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어릿광대의견해

신발의 문제

엔디 2004. 9. 2. 23:04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묘사하며 "신발보다도 자주 나라를 바꾸"었던 시대라는 표현을 썼다. 이 구절이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쉽게 닳아 바꾸어야 하는 신발의 속성 때문이다. 그리고 신발이 그런 속성을 지닌 것은, 신발이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 곧 범인凡人의 것이기 때문이다.

신발을 얻기 위해 달리는 소년의 모습이나, 새 직장을 구하기 위해 떨어진 신발 밑창을 감추는 실업자의 모습이 영화 속에 종종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가 경제 생활에 종사해야 한다면, 다시 말해 '먹고 살아야' 한다면, 신발은 필수적인 것이다.

모세가 만난 신神은 그래서 모세에게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신神은 신발이 상징하는 '천박한' 고통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만의 문제였고, 또한 하찮은 것이었다. 그러나 실은 고통이야말로 위대한 것이고, 캠벨의 말대로, 고통이야말로 생의 본질이다. 그래서 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세상에는 여전히 '아버지'가 존재한다.

십구문 반의 '아버지'는 아직도 육문 삼의 막내둥이를 위해 자신의 신발을 닳리고 있는 것이다. (박목월) 그러므로 신발은 항상 가난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마지막 안식처가 신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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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황금광시대'에는 금광을 찾는 두 사람이 신발을 삶아먹는 장면이 나온다. 천연덕스럽게 신발을 먹는 채플린의 연기를 마냥 웃으며 볼 수 없는 것은 지금-여기의 가난한 삶의 모습들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남은 신발을 삶아먹으면서도 줄서서 복권을 사는 '황금광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황금광시대'의 문제는 황금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황금에 '올인'하게 만드는 신발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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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의 문제가 여전히 현재형인 이유는 '고무신'을 돌려 '황금' 배지를 단 국민의 대표들이 이 문제를 공공연히 회피하기 때문이다.

'최저생계비로 한달 생활하기' 체험 행사가 얼마 전 참여연대 주최로 열렸다. 이 행사가 턱없이 부족한 최저생계비의 현실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결정권자들에게는 '신발의 문제'가 여전히 부차적인 문제로 남아있다. 브레히트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인간이 인간을 돕는 정도까지 되거든 이 암울한 시대를 기억해다오"라고 끝맺고 있다. "신발보다도 더 자주 나라를 바꾼" 이유가 저렇게 단순한 이상 때문이라는 것은 이러한 우리 현실에 시사하는 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