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어릿광대의견해

추측과 진실 사이

엔디 2005. 1. 7. 01:31

▲프레시안 뉴스 댓글 (현재 지워졌음)


이기준-김우식, 40년간 '바늘과 실'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가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영화는 단지 진실에 대한 영화다. 진실과 거짓이라는 테마는 서태윤 형사(김상경 扮)가 계속해서 "서류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라는, 결말에서의 반전을 암시하는 명제를 내세움에서 확인된다. 이 영화를 하나의 메타포로 간주한다면, 진실을 찾는 것은 일종의 미궁 속의 수사와도 같다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함께 본 연인에게 내가 한 말은 "박현규(박해일 扮)가 범인이네."였다. 연인은 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내 말에 의구심을 갖는 눈치였다. 그 '눈치'를 눈치챈 내가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영화를 보고난 직후의 그 상태, 서태윤 형사의 수사선搜査線을 뒤따라가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서사 속에서는 박현규는 결코 범인이 아니다. 사람들은 '우연'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연'은 우연이 아니라, 숨은 관계의 암시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내가 박현규를 범인으로 지목했던 이유는 '우연' 때문이었다. 박현규를 둘러싼 수많은 간접적 증거들이 영화 속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박현규를 범인으로 증명할 만큼 많이, 그러나 정말 박현규가 범인이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화성의 '화' 자도 나오지 않는 이 영화가 반드시 화성과 관계되었다고 무턱대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 영화는 보다 폭넓다. 이 영화는 하나의 공식formule이다.

저 공식은 우리의 판단jugement을 판단할 공식이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비합리적으로 판단하는가. 우리의 판단은 사실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 모든 음모 이론은 하나의 가능성으로서의 가치밖에는 없다. 방증이 일백이라도 소용 없다. 직접적인 증거를 대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보자.

이기준 신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에 대한 인선에 말들이 많다. 국립 서울대학교 총장 재직 당시 그의 편법적 공금유용 혐의와 불법적 사외 이사 겸직 문제, 그리고 아들의 병역 문제와 국적 포기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이러한 사항들은 인사 청문회라도 해야 할 정도이다. 이것은 직접적인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왜 그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맡아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정찬용 청와대 인사수석의 "결정적인 흠이 아니라면 넓은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에서 상징적으로 알 수 있듯이 청와대는 그를 감싸고 있는 것 같다. 이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는 시각은, 인적자원을 육성할 부총리가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자격 자체를 잃을 정도로 중요한 문제인데 이를 "결정적인 흠이 아니"라고 청와대에서 먼저 운韻을 뗀 것에서 비롯되었겠지만, 그 시각이 갖는 힘은 가공할 만하다. 음모 이론은 이 힘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과 이기준 신인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의 오랜 교우관계는 그렇게 기자들의 눈을, 그리고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각각 연세대와 국립 서울대의 화학공학과 57학번 동기라는 점에서 시작해, 함께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유학을 갔고, 둘이 공저를 많이 냈고, 그 가운데 얼마는 화공과의 교과서로 여겨지기까지 하고, 공학기술학회 회장을 서로 이어서 했고, 공학한림원이라는 단체의 회장과 부회장을 나누어 맡았고, 공학교육인증원의 이사장과 원장을 나란히 지냈다는 것이 기사의 요지다. 이 목록은 결코 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이 이기준 신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추천했거나 비호하는 증거 능력이 없다. 그러나 이 목록은 아주 길기 때문에 독자들의 의식 속에서 그 증거로 기능한다.

내가 보기엔, 함께 화공과 57학번이며 함께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유학을 갔고 화공과의 교과서로까지 여겨지는 책을 함께 썼다면, 이후의 행적들은 화학공학이라는 학문에 있어서 그들의 비중을 알 수 있게 하는 것들로써 전혀 이상한 문제가 아니다. 57학번이라면 휴전 협정 이후 겨우 4년이 지났을 때인데, 그때라면 대학을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을 것이고, 그때 유학까지 갔다 왔다면 화학공학에 대한 열정이나 실력은 충분할 것이다. 그것으로 나머지 행적은 모두 규명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풀브라이트 장학금 수여자와 신神도 비리의 공모자가 되고 만다. 하필 나중에 대통령 비서실장과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지낼 사람에게 같이 장학금을 준 혐의로, 혹은 하필 그들을 똑같이 57년에 입학하도록 만든 혐의로.)

추측은 이성에 결단코 반대된다. 기자는, 그리고 우리 독자들은, 법정에 선 것처럼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우리의 손가락은 범인(인 것 같은 사람)을 가리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공식에 맞추어 다시 한 번 계산하라고 있는 것이다. 앞든 예를 계속 밀고나가자면, 이기준 씨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맡아서는 안 되는 것은 그 직접적인 이유로 말미암아야지, 인위적이고 음모론적인 방증들을 문제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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