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어릿광대의견해 74

걸그룹과 현자의 돌

최승희 PD가 연출한 KBS의 예능 프로그램 '본분 금메달'과 안준영 책임프로듀서가 맡은 M.net의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101'은 전혀 다른 구성을 하고 있지만 사실 본질은 같다. 이를테면 두 프로그램 사이의 간극은 딱 웃음과 눈물 사이의 간극과 같다. 요컨대 걸그룹은 웃음을 팔고 걸그룹 지망자들은 눈물을 파는 우리 시대를 그대로 반영한 프로그램들이다. 아니 방송사들이 자신의 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웅변하는 대로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게 정정할 수 있겠다: "걸그룹은 웃음을 팔아야 하고, 걸그룹 지망자들은 눈물을 빼앗겨야 한다."언론이 앞다퉈 보도한 내용이지만 굳이 반복하자면 '본분 금메달'은 "걸그룹은 항상 이미지 관리에 힘써야 한다"는 전제 아래 갑자기 바퀴벌레 모형을 내놓는다든지 해서 걸그룹을 ..

오매와 오오미: 정치와 말

언어의 조탁에 관심이 많았던 시문학 동인 시인 김영랑은 『영랑시집』에 실린 시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에서 가을이 깊어가는 시절에 대한 감탄이 담긴 누이의 한 마디를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내용으로만 보면 이 작품은 전적으로 그 누이의 말이 계기가 되어 쓰여진 작품으로 보이는데, 첫 연의 시작과 두 연의 마지막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그 한 마디가 시의 발단과 절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매 단풍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니리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보아라 「오-매 단풍들것네」 - 김영랑,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전문 강희숙 조선대 교수의 전라도의 언어 11: “오메 단풍 들것네”에 따르면 호남..

어머니와 무상급식

경북 구미의 선산이 고향인 내 어머니는 아주 평범한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다까기 마사오高木正雄와 동향인 탓에 비생산적인 오해를 사기도 했고, 실제로 아직도 그를 위인 중 하나로 꼽고 있지만, 글쎄 정치와는 별 무관한 삶을 살아왔다고 스스로 믿는 한 교사였을 뿐이다. 자식인 내가 이명박이 대통령 돼서는 안 된다고 안 된다고 길길이 뛰니까 대신 이회창을 찍은, 그런 TK 출신의 한 사람일 뿐이다. 어머니가 대구교대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것은, 어쩌면 가난 때문이었다. 당시 교대는 2년제였고, 학비가 무료였다. 대신 졸업 후에는 반드시 몇 년 이상 교사로 근무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교사 인력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그런 식으로 양성하려 했던 것 같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이야기다. 학비가 ..

과학과 정치윤리: 그리섬 대 서태윤, 천안함 미스터리

몇 년 전, 한국의 한 과학자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하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묘한 말을 했다. 안 그래도 가득할 대로 가득한 한국인의 국가주의nationalisme를 자극했던 그 말은, 비록 빠스뙤르Pasteur가 먼저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과학적'인 언사라고는 할 수 없었다. 조국을 위한다는 명목 때문인지 몰라도, 실제로 그는 여성의 난자를 구입하는 비윤리적인 행태에서부터 1차 자료 조작이라는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까지 저버리는 사건--사고가 아니라--까지 저질렀다. '조국' 운운한 발언의 여파는 컸다. 그에 대한 옹호는 지금도 정치적인 색채를 띤다: 난자를 매매한 것은 그저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간단히 면죄부가 부여된다;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라고 ..

빨간 사과의 진실과 구라

IMF 위기를 조금씩 극복해나가던 2001년 한 카드사의 신년 광고는 어느 여배우를 등장시켜 아주 단순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여러분, 부자되세요. 꼭이요." 무차별 카드 발급의 여파로 신용불량자가 매해 증가하던 시절이었다. 광고는 대박을 쳤다. 카드사의 이미지도, 배우의 이미지도 덩달아 올라갔다. 카드사로서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지점을 정확히 공략한 셈이었다.소비자들은 모두 부자가 되기를 원했다. 적어도 그런 말이라도 듣기를 바랐다. "부자되세요."그래서…… 그때부터였던 듯하다, 친한 사람들끼리 발랄하게 "새해 복 많이 받아" 대신 "새해 돈 많이 받아" 하고 인사를 주고 받았던 것은. 그 말은 묘하게도 위악爲惡스러운 매력이 있었고, 또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는 그런 욕심이 있었으므로 '진실'한 말이..

범인은 누구인가: 사이코패스 공포의 사회학

연예인이 죽으면 악플, '묻지마 살인'은 사이코패스다. 일종의 공식이 된 듯하다. 일단 이해할 수 없는 무차별 살인이 일어나면, 당연하다는 듯이 사이코패스부터 의심한다. 문화일보가 인용한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사이코패스들은 치밀하며, 죄책감이 없고, 반사회적이지만, 평상시에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그럼 사이코패스는 왜 생기는 것이며 이들을 구별할 방법은 없을까? 사이코패스 범죄를 막으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목차 사이코패스, 사회의 불수의근? 사이코패스와 슈퍼테러리즘 사이코패스 사건 예방 범인은 누구인가? 사이코패스, 사회의 불수의근?# 언론이 인용한 전문가들의 말만 들으면, 사이코패스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사회의 불수의근不隨意筋이다. '재수 없이' 이 ..

'국어순화'와 언어 심미주의: '우리말 다듬기' 유감

무분별한 한자어나 외래어의 사용은 분명히 언어의 양극화를 심화시켜 정보의 불균형을 낳는다. 정보가 민주적으로 배포되지 않는 곳에서 세계는 평평하지 않다. 때문에 한자어나 서양 외국어 독해에 어려움을 겪는 대중들에게 외래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운동은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이를테면, '국어순화' 운동의 가장 큰 성과로 생각되는 '갓길'이 그렇다. 숄더shoulder나 노견路肩이라고 하면 썩 잘 다가오지 않는 개념이 갓길이라고 하면 한눈에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게다가 갓길은 숄더나 노견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말이다. 정과리(1998, 38)는 "'노견'이라는 가금家禽 종자 같은 이름을 벗어던지고 새로 차려 입은 우리말이 상큼한 여성성을 연상케"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립국어원에서 운영하는 우리말 다듬기 ..

구술사의 진실과 점근선: 뉴라이트식 실증주의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를 넘어서

흔히 뉴라이트 역사교과서라고 불리는 교과서포럼의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가 내세우는 것은 실증주의다. 그들은 기존의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되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교과서포럼 창립선언문을 통해 이렇게 자신들의 지향점을 밝혔다: 은 대한민국의 과거를 미화하지도 않겠지만, 비하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연히 우편향도 아니고 좌편향도 아니다. 오로지 있는 그대로 우리가 치열하게 살아온 과거를 맑은 거울에 비추어보는 것처럼 진솔하게 보고자 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야말로 이 지향하고 있는 교과서철학이다. '좌편향'과 '우편향'을 벗어나겠다는 주장은 오래도록 우파의 논리였던 '탈정치'와 다를 바가 없고, '실사구시'라고 하는 것도 우파들이 말하는 '실용주의'의 정체가 밝혀진 지금에 와서는 전혀 새로울 것이 ..

선거법과 개인정보

아침에 오마이뉴스 박성호 기자의 공정택지지문자 거부할 수 없었다는 기사를 보고 놀랐다. 교육감 선거본부의 선거 운동이 '스팸 문자'와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박성호 기자는 그 문자를 거부할 수 없었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기사를 썼다. 그리고 선본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홍보과 번호를 알아냈지만 그쪽 전화도 아무도 받지 않았다고 썼다. 내가 같은 곳으로부터 문자를 받은 것은 오늘 낮 12시가 좀 넘어서였다. 문자 내용은 이랬다: [선거정보]전교조 는안됩니다 공정 택 현교육감에게 표를몰아주세요! 거부0802855000 먼저 박 기자처럼 수신 거부 번호(080-285-5000)로 전화를 걸어봤지만 헛수고였다. 신호가 가는 듯 '따르릉' 하더니 이내 '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