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망각의책 11

천지인-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

고교 시절 은사님이 녹음해서 주셨던 천지인의 테이프를 처음 더블 데크에 걸었을 때 나온 노래가 "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였다. 테이프가 늘어질까봐 아껴아껴 듣다가 최근에야 복각판 CD를 구매했는데... 어쨌든 대학에 들어가 기형도를 찬찬히 읽으면서 이 곡이 본래 그의 시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CD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는 없는데...) 수백개의 명함을 읽으며 일일이 얼굴들을 기억할 순 없지 우리에겐 그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한두시간 차이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생각할 정도로 우리에겐 그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굳게 뚜껑이 닫힌 만년필처럼 서로에게 필요한 말만 던지고 10년이 지난 드라마처럼 어쨌든 우리는 살아가니까 풀어진 와이셔츠 단추 한개에 날선 칼라가 늘어져..

소금인형

과거의 '시운동' 동인의 한 명이었던 안재찬이 어느 날 갑자기 류시화가 되었다. 상상력에 주목한 '시인동' 동인에서 명상가로 옮겨간 그를 보면 상상력이 명상과 얼마나 가까운지, 그리고 시가 명상으로 떨어지기가 얼마나 쉬운지 알 수 있다. 나는 명상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라, 명상이란 본시 말을 벗어나는 것이므로 말을 붙잡아야 하는 시로서는 후퇴라고 말하는 것이다. 김현 선생은 안재찬이라는 시인을 주목하여 "그의 시세계를 받침하고 있는 것은 '나에게는 할 말이 없다'라는 쓰디쓴 자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의 담백하고 좋은 시 '소금인형'은 긴 말 하지 않는다. 워낙 담백한 시고, 그래서 독자는 일순 당황하지만 그 다음 자기-없음의 이 상태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안치환의 소금인형은 일반적인 노래의 길..

샴푸의 요정

빛과 소금의 샴푸의 요정이다. 장정일의 시를 잘 변형하여 만든 이 노래를 오래 좋아했다. 다소 몽환적인 분위기를 즐겼던 것일까? 항상 노래와 영화를 대할 때면 시와 소설을 생각했다. 현대의 대표적인 서정 문학은 시가 아니라 노래이며, 현대 서사문학은 소설이 아니며 영화가 아닐까? 하지만 나는 거기에 쉽게 녹아들 수가 없었다. 노래에 대해 시의 우위를, 영화에 대해 소설의 우위를 항상 느꼈기 때문이다. 가령, 빛과 소금의 '샴푸의 요정'에는 장정일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 애증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매트릭스 안의 모든 것이 조작된 것임을 알면서도 매트릭스를 동경하는 것으로, 나는 키치Kitsch 시인들 모두에게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노래나 영화에서는 볼 수가 없다...

『르 몽드』- 최연구

『르 몽드』 최연구, 살림. 2003년 12월 30일 초판. 르 몽드 광고 수입은 38% 르 몽드의 1년 매출액은 1999년 기준으로 2억3천5백만 유로(약 2,700억 원) 규모이다. 그런데 르 몽드 총매출액 중 신문 판매를 통한 수입은 2000년 기준으로 전체 수입 중 62%이다. 반면 광고 수입은 38%이다. 이 수치는 장-마리 콜롱바니 회장이 르 몽드를 이끌면서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광고 비중을 대폭 늘린 이후의 수치이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르 몽드의 수입 구조는 구독료 수입(지대)과 광고가 각각 70%, 30% 정도였다. 어쨌거나 광고 수입보다 신문 판매 수익이 절대적으로 많다는 것은 이 신문이 광고주인 대기업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의 언론은..

「스포츠: 잘 잰 시간의 감옥」 - 고든 피터스

1968: Marching in the street Tariq Ali & Susan Watkins, 안찬수·강정석 옮김, 삼인. 2002년 12월 13일 초판 4쇄 발행. 스포츠: 잘 잰 시간의 감옥 멕시코 올림픽 사보타주 스포츠는 비정치적 활동이라는 관념만큼 비판을 받지 않은 격언은 없다. 내가 아는 한 모든 스포츠 행사가 전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토론의 주제로 삼은 적은 결코 없다. 일반적으로 스포츠에 이의를 제기할 만한 이유로는 적어도 네 가지가 있다. 1. 스포츠는 '경쟁심'을 고취한다. 2. 오늘날 대회가 개최될 때 스포츠는 민족주의의 가장 원색적인 형태를 고취한다. 3. 육체적인 건강함을 강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군국주의적이다. 4.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 깃든다"는 (아..

『번역어성립사정』- 야나부 아끼라

『飜譯語成立事情』 『번역어성립사정』 柳父章, 서혜영 옮김, 일빛. 2003년 4월 1일 초판. 글머리에 이 책에서 다루는 '사회' '개인' '근대' 등의 번역어는 학문과 사상의 기본 용어이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나 신문지면 등에도 자주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도 가정의 거실에서 가족들끼리 또는 직장 동료들끼리 편하게 대화를 할 때에는, 이런 말은 보통 사용하지 않는다. 상당히 교육 정도가 높은 사람의 가정이라 하더라도 그럴 것이다. 만약 편안한 자리에서 누군가가 이러한 말을 입에 올린다면, 주위 사람들이 얼른 자세를 고쳐 앉거나 자리가 썰렁해질지도 모른다. 즉 이런 말은 사용되는 장소가 한정돼 있어서, 일상 생활의 장에서가 아니라, 학교나 활자 속의 세계 혹은 집안이라 해도 공부방에서만 사용된다. ..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더글러스 러미스

『經濟成長がなければ私たちは豊かになれないのだろうか』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C. Douglas Lummis, 최종철·이반 옮김, 녹색평론사. 2002년 12월 10일 초판, 2003년 2월 20일 2쇄. 일본에 와보기 전에는 '영어회화(English Conversation)'라는 말을 그 어디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물론 이 두 낱말이 어떻게 해서 복합명사화하게 되었는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쓰는 영어회화라는 표현은 그것이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종의 슬로건적 느낌을 풍긴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영어로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영어회화를 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라는 우리가 종종 접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