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국가는 항상 '보통인'을 지향하지만, 사회적 약자를 이용한다.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인 박세호 씨가 "전 군대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할 수 있는 여러분은 축복받은 것입니다. 국방의 의무는 곧 축복입니다."라고 말한 건 그런
의미에서 국민국가의 농간이다.
과거 일본이 '대일본제국'을 칭할 때, 일본부인회가 여성 참전을 놓고 둘로 갈라져 싸운 일이 있다. 군대를 갈 수 없는, 따라서 국가를 지킬 수 없는 여성들은 항상 남성보다 못한 2등 국민으로 머물러야 했던 사정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아니, 거기까지 갈 일도 없다. 군가산점제의 위헌성을 알린 여성들을 남성들이 '이화 5적'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고, 자신들이 군대에서 겪은 고난을 가지고 유세하는 장면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여전히 2등 국민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군대와 2등 국민은 한국인에게 특별한 아픔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춘원과 미당으로 대표되는 일제부역日帝扶役¹ 문인들이 무엇보다도 대동아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의 참전을 종용했다는 점에서다. 특히 춘원은 모든 조선인들이 일제에 협력하고 일본 덴노우天皇에 충성하게 되면 진정한 의미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가 될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랬더라도 조선인은 일본 제국주의가 유지되는 한 2등 국민이었을 것이다.
(*¹ 흔히 '친일親日'이라고 쓰는 뜻으로 쓴 말이다. '친한파'나 '지한파'라는 용어가 한국인의 것이듯이 '친일'은 일본의 입장을 대변한 용어라는 주장이 있다. '반민족反民族'이라고 쓰는 사람도 있겠지만, 너무 짙은 민족주의적 성격 때문에 쓰기가 망설여진다. '일제부역'은 민족주의적 용어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비교적 객관적인 용어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한편,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부시 대통령이 테러의 배후를 찾는다는 미명하에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할 살상을 준비하는 동안, 테러 현장에서는 흑인 합창단이 '별을 뿌려놓은 깃발The Star-spangled Banner'이라는 미국 국가를 불렀다. 오랜 인종 갈등이 국가의 '공적公敵'이 나타나자 시침질假縫된 것이다.
박세호 씨의 착각도 그와 같은 차원이다. 국방의 의무는 축복이 아니다. 박세호 씨가 그렇게 느낀다는 건, 그가 당한 차별이 2등 국민으로서의 차별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그가 차별을 당하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 때문이지 군대를 갔다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원인을 잘못 판단한 것이다.
국방의 의미는 결코 축복²이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다섯 가지 측면에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² 축복祝福은 그 한자를 뜯어보면 알 수 있듯이 '복을 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는 '축복'이 아니라 '복'이다. 마찬가지로 "신이시여, 우리를 축복하소서"처럼도 본래 쓸 수 없다. 신은 복을 주는 주체이지, 다른 누군가에게 복을 비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은 기독교 용어로 '하나님이 복을 내림'이라는 뜻을 수용하고 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잘못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추측컨대 이런 오류는 영어의 bless를 일률적으로 축복으로 번역하는 데서 온 것이 아닐까 싶다.)
먼저 국방의 의무가 복이라는 인식은, 국방의 의무가 보편적일 것이라는 잘못된 전제를 깔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일본 부인회가 2등 국민에서 1등 국민으로 '신분 상승'하기 위해 참전을 고심했지만, 징병제가 없는 지금의 일본인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1등 국민, 아니 그냥 국민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징병제는 특수한 상황과 특수한 정책이 만든 여러 국방 정책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유럽의 예를 들자면, 유럽에서 징병제가 의무인 나라는 손에 꼽을 정도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달리 말하면, 징병제는 국민을 1등과 2등으로 나누는 옳지 못한 제도라는 함의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법 앞에 평등해야 할 국민을 남성/여성, 비장애인/장애인의 구도로 나누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단순한 차이를 넘어선 차별이다. 장애인에 국한시켜 말하자면, 이같은 주장은 오히려 장애인 차별의 첨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 장애인/비장애인 차별을 고착화시킬 수 있다.
둘째로 "국방의 의무는 복"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근거 없는 은유법이 방치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미 명제가 아닌 것이다. 어떤 말이 옳거나 틀리려면, 그 말이 참/거짓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데, 다시 말해 명제여야 하는데 "국방의 의무는 복"이라는 말은 거기서부터 이미 틀어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은유가 제국주의자나 국가사회주의자에 의해 오용되기 쉽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셋째로 "국방의 의무는 복"이라는 주장은 과도한 국가중심주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다. 국가는 실체實體가 아니다. 국가는, 말하자면 우리의 믿음과 지지로 탄생한 시뮐라시옹smulation이다. 그러므로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지를 먼저 생각하라"는 케네디의 주문은 당찮은 말nonsense이다. 국가라는 허상虛像의 시스템이 개인이라는 실체를 압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넷째로 "국방의 의무는 복"이라는 말이 단지 '징병제'에 대한 예찬으로만 쓰인다는 문맥도 문제다. 사실 세금을 성실하게 내는 여성은 이미 국방의 의무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헌법상 국방의 의무는 모든 국민이 지는 것이고, 국방의 의무 가운데 하나인 병역의 의무를 남성이 이행하고 있는 것인데 이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다섯째로 "국방의 의무는 복"이라는 주장은 "국방의 의무"를 다른 의무와 구별하고 신성시하게 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국가 전체를 두고 볼 때 80여만명에 달하는 군인이 있는 나라에서 징집 거부자, 집총 거부자, 병역 기피자는 극소수다. 반면, 대기업부터 영세 자영업자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탈세했거나 탈세의 혐의가 있는데도 "납세의 의무는 복"이라는 주장은 없다. 국방의 의무는 한국 국민의 4대 의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물론 이같은 발언은 박세호 씨의 잘못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도 국가와 징병제, 그리고 이를 신성시하게 만드는 '국민교육헌장'의 희생자다. 그것을 감안하고 그의 말을 솜솜 뜯어보면 누구나 알고 있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국방의 의무는 복"이라는 그의 발언은 국방의 의무는 복이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완전히 단합된 집단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구호가 굳이 없어도 되는 이치와 같다. 박세호 씨의 의식 속에서 아니면 무의식 속에서, '국방의 의무'는 달갑지 않은 것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받을 수 있는 그 반대급부(차별 없음)가 끌렸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장애인이 국방의 의무를 찬양하면 차별받던 장애인이 1등 국민으로 '신분상승'할 수 있다는 해묵은 착각을 반복한 것은 아닐까? 둘 중 어느 것이어도, 둘 다이어도, 혹은 둘 다 아니어도 그 궁극적 원인은 하나다: 한국 사회가 장애인을 너무 차별하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징병제는 폐기되어야 마땅할 제도다. 징병제는 차별을 고착화시키거나 차별을 조장하는 제도가 되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국민국가 자체가 이같은 차별을 양산하는 원흉이지만, 국민국가의 해체는 요원한 일이라고 한다면 일단 징병제의 폐지가 급선무다. 더구나 징병제는, 논지를 흐릴 각오를 하고 말하자면, 비슷한 의미로 사회적 약자인 대다수 남성들을 '징병'하여 착취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징병제를 둘러싼 양성간 대립도 시스템이 조장한 약자 대 약자의 싸움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국가주의는 사회적 약자를 이렇게 효율적으로 통제한다.
과거 일본이 '대일본제국'을 칭할 때, 일본부인회가 여성 참전을 놓고 둘로 갈라져 싸운 일이 있다. 군대를 갈 수 없는, 따라서 국가를 지킬 수 없는 여성들은 항상 남성보다 못한 2등 국민으로 머물러야 했던 사정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아니, 거기까지 갈 일도 없다. 군가산점제의 위헌성을 알린 여성들을 남성들이 '이화 5적'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고, 자신들이 군대에서 겪은 고난을 가지고 유세하는 장면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여전히 2등 국민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군대와 2등 국민은 한국인에게 특별한 아픔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춘원과 미당으로 대표되는 일제부역日帝扶役¹ 문인들이 무엇보다도 대동아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의 참전을 종용했다는 점에서다. 특히 춘원은 모든 조선인들이 일제에 협력하고 일본 덴노우天皇에 충성하게 되면 진정한 의미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가 될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랬더라도 조선인은 일본 제국주의가 유지되는 한 2등 국민이었을 것이다.
(*¹ 흔히 '친일親日'이라고 쓰는 뜻으로 쓴 말이다. '친한파'나 '지한파'라는 용어가 한국인의 것이듯이 '친일'은 일본의 입장을 대변한 용어라는 주장이 있다. '반민족反民族'이라고 쓰는 사람도 있겠지만, 너무 짙은 민족주의적 성격 때문에 쓰기가 망설여진다. '일제부역'은 민족주의적 용어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비교적 객관적인 용어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한편,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부시 대통령이 테러의 배후를 찾는다는 미명하에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할 살상을 준비하는 동안, 테러 현장에서는 흑인 합창단이 '별을 뿌려놓은 깃발The Star-spangled Banner'이라는 미국 국가를 불렀다. 오랜 인종 갈등이 국가의 '공적公敵'이 나타나자 시침질假縫된 것이다.
박세호 씨의 착각도 그와 같은 차원이다. 국방의 의무는 축복이 아니다. 박세호 씨가 그렇게 느낀다는 건, 그가 당한 차별이 2등 국민으로서의 차별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그가 차별을 당하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 때문이지 군대를 갔다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원인을 잘못 판단한 것이다.
국방의 의미는 결코 축복²이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다섯 가지 측면에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² 축복祝福은 그 한자를 뜯어보면 알 수 있듯이 '복을 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는 '축복'이 아니라 '복'이다. 마찬가지로 "신이시여, 우리를 축복하소서"처럼도 본래 쓸 수 없다. 신은 복을 주는 주체이지, 다른 누군가에게 복을 비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은 기독교 용어로 '하나님이 복을 내림'이라는 뜻을 수용하고 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잘못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추측컨대 이런 오류는 영어의 bless를 일률적으로 축복으로 번역하는 데서 온 것이 아닐까 싶다.)
먼저 국방의 의무가 복이라는 인식은, 국방의 의무가 보편적일 것이라는 잘못된 전제를 깔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일본 부인회가 2등 국민에서 1등 국민으로 '신분 상승'하기 위해 참전을 고심했지만, 징병제가 없는 지금의 일본인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1등 국민, 아니 그냥 국민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징병제는 특수한 상황과 특수한 정책이 만든 여러 국방 정책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유럽의 예를 들자면, 유럽에서 징병제가 의무인 나라는 손에 꼽을 정도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달리 말하면, 징병제는 국민을 1등과 2등으로 나누는 옳지 못한 제도라는 함의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법 앞에 평등해야 할 국민을 남성/여성, 비장애인/장애인의 구도로 나누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단순한 차이를 넘어선 차별이다. 장애인에 국한시켜 말하자면, 이같은 주장은 오히려 장애인 차별의 첨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 장애인/비장애인 차별을 고착화시킬 수 있다.
둘째로 "국방의 의무는 복"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근거 없는 은유법이 방치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미 명제가 아닌 것이다. 어떤 말이 옳거나 틀리려면, 그 말이 참/거짓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데, 다시 말해 명제여야 하는데 "국방의 의무는 복"이라는 말은 거기서부터 이미 틀어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은유가 제국주의자나 국가사회주의자에 의해 오용되기 쉽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셋째로 "국방의 의무는 복"이라는 주장은 과도한 국가중심주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다. 국가는 실체實體가 아니다. 국가는, 말하자면 우리의 믿음과 지지로 탄생한 시뮐라시옹smulation이다. 그러므로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지를 먼저 생각하라"는 케네디의 주문은 당찮은 말nonsense이다. 국가라는 허상虛像의 시스템이 개인이라는 실체를 압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넷째로 "국방의 의무는 복"이라는 말이 단지 '징병제'에 대한 예찬으로만 쓰인다는 문맥도 문제다. 사실 세금을 성실하게 내는 여성은 이미 국방의 의무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헌법상 국방의 의무는 모든 국민이 지는 것이고, 국방의 의무 가운데 하나인 병역의 의무를 남성이 이행하고 있는 것인데 이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다섯째로 "국방의 의무는 복"이라는 주장은 "국방의 의무"를 다른 의무와 구별하고 신성시하게 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국가 전체를 두고 볼 때 80여만명에 달하는 군인이 있는 나라에서 징집 거부자, 집총 거부자, 병역 기피자는 극소수다. 반면, 대기업부터 영세 자영업자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탈세했거나 탈세의 혐의가 있는데도 "납세의 의무는 복"이라는 주장은 없다. 국방의 의무는 한국 국민의 4대 의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물론 이같은 발언은 박세호 씨의 잘못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도 국가와 징병제, 그리고 이를 신성시하게 만드는 '국민교육헌장'의 희생자다. 그것을 감안하고 그의 말을 솜솜 뜯어보면 누구나 알고 있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국방의 의무는 복"이라는 그의 발언은 국방의 의무는 복이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완전히 단합된 집단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구호가 굳이 없어도 되는 이치와 같다. 박세호 씨의 의식 속에서 아니면 무의식 속에서, '국방의 의무'는 달갑지 않은 것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받을 수 있는 그 반대급부(차별 없음)가 끌렸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장애인이 국방의 의무를 찬양하면 차별받던 장애인이 1등 국민으로 '신분상승'할 수 있다는 해묵은 착각을 반복한 것은 아닐까? 둘 중 어느 것이어도, 둘 다이어도, 혹은 둘 다 아니어도 그 궁극적 원인은 하나다: 한국 사회가 장애인을 너무 차별하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징병제는 폐기되어야 마땅할 제도다. 징병제는 차별을 고착화시키거나 차별을 조장하는 제도가 되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국민국가 자체가 이같은 차별을 양산하는 원흉이지만, 국민국가의 해체는 요원한 일이라고 한다면 일단 징병제의 폐지가 급선무다. 더구나 징병제는, 논지를 흐릴 각오를 하고 말하자면, 비슷한 의미로 사회적 약자인 대다수 남성들을 '징병'하여 착취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징병제를 둘러싼 양성간 대립도 시스템이 조장한 약자 대 약자의 싸움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국가주의는 사회적 약자를 이렇게 효율적으로 통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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