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시를 잘 변형하여 만든 이 노래를 오래 좋아했다. 다소 몽환적인 분위기를 즐겼던 것일까?
항상 노래와 영화를 대할 때면 시와 소설을 생각했다. 현대의 대표적인 서정 문학은 시가 아니라 노래이며, 현대 서사문학은 소설이 아니며 영화가 아닐까? 하지만 나는 거기에 쉽게 녹아들 수가 없었다. 노래에 대해 시의 우위를, 영화에 대해 소설의 우위를 항상 느꼈기 때문이다.
가령, 빛과 소금의 '샴푸의 요정'에는 장정일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 애증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매트릭스 안의 모든 것이 조작된 것임을 알면서도 매트릭스를 동경하는 것으로, 나는 키치Kitsch 시인들 모두에게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노래나 영화에서는 볼 수가 없다.
사내는 추리극장이 싫다. 국내 소식이 싫고 운동경기가 싫고 문제의 외화가
싫다. 안 본다. 그리고 방송출연하는 많은 다른 여인들이 역겹다. 나는 그녀만을 본다. 여덟 시 반의 그녀를 기다린다. 보시겠읍니까 15초 동안 그녀는 샴푸회사를 위해 광고하지요. 보시겠읍니까
그녀는 인사를 잘한다. 안녕하셔요 그녀는 미소띠며 속삭인다 파란 물방울 무늬 잠옷을 입고 그녀는 머리를 감아 보인다. 무지개를 실은 동글동글한 거품이 티브이 화면을 완전히 메운다. 그러면 샴푸의 요정이 속삭이는 거지 새로 나온 샴푸, 당신이 결정한 샴푸라고 향기가 좋은 샴푸, 세계인이 함께 쓰는 샴푸 아마 당신은 사랑에 빠질 거예요 라고 속삭이는 것이지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아시아 굴지의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그리고 우리들에겐 요정이 있다. 현존하는 유일한 요정 매일 저녁 여덟 시 반, 티브이 화면을 찢으며
우리 곁에 날아오는 샴푸의 요정. 그녀는 15 초 동안 지껄이고 캄캄한 화면 뒤로 사라진다. 여덟 시 반. 매일 저녁 여덟 시 반에는 그녀가 출연하는 광고가 있다. 기다려 주세요
광고가 끝나면 사내는 무기력하게 티브이를 꺼 버린다. 매일 저녁 15초가 필요할 뿐 사내는 사진을 들여다본다. 짝사랑하는 그녀 사진을 사내는 모은다. 방에 붙이기도 한다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 수영복을 입은 모습 승마복을 멋지게 입은 사진을 그는 모은다. 그리고 칼에 대어 잘라낸다. 샴푸의 요정이 어느 영화에 출연해서 보여주는 곧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의 남자 배우 입술을 면도날로 잘라낸다.
선전문안이 들끓는 밤 열 한 시 나지막이 샴푸의 요정이 속삭이지 않는가 그녀의 노래가 귓전에 맴돌지 않는가. 쓰세요, 쓰세요, 사랑의 향기를 느껴 보세요. 그리고 그녀의 약속이 가슴속에 고동치지 않는가. 오늘 밤 당신을 찾아가겠어요, 광고 속에서 그녀는 약속했었지. 욕망이 들끓는 사내의 머리통
옷을 벗는 요정. 담배불 자국이 송송한 소파에 비스듬이 눕는 요정. 신비스레 신비스레 가라앉는 요정. 뜨거운 입술로 이리 오세요 예쁜 아기, 속살거리는 요정 환영이 들끓는 밤 열 두 시, 이윽고 샴푸의 요정은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냄새를 맡아 본다. 제가 권한 것을 쓰셨겠지요 물론 그러하셨겠지요?
0시 삼십 분. 사내는 샴푸가 아닌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다. 무언가 시도하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실내화를 끌며 얼마나 잽싸게 달아나는가. 참 잘하셨어요 샴푸는 역시 우리 것이 최고랍니다. 계속 애용해 주세요. 분홍빛 잠옷을 끌며 샴푸의 요정은 사라진다. 아아 좀더 있어 주세요! 좀더!
꿈에서 깨어나 사내는 타자기를 두드려댄다. 딱딱딱딱딱 굴지의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그리고 현존하는 유일한 요정은 샴푸요정이다.
장정일의 시 '샴푸의 요정'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사내'라는 호칭이 1연 4행에서 '나'로 3연 3행에서 '우리'로 바뀐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