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淸算'은 '맑게 계산하다'라는 뜻이다. 본래 금전 거래에 쓰일 이 낱말이 '과거사 청산'처럼 의미가 확장된 것은
역사적·정치적 문맥 속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꼭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에 방불하다는 데서 착안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금전 거래와 달리 과거사는 '청산'될 수 없는 것이다. 역사가 가진 명백함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진상규명특별법'은 이런 난관을 도외시하고 있다. 50년 이상이 지난 뒤에 행해지는 20세기 초에 대한 실사가 거둘
성과도 의문이거니와, 설령 명백한 친일행위가 드러났다 한들 그것이 우리와 후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자칫 정치적으로 이용될 염려도 무척 큰 이 일을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들은 바 없다.
구한 말 대제학을 지내고, 한일합방 이후에는 자작의 작위를 받은 김윤식의 예는 '친일진상규명특별법'이 거둘 성과의 미미함을 한 눈에 확인시켜 준다. 김윤식은 한일합방에 대한 가부를 묻는 질문에 '不可不可'로 답했다고 한다. 이를 '不可! 不可!', 곧 '절대로 안 된다'라고 새겨야 하는지, '不可 '不可'', 곧 '반대는 안 된다'라고 새겨야 하는지, 혹은 '不可不 可', 다시 말해, '할 수 없이 찬성'이라고 새겨야 하는지에 대해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김윤식이 친일파인지 아닌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역사 자료 속에는, 그가 자작 작위를 받았다는 증거와 함께 3.1 운동 지지 발언으로 이를 박탈당했다는 증거도 있는 것이다. 또, 사실상 일제의 감시 속에서 이루어진 답변을 두고 언행의 도덕성을 따진다는 것도 합리적인 일은 아니다. 행위 자체의 도덕성만이 아니라 그 문맥까지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다시 친일행위의 기준 논란으로까지 번진다. 만주나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아니라면, 일제의 통치 아래 있던 조선 반도의 사람들은 크나 적으나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에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창씨개명한 것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기준을 세우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우국지사는 아니나 자기가 망국 백성이라는 것은 어느 때나 잊지 않고 있었던' 사람들이 당시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상당히 논란이 될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의 경우를 생각해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그 자신들의 주장대로 반드시 민족지인 것도 아닐테지만, 그 반대편의 주장대로 친일지라고만 규정하기에도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때문에 이들 신문의 행적은 자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되게 마련이다. 더구나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이들 신문에 대한 조사 결과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법의 성과에 대한 의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의 합목적성과 실효성, 그리고 부작용이다. '친일진상규명특별법'을 시행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추상적인 대답 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다. 친일진상규명을 하고 나면 과연 역사가 갑자기 바로 설 것인지, 친일행위를 열심히 정죄하고 나면 나라가 깨끗해질 것인지 우리는 보다 합리적으로 숙고해봐야 한다. 또, 극소수를 제외한 관련자가 모두 사망한 상태에서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이 얼마나 필요할지도 마땅히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법안에 의한 조사가 야기할 수 있는 심리적 연좌제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마땅히 고려해야 한다.
진실은 항상 실무율로 있지 않다. 때문에 국가 권력이나 정권이 역사를 다시 쓰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다. 역사가 정권의 종속물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해방 60년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과거의 친일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그런 목적에서라면 그 규명은 마땅히 학계의 몫이어야 할 것이다.
구한 말 대제학을 지내고, 한일합방 이후에는 자작의 작위를 받은 김윤식의 예는 '친일진상규명특별법'이 거둘 성과의 미미함을 한 눈에 확인시켜 준다. 김윤식은 한일합방에 대한 가부를 묻는 질문에 '不可不可'로 답했다고 한다. 이를 '不可! 不可!', 곧 '절대로 안 된다'라고 새겨야 하는지, '不可 '不可'', 곧 '반대는 안 된다'라고 새겨야 하는지, 혹은 '不可不 可', 다시 말해, '할 수 없이 찬성'이라고 새겨야 하는지에 대해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김윤식이 친일파인지 아닌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역사 자료 속에는, 그가 자작 작위를 받았다는 증거와 함께 3.1 운동 지지 발언으로 이를 박탈당했다는 증거도 있는 것이다. 또, 사실상 일제의 감시 속에서 이루어진 답변을 두고 언행의 도덕성을 따진다는 것도 합리적인 일은 아니다. 행위 자체의 도덕성만이 아니라 그 문맥까지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다시 친일행위의 기준 논란으로까지 번진다. 만주나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아니라면, 일제의 통치 아래 있던 조선 반도의 사람들은 크나 적으나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에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창씨개명한 것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기준을 세우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우국지사는 아니나 자기가 망국 백성이라는 것은 어느 때나 잊지 않고 있었던' 사람들이 당시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상당히 논란이 될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의 경우를 생각해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그 자신들의 주장대로 반드시 민족지인 것도 아닐테지만, 그 반대편의 주장대로 친일지라고만 규정하기에도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때문에 이들 신문의 행적은 자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되게 마련이다. 더구나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이들 신문에 대한 조사 결과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법의 성과에 대한 의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의 합목적성과 실효성, 그리고 부작용이다. '친일진상규명특별법'을 시행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추상적인 대답 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다. 친일진상규명을 하고 나면 과연 역사가 갑자기 바로 설 것인지, 친일행위를 열심히 정죄하고 나면 나라가 깨끗해질 것인지 우리는 보다 합리적으로 숙고해봐야 한다. 또, 극소수를 제외한 관련자가 모두 사망한 상태에서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이 얼마나 필요할지도 마땅히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법안에 의한 조사가 야기할 수 있는 심리적 연좌제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마땅히 고려해야 한다.
진실은 항상 실무율로 있지 않다. 때문에 국가 권력이나 정권이 역사를 다시 쓰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다. 역사가 정권의 종속물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해방 60년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과거의 친일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그런 목적에서라면 그 규명은 마땅히 학계의 몫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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