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소남은 난의 노근을 드러내어 亡宋의 한을 그렸고, 조맹부는 훼절하여 元에 출사했지만, 정소남의 난초만 홀로 향기롭고 조맹부의 송설체가 비천하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未堂徐廷柱西紀二千年十二月二十四日聖誕節前夜死去. 當時我年二十一也.
서정주는 흔히 '생명파'로 명명되는 시인이다. 과연 그의 시에서는 생명에 대한 집착과 열의가 지속적으로 나온다. 생명이라는 것에 대한 계속되는 탐구는 우리 삶의 의미를 밝혀줄 것도 같다. 그의 초기시에 보이는 여러 시어들은 젊은 날들의 타오르는 생명에서 점차로 나이먹어가는 생명의 모습을 보여준다.
서정주의 첫 시집인 『花蛇集』은 그 강렬한 이미지와 시어들 때문에 인상적이다. 강렬한 이미지는 주로 시각적 이미지, 그 중에서도 붉은 색의 이미지들이다. 그 이미지를 대표하는 개별어들은 [피, 석류, 능금, 입술(입설), 도화桃花(복사꽃), 오디, 볽은 댕기, 볽은 꽃밭, 볽으스럼한 얼굴, 닭벼슬, 붉고 붉은 눈물, 붉은 우름, 진달래꽃, 산호珊瑚]들이다. 이에 대비되는 흰 색의 이미지나 푸른 색의 이미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붉은 색의 광기어린 지배에서 이 시집이 벗어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붉은 색은 대체로 젊은 시절의 강한 성욕의 지배를 내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성욕의 표현들은 「花蛇」에서 "石油 먹은 듯…… 石油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로, 「桃花桃花」에서 "푸른 나무그늘의 네거름길우에서 / 내가 볽으스럼한 얼굴을하고 / 앞을볼때는 앞을볼때는 // 내 裸體의 에레메야書 / 毘盧峰上의 强姦事件들."로, 「雄鷄(下)」에서 "어찌하야 나는 사랑하는자의 피가 먹고싶습니까" 등으로 나타난다. 이런 강렬한 성욕은 대체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기에 마련이다. 그것도 "사랑하는 자의 피가 먹고 싶"을 만큼 강렬하다면 그 죄책감은 더하리라. 「문둥이」에서는
로 표상되어 있다. 하지만, 그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문둥이는 애기를 먹는다. 그것은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편에서 그의 강렬한 붉음을 조절하는 장치가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桃花桃花」에서의 "나의微熱을 가리우는 구름이있어 / 새파라니 새파라니 흘러가다가"나 「水帶洞詩」에서의 "흰 무명옷 가라입고 난 마음 / 싸늘한 돌담에 기대어 서면 / 사뭇 숫스러워지는 생각, 高句麗에 사는듯 / 아스럼 눈감었든 내넋의 시골 / 별 생겨나듯 도라오는 사투리."이 대표적이다(강조 인용자). 무섭고 강렬한 붉은 작용에 푸르고 흰 반작용이 있었기에 서정주는 페시미즘에 침윤되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붉은 강렬함은 두 번째 시집 『歸蜀途』에 가면서 "하눌ㅅ가에 머무른 꽃봉오리ㄹ 보아라", "뺨 부비며 열려있는 꽃봉오리ㄹ 보아라",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눌ㅅ가에 / 인제 바로 숨쉬는 꽃봉오리ㄹ 보아라"로 마무리된다.
두 번째 시집 『歸蜀途』에서 서정주는 한恨의 정서로 빠져들고 있다. 아마도 그의 강렬함이 충족되지 않아서, 아니 충족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리라. 그는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牽牛의 노래」)라는 한스러운 말을 내뱉고 있다. 표제시인 「歸蜀途」나 「푸르른 날」 역시 별리의 정한을 노래한 절창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 속에서도 그의 생명력만은 고스란히 간직되고 있다. "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에라도"라고 외치는 페시미스트들과는 사뭇 달리, 또 "죽지 못해 산다"는 한 섞인 체념과도 다르게 서정주는 여직껏 끊임없이 삶에의 욕구를 달려 왔던 것이다. 이런 삶의 욕구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한과 이별과 슬픔이 미치도록 자신을 지배했음에도 서정주는 어디에서 살아야할 이유와 목적과 당위를 찾았던 것일까?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라는 긴, 시의 제목에서도 서정주는 자문自問하고 있다. 그가 살고 싶어하는 이유는 "꽃으로 문지르는 행위" 때문이다.
꽃으로 문지르는 행위, 그것은 한과 이별과 슬픔의 해소를 뜻하는 바, 치유를 말하고 있다. 『花蛇集』에서 보여졌던 흰색의 이미지와 푸른색의 이미지가 여기에서 또다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 시가 서정주 시의 근원적인 무언가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가 아픔을 안고서도 살아가려 애쓰는 이유는 그 아픔이 계속 치유되기 때문이며 그 자신도 치유에의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절망은 결국은 페시미즘으로 몰고갈 수도 있지만, 인간은 죽기 전까지는 배수진背水陣을 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죽기까지 희망을 간직한 채 사는 셈이 된다. 이장희를 비롯한 페시미스트들이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마지막 절망인 죽음을 택하는 것과는 다른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서정주는 이런 자신의 삶에의 욕망을 확인하고서 다음 시집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제서야 그에게는 일말의 평화랄 것이 찾아오고 안정을 찾는다. 그의 생명지향은 드디어 나이먹기 시작한 것이다.
『徐廷 柱 詩選』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은 안정감이다. 그는 이제 「菊花 옆에서」나 「無等을 보며」 같은 작품을 내어놓는다. 마음에 안정과 깊은 사색이 없으면 쓰지 못할 내용들이라 생각한다. 그는 이제 자신을 비우는 법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시방 제 속은 꼭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븨여진 항아리와 같습니다."(「祈禱 壹」) 자신을 비우면 세상 모든 것이 조화롭게 보인다. 그는 드디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새로 알게 되고,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그 사랑은 자연과 별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요 조화에 대한 경탄이요 감화다. 그는 슬픔을 알고 있지만 슬픔을 가르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上里果園」). 그가 얻은 결과가 너무 상투적이고 예사롭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가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서 얻은 결과일테니까.
未堂徐廷柱西紀二千年十二月二十四日聖誕節前夜死去. 當時我年二十一也.
서정주는 흔히 '생명파'로 명명되는 시인이다. 과연 그의 시에서는 생명에 대한 집착과 열의가 지속적으로 나온다. 생명이라는 것에 대한 계속되는 탐구는 우리 삶의 의미를 밝혀줄 것도 같다. 그의 초기시에 보이는 여러 시어들은 젊은 날들의 타오르는 생명에서 점차로 나이먹어가는 생명의 모습을 보여준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뿐이었다.
어매는 달을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 않는다하는 外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눈이 나는 닮었다한다.
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
어떤이는 내눈에서 罪人을 읽고가고
어떤이는 내입에서 天痴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찰란히 티워오는 어느아침에도
이마우에 언친 詩의 이슬에는
멫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꺼있어
볓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
병든 숫개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 「自畵像」 全文
서정주의 첫 시집인 『花蛇集』은 그 강렬한 이미지와 시어들 때문에 인상적이다. 강렬한 이미지는 주로 시각적 이미지, 그 중에서도 붉은 색의 이미지들이다. 그 이미지를 대표하는 개별어들은 [피, 석류, 능금, 입술(입설), 도화桃花(복사꽃), 오디, 볽은 댕기, 볽은 꽃밭, 볽으스럼한 얼굴, 닭벼슬, 붉고 붉은 눈물, 붉은 우름, 진달래꽃, 산호珊瑚]들이다. 이에 대비되는 흰 색의 이미지나 푸른 색의 이미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붉은 색의 광기어린 지배에서 이 시집이 벗어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붉은 색은 대체로 젊은 시절의 강한 성욕의 지배를 내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성욕의 표현들은 「花蛇」에서 "石油 먹은 듯…… 石油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로, 「桃花桃花」에서 "푸른 나무그늘의 네거름길우에서 / 내가 볽으스럼한 얼굴을하고 / 앞을볼때는 앞을볼때는 // 내 裸體의 에레메야書 / 毘盧峰上의 强姦事件들."로, 「雄鷄(下)」에서 "어찌하야 나는 사랑하는자의 피가 먹고싶습니까" 등으로 나타난다. 이런 강렬한 성욕은 대체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기에 마련이다. 그것도 "사랑하는 자의 피가 먹고 싶"을 만큼 강렬하다면 그 죄책감은 더하리라. 「문둥이」에서는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우름을 밤새 우렀다.
- 「문둥이」 全文
로 표상되어 있다. 하지만, 그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문둥이는 애기를 먹는다. 그것은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편에서 그의 강렬한 붉음을 조절하는 장치가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桃花桃花」에서의 "나의微熱을 가리우는 구름이있어 / 새파라니 새파라니 흘러가다가"나 「水帶洞詩」에서의 "흰 무명옷 가라입고 난 마음 / 싸늘한 돌담에 기대어 서면 / 사뭇 숫스러워지는 생각, 高句麗에 사는듯 / 아스럼 눈감었든 내넋의 시골 / 별 생겨나듯 도라오는 사투리."이 대표적이다(강조 인용자). 무섭고 강렬한 붉은 작용에 푸르고 흰 반작용이 있었기에 서정주는 페시미즘에 침윤되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붉은 강렬함은 두 번째 시집 『歸蜀途』에 가면서 "하눌ㅅ가에 머무른 꽃봉오리ㄹ 보아라", "뺨 부비며 열려있는 꽃봉오리ㄹ 보아라",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눌ㅅ가에 / 인제 바로 숨쉬는 꽃봉오리ㄹ 보아라"로 마무리된다.
두 번째 시집 『歸蜀途』에서 서정주는 한恨의 정서로 빠져들고 있다. 아마도 그의 강렬함이 충족되지 않아서, 아니 충족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리라. 그는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牽牛의 노래」)라는 한스러운 말을 내뱉고 있다. 표제시인 「歸蜀途」나 「푸르른 날」 역시 별리의 정한을 노래한 절창이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처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 「푸르른 날」 全文
하지만, 이러한 한 속에서도 그의 생명력만은 고스란히 간직되고 있다. "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에라도"라고 외치는 페시미스트들과는 사뭇 달리, 또 "죽지 못해 산다"는 한 섞인 체념과도 다르게 서정주는 여직껏 끊임없이 삶에의 욕구를 달려 왔던 것이다. 이런 삶의 욕구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한과 이별과 슬픔이 미치도록 자신을 지배했음에도 서정주는 어디에서 살아야할 이유와 목적과 당위를 찾았던 것일까?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라는 긴, 시의 제목에서도 서정주는 자문自問하고 있다. 그가 살고 싶어하는 이유는 "꽃으로 문지르는 행위" 때문이다.
눈물로 적시고 또 적시어도
속절없이 식어가는 네 흰 가슴이
저 꽃으로 문지르면 더워 오리야
아홉밤 아홉낮을 빌고 빌어도
덧없이 스러지는 푸른 숨ㅅ결이
저꽃으로 문지르면 도라 오리야
- 「門열어라 鄭道令아」 부분
꽃으로 문지르는 행위, 그것은 한과 이별과 슬픔의 해소를 뜻하는 바, 치유를 말하고 있다. 『花蛇集』에서 보여졌던 흰색의 이미지와 푸른색의 이미지가 여기에서 또다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 시가 서정주 시의 근원적인 무언가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가 아픔을 안고서도 살아가려 애쓰는 이유는 그 아픔이 계속 치유되기 때문이며 그 자신도 치유에의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절망은 결국은 페시미즘으로 몰고갈 수도 있지만, 인간은 죽기 전까지는 배수진背水陣을 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죽기까지 희망을 간직한 채 사는 셈이 된다. 이장희를 비롯한 페시미스트들이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마지막 절망인 죽음을 택하는 것과는 다른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서정주는 이런 자신의 삶에의 욕망을 확인하고서 다음 시집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제서야 그에게는 일말의 평화랄 것이 찾아오고 안정을 찾는다. 그의 생명지향은 드디어 나이먹기 시작한 것이다.
『徐廷 柱 詩選』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은 안정감이다. 그는 이제 「菊花 옆에서」나 「無等을 보며」 같은 작품을 내어놓는다. 마음에 안정과 깊은 사색이 없으면 쓰지 못할 내용들이라 생각한다. 그는 이제 자신을 비우는 법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시방 제 속은 꼭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븨여진 항아리와 같습니다."(「祈禱 壹」) 자신을 비우면 세상 모든 것이 조화롭게 보인다. 그는 드디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새로 알게 되고,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그 사랑은 자연과 별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요 조화에 대한 경탄이요 감화다. 그는 슬픔을 알고 있지만 슬픔을 가르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上里果園」). 그가 얻은 결과가 너무 상투적이고 예사롭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가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서 얻은 결과일테니까.
신령님…….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마리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랑이 같었읍니다
번쩍이는 비눌을 단 고기들이 헤엄치는
초록의 강 물결
어우러저 날르는 애기 구름 같었읍니다
신령님…….
그러나 그의 모습으로 어느날 당신이 내게 오셨을때
나는 미친 회오리 바람이 되였읍니다
쏟아져 네리는 벼랑의 폭포
쏟아져 네리는 쏘내기비가 되었읍니다
그러나 신령님…….
바닷물이 적은 여울을 마시듯이
당신은 다시 그를 데려가고
그 훠―ㄴ한 내 마음에
마지막 타는 저녁 노을을 두셨읍니다.
그러고는 또 기인 밤을 두셨읍니다신령님……
그리하여 또 한번 내위에 밝는 날
이제
산ㅅ골에 피어나는 도라지 꽃같은
내 마음의 빛깔은 당신의 사랑입니다
-「다시 밝은 날에」全文
미당
시전집 1 서정주 지음/민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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