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국제 사회에서 영어의 중요성이 점차로 강조되고 있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했으며, 공용어로 지정하지 않은 나라에서도 제 1외국어로 영어를 배우는 비율이 매우 높다(복거일 1998, 170-171). 이 때문에 최근 우리 나라도 '영어공용화론'이라는 논쟁이 있었고, 잠재적으로는 지금도 상반된 주장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영어를 배우는 인구가 점차로 늘고 있지만, 영어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높다. 그것은 아마 미국에 대한 견제의 일부일 것이라 생각되는데, 모든 것을 경제의 논리로 환원시키는 신자유주의 논리가 거기에 스며있다. 그러나, 김종명이 인용한 독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문화를 단순히 경제적 요인으로 격하시켜서는 안 됩니다."라는 발언(원윤수 2000, 149)에서 보듯이, 문화를 경제의 논리로만 판단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어떤 문화를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언어이다. 프랑스에서 최근 시행한 조사에서는 질문 대상의 69%가 프랑스어가 가장 중요한 문화재라고 답하였다고 한다(김춘미 1997, 88). 이 언어가 경제의 논리에 지배되려는 경향으로 기울어진 것이 눈에 띄기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 '영어공용화론'을 최초로 공론화시킨 복거일도 경제의 논리를 주로 그 논거로 펴고 있다.
약소국인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막강한 경제력과 이를 위한 효율성을 무기로 한 영어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다. 이에 영어의 영향력은 점차 커지고 있다. 이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길을 찾아야하는지를 자세히 알아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 이런 작업에서 프랑스처럼 자기 언어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그 관심을 구체적으로 정책에 반영하고 있는 나라에 대한 참고는 필수적일 것이며, 또한 그런 나라를 곧이 따라해서도 안 될 것이다.
II.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의 경우에도 영어는 하나의 문제거리였다. 일터에서 쓰이는 영어가 점차로 많아지게 된 것이다(김종명 2000, 148). 에띠앙블Etiemble 교수같은 사람은 프랑스인들의 무절제한 영어사용을 개탄하여 조롱조로 프랑글레franglais라는 표현을 만들어 쓰기도 했을 정도다(주경복 1996, 46).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어가 차지하는 비율은 적지 않다. 그들은 독일이나 우리 나라처럼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으므로, '프랑스어를 쓰는가'가 문화와 나라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단적인 예로, 문학을 들어보면 이렇다. "프랑스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프랑스 사람이 쓴 문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어로 씌어진 문학"을 가리키는 것이다(송면 1996, 10; 송면 1973, 14-15).¹ 이렇게 중요한 프랑스어가 'DDD(Donald Duck Dialect)'에 의해 '오염'되고 있으니 프랑스의 정책이 이를 막는데 기우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여진다.
1994년,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이었던 자끄 뚜봉Jacques Toubon은 프랑스어 보호를 위해 이른바 '뚜봉 법Loi de Toubon'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영어의 영향력을 막기 위한 것이 그 주목적이었다. 이 '뚜봉 법'에 대한 입장은 크게는 두 가지, 조금 더 세분하면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찬성, 제한적 찬성, 반대가 그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의 근거가 하나로 같다는 것이다. 둘 다 '언어의 획일화에 대한 반대'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뚜봉 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당연히 "프랑스 내에서 불어만 쓰라는 것은 언어의 획일화"이며, "언론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이원복 1996, 196-197). 또, 찬성하는 사람은 찬성하는 사람대로 '뚜봉 법'의 취지는 "영어를 통해 진행되고 있는 획일화 및 미국 중심의 패권주의에 대한 경계"라며, 이는 언어의 획일화가 아니라 언어의 다양화를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안근종은 전하고 있다(원윤수 2000, 59). (그런데 이 '뚜봉 법'은 3,500개의 영어 단어 사용을 금하고 이를 프랑스어로 대체했는데, 사용과정에 억지가 많이 눈에 띄기도 한다. 이를테면 청바지Jean를 님Nîmes 산産 천 바지pantalon en toile de Nîmes라고 하는 것과 같은 억지이다(이원복 1996. 202-203).)
사실 프랑스는 특유의 똘레랑스tolérence 정신으로 상대적 소수자들을 용인해주고, 소수문화에 대한 보호정책을 펴고 있다. 당연히 다양한 인류 문화의 소중한 재산이며, 서로 다른 세계관의 거울(Humboldt)이라는 언어에 대한 다양화 정책은 당위성을 가진다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영어에는 이렇듯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영어가 경제의 논리를 가지고 들어오기 때문일 것이다.
III. 우리 나라의 경우
우리 나라에서는 복거일과 민족주의자들이 영어공용화에 대해 치고받는 소모적인 논쟁을 하긴 했으나 실제적으로 논의된 것은 없었다. 그것은 지극히 비생산적인 논쟁이었다.
복거일은 21세기가 되면 영어가 '지구 제국'의 명실상부한 공용어가 될 것이고, 그 때가 되어 정보의 한 가운데 있기 위해선 인터넷 등에서 가장 많이 보는 말인 영어를 잘 해야 우리가 '지구 제국'의 중심부에 위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번역 등에 들이는 수고를 다른 쪽, 즉 생산적인 쪽으로 돌리면 훨씬 더 효율적일 것이라는 주장이다(복거일 1998, 179; 189-190).
반면 민족주의자들은 언어야말로 우리 민족을 나타내주는 가장 확실한 표식이라고 주장하면서, 복거일을 제지하고 나섰다. 「민족의 생명」(정소성, 『중앙일보』1999년 11월 29일), 「민족의 얼이 담겨있는 그릇」(현택수, 『조선일보』1999년 8월 31일), 「한국어에는 한국 민족의 역사와 전통과 정서가 담겨 있다」(박강문, 『새국어 생활』2000년 봄호), 「노예로서 편하게 사느냐,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주인 노릇을 하면서 제멋대로 사느냐」(한영우, 『조선일보』1998년 7월 10일), 「어머니가 문둥이일지라도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는 않을 것」(이윤기, 『조선일보』1998년 7월 13일) 등 제목만 보아도 민족주의의 열정이 풍기는 글들이다.
IV. 해결책은?
하지만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짚어야 할 것은, '문제'는 '양쪽 중에 어느 쪽이 옳은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의 목적은 최선의 방법과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양쪽에서 좋은 점을 뽑아 보다 나은 해결책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언어와 사회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언어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국민 정신과 국민성을 반영한다는 것은 훔볼트Humboldt의 언어관이고,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단지 반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험들을 규정짓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사피어Sapir의 가설이지만, 주변 환경(사회)과 언어가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없어보인다.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도 "언어는 인간을 규정하는 핵심요소"라고 하여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한학성 2000, 58). 에스키모의 말에 '눈[雪]'을 지칭하는 각기 다른 단어가 많이 눈에 띄고, 우리말에 rice에 해당하는 말―벼, 쌀, 밥 등이 많이 보이는 것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논거로 흔히 사용되는 것 중 하나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와 언어 어느 하나가 우위를 점하고 다른 하나에 일방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나, 사실은 안근종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사회와 언어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고 서로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원윤수 2000, 52-56). 즉, 사회가 변하면 이에 따라 언어도 변하게 되고, 반면 언어가 변하면 사회도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언어는 변한다. 사회는 늘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언어는 외부와의 접촉에서 가장 많이 변하는데, 그것은 두 문화의 접점에서는 상대 문화와 자기 문화의 서로 상이한 부분을 많이 목격하기 때문일 것이다. 컴퓨터와 같은 "새로운 문물"들이 그 예이다. 이런 "새로운 문물"들이 들어오면서 이를 표현하는 말도 같이 들어오게 된다. 여기서 또다시 주의해야할 것이 있는데, 언어가 변하는 것은 언어의 "타락"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남기심들(1997, 4)이 말했듯 "옛말이 타락해서 오늘날의 말이 되는 것이 아니고 변화해서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다른 문화와의 접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설령 우리가 접촉하는 대상이 소위 '굉장히 발달되지 못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의 문화의 질이 위협받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문화는 어느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낫다고 하는 판단이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비-스트로스는 지질학의 비유를 들어, 아주 오래된 암반층이 최근에 형성된 암반층과 함께 있을 때 고대의 암반이 현대의 암반에 비해 열등하지 않은 것처럼, 흔히 '원시적'이라 일컬어지는 문화·관습이 열등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Leach 1998, 37). 또, 남기심들도 "미개사회(未開社會)의 언어는 미개하고, 문명사회의 언어는 더 발달되고 복잡한 구조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문화의 발전도(發展度)와 언어구조의 추상성이나 복잡성의 정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남기심 외 1997, 3). 그리고 그 각기 대등한 문화 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구분되며 가장 총체적인 문화는 바로 언어이다. 다시 말해, 언어는 "문화는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주장의 가장 핵심적인 예가 되는 것이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이런 변별성은 언어의 특징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모든 각 언어는 서로 다르게 구조적으로 분절되어 있다. 그런 분절은 언어마다 다르다. 예를 들면 눈[雪]에 대한 어휘가 이례적으로 많은 에스키모 족의 언어와 영어를 비교할 때, 에스키모 족이 눈에 대한 어휘수가 많으므로 영어보다 우등하지 않은 것과 같다. 또, 프랑스어의 fleuve(강)와 rivière(하천)라는 단어에 대응하는 영어의 단어는 각각 river과 stream이지만, 양 언어 내에서 두 단어를 분절하는 양식이 다르다. river와 stream은 순전히 강의 크기에만 관련된 것이지만, fleuve와 riviere는 바다로 흘러가는 강fleuve과 바다로 직접 흘러들지 않는 강rivière이라는 식으로 다르게 분절하고 있다. 때문에 불어의 fleuve와 영어의 river는 비슷한 말이긴 하지만 꼭 같지는 않다(Culler 1998, 37-38). 어느 쪽이 더 나은 언어인가? 양쪽의 언어가 모두 필요하다.
한 언어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언어 습관에서 주로 쓰이는 '사라'라는 표현을 '접시'로 바꾸자는 주장이 오래 있어왔지만 사실은 '사라'와 '접시'는 그 쓰임이 다르다. '사라'는 큰 접시를 의미한다(복거일 1998, 131-132). 말이 이미 들어와 이런 지위를 획득하고 있는데 이를 언어의 '순수성'을 위해 없애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게다가 이런 행위는 통시적인 것을 공시적인 것에 적용하는 사례가 되기도 한다. 드 소쉬르(1990, 99)에 따르면 "언어는 그 구성요소의 순간 상태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없는 순수한 가치 체계"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언어는 본질적으로 우열을 가릴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언어도 다른 언어나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몸바꾼 언어보다 열등한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어는 사회를 반영할 줄 알아야 하는데 '순수한' 언어는 그런 역할을 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회와 서로 충돌하게 되고, 급기야는 그 사회와 서로 맞지 않게 되어 버려지게 될 뿐이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지체cultural lag'―급속히 발전하는 물질문화와 비교적 완만하게 변하는 비물질문화간에 변동속도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사회적 부조화―이다.
이 시점에서 밀려들어오는 영어를 막으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그 빛이 바랜다. 그들은 '문화지체'를 일부러 조장하려는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들의 행동근거인 "언어의 다원화"도 마찬가지다. 언어의 다원화를 위해 다른 언어를 규제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이를테면, 파시즘을 규제하는 전체주의가 옳은가?) 하지만, 실제로 영어가 가지고 있는 모습은 기존의 '문화접변', '문화변동'의 양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영어의 '침입'에 반대하여 이를 규제하는 것도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 영어가 들어오는 출입구는 문화가 아니다. 영어는 경제의 문을 통해서 들어오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문화의 하나로써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효율적인 '도구'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언어의 강제이다.
우리의 경우, 일제 시대에 소위 '민족말살정책'이라는 것을 겪었다. '창씨개명'과 '조선어 탄압'을 주로하여 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우리말을 없애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얼'과 '혼'은 문화이다.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사상과 생각이 담긴 것이 우리말인데, 이를 뿌리채 뽑으려 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강제의 모습이다. 이것은 '문화접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강제'라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언어(또는 문화)의 다양성을 방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영어의 경우에는 좀더 위험한 모습으로 오고 있다. 이에 대해 안근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원윤수 2000, 59-60).
음모론적인 사고가 글을 지배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을 지적했다. 영어의 유입('침탈')에는 강제성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어가 문화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소리이다. 분명히 프랑스말과 영어와 우리말은 각기 다른데, 어느 하나가 "경제적으로" 더 편리하다는 이유에서 다른 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생각과 사상을 담는 틀'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하나이며 언어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문학을 예로 들어보자. 가령 서정주의 「자화상」의 경우에 이를 영역하였을 때, 과연 한 편의 시로써 손색이 없을 것인가?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자화상」과 이의 영역본과 일역본을 대조하여 영역본과 일역본이 잃고있는 시적 함의들을 밝히고 있다(유종호·최동호 1995, 131-135).
이런 말들이 가령 영역본에 있는 대로 "withered and pale as leek root(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 "green apricots(풋살구)", …, "the year of reforms(甲午年)", "it is wind that has raised the better part of me(八割이 바람)" 등으로 완전히 치환된다고 볼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영어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회와 문화에서 매우 훌륭한 언어이지만 그것이 한국의 상황과 문화와는 맞지 않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영어 스스로도 아마 이런 한계에 부딪혀 세계 유일의 언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책은 혼란을 미연에 방지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정책적으로 영어를 일뷰 규제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 할 수 있겠다.
V. 결론
영어는 결국 어느 나라의 말도 완전히 잠식하지 못한다. 하나의 언어가 다른 모든 언어를 대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실제로 깨닫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뒤일 것이며 그 때에는 혼란만 더 생기게 된다. 때문에 정책적으로 영어를 일부 규제하여 문화적 다양성을 유지하며, 영어도 또한 그 다양성 정책의 일환으로 보호받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해야할 일이다. 영어에 대한 규제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에 대한 구체적인 규제안 마련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지금부터는 에너지를 그쪽으로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은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청바지를 도포바지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코너 킥'을 '구석차기'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태권도에서 '겨루기'는 어느 나라에 가도 '겨루기'이다. 또 똘레랑스tolérance를 '용인'으로 옮기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이 과연 본의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런 문화적인 접촉으로 생긴 용어들까지 규제하는 것은 옳지 않고 단순히 경제성이나 효율성만을 따진 용어는 규제하는 것, 이것이 영어 규제의 한 기준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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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춘미 엮고 씀. 1997. 『프랑스 문화정책의 흐름』. 서울: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남기심·이정민·이홍배. 1997. 『언어학개론』. 개정판. 서울:탑출판사.
복거일. 1998.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서울:문학과지성사.
송 면. 1996. 『프랑스 문학의 이해』. 개정판. 서울:서문당.
―――. 1973. 『프랑스 文學史』. 재판. 서울:일지사.
원윤수 엮음. 2000. 『진정한 세계화의 모색:불어권의 경우』. 서울:서울대학교출판부.
유종호·최동호 엮음. 1995. 『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서울:현대문학.
이원복. 1996. 『현대문명진단③』. 서울:조선일보사.
주경복. 1996. 『프랑스어와 언어 이론』. 서울:어문학사.
한학성. 2000. 『영어 공용어화, 과연 가능한가』. 서울:책세상.
Culler, Jonathan. 1998. 『소쉬르Saussure』. 이종인 옮김. 서울:시공사.
Leach, Edmund. 1998.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 이종인 옮김. 서울:시공사.
de Saussure, Ferdinand. 1990. 『일반 언어학강의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 최승언 옮김. 서울:민음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국제 사회에서 영어의 중요성이 점차로 강조되고 있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했으며, 공용어로 지정하지 않은 나라에서도 제 1외국어로 영어를 배우는 비율이 매우 높다(복거일 1998, 170-171). 이 때문에 최근 우리 나라도 '영어공용화론'이라는 논쟁이 있었고, 잠재적으로는 지금도 상반된 주장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영어를 배우는 인구가 점차로 늘고 있지만, 영어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높다. 그것은 아마 미국에 대한 견제의 일부일 것이라 생각되는데, 모든 것을 경제의 논리로 환원시키는 신자유주의 논리가 거기에 스며있다. 그러나, 김종명이 인용한 독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문화를 단순히 경제적 요인으로 격하시켜서는 안 됩니다."라는 발언(원윤수 2000, 149)에서 보듯이, 문화를 경제의 논리로만 판단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어떤 문화를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언어이다. 프랑스에서 최근 시행한 조사에서는 질문 대상의 69%가 프랑스어가 가장 중요한 문화재라고 답하였다고 한다(김춘미 1997, 88). 이 언어가 경제의 논리에 지배되려는 경향으로 기울어진 것이 눈에 띄기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 '영어공용화론'을 최초로 공론화시킨 복거일도 경제의 논리를 주로 그 논거로 펴고 있다.
약소국인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막강한 경제력과 이를 위한 효율성을 무기로 한 영어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다. 이에 영어의 영향력은 점차 커지고 있다. 이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길을 찾아야하는지를 자세히 알아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 이런 작업에서 프랑스처럼 자기 언어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그 관심을 구체적으로 정책에 반영하고 있는 나라에 대한 참고는 필수적일 것이며, 또한 그런 나라를 곧이 따라해서도 안 될 것이다.
II.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의 경우에도 영어는 하나의 문제거리였다. 일터에서 쓰이는 영어가 점차로 많아지게 된 것이다(김종명 2000, 148). 에띠앙블Etiemble 교수같은 사람은 프랑스인들의 무절제한 영어사용을 개탄하여 조롱조로 프랑글레franglais라는 표현을 만들어 쓰기도 했을 정도다(주경복 1996, 46).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어가 차지하는 비율은 적지 않다. 그들은 독일이나 우리 나라처럼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으므로, '프랑스어를 쓰는가'가 문화와 나라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단적인 예로, 문학을 들어보면 이렇다. "프랑스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프랑스 사람이 쓴 문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어로 씌어진 문학"을 가리키는 것이다(송면 1996, 10; 송면 1973, 14-15).¹ 이렇게 중요한 프랑스어가 'DDD(Donald Duck Dialect)'에 의해 '오염'되고 있으니 프랑스의 정책이 이를 막는데 기우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여진다.
1994년,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이었던 자끄 뚜봉Jacques Toubon은 프랑스어 보호를 위해 이른바 '뚜봉 법Loi de Toubon'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영어의 영향력을 막기 위한 것이 그 주목적이었다. 이 '뚜봉 법'에 대한 입장은 크게는 두 가지, 조금 더 세분하면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찬성, 제한적 찬성, 반대가 그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의 근거가 하나로 같다는 것이다. 둘 다 '언어의 획일화에 대한 반대'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뚜봉 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당연히 "프랑스 내에서 불어만 쓰라는 것은 언어의 획일화"이며, "언론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이원복 1996, 196-197). 또, 찬성하는 사람은 찬성하는 사람대로 '뚜봉 법'의 취지는 "영어를 통해 진행되고 있는 획일화 및 미국 중심의 패권주의에 대한 경계"라며, 이는 언어의 획일화가 아니라 언어의 다양화를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안근종은 전하고 있다(원윤수 2000, 59). (그런데 이 '뚜봉 법'은 3,500개의 영어 단어 사용을 금하고 이를 프랑스어로 대체했는데, 사용과정에 억지가 많이 눈에 띄기도 한다. 이를테면 청바지Jean를 님Nîmes 산産 천 바지pantalon en toile de Nîmes라고 하는 것과 같은 억지이다(이원복 1996. 202-203).)
사실 프랑스는 특유의 똘레랑스tolérence 정신으로 상대적 소수자들을 용인해주고, 소수문화에 대한 보호정책을 펴고 있다. 당연히 다양한 인류 문화의 소중한 재산이며, 서로 다른 세계관의 거울(Humboldt)이라는 언어에 대한 다양화 정책은 당위성을 가진다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영어에는 이렇듯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영어가 경제의 논리를 가지고 들어오기 때문일 것이다.
III. 우리 나라의 경우
우리 나라에서는 복거일과 민족주의자들이 영어공용화에 대해 치고받는 소모적인 논쟁을 하긴 했으나 실제적으로 논의된 것은 없었다. 그것은 지극히 비생산적인 논쟁이었다.
복거일은 21세기가 되면 영어가 '지구 제국'의 명실상부한 공용어가 될 것이고, 그 때가 되어 정보의 한 가운데 있기 위해선 인터넷 등에서 가장 많이 보는 말인 영어를 잘 해야 우리가 '지구 제국'의 중심부에 위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번역 등에 들이는 수고를 다른 쪽, 즉 생산적인 쪽으로 돌리면 훨씬 더 효율적일 것이라는 주장이다(복거일 1998, 179; 189-190).
반면 민족주의자들은 언어야말로 우리 민족을 나타내주는 가장 확실한 표식이라고 주장하면서, 복거일을 제지하고 나섰다. 「민족의 생명」(정소성, 『중앙일보』1999년 11월 29일), 「민족의 얼이 담겨있는 그릇」(현택수, 『조선일보』1999년 8월 31일), 「한국어에는 한국 민족의 역사와 전통과 정서가 담겨 있다」(박강문, 『새국어 생활』2000년 봄호), 「노예로서 편하게 사느냐,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주인 노릇을 하면서 제멋대로 사느냐」(한영우, 『조선일보』1998년 7월 10일), 「어머니가 문둥이일지라도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는 않을 것」(이윤기, 『조선일보』1998년 7월 13일) 등 제목만 보아도 민족주의의 열정이 풍기는 글들이다.
IV. 해결책은?
하지만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짚어야 할 것은, '문제'는 '양쪽 중에 어느 쪽이 옳은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의 목적은 최선의 방법과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양쪽에서 좋은 점을 뽑아 보다 나은 해결책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언어와 사회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언어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국민 정신과 국민성을 반영한다는 것은 훔볼트Humboldt의 언어관이고,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단지 반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험들을 규정짓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사피어Sapir의 가설이지만, 주변 환경(사회)과 언어가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없어보인다.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도 "언어는 인간을 규정하는 핵심요소"라고 하여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한학성 2000, 58). 에스키모의 말에 '눈[雪]'을 지칭하는 각기 다른 단어가 많이 눈에 띄고, 우리말에 rice에 해당하는 말―벼, 쌀, 밥 등이 많이 보이는 것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논거로 흔히 사용되는 것 중 하나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와 언어 어느 하나가 우위를 점하고 다른 하나에 일방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나, 사실은 안근종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사회와 언어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고 서로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원윤수 2000, 52-56). 즉, 사회가 변하면 이에 따라 언어도 변하게 되고, 반면 언어가 변하면 사회도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언어는 변한다. 사회는 늘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언어는 외부와의 접촉에서 가장 많이 변하는데, 그것은 두 문화의 접점에서는 상대 문화와 자기 문화의 서로 상이한 부분을 많이 목격하기 때문일 것이다. 컴퓨터와 같은 "새로운 문물"들이 그 예이다. 이런 "새로운 문물"들이 들어오면서 이를 표현하는 말도 같이 들어오게 된다. 여기서 또다시 주의해야할 것이 있는데, 언어가 변하는 것은 언어의 "타락"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남기심들(1997, 4)이 말했듯 "옛말이 타락해서 오늘날의 말이 되는 것이 아니고 변화해서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다른 문화와의 접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설령 우리가 접촉하는 대상이 소위 '굉장히 발달되지 못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의 문화의 질이 위협받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문화는 어느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낫다고 하는 판단이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비-스트로스는 지질학의 비유를 들어, 아주 오래된 암반층이 최근에 형성된 암반층과 함께 있을 때 고대의 암반이 현대의 암반에 비해 열등하지 않은 것처럼, 흔히 '원시적'이라 일컬어지는 문화·관습이 열등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Leach 1998, 37). 또, 남기심들도 "미개사회(未開社會)의 언어는 미개하고, 문명사회의 언어는 더 발달되고 복잡한 구조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문화의 발전도(發展度)와 언어구조의 추상성이나 복잡성의 정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남기심 외 1997, 3). 그리고 그 각기 대등한 문화 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구분되며 가장 총체적인 문화는 바로 언어이다. 다시 말해, 언어는 "문화는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주장의 가장 핵심적인 예가 되는 것이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이런 변별성은 언어의 특징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모든 각 언어는 서로 다르게 구조적으로 분절되어 있다. 그런 분절은 언어마다 다르다. 예를 들면 눈[雪]에 대한 어휘가 이례적으로 많은 에스키모 족의 언어와 영어를 비교할 때, 에스키모 족이 눈에 대한 어휘수가 많으므로 영어보다 우등하지 않은 것과 같다. 또, 프랑스어의 fleuve(강)와 rivière(하천)라는 단어에 대응하는 영어의 단어는 각각 river과 stream이지만, 양 언어 내에서 두 단어를 분절하는 양식이 다르다. river와 stream은 순전히 강의 크기에만 관련된 것이지만, fleuve와 riviere는 바다로 흘러가는 강fleuve과 바다로 직접 흘러들지 않는 강rivière이라는 식으로 다르게 분절하고 있다. 때문에 불어의 fleuve와 영어의 river는 비슷한 말이긴 하지만 꼭 같지는 않다(Culler 1998, 37-38). 어느 쪽이 더 나은 언어인가? 양쪽의 언어가 모두 필요하다.
한 언어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언어 습관에서 주로 쓰이는 '사라'라는 표현을 '접시'로 바꾸자는 주장이 오래 있어왔지만 사실은 '사라'와 '접시'는 그 쓰임이 다르다. '사라'는 큰 접시를 의미한다(복거일 1998, 131-132). 말이 이미 들어와 이런 지위를 획득하고 있는데 이를 언어의 '순수성'을 위해 없애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게다가 이런 행위는 통시적인 것을 공시적인 것에 적용하는 사례가 되기도 한다. 드 소쉬르(1990, 99)에 따르면 "언어는 그 구성요소의 순간 상태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없는 순수한 가치 체계"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언어는 본질적으로 우열을 가릴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언어도 다른 언어나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몸바꾼 언어보다 열등한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어는 사회를 반영할 줄 알아야 하는데 '순수한' 언어는 그런 역할을 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회와 서로 충돌하게 되고, 급기야는 그 사회와 서로 맞지 않게 되어 버려지게 될 뿐이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지체cultural lag'―급속히 발전하는 물질문화와 비교적 완만하게 변하는 비물질문화간에 변동속도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사회적 부조화―이다.
이 시점에서 밀려들어오는 영어를 막으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그 빛이 바랜다. 그들은 '문화지체'를 일부러 조장하려는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들의 행동근거인 "언어의 다원화"도 마찬가지다. 언어의 다원화를 위해 다른 언어를 규제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이를테면, 파시즘을 규제하는 전체주의가 옳은가?) 하지만, 실제로 영어가 가지고 있는 모습은 기존의 '문화접변', '문화변동'의 양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영어의 '침입'에 반대하여 이를 규제하는 것도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 영어가 들어오는 출입구는 문화가 아니다. 영어는 경제의 문을 통해서 들어오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문화의 하나로써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효율적인 '도구'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언어의 강제이다.
우리의 경우, 일제 시대에 소위 '민족말살정책'이라는 것을 겪었다. '창씨개명'과 '조선어 탄압'을 주로하여 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우리말을 없애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얼'과 '혼'은 문화이다.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사상과 생각이 담긴 것이 우리말인데, 이를 뿌리채 뽑으려 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강제의 모습이다. 이것은 '문화접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강제'라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언어(또는 문화)의 다양성을 방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영어의 경우에는 좀더 위험한 모습으로 오고 있다. 이에 대해 안근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원윤수 2000, 59-60).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오늘날 영어의 침탈 현상에는 이전의 언어 침탈 현상처럼 정치적 이유가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세계화와 표준화의 영향으로 영어에 대한 수요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증대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침탈을 받고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침탈 현상이 지닌 위험을 간과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는 방안 또한 종래와는 다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음모론적인 사고가 글을 지배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을 지적했다. 영어의 유입('침탈')에는 강제성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어가 문화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소리이다. 분명히 프랑스말과 영어와 우리말은 각기 다른데, 어느 하나가 "경제적으로" 더 편리하다는 이유에서 다른 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생각과 사상을 담는 틀'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하나이며 언어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문학을 예로 들어보자. 가령 서정주의 「자화상」의 경우에 이를 영역하였을 때, 과연 한 편의 시로써 손색이 없을 것인가?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자화상」과 이의 영역본과 일역본을 대조하여 영역본과 일역본이 잃고있는 시적 함의들을 밝히고 있다(유종호·최동호 1995, 131-135).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 "풋살구"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손톱이 깜한 에미" "甲午年" "外할아버지" "八割이 바람" "병든 수캐"와 같은 심상은 우리의 전통적인 삶과 그 터전에 밀착되어 있는 이를테면 기층적(基層的) 심상의 말들이다.
이런 말들이 가령 영역본에 있는 대로 "withered and pale as leek root(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 "green apricots(풋살구)", …, "the year of reforms(甲午年)", "it is wind that has raised the better part of me(八割이 바람)" 등으로 완전히 치환된다고 볼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영어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회와 문화에서 매우 훌륭한 언어이지만 그것이 한국의 상황과 문화와는 맞지 않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영어 스스로도 아마 이런 한계에 부딪혀 세계 유일의 언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책은 혼란을 미연에 방지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정책적으로 영어를 일뷰 규제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 할 수 있겠다.
V. 결론
영어는 결국 어느 나라의 말도 완전히 잠식하지 못한다. 하나의 언어가 다른 모든 언어를 대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실제로 깨닫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뒤일 것이며 그 때에는 혼란만 더 생기게 된다. 때문에 정책적으로 영어를 일부 규제하여 문화적 다양성을 유지하며, 영어도 또한 그 다양성 정책의 일환으로 보호받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해야할 일이다. 영어에 대한 규제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에 대한 구체적인 규제안 마련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지금부터는 에너지를 그쪽으로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은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청바지를 도포바지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코너 킥'을 '구석차기'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태권도에서 '겨루기'는 어느 나라에 가도 '겨루기'이다. 또 똘레랑스tolérance를 '용인'으로 옮기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이 과연 본의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런 문화적인 접촉으로 생긴 용어들까지 규제하는 것은 옳지 않고 단순히 경제성이나 효율성만을 따진 용어는 규제하는 것, 이것이 영어 규제의 한 기준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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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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