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책 61

노동으로의 삼투, 문학으로의 귀환: 송경동의 산문

“시에서 돈 냄새가 났으면 좋겠다”고 최영미 시인은 말했지만, 송경동의 시에서는 무슨 냄새가 날까. 광주천을 붉다고 쓴 시 때문에 얻어맞아 얼얼한 볼을 한 채로 맡은 봄 향기일까, 눅눅한 잡부 숙소의 때 절은 이부자리에서 나는 피 섞인 정액 냄새일까, 아니면 가끔 비정규직 일터인 지하로 내려오던 어느 아름다운 정규직 여 직원에게서 끼쳐오던 향수 냄새일까, 그도 아니면 아들과 놀이터 삼아 가던 사우나의 수증기 냄새일까. 『꿈꾸는 자 잡혀간다』는 운문의 제약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쓰인 그의 줄글을 모은 책이다. 시집 속에서 그는 어쩔 수 없는 시인이었지만, 이 산문 속에서 그는 시인이기도 하고 시인이 아니기도 하다. 시인이 아닐 때 그는 노동자이자 투사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아들이기도 하다..

타오르는책 2011.12.20

무협지와 80년대: 김영하 『무협 학생운동』, 유하 『무림일기』

90년대 끝무렵에 대학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세기말 학번'이라고 했다. 당시 내가 있던 대학의 총학생회은 이른바 '비(운동)권'이었고, 단과대 학생회는 NL(민족자주)이었다. 별로 개의치 않았다. 새터(신입생수련회)에서 단대학생회가 주는 가방을 받았다. '통일'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보라색과 회색이 있었는데, 나는 바라던 회색 가방을 받아서 내심 기뻤다. 학생회는 신입생들에게 IMF를 주제로 촌극을 만들라고 했다. 우리는 각 과/반별로 모여 촌극을 준비했고, 한국이가 대학 들어가서 공부 안 하고 놀다가 결국 F 학점을 받지만(I am F!=IMF),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열심히 공부해 A로 올라선다는 진부한 스토리의 우리 과/반 촌극은 전체 2위를 차지했다. 그게 다였다.우리네 동기들은 세..

타오르는책 2010.01.04

시간과 기억 속 재편되는 계급: 박주택 『시간의 동공』

최초의 시계, 최초의 달력은 사람의 눈이었다. 사람들은 태양과 달의 모양과 움직임, 물의 흐름을 보고 세월歲月과 시간時間과 촌음寸陰을 알았다. 박주택의 시집 『시간의 동공』은 시인의 눈을 따라 시간의 흐름을 꿰뚫어보고, 눈이 보았던 기억과 그 속에 숨어있는 계급을 살펴보는 시집이다. 시인의 눈은 먼저 "문을 닫은 지 오랜 상점"을 바라본다. 불빛이 없어 어두운 그곳에는 발가벗겨진 채 갇혀 있는 인형이 보인다. 시인은 문득 섬뜩함을 느낀다. 그리고 사뭇 달랐던, 처음 그곳에 갔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때는 허리춤이 드러난 한 여자가 물을 뿌리며 창을 닦고 있었고, 사랑스러운 아이와 고요한 커피 잔도 시인의 눈에 들어왔다. 아마 인형도 그 때는 옷을 걸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인은 그 먼 기억..

타오르는책/詩 2009.11.09

김수영과 언론 자유: 시 「'金日成萬歲'」에 부쳐

김수영의 시 「'金日成萬歲'」를 읽었다. 제목만 봐도 어지간해서는 출간을 못했겠구나 싶은 시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이를테면, 텍스트가 가리키는 달이 분명 '한국의 언론 자유'라고 하더라도, 그 손가락인 텍스트가 너무 '섹시'했기 때문에 당국은 텍스트 자체를 모자이크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건 김수영 같은 시인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아름다운데다 달을 가리키기에 더이상 효과적인 수단을 찾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시를 읽어 보자(김수영 2008, 119): '金日成萬歲' 韓國의 言論自由의 出發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韓國 言論의 自由라고 趙芝薰이란 詩人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金日成萬歲' 韓國의 言論自由의 出發은 이것을 인정하는..

타오르는책/詩 2008.06.02

개악판 『어린 왕자』: 예담-아르데코7321판을 둘러싼 번역 비교

예담은 위즈덤하우스의 임프린트 출판사로, 예담판 『어린 왕자』는 디자인 문구류 회사인 아르데코7321이 '어린 왕자'의 상표권 계약을 체결한 후 국내 시장을 거의 독점하려는 의도로 위즈덤하우스와 함께 낸 책이다. (세계일보의 조정진 기자는 예담판이 곧 아르데코7321과 계약 하에 낸 것이라는 점을 모르고 스캔들마케팅이라는 딴소리를 하고 있다.)아르데코7321은 상표권을 취득한 후 각 출판사와 서점에 공문을 보내 서점에 깔린 『어린 왕자』 중 (자신들이 상표권 라이센스를 얻은) 특정 삽화 및 서체를 사용한 책을 모두 서점에서 철수시키라고 고지했고 각 출판사는 반발하고 있는 상태다. 여기에는 저작권 또는 상표권과 관련한 복잡한 문제가 있다.예담판 『어린 왕자』는 불문학 박사이자 전문 번역가인 강주헌이 번..

새 『어린 왕자』와 아르데코7321의 비즈니스맨 정신

얼마 전에 쓴 어린 왕자를 소비하는 사회: 어린 왕자 상표권 분쟁에서 나는 "아르데코7321이나 유족 재단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고 적었다. 나는 정말 몰랐다; 그래서 나는 "기존의 출판사들이 생떽쥐뻬리의 명예를 높였으며, 아르데코7321의 매출도 높여 주었을 것"이라고 너무 순진하게 진단했던 듯하다. 그리고 얼마 전 '새 『어린 왕자』'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계일보의 조정진 기자는 예담(위즈덤하우스)판 『어린 왕자』가 아르데코7321과 관련되어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스캔들마케팅이란 글을 쓴 것 같다. 서점에 가서 책 표지만 한 번 봐도 아르데코7321이라는 글자를 볼 수 있었을 텐데. 2008. 5. 6. 11:48 추가) 아르데코7321 측은 처음부터 기존의 책들을 모..

어린 왕자를 소비하는 사회: 어린 왕자 상표권 분쟁

서점에서 한동안 『어린 왕자』를 못 보게 될 거라고 한다. 이유인즉, 생떽쥐뻬리가 그린 그림 몇 장과 '어린 왕자'라는 한국어 제호, 그리고 'Le Petit Prince'라는 프랑스어 제호가 상표권 등록이 되어 있는데, 상표권 소유자인 SOGEX(생떽쥐뻬리 유족 재단)가 이를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그림과 제호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가장 먼저 이루어진 상표권 등록은 1996년부터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제서야 상표권을 문제 삼은 것은 최근 '아르데코7321'이라는 국내 업체가 해당 상표권 관련 독점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르데코7321은 각종 공예품과 공책, 메모장 등을 만드는 회사다. 최근 주변에 '어린 왕자'가 들어간 노트나 연습장을 쓰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는데, 모..

태안 사태, 그리고 우화와 시의 힘: Sepúlveda『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우화fable란 동물에게 사람의 속성을 투영한 이야기로 일종의 알레고리allegorie이다(이상섭, 210-210). 그래서 논자에 따라서는 우화를 의인소설擬人小說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한용환, 333-336). 그런데 우화 가운데 인간이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럴 경우 대개 인간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가령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인간은 사회주의 혁명 이전의 제정帝政 러시아를 의미한다. 또 안국선의 「금수회의록」은 좀더 직접적으로 옳지 못한 인간의 태도를 풍자하고 있다. 이처럼 동물이 등장인물인 이야기에서 인간이 쉽게 부정적으로 묘사된다는 것은, 적어도 문학적 상상력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의 감정을 동물에 이입했을 때 인간이 추악한 존재라고 느끼기 쉽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나는 다소 딱..

곳의 감옥, 곳의 욕망: Duras『모데라토 칸타빌레』

1 욕망이란 이 곳에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 실재로서 현재하는 것을 바란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면 사실 '그대'는 곁에 없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 봐야 한다. 삶의 영원한 항등식처럼,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은 행복한 삶이다. 여기까지 인정한다면, 그 다음 행복의 각론에서 저마다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순서가 남아 있다. 뒤라스의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안 데바레드 부인이 바랐던 것은 그가 속한 곳의 정원과 무도회와 파티에는 없는 것이었다. 데바레드 부인의 행복이란 무엇이었을까. 데바레드 부인은 무엇을 바랐고, 무엇을 욕망했을까. 2 르네 지라르는 모든 욕망은 주체와 대상 이외에 또다른 타자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중세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롤 모..

어린 왕자는 해지는 걸 몇 번 보았나: 『어린 왕자』의 판본과 그림

『어린 왕자』의 여러 한국어판 번역본들과 불어판 또는 영어판을 비교해 보면 조금 이상한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아마도 쓸쓸했던 날의) 어린 왕자가 자기 행성 B612에서 본 해넘이의 수가 한국어판과 불어판 또는 영어판이 다른 것이다 한국어판은 대개 마흔세 번으로, 영어나 불어판은 마흔네 번으로 기록하고 있다: « Un jour, j'ai vu le soleil se coucher quarante-quatre fois! » -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 폴리오folio 문고판, 31쪽. (1999년 문고판 간행) "One day," you said to me, "I saw the sunset forty-four times!" - 하비스트북A Harvest Book하코트 브레이스Harcourt B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