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서 돈 냄새가 났으면 좋겠다”고 최영미 시인은 말했지만, 송경동의 시에서는 무슨 냄새가 날까.
광주천을 붉다고 쓴 시 때문에 얻어맞아 얼얼한 볼을 한 채로 맡은 봄 향기일까, 눅눅한 잡부 숙소의 때 절은 이부자리에서 나는 피 섞인 정액 냄새일까, 아니면 가끔 비정규직 일터인 지하로 내려오던 어느 아름다운 정규직 여 직원에게서 끼쳐오던 향수 냄새일까, 그도 아니면 아들과 놀이터 삼아 가던 사우나의 수증기 냄새일까.
『꿈꾸는 자 잡혀간다』는 운문의 제약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쓰인 그의 줄글을 모은 책이다. 시집 속에서 그는 어쩔 수 없는 시인이었지만, 이 산문 속에서 그는 시인이기도 하고 시인이 아니기도 하다. 시인이 아닐 때 그는 노동자이자 투사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아들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는 아주 견고한 성벽을 쌓고 있는 그의 시집에서와 달리, 여기서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내보인다.
가령 학생들이 별 생각 없이 광주천을 붉다고, 날개를 달고 이 땅을 떠나고 싶다고 쓴 시를 공안 검사의 눈으로 바라보던 교감 선생님과 문예반 선생님의 ‘취조’ 사건은 그의 시에서였다면 단단한 껍데기에 싸여 고정돼 있었겠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핸드헬드카메라’처럼 흔들흔들, 거칠게 그려진다.
_IMG_4415 by redslmdr |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용산 참사’ 현장인 남일당 빌딩이었다. 차디찬 겨울,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모닥불 곁에서 그는 성명 같은 시를 읽었다. 도무지 시 같이 느껴지지 않았고, 어쩐지 어색하게도 뭉툭한 모습이었다. 추위에 내가 너무 얼어 있었기 때문일까.
다시 참 쓸쓸한 겨울 공화국이다. 언론의 입에 재갈이 물리고, 사람들의 양심은 얼어붙고, 광장은 봉쇄당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보수화되고, 가진 자들은 인면수심의 짐승이 되어가고 있다. 사회가 닫혀가고 있다.
-「시대의 망루, 용산」
그러다 창비에서 나온 시집이 눈에 띄었고, 그 시집에서 그는 좀더 단단한 사고의 언어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쩌면 남일당 빌딩 앞에서 들었던 시와 같은 시였는지도 모르지만, 시집 속에 정련된 활자는 적어도 말들을 더욱 단단하게 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는지도 모른다. 브레히트나 엘뤼아르의 어떤 번역시들을 연상하게 하는 그의 시는 세련되지 않은 매력이 있었다.
말하자면 백무산처럼 강하지 않으면서 단단하고, 박노해처럼 비장하지 않으면서 쓸쓸했다.
자꾸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 묵은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려봐도
진보단체 사이트를 이리저리 뒤져봐도
(…)
분명히 내가 잃어버린 게 한가지 있는 듯한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혁명」
그리고 이번 산문집에서 그는 뭉툭하지도 단단하지도 않은 말랑말랑하고 흔들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영웅도 위인도 아니었고, 평범한 사람이거나 어쩌면 그보다 더 못한 사람이었다. 꿈과 희망을 품고 있지만, 한 때는 욕망에 매몰됐던 사람이었다.
일을 받지 못한 날은 힘이 쭉 빠졌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생활이기에 타격이 컸다. 생활의 타격보다 일조차 할 수 없는 인생이라는 설움이 자학의 늪으로 청년을 끌어당겼다. 그런 날이면 청년은 텅 빈 잡부 숙소에 누워 종일 몇 번씩이고 자위를 하곤 했다. 어떤 땐 허물이 벗겨진 그곳에서 핏물이 배어 나오기도 했다.
-「그 잡부 숙소를 잊지 못한다」
그러나 그 말랑말랑함은 책을 읽어나갈수록 조금씩 뼈를 얻어간다.
1부~5부의 소제목으로 말하자면, ‘꿈꾸는 청춘’ ‘가난한 마음들’에서 물렁거렸던 것들이 ‘이상한 나라’에서 굳고, ‘잃어버린 신발’을 거쳐 ‘CT85호와 희망버스’에서는 점차 우리가 아는 송경동의 얼굴로 빚어진다.
이를테면 우리는 우리가 아는 그의 얼굴을 대하면서 조금씩 마음이 놓인다.
2003년 6월 11일, 김주익은 최후의 결단을 한다. 폭우가 쏟아지는 새벽, 혼자 100톤짜리 지브 크레인, 35미터 상공의 ‘85호 크레인’으로 올라갔다. ‘나의 무덤은 85호 크레인이다. 너희가 내 목숨을 달라고 하면 기꺼이 바치겠다’라는 절박한 호소였다. 하지만 그 결의를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경찰은 공권력을 수시로 투입했고, 국민의 정부를 넘어 참여정부라는 정권 역시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못 박았다. 힘을 받은 사측은 김주익이 목숨을 걸고 크레인에 올라 있는 동안에 단 한 번도 교섭에 나오지 않았다.
(…)
2011년 1월 6일 새벽 3시. 한 늙은 여성노동자가 김주익의 영혼이 아직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85호 크레인의 차가운 난간을 붙잡고 올랐다. 사측이 정리해고 명단을 발표하기 전날이었다.
-「김진숙과 ‘85호 크레인’」
그래, 여기서 우리는 ‘구속당한 시인’인 송경동의 얼굴을 비로소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추도시 낭독이 폭력 행위가 되는 나라에서 그는 시인 직함을 단 투사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누가 내게 이 산문집의 매력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1부와 2부의 글을 읽어줄 것이다. 그가 투사나 시인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안다는 것은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 다시 그의 시에서는 무슨 냄새가 날까. 어쩌면 아무 냄새도 안 나지 않을까.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냄새는 아무도 맡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꿈꾸는 자 잡혀간다 - 송경동 지음/실천문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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