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어릿광대의견해

내재적 접근론과 과거사법

엔디 2005. 3. 29. 01:41
객관적이라는 것은 기준이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잣대가 하나라면 분란이 일어날 염려가 없다. 그것이 법치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법치주의의 한계는 이미 선진先秦 시대에 유가 철학자들과 도가 철학자들이 누누이 강조했던 것이지만, 비할 수 없이 커진 현대 사회는 반드시 체계système에 의해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경계인'이라 불리는 송두율 교수를 생각한다. 송두율 교수가 귀국 후 잡혀 있었던 이유는 그가 이북에서 노동당에 가입했던 전력 때문이다. 보수 언론들은 큼지막한 활자로 그 글씨를 써 놓고 가판대에서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두 장을 넘기면 송두율 교수가 썼던 책에서 '내재적 접근론'이 문제라면서 짐짓 독자들의 판단에 훈수를 두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접근론'은 사실 어려운 전문용어는 아니다. 그 사회를 안에서 바라봐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이 논의는, 서울 가봐야 서울 안다는 당연한 이야기다. 물론, 가치판단을 전혀 배제하고 있다는 단점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 보수파들이 자주 드는 예를 그대로 언급한다면, 그가 인권 탄압이나 비민주성이 이남보다 이북이 더 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명 문제가 없지 않다. 아주 소박한 수준의 내재적 접근론이라면 히틀러의 독재조차 그 사회의 눈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아서 상황이 금새 역전되었다. 과거사진상규명법이 논란거리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진보언론과 진보단체들은 이 법안에 적극 찬성하고 있고, 말과 글을 통해 확인되지 않은 문장들이 드물게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 소박한 수준의 '내재적 접근론'을 주창하는 이들은 송두율 교수의 맞은 편에 있던 사람들이다. 일제시대에 살아보지도 않고 쉽게 단죄하지 말라는 것이다.

소박한 수준의 '내재적 접근론'은 한마디로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이북의 상황도 일제 치하의 상황도 그들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한 중대한 요인이다. 우리는 그 요인들을 존중해야 한다. 동시에 이와 같은 접근방식의 한계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인식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의 잣대로 모든 사물의 길이를 재는 것이다. 사실 정쟁을 풀 실마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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