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망각의책

『르 몽드』- 최연구

엔디 2004. 4. 2. 22:18
르몽드
『르 몽드』
최연구, 살림.
2003년 12월 30일 초판.

<ㅉ=69>르 몽드 광고 수입은 38%

르 몽드의 1년 매출액은 1999년 기준으로 2억3천5백만 유로(약 2,700억 원) 규모이다. 그런데 르 몽드 총매출액 중 신문 판매를 통한 수입은 2000년 기준으로 전체 수입 중 62%이다. 반면 광고 수입은 38%이다. 이 수치는 장-마리 콜롱바니 회장이 르 몽드를 이끌면서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광고 비중을 대폭 늘린 이후의 수치이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르 몽드의 수입 구조는 구독료 수입(지대)과 광고가 각각 70%, 30% 정도였다. 어쨌거나 광고 수입보다 신문 판매 수익이 절대적으로 많다는 것은 이 신문이 광고주인 대기업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의 언론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일 수는 있어도, 광고주인 기업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르 몽드는 이런 자본주의 언론의 한계를 처음부터 자각했고, 경제권력(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광고보다 판매 수익을 우선으로<ㅉ=70>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초지일관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 권력으로부터의 재정적 독립은 르 몽드의 독립성을 뒷받침하는 토대이다. (한편 우리나라 신문은 어떤가. 우리나라는 그 구성 비율이 정반대이다. 우리나라 주요 일간지의 재정구조를 보면 광고 수입이 평균적으로 신문 재정의 약 70%를 웃돈다.)

이처럼 광고 수입을 제한하여 언론의 독립성을 견지하고 있는 르 몽드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1985년부터는 광고 업무를 아예 자회사로부터 분리시켜 편집과 광고의 유착 관계를 근원적으로 '단절'시켰다. 르 몽드는 이런 면에서 여러 가지로 독립 언론의 모델이 되고 있다.

그러나 르 몽드가 최고의 지성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독특한 소유 구조나 재정적인 독립성 때문만은 아니다. 르 몽드는 분명한 색깔과 논조를 가지고 있는 소신 있는 언론이다. 기사의 깊이와 세련된 분석은 단연 타 신문의 추종을 불허한다.

르 몽드는 '모든 권력(정치권력과 금권)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한다. 하지만 독립성과 중립성은 다른 개념이다. 르 몽드는 양비론처럼 모호한 입장을 표방하거나, 중립성을 내세우는 회색 언론은 결코 아니다. 르 몽드의 입장은 오히려 분명하고 명확하다. 특히 인종주의나 극우 이데올로기에 대한 르 몽드의 입장은 비타협적이기까지 하다.

프랑스 언론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정치적 색깔을 분명히 갖고 있고 사설의 논조도 일관성을 갖는다. 르 몽드의 목소리는 진보적이다. 르 몽드는 프랑스 지성들이 그러하듯 자신과<ㅉ=71>다른 의견에 대한 정치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언론이 정치인이나 정당, 정치 세력에 대해 색깔 공세를 퍼붓는다는 것은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상상할 수도 없다. 프랑스 문화와 지성을 유지해 온 가장 큰 힘은 다양성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적 다양성, 문화적 다양성은 프랑스 사회가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가치이다. […]

<ㅉ=75>중립 표방 않는 프랑스 언론

프랑스 언론은 결코 중립을 표방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나라 언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이다. 우리나라 언론은<ㅉ=76>저마다 정론직필의 정론지를 자처하고 있고 언론의 객관성, 중립성을 내세운다. 보수적인 신문이든 진보적인 언론학자이든 모두 같은 논지를 펴고 있다. 가령 언론학자 김동민 교수는 오마이뉴스에 실린 글을 통해 "나는 거듭 강조하거니와 언론의 생명은 '도덕성'과 '비당파성'이다"라고 말했다. 언론의 중립성을 통한 공정성을 주장하는 것은 진보적인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프레시안에 실린 다음의 글은 '새 언론포럼'에서 프레시안의 한 간부가 발표한 발제문의 일부이다.

언론이 현실의 특정 정치 세력과 일체화되는 것은 위험하다. 현실의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진리와 정의를 독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은 항상 옳다'는 공산당의 무오류 선언은 오류였음에 드러났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한 세력이 절대선을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며 이에 동조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현실의 특정 세력은 정당성의 일부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누가 더 정당성의 비율이 많은가'이다. 언론의 역할은 공정한 심판자로서 현실 세력의 시시비비를 냉정하게 가려내는 것이다.(「프레시안」, 2003년 11월 21일.)

언론이 공정한 심판자로서 현실 세력의 시시비비를 객관적으로 가려낸다는 것이 가능한가? 정치적 사안에 대한 공정한 심판이 과연 가능한가? 이런 객관성, 가치중립성의 주장<ㅉ=77>은 막스 베버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보수건 진보건, 한국 언론들이 하나같이 공정성과 중립성을 표방하는 것은 한국 언론이 그동안 너무 편파적이거나 친권력적이었음을 반증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론이 중립성, 비당파성, 객관성을 견지한다는 것 또한 관념적인 신화에 불과하다. 프랑스 언론은 도덕성, 진실성은 표방하지만 비당파성을 표방하지는 않는다. 하니리포터 김승열은 언론은 오히려 당파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프랑스 언론에 비추어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다.

현재 한국 언론은 당파성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한국 언론 대부분이 무당파성, 정론, 객관성, 균형을 강조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프랑스에는 오히려 이러한 당파성을 근거로 논쟁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극우에서 극좌에 이르는 언론들이 무지개처럼 늘어서 있고, 누군가가 사회에 대한 발언을 할 때는 그가 지지하는 정당, 그 정당을 지지하는 언론을 보아야만 올바로 발언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으며, 미국도 마찬가지도 명백히 공화당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언론이 나누어져 있다.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라면 다양성을 토대로 하여야 하고, 이는 언론의 당파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언론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과 진실이지 비당파성이 아니다. 피하여야 할 것은 왜곡이지 당파성이 아니다.(김승열, 「하니리포터」, 2001년 7월 5일.)

<ㅉ=78>언론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은 언론의 독립성이다. 한 나라가 독립을 잃으면 자유를 잃듯이, 언론도 독립성을 잃으면 자유를 잃게 된다. 언론의 역사는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언론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현대 사회에서 언론은 입법, 행정, 사법부에 버금가는 제4의 권력(제4부)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주필인 이냐시오 라모네(Ignacio Ramonet)는 자신의 저서 『커뮤니케이션의 횡포』에서 미디어를 제4부가 아닌 제2부로 규정하고, "제1부로 뛰어오른 경제, 제3부로 밀려난 정치와 함께 새로운 '삼권 분립'을 이루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하지만 그래도 이 막강한 펜의 힘은 때로는 정치권력 앞에, 때로는 자본의 위력 앞에 굴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프랑스의 언론도 처음부터 자유 언론이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던 나폴레옹 시대의 언론만 보더라도 프랑스의 언론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신문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기는커녕 정치권력 앞에서 해바라기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권력 앞에서 신문 편집이 굴절된 고전적인 예가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최대 일간지 모니퇴르(Moniteur)이다. 지금은 사라진 언론이지만 모니퇴르는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시민혁명을 옹호하면서 최대의 일간지로 부상했다. 하지만 반혁명적인 나폴레옹이 집권하자 이번에는 나폴레옹을 적극적으로 지<ㅉ=79>지하면서 시민세력의 기대를 저버린다. 나폴레옹이 패전한 뒤 엘바 섬으로 유배되자, 이 신문은 다시 나폴레옹을 비판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15년 3월 1일 엘바 섬을 탈출해 다시 파리로 입성한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파리로 들어오는 20일간에 드러난 모니퇴르의 논조 변화를 보면 언론이 권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고 친권력적이었는지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모니퇴르 머리기사의 제목 변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살인마 소굴에서 탈출
-코르시카의 아귀 쥐앙 만에 상륙
-괴수 카프에 도착
-괴물 그르노블에 야영
-폭군 리용을 통과
-약탈자 수도 60마일 지점에 출현
-보나파르트 급속히 전진! 파리 입성은 절대 불가
-황제 퐁텐블로에 입성하시다
-어제 황제 폐하께옵서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거느리고 궁전에 듭시었다(손석춘, 『신문읽기의 혁명』(개마고원, 1997) 재인용.)

전두환 장군이 집권하자 조선, 동아일보가 보여주었던 용비어천가식의 보도 기사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ㅉ=80>언론은 권력과 긴장 관계 유지해야

물론 오늘날의 프랑스 언론에서 이런 권력에 대한 아부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그만큼 시민 사회가 탄탄해졌고, 언론이 투쟁을 통해 '자유'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쟁취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언론이 사회의 공기(公器)로서 제 기능을 다하자면 언론은 권력과 부단히 긴장 관계를 가져야 한다.

언론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라고 해서 언론의 독립성이 완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경제권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언론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언론은 여전히 '광고'라는 경제권력으로부터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르 몽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르 몽드는 자본주의의 언론도 충분히 경제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때문에 르 몽드는 정치권력과 금권으로부터의 독립성이야말로 신문의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