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05년 6월 29일 字
[박은주의 '발칙 칼럼'] '여자'라서 유리하다고?
'역차별'은 차별의 반댓말이 아니다. '역차별'이라는 말이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앞의 '역'이라는 접두어가 자취를 감출 수 있어야 한다. '역차별'론은 대개 가해자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29일자 조선일보에는 박은주 기자의 '역차별'론이 실렸다. 그는 "슬프게도 ... 자주 있었"기에 너무나도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시추에이션'을 이야기했다. 그가 이야기한 이 '시추에이션'은 하나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어떤 전형type이다. 적어도 '역차별'이라는 낱말은 그 전형을 딛고서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흑인에 대한 차별은 스스로를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한다. 그 말은 백인·남성은 그 사회에서 알게 그리고 모르게 혜택을 본다는 뜻이다. 물론 더 나쁜 건 감춰진 헤택과 감춰진 차별이다. 항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백인과 남자들은 이런 원죄가 있기 때문에 무조건 쥐죽은 듯이 살다 죽으라는 말은 아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처한 상황situation이다. 박은주 기자가 목격한, 혹은 전해 들은 사건은 이러한 맥락 속에 있다.
물론 그 여자는 잘못했다. 관용적으로 여성이 "어딜 만져?"라고 부르짖을 수 있는 상황은 성적 모욕감을 느꼈을 때이다. (그런 법은 없지만, 대개 그렇고, 그래서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청자들의 상상이 그 쪽으로 흘러간다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처럼 접고 들어가는 화법도 박은주 기자가 전해들은 이야기에 거짓이 없다는 한에서 유효하다.) 그러므로 과잉대응이라 할 만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남자도 박은주 기자도 '시추에이션'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남자는 모르는 사람의 어깨를 잡아 끌면 안 된다는 걸 몰랐던 것일까? 박은주 기자는 이 뜬금없는 '역차별'론이 다시 차별을, 그 차별은 다시 '역차별'론을 부른다는 것을 몰랐던 것일까?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리얼리즘도 아니고 "어딜 만져"도 아니고, 정의définition다. 박은주 기자가 누구에게 말을 전해들었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그의 "꽤 '진보적인' 이 남자"가 "아무리 여성상위라지만, 이건 해도해도 너무 한 일"이라고 말했다면 박은주 기자의 진보의 개념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아마 '상당히 앞질러나가는 분'이라는 뜻으로 썼다고 짐작되는 "꽤 진보" 씨는 억울할 것이다. "여성상위"의 '시추에이션'을 인정하는 순간 '역차별'이라는 낱말은 존재 근거를 잃기 때문이다. '남성'과 '상위'가 혼인해 '역차별' 어린이를 낳아야 하는데. 우리 가여운 '역차별' 어린이는 돈데크만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가 '상위'가 '여성'과 헤어지고 '남성'과 만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더 할 말이 없지만, 박은주 기자는 할 말이 남은 모양이다. "앞의 사건과는 관계없이"라는 조건을 달아, 글의 통일성이라는 논술 쓰기의 기본을 깨뜨려서 조선일보를 보면서 논술 공부를 하는 가엾은 일만이천 수험생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으면서, 무려 세 가지 '시추에이션'을 200자 원고지 1장 반 짜리 마지막 문단에 쏟아붓는다:
"다들 커피 마시는데 '난 생과일 주스'라며 돈 한 푼 안 내는 얌체족" 여자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길래 가여운 '역차별' 어린이까지 증인대에 세운 것일까. 다들 커피를 마시는데 혼자 생과일 주스를 시키면 그게 큰 잘못이 되는 것일까. 다들 자장면 먹는데 혼자 짬뽕 시키면 안 된다는 한국의 권위주의와 전체주의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이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말이 아니라면, 돈 안 내는 게 문제가 되는 것일까. 옳다. 그건 확실히 문제다. 왜 남자들은 그 여자에게 돈 내라고 이야기 안 하는 것일까. '쫀쫀'한 남자가 되기 싫어서다. 이 "남성 상위"의 시대에서 남자는 자존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얌체족" 여자는 "여성 상위" 시대와는 관계가 없다.
회식자리의 "나도 한 잔 줘"가 성희롱이라며 '오버'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도, 아마 박은주 기자는 "꽤 진보" 씨로부터 전해 들은 것일까. "나도 한 잔 줘"는 성희롱이 아니다. 문제는 대개 그 문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 잔 따라 봐"다.
밤새워 일하는 걸 보고 "일중독" 운운하는 여자도 마찬가지다. 그 여자는 '쿨'한 게 아니라 "남성 상위" 사회에서 여성에게 지워지는 짐이 너무 많아서 지친 것이다. 최근 법원으로부터 '특수 노동'으로 규정받은 육아와 가사를 책임지느라 시간이 없는 것이다. 진짜 일 중독은, 그러므로, "남자들"이 아니라 '쿨' 해 보이는 그 여자다.
'쿨' 해 보이려는 여자는 그 여자가 아니라 박은주 기자다. '난 그런 여자들과는 다르다'고 상큼하게 이야기한다. 여기서 상황은 뒤집어진다. 어쩌면 박은주 기자는 우리 사회가 처한 '시추에이션'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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