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 「'金日成萬歲'」를 읽었다. 제목만 봐도 어지간해서는 출간을 못했겠구나 싶은 시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이를테면, 텍스트가 가리키는 달이 분명 '한국의 언론 자유'라고 하더라도, 그 손가락인 텍스트가 너무 '섹시'했기 때문에 당국은 텍스트 자체를 모자이크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건 김수영 같은 시인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아름다운데다 달을 가리키기에 더이상 효과적인 수단을 찾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시를 읽어 보자(김수영 2008, 119):
'金日成萬歲'
韓國의 言論自由의 出發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韓國
言論의 自由라고 趙芝薰이란
詩人이 우겨대니나는 잠이 올 수밖에
'金日成萬歲'
韓國의 言論自由의 出發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韓國
政治의 自由라고 張勉이란
官吏가 우겨대니나는 잠이 깰 수밖에
(1960.10.6.)
시적인 기교를 거의 부리지 않은 무척이나 담박한 시다. 김수영이 진실로 김일성을 추종하는 시인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오로지 무엇이든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검열의 왕국을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김수영은 외로이 잠이 들었다가 깬다. 그는 함께 이야기할 말벗이 없다. 장면이라는 관리뿐 아니라 조지훈이라는 시인까지도 '자유'에 대한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그보다 일찍이 1956년에는 「눈」이라는 시를 통해 대나무숲에라도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을 쏟아놓기도 했다(김수영 1981a, 97):
기침을 하자
젊은 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1956)
4월혁명이 일어난 후, 김수영은 4월 26일 조간에 발표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는 시를 통해 이제 '상식'이 된 민주주의와 자유를 부르짖는다. (그날 낮 1시 이승만은 하야를 발표한다.) 김수영은 "기침을 하자"에서 벗어나 하고 싶었던 말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운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제2공화국이 들어서자 김수영은 6월 30일 일기에서 비통하게 말한다(김수영 1981b, 333):
第二共和國!
너는 나의 적이다.
나는 오늘 나의 완전한 휴식을 찾아서 다시 뒷골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제의 나는 없어!
[…]오오, 자유. 오오, 휴식.
오오, 허망.
오오, 그럼 나의 벗들.第二共和國!
너는 나의 적이다. 나의 완전한 휴식이다.
영광이여, 명성이여, 위선이여, 잘 있거라.
그가 이런 어조로 2공화국을 '까'는 이유는 무엇일까. 혁명 속에서 말의 자유를 만끽했던 김수영이 2공화국에서 어떤 훼방을 발견한 것이 아닐까? 분명히 2공화국은 최인훈의 『광장』을 용인했고, 대한민국 제2공화국 헌법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사전 허가 또는 검열제를 금지하는 등 자유권의 강화가 많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김수영은 한국의 언론 자유에 대해 '~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으로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 같다. 다시 김수영의 일기를 보자. 9월 20일자 일기다(김수영 1981b, 338-339):
언론자유나 사상의 자유는 헌법조항에 규정이 적혀있다고 해서 그것이 보장되었다고 생각해서는 큰 잘못이다. 이 두 자유가 진정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위선 자유로운 환경이 필요하고 우리와 같이 그야말로 이북이 막혀 있어 사상이나 언론의 자유가 제물로 위축되기 쉬운 나라에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이 두 개의 자유의 창달을 위하여 어디까지나 그것을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하지 방관주의를 취한다 해도 그것은 실질상으로 정부가 이 두 자유를 구속하게 된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정부가 지금 할 일은 사회주의의 대두의 촉진 바로 그것이다. 학자나 예술가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국가를 초월한 존재이며 불가침의 존재이다. 일본은 문인들이 중공이나 소련같은 곳으로 초빙을 받아 가서 여러가지로 유익한 점을 배우기도 하고 비판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되어있다. 언론의 창달과 학문의 자유는 이러한 자유로운 비판의 기회가 국가적으로 보장된 나라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검열이란 정부 기관이나 영진위, 기윤실, 유림 따위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검열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이미 존재하며, 자기 검열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검열이다. 글쓰는 사람이 조건반사처럼 글을 쓰면서, 심지어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조차 스스로의 글과 생각을 제한해야 한다면, 거기엔 실질적인 검열이 없더라도 언론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불평은 있지만 검열 때문에 불평을 말할 수 없는 오웰의 『1984』보다 불평 자체를 느끼지도 못하는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더 끔찍한 세계다.
위 김수영의 일기를 읽고 놀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논리정연한 글에 고개를 끄덕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 「'金日成萬歲'」나 그 제목을 읽고서는 아마 한국인들의 대부분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시사인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81
10월 6일 이후, 이 시가 겪은 수난은 시인의 일기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여기에 옮겨 보자(김수영 1981b, 339-340, 342):
10월 6일
시 「잠꼬대」*를 쓰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썼는데, 현경한테 보이니 발표해도 되겠느냐고 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언론자유〉에 대한 고발장인데, 세상의 오해여부는 고사하고, 《現代文學》지에서 받아줄는지가 의문이다. 거기다가 거기다가 趙芝薰도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는가?
* 이 작품의 최초의 제목은 「○○○○○」. 詩輯으로 내놓을 때는 이 제목으로 하고 싶다.
10월 18일
시 「잠꼬대」를 《自由文學》에서 달란다. 「잠꼬대」라고 제목을 고친 것만 해도 타협인데, 본문의 〈×××××〉를 〈×××××〉로(한글로--편집자 주) 하자고 한다.
집에 와서 생각하니 고치기 싫다. 더이상 타협하기 싫다.
허지만 정 안되면 할 수 없지. 〈 〉부분만 언문으로 바꾸기로 하지.
후일 시집에다 온전하게 내놓기로 기약하고.
한국의 언론자유? God damn이다!
[…]
10월 19일
[…]
시 「잠꼬대」는 無修正으로(언문 교체 없이) 내어밀자.
10월 29일
「잠꼬대」는 발표할 길이 없다. 지금같아서는 시집에 넣을 가망도 없다고 한다.
12월 25일
「永田絃次郞」과 「○○○○○」를 함께 월간지에 발표할 작정이다.
12월 25일
「○○○○○」는 〈인간본질에 대해서 설치된 諸制限을〉관찰하는 데 만족하고 있는 시이다.
김수영은 이 문제가 되는 시를 "아무렇지도 않게" 썼다고 했다. 그런데 아내에게 보여 주니 "발표해도 되겠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니 수영 자신도 은근히 걱정이 되는 모양인지 잡지에서 받아줄지 안 받아줄지 걱정한다. 《현대문학》이 받아주지 않았는지 《자유문학》으로 지면을 바꾸어 보지만 거기서 다시 타협을 요구하고, 김수영은 그걸 받을지 말지 고민한다. 결국 그가 《자유문학》에 내민 원고가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결국 그 시는 발표할 지면을 찾지 못했다. 시집으로도 넣지 못한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김수영의 울분이 느껴지는 듯하다.
12월 25일자 두 일기의 「○○○○○」가 「'金日成萬歲'」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가타 겐지로永田絃次郞」 역시 월북 등 북한과 관련된 시이므로 「○○○○○」를 「'金日成萬歲'」로 보는 것에 문제는 없어 보인다. 김수영은 「○○○○○」가 단지 "인간본질에 대해서 설치된 제제한을 관찰하는 데 만족하"는 시라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는 '언론의 자유'라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의 본질에 대해 설치된 모든 제한을 관찰하는 시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이유가 내부 검열 또는 자기 검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검열을 시작하게 되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김수영 1981a, 249-250):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 짜리 갈비가 기름덩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려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1965. 11. 4.)
1965년이면 1963년 윤보선을 상대로 대선에 성공한 '민간인' 박정희가 군인들을 베트남으로 파병했던 시기이다. 아마 이 때쯤부터 미국과의 긴밀한 협조가 더욱 공고해졌을 것이다. 사상의 통제는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김수영은 "왕궁의 음탕"에 대해 쓸 수 없었다. 그것을 쓰면 잡혀갔을 것이고, 그것을 쓴다고 해서 받아줄 잡지도 출판사도 없었다. 김수영이 스스로 반성하고 있는 이 시, 「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를 읽을 때면, 그가 얼마나 소시민이었고 그가 얼마나 옹졸했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그가 말을 하는 데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옳다.
김명인(2008, 168)은 "김수영에게 언론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문학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밝혀 쓰고 있고, 김현(1991, 399)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있어서는 자유가 없는 곳에서의 시란 방랑이며 고초이며, 설사이다. 그것은 소음이다. 그러나 그는 그 소음을 더욱 크게 내지르려고 애를 쓴다. 그것은 저질의 참여시가 아니라, 높은 정신의 자기 학대이다."라고 쓰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김수영의 시 「'金日成萬歲'」를 그대로 실었을 경우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체제가 무너지거나 권위가 떨어지거나 했을 것인가 하는 가정이다. 이북의 1960년대는 이른바 '천리마 시대'였다. 천리마 시기가 되어 증산增産은 물론 사상의 통제도 더욱 심해졌다. 이 운동의 결과 북은 아마 상당 부분의 성과를 거두었던 것 같다. 김일성은 문예에 대해서도 천리마 운동이 필요하다고 교시한다. 그에 따르면 "문학과 예술은 언제나 현실보다 앞서"서 공산주의로 가는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작가들이 "천리마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여러 차례 비판한 모양이다(신형기·오성호 2000, 219-225).
한국 사회가 「'金日成萬歲'」를 용인하지 못했던 것은 자기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1960년대 당시에 김수영의 「'金日成萬歲'」가 발표될 수 있었다면 국가 체제는 물론이고 권위 역시 더욱 공고해졌을 것이다. 김수영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를 썼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그 영민한 김수영이 과연 「'金日成萬歲'」라는 시가 지면을 찾지 못하리라는 것을 몰랐을까. 사람들이 달을 보지 못하고 '섹시'한 손가락만 바라볼 것이라는 걸 그가 몰랐을 리 없다. 나는 그가 더 먼 미래를 바라보고 이 시를 썼으리라고 생각한다. 4월 혁명보다 더 먼 미래를 말이다. 4월 혁명은 성공한 혁명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김수영은 「그 방을 생각하며」에서 이렇게 말한다(김수영 1981a, 160):
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狂氣----
失望의 가벼움을 財産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歷史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財産으로 삼았다[…]
방을 잃고 落書를 잃고 期待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1960. 10. 30.)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꾼 셈이 되었고, 언론 자유도 없어 펜은 녹이 슨 데다 이제 뼈와 광기만이 남은 상태다. 재산은 실망의 가벼움뿐이다. 이것이 시인의 현실 인식이다. 1960년 10월이면 『광장』이 발표된 때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자유로웠던 그 시기에 김수영은 이미 녹슨 펜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수영은,
그러나 수영은 언젠가 「'金日成萬歲'」를 출간할 날이 오리라고 믿었던 것일까. 그의 가슴은 그 때 무엇으로 풍성했던 것일까.
덧말) 정지창 교수는 다산연구소에 기고한 글, 「유언비어의 시대」에서 언론 자유가 없던 시절에 '유언비어'가 담당했던 기능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그 시절 '유언비어'는 진실의 다른 이름이었다. 당시의 '유언비어'는 언론 통제를 공격하는 게릴라부대와 같다. 이제 '괴담'이라는 이름의 '유언비어'를 다시 통제하려고 하는 정권이 들어섰다. 김수영이 말했듯 민주주의와 자유는 이제 상식으로 되었다. '김일성만세'가 빤히 잡지에 실릴 수 있는 이 시대에, 언론 통제는 번연히 살아 있음을 본다. 방의 벽에라도, 인터넷 어느 구석에라도 나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 라고 낙서라도 꾹꾹 눌러서 하자.
참고문헌
김명인. 2008. "제 모습 되살려야 할 김수영의 문학세계: 김수영 미발표 유고 해제". 실린곳: 『창작과 비평』. 통권 140호. 서울:창비. 153-176쪽.
김수영. 1981a. 『김수영 전집』. 1:詩. 서울:민음사.
------. 1981b. 『김수영 전집』. 2:散文. 서울:민음사.
------. 2008. "'金日成萬歲'". 실린곳: 『창작과 비평』. 통권 140호. 서울:창비. 119쪽.
김현. 1991. "김수영을 찾아서". 실린곳: 김현. 1991. 『상상력과 인간/시인을 찾아서』. 김현문학전집3. 서울:문학과지성사. 392-399쪽. 처음실린곳: 『심상』. 1974년 3월호.
신형기·오성호. 2000. 『북한문학사: 항일혁명문학에서 주체문학까지』. 서울:평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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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2008년 가을호(통권141호) '독자의 목소리'에 실린 요약:
김수영의 시 「‘金日成萬歲’」를 읽었다. 제목만 봐도 어지간해서는 발표 못했겠구나 싶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이를테면 텍스트가 가리키는 달이 분명 ‘한국의 언론자유’라 하더라도, 그 손가락인 텍스트가 너무 ‘쎅시’했기 때문에 텍스트 자체를 모자이크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읽어보면, 이 시는 기교를 거의 부리지 않은 무척이나 담백한 시다. 김수영이 진실로 김일성을 추종하는 시인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오로지 무엇이든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검열의 왕국을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해제에서 김명인도 “김수영에게 언론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문학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밝혀 쓰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金日成萬歲’」를 그대로 실었다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체제가 무너지거나 권위가 떨어졌을 것인가 하는 가정이다. 한국사회가 이 시를 용인하지 못했던 것은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1960년대 당시에 이 시가 발표될 수 있었다면 국가체제는 물론이고 권위 역시 더욱 공고해졌을 것이다. 김수영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를 썼던 것이다.
김수영은 언젠가 「‘金日成萬歲’」가 발표될 날이 오리라 믿었던 것일까.
요약문을 보니 국가 체제와 관련된 부분에서 내 뜻과 달리 오해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2008. 08. 24.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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