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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태안 사태, 그리고 우화와 시의 힘: Sepúlveda『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우화fable란 동물에게 사람의 속성을 투영한 이야기로 일종의 알레고리allegorie이다(이상섭, 210-210). 그래서 논자에 따라서는 우화를 의인소설擬人小說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한용환, 333-336). 그런데 우화 가운데 인간이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럴 경우 대개 인간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가령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인간은 사회주의 혁명 이전의 제정帝政 러시아를 의미한다. 또 안국선의 「금수회의록」은 좀더 직접적으로 옳지 못한 인간의 태도를 풍자하고 있다. 이처럼 동물이 등장인물인 이야기에서 인간이 쉽게 부정적으로 묘사된다는 것은, 적어도 문학적 상상력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의 감정을 동물에 이입했을 때 인간이 추악한 존재라고 느끼기 쉽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나는 다소 딱.. 더보기
소설가의 죽음: '간지나는 이야기' 자판기 1 사람들은 왜 이야기를 읽을까? 또 왜 이야기를 쓸까? 내게 항상 관심을 끄는 말은 이런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쓰면 소설책 몇 권은 된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술에 취해 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의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어쨌든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참 많다. 블로그나 까페가 붐비고, 인터넷 댓글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다. 술에 취한 것처럼 다들 자기 이야기를 내뱉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는 욕을 '씨부리'는 것이다. 이청준은 일찍이 언어사회학서설이라는 연작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가운데 한 편은 「자서전들 쓰십시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코미디언 피문오 씨의 자서전 대필 작가 윤지욱이 자서전 쓰기를 그만두는 이야기를 .. 더보기
곳의 감옥, 곳의 욕망: Duras『모데라토 칸타빌레』 1 욕망이란 이 곳에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 실재로서 현재하는 것을 바란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면 사실 '그대'는 곁에 없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 봐야 한다. 삶의 영원한 항등식처럼,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은 행복한 삶이다. 여기까지 인정한다면, 그 다음 행복의 각론에서 저마다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순서가 남아 있다. 뒤라스의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안 데바레드 부인이 바랐던 것은 그가 속한 곳의 정원과 무도회와 파티에는 없는 것이었다. 데바레드 부인의 행복이란 무엇이었을까. 데바레드 부인은 무엇을 바랐고, 무엇을 욕망했을까. 2 르네 지라르는 모든 욕망은 주체와 대상 이외에 또다른 타자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중세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롤 모.. 더보기
어린 왕자는 해지는 걸 몇 번 보았나: 『어린 왕자』의 판본과 그림 『어린 왕자』의 여러 한국어판 번역본들과 불어판 또는 영어판을 비교해 보면 조금 이상한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아마도 쓸쓸했던 날의) 어린 왕자가 자기 행성 B612에서 본 해넘이의 수가 한국어판과 불어판 또는 영어판이 다른 것이다 한국어판은 대개 마흔세 번으로, 영어나 불어판은 마흔네 번으로 기록하고 있다: « Un jour, j'ai vu le soleil se coucher quarante-quatre fois! » -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 폴리오folio 문고판, 31쪽. (1999년 문고판 간행) "One day," you said to me, "I saw the sunset forty-four times!" - 하비스트북A Harvest Book하코트 브레이스Harcourt Bra.. 더보기
서바이벌 게임: 박일문『살아남은 자의 슬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어야 했다고, 스스로에게 늘 확인시키곤 했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걸쳐서, 혹은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걸쳐서 후다닥 해치운 대학 생활에 대한 약간의 자괴 같은 것도 있었다. 대학 생활이 내게 준 것은 무척 많았지만, 살펴보면 대개 지나간 것이나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함께 끼어 있었다. 맑스도 레닌도 제대로 읽지 못했고, 노동자의 삶을 위해 시위도 한 번 한 일도 없다. 그렇다고 학문을 깊이 탐구한 것도 아니다. 나는 늘 주위만을 기웃거렸을 뿐이다. 맑스-레닌을 읽기에 나는 너무 늦게 대학엘 들어왔고, 학문 탐구를 위해서는 너무 일찍 대학에 들어온 셈이다. 콤플렉스 탓일까. 내 책장에는 책들이 쌓이어 갔고, 그 책들은 다시금 내게 부담 혹은 콤.. 더보기
참된 기억을 위하여: 황석영『손님』 삶은 기억의 축적이다. 기억들은 오늘을 받치는 토양으로 삶의 기저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그 기억들을 나름의 순서로 재구성하는 것이 소설을 비롯한 글의 목적이다. 문제는 흔히 그 기억들은 현실의 힘에 밀리고 눌려 쉽사리 지각변동을 겪게 된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하면, 본래 사람이 가진 기억이라는 것이 사실 온전하지 않아서 우리가 기댈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는 행위 그 자체는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지만 그 기억의 내용은 우리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건을 대할 때 기억에만 의존한다면 우리는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결과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에는 이러한, 기억이 갖는 문제점들이 엿보인다. 황해도 신천의 학살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 더보기
어린왕자와 경계부수기: J.-P. David『다시만난 어린왕자』 어린왕자가 지구로 다시 돌아왔다. 그의 별에 어쩌다 호랑이가 머물게 되었고, 호랑이 때문에 양과 장미가 위협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왕자는 호랑이 사냥꾼을 찾고 있다. 워낙 쌩떽쥐뻬리의 『어린왕자』는 동화로 씌어진 것이다. 동화가 소설보다 수준낮은 것이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리라. 쌩떽쥐뻬리는 심지어 『어린왕자』를 어른인 레옹 베르뜨에게 헌정하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사과하고 있기까지 하다. 쌩떽쥐뻬리가, 혹은 그의 어린왕자가 경멸했던 것은 '버섯'같은 어른들의 사고방식이다. 『다시 만난 어린왕자』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어린왕자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별(사실은 행성)을 떠나 지구로 오는 길에 만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보면 금방 나타난다. 어린왕자는 차례로 환경.. 더보기
구체具體 위에 핀 죄의 꽃: 도스또예프스끼『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성서는 크게 보아 '구원의 역사'이다. 아담의 첫 범죄sin 이후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때를 거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구원'이 올 때까지의. '구원'이 있기까지는 '죄'가 있어야 하므로 성서는 또한 '죄'의 역사이다. 그러나 '죄'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누구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누구든 "신(神)이 부과한 명령을 어기는 것"이 죄라고 주장하려는 이는 '왜 카인이 십계명이 생기기도 전에 스스로를 괴롭게 해야 했는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그 '죄의 역사'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죄의 개념을 보다 명확히 하고 있다. 대개 사람들에게는 죄가 선험성Apriotät을 지니고 나타난다면, 도스또예프스끼의 소.. 더보기
헐리우드 vs. 지금-여기: 안정효『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과감하게 중편이나, 장편이라도 좀더 짧게 압축시킬 수 있는 작품이다. 수많은 옛날 헐리우드 영화가 우리 눈을 어지럽히고, 그 배우들의 이름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 많은 영화제목을 빼고 나면, 이 작품은 그저 옛날엔 참 좋았지 류의 과거를 아름답게 재구성하는 회고소설에 불과해질 것이다. 회고소설? 하긴 어떤 이는 이 소설을 회고소설이라고 부를 것이고 어떤 이는 이 소설을 표절에 대한 소설이라고 부를 것이지만, 이 소설은 기실 그 아무 것과도 관련이 없다. 영화가 삶의 한 부분이었던 그 당시를 애정어린 손길로 재구성해내고 있으면서도, 항상 '지금-여기maintenant-ici'를 잊지 않고있는 작가의 펜은 헐리우드 키드가 느꼈던 '고스트幽靈 현상'과는 정반대되는 방향을 가지는 것이다. .. 더보기
알레고리 없이 '워터십 다운' 읽기: R. Adams『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다른 많은 판타지 소설이 그렇듯이, 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아이들의 요구에서 시작된다. 애덤스의 아이들은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않은' 길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했다. 아이 때는 누구나 이야기를 원한다. 삶의 언어, 언어로 표현된 삶이 인간에게 본래적인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증거이다. 허구虛構를 뜻하는 '소설fiction'이라는 말에 환상幻想을 뜻하는 '판타지fantasy'라는 말이 덧붙여졌을 때, 그 말의 파괴력은 절정에 달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거짓'의 극한極限이다. 그런데, 놀라워라, 판타지 소설의 독자는 그 '거짓'을 '거짓' 그대로 믿게 된다. 이름에서 보자면 허구의 끝으로 달려가는 것이 판타지소설인데도 판타지소설의 독자는 그것을 진.. 더보기
삼국지의 홍수 속에서: 황석영 옮김 『삼국지』 출판도 유행을 따르는 것 같다. 아니, 내가 헤아려 보건대 출판이야말로 유행에 가장 민감한 분야 중 하나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셜록홈즈 전집이나 뤼팽 전집이 시일에 큰 차이를 두지 않고 두세 출판사에서 중복 출판된 것이 하나의 예가 될 것이며, 또 얼마 전의 '쥘 베른'의 중복 출판도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유행은 '삼국지'다. 소설가 황석영이 『삼국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질 때 즈음하여 다른 출판사들은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삼국지』로 가장 많은 상업적 성공을 본 민음사나 정역正譯의 자부심이 넘치는 솔출판사의 온-오프라인 서점 마케팅은 꽤나 살벌했다. 그 와중에 나는 글 한편 '이링공 뎌링공' 만들어 '당첨'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분은 그렇게 깔끔하고 깨끗하지 않다. '삼.. 더보기
홍수 가운데의 정수淨水: 김구용 옮김『삼국지연의』 "'삼국지'는 없다"고 누군가가 자신의 '삼국지' 번역본 서문에서 말했다. '삼국지'는 홍수처럼 많이 출간되지만 진짜 '삼국지'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문열, 김홍신을 대표로 하여 정비석, 박종화, 조성기는 물론이고 멀리는 박태원 가까이는 황석영까지 당대의 글쟁이와 문장가는 삼국지 번역을 한 번씩 해보려는 욕심이 있는 모양이다. 이문열이 그 서문에서 말한 의미로 "쓸모없는 노력의 중복"이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 모두는 '역자 서문'에서 출간의 변辨을 한 마디씩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출간의 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번역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이다. 이문열은 '평역 삼국지' 서문에서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를 "거의 대역이 가능할 정도로" 모본을 충실히 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