 곤란” 1 전통과 문화의 중심부/주변부 - 평坪이라는 단위는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한국의 전통적인 넓이 단위가 아니다. 평은 일본에서 들여온 것인데, 현재는 일본에서도 평 대신 제곱미터를 쓰고 있다. (본래 이런 것은 문화의 중심부에서보다 문화의 변두리에서 더 소중히 여겨지는 것이다.) 2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 평이 인간의 키를 감안한 휴먼 척도라고? 그런 인식은 곧장 180센티미터가 안 되거나, 그보다 더 큰 사람들을 싸그리 무시한 인식이 되고 만다. 또한 그런 인식대로라면 사람의 키를 잴 때도 센티미터보다는 척尺을 써야 옳다는 결론이 나온다... 3 미국 따라하기 - 옷 치수나 여자들의 신체 치수는 주로 인치를 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女교사"

초등교사 임용시험 부산 합격자 100명 중 97명이 여선생님 [중앙일보] 1 도대체 '여성적인 것'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끔 종잡을 수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남자들은 논리에 강하고 여자들은 창의적이어서 21세기는 여성에게 유리하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남자들은 창조적인 일을 잘하고, 여자들은 꼼꼼해서 암기하는 데 능하다고 한다. 과연 '여성적인 것'이라는 것은 있는 것일까?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니, 앞으로는 여성적인 것이 중요해지는 시대가 온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사실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들이 말하는 여성에게 유리한 상황이 생물학적으로 규명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임용고시에서 여성 합격자가 많은 이유가, 시험이 여성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말은 따라서 아무 근거가 없는 말이다. 그런 주장을 하..

도우미 유감遺憾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들…’ - 조선닷컴: 도우미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노래방 도우미'가 망쳐놓았다,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끔 말은 가능한 한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동의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언어심미주의자가 망설일 분명한 이유가 있다: 도우미의 '출신성분'이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 도우미가 가장 처음 쓰인 것은 1993년, 대전 국제박람회EXPO 때다. 박람회 안내요원을 20대 여성들로 뽑아, 그들을 '도우미'로 이름했던 것이다. 선진국들 사이에서는 올림픽만큼이나 중요하고 인기있는 행사라고 언론에서 난리를 치던 엑스포였기 때문에, 도우미라는 이름도 쉽게 대중들에게 각인되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당시의 광고나 팸플릿을 조금만 관심있게 들여다 보았다면 '도우미'의 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사건의 핵심

"'공산당이 싫어요' 기사는 가필한 것" 이승복이 공산당에게 죽으면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진위 여부가 지금까지도 논의 대상인가보다. 최근 대법원 확정 판결이 있었고, 조선일보는 신이 나서 판결문을 실었다. 일부 언론은 또한 이승복 사건이 날조 내지는 가필된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국가적으로 유명해진 사건이기 때문에, 이를 제목으로 뽑으면 독자들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라는 예측도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이슈화시키는 데 한몫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는지 외치지 않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날조된 것..

현실로 나타난 김연아 올인의 문제

‘피겨 요정’ 김연아 어쩌나 김연아 '올인'에 대해서 우려했던 사태가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나는 황우석 사건과 비교하여 김연아 올인에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했었는데(링크), 그때만 해도 '그럴 우려가 있으니 조심하자' 정도였지 정말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선택과 집중'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 비근한 주식 투자만 해도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금언인데도, 다른 부분에서는 흔히 무시된다. 김연아 선수에 대한 '올인'은 그런 '대박 기대 투자'와는 또다른 해묵은 문제 하나를 더 갖고 있으니: 이는 스타 만들기다. 전체주의가 강한 국가일수록 스타 만들기에 전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모쪼록 김 선수의 쾌유를 빈다.

사형제 폐지의 국제 표준

반기문 총장 유엔 첫 출근... 아픈 '신고식'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사형제와 관련한 발언으로 UN에서 곤욕을 치른 모양이다. 사실 한국인들의 과반수가 사형제 유지에 찬성하고 있고(조선일보 기사), 반기문 역시 한국에서 장관 등을 지낸 사람이므로 그의 인식에 무슨 큰 문제가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다시 되새겨봐야 할 것은, UN을 비롯한 국제 사회가 사형 제도에 대해 갖는 입장과 한국인의 입장의 차이이다: UN은 지금껏 일관되게 사형제 폐지를 주장 내지 권고해 왔다. 다만 개별 국가에 이를 적용하라고 하면 내정 간섭이 되므로 이를 유보해 왔을 뿐이다. 이상한 것은 한국인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사형제를 폐지하면 무슨 흉악범들이 활개를 칠 것으로 생각..

국제 노동조합의 출범?

英-獨-美 잇는 '국제 단일노조' 탄생할까?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하에 자본은 얼마든지 국경을 넘어다닐 수 있다. 2006년 '해외 펀드'가 뜰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가진 자본이 브릭스BRICs나 베트남 등지로 이동하여 투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신자유주의는 자본'만'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가령, 브릭스 국가나 베트남의 노동자가 합법적으로 한국으로 이동하여 일자리를 얻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혹은 불법체류자로 불리는 외국인들은 대부분 이런 사람들이다. 국제 노동조합이 이와 같은 이주노동자들을 충분히 보호해주기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노동자의 연대solidarité를 통해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런 국제 노동조합은 영-미-독 등 ..

러시아미술은 ‘혁명문학’이다

러시아미술은 ‘혁명문학’이다 : 책 : 문화 : 뉴스 : 한겨레: 예술의 경향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기'와 '아는 대로 그리기'로 나눈 아르놀트 하우저의 견해는 진정 탁견인 듯하다. 내 생각에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기'의 매력은 그 힘에 있다. 진실과 사실이 가진 힘을 우리가 모르는 바 아니기 때문이다. 꾸르베의 그림을 보았을 때, 그리고 러시아 민중들의 삶을 보았을 때 우리가 느끼는 절망과 그 절망에서 나오는 힘이란 그런 것이다. '아는 대로 그리기'의 매력은 그 자유로움에 있는 것이다. 뭉크의 음산한 그림을 볼 때나, 마그리트의 묘한 그림을 볼 때, 그리고 샤갈의 분방하고 발랄한 그림을 볼 때 우리는 그런 것을 느끼는 것이다. 백색의 북국에서 일어난 혁명은, 또 무슨 색을 가지고 있을까. 어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