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문체를 통해 독자를 유혹하듯이, 영화는 영상을 통해 독자를 유혹한다. 하지만, 문학은 문체만으로 떨어질 수 없고, 영화 역시 영상만으로 떨어질 수 없다. 화려한 수사나 미사여구가 문학 텍스트가 가진 메시지의 해석decoding을 방해--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할 수 있듯이 하드코어 혹은 하드고어한 영상도 마찬가지다. 밀로스 포만 감독의 영화 《고야의 유령들Goya's Ghosts》은 그런 점에서 오해할 소지가 많은 영화다; 이 영화는 단순한 시대극도 아니요, 종교 재판을 비난하려는 영화도 아니요, 야만의 시대를 고발하려는 영화도 아니다.
《고야의 유령들》은 '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영화다. 이 영화는 한 편의 예술가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구성을 취하면서도, 영화에서 주인공이자 관찰자인 그 예술가를 사건 속에 역동적으로 개입시켜 '진실'에 대한 성찰을 하게 하는 영화이다. 영화는 진실vérité과 진실에 대한 판단jugement에 대해 여러 번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다. 조금은 허무할 수 있는 밀로스 포만의, 혹은 고야의 결론을 위해 영화를 따라가 보자.
1. 로렌조와 다른 신부들: 고야의 그림1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엄숙한 신부들이 나타나 고야의 그림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이런 것이 시중에 팔리고 있단 말인가? 이런 신성모독 같으니라고! 이런 걸 그린 사람이 누군가? 당장 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는 어둠이 보낸 자가 틀림없다.
그 때 로렌조라는 이름의 신부Brother Lorenzo가 일어나서 고야의 그림을 변호한다: 요컨대 고야는 선량하고 믿음 깊은 신자이고, 에스빠냐 최고의 화가라고. 그런 신자의 예술 표현을 오독하고 그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고야는 실제로 이 세상을 그가 본 대로 그렸을 뿐이라고. 문제는 그 그림이 아니라 이토록 악마가 가득한 이 세상이라고.
실제로 당시 세상에 그토록 악마가 가득했을까? 그걸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여기서 로렌조의 의견과 다른 신부들의 의견이 충돌하는 것을 본다; 로렌조는 고야의 그림이 세계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보지만, 다른 신부들은 그의 그림이 세계를 왜곡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로렌조는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다: "실제 이 세상은 이토록 악마가 가득하고, 타락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날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옛날의 방식'이란,
바로 종교 재판을 일컫는다.
2. 이교도의 판별식
종교 재판을 말하던 로렌조 신부가 사람들 앞에서 이교도를 구별하는 방법에 대해 말한다: 볼테르Voltaire에 대해 말하거나 과학science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은 이교도, "교회church"라는 말 대신 "신전temple"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신교도, 소변을 보면서 성기를 가리는 사람은 할례를 받은 유대교인, ……. 그의 앞에는 신앙심 깊은 제자들이 모여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로렌조 신부가 나열하는 것은 일종의 판별식이다: b²-4ac가 0보다 크지 않으면 일단 무조건 이교도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로렌조 신부가 나열한 목록이 이교도 됨을 증명하는 충분조건이 아님을 명확히 알고 있다. 그 점에서 우리는 하나일 진실을 사이에 두고 로렌조 신부와 대척점에 서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로렌조 신부는 아마도 그 신앙심을 바탕으로 본인이 말한 것이 분명히 진실임을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사람을 발견하면 (종교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교회로 알리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놀라야 하는 이유는, 그 자리의 어느 누구도 그의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의문을 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과 우리가 진실에 대해 갖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3. 자백confess과 믿음 ①
이네스 빌바뚜아Inés Bilbatúa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 사실fait이 지금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이교도의 판별식을 적용하면 이 사실은 이네스가 본래 유대교도라는 것의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네스는 바로 그 혐의로 종교재판소 소환장을 받는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유대교의 교리를 따르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유대교도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모세오경 가운데 특히 규례들을 많이 담고 있는 레위기는 유대인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지 못하는 음식을 나누어 규정해 놓고 있다(레 11:1-8):
야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주어라. '땅 위에 있는 모든 네 발 짐승 가운데서 너희가 먹을 수 있는 동물은 이런 것들이다.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은 먹을 수 있다. 새김질하는 짐승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이라도 다음과 같은 것은 먹지 못한다.
낙타는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사반도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토끼도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돼지는 굽은 두 쪽으로 갈라졌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이런 동물의 고기는 먹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주검에 닿아도 안 된다.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한 것들이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가 유대교도임을 논증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종교재판이 채택하는 방법은 자백confess이다; 적어도 본인이 자신의 입으로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니겠느냐는 논리다. 이것이 재판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는 현대의 소송법이 자백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현대법에서는 이른바 '자백보강법칙'은 일종의 상식이다: 즉, 자백이 유일한 증거이면 그를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12조 ⑦항은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폭행·협박·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망 기타의 방법에 의하여 자의로 진술된 것이 아니라고 인정될 때 또는 정식재판에 있어서 피고인의 자백이 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때에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거나 이를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고 규졍하고 있고, 형사소송법 310조는 "피고인의 자백이 그 피고인에게 불이익한 유일의 증거인 때에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자백이라는 것의 증거 능력은 결국 다른 증거를 뒷받침하는 보조 증거로만 쓰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재판은 그런 절차를 무시했다.
게다가 당시 종교재판에서는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들이 '심문Question'이라고 부르는 '고문torture'의 절차를 도입했다. 이네스는 손을 뒤로 묶이어 천정에 매달리는 고문을 당했고, 결국 그들에게 자신이 유대교를 믿고 있다고 '자백'했다. 심문에 대한 그들의 논리는 이런 것이다: "만약 그가 유대교도라면 그는 결국 긴 심문을 견디지 못해 자백하고 말 것이며, 그가 유대교도가 아니라면 신이 그에게 버틸 능력을 주실 것이다."
여기서 중세의 마녀 사냥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일까? 영화 속에서 이네스는, 고야의 집에서 얼굴이 없는 그림을 보고 화가에게 묻는다: "저 그림은 왜 얼굴이 없어요?" "유령이니까요. 유령을 본 적이 있나요?" "아뇨, 하지만 나 마녀는 본 적이 있어요. 꼬부라진 몸에 냄새가 고약했어요." "음, 내가 본 마녀와는 좀 다르군요. 내가 본 마녀는 젊고, 아름다운 데다 꽃향기가 나던데 말이에요. 그 사람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지요." 이네스는 깜짝 놀라며 발랄하게 반문한다: "난 마녀가 아닌걸요? I'm no witch?"
중세에는 다양한 마녀 사냥이 행해졌는데, 대표적으로 이런 방법들이 쓰였다(Jeffrey Burton Russell 2001, 139-140):
마녀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몇 가지 고문법도 고안되었다. 예컨대 '수영'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고대에 행하던 물에 의한 죄인 판별법의 잔존형태라고도 말할 수 있는 '마녀의 수영'은 피고의 손발을 묶은 뒤 깊은 물 속에 던져 넣는 것을 말한다. 물에 가라앉으면 그것은 마녀가 신의 창조물이어서 물이 받아들인 증거이므로 무죄임이 인정되어 물 밖으로 건져내었다. 그러나 만일 물 위로 떠오른다면 그것은 물이 그녀를 거부한 증거이기 때문에 유죄로 판정된다… 그뿐 아니라 바늘로 찌르기도 있었다. 사람들은 마녀의 몸에 악마의 표식인 무감각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상흔이나 멍으로 남의 눈에 보이는 일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발견할 때까지 끝이 뾰족한 물건으로 피고의 온몸을 찔러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고문법은 마녀가 자신이 마녀라고 쉬 자백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거나, 혹은 끝까지 버티더라도 만신창이가 되거나 죽게 되는 방법들이다. 그렇다면 설령 고문으로 인해 얻어지는 결과가 진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용의자의 삶은 이미 파탄이 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문이라는 심문 방식이 갖는 잔인함이 아니다; 문제는 고문과 진실의 관계다. 고문당하는 사람이 바라는 것은 고통의 회피이므로 진실이 아니라 고문하는 사람이 원하는 '진실' 곧, 거짓을 말하게 마련이다. 현대의 재판에서 고문에 의한 자백이 증거능력을 잃는 것은, 고문이 잔인하기 때문이 아니라 고문에 의한 자백의 진실성 자체가 의심되기 때문이다.
이네스의 사례로 돌아가자: 이네스는 단순한 심문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대교도라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황당하다는 표현을 짓는다. 심문자들은 '진실'을 말하라고 했고, 이네스는 진실을 말했지만 심문자들은 믿지 않는다. 급기에 이네스는 심한 고문을 받게 된다. 그가 매달려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진실이 무엇인지 말해주세요! Tell me what the truth is!" 곧 당신들이 원하는 진실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는 외침이다.
4. 자백과 믿음 ②
이네스가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 토마스 빌바뚜아Tomás Bilbatúa는 고야에게 부탁해서 로렌조 신부를 집으로 초대한다. 로렌조는 거기서 '심문'을 통해 진실을 밝혀낼 수 있다는 신념을 말한다. 빌바뚜아 가족들은 그런 '심문' 방식이 오래 전에 없어진 것이 아니었는지 물었으나 로렌조는 "'진실'을 가려내기 위해" 다시 부활했다고 말했다. 교회 법에 의하면 '심문'에 의한 '자백'은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된다고까지 했다.
빌바뚜아 가족들은 급기야 자신만만한 로렌조를 붙잡아 고문하고, "실은 나는 침팬지와 오랑우탄 사이의 호로자식으로……" 운운하는 글에 서명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고문이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증거물로, 로렌조의 서명이 든 그 글을 왕에게 보여 주며 도움을 요청했다. 종교재판소는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그들은 '심문'의 능력을 부정하는 대신, 로렌조 한 사람을 '타락한 자'로 규정하고 만다.
5. 상대방이 원하는 진실: 고야의 그림 2
궁정화가 고야는 말을 탄 왕비의 모습을 그렸다. 왕비는 역사에 '있는 그대로, 젊고 아름답게' 남기를 원했지만, 고야는 상반된 두 진실 가운데 앞엣것을 택해 그린 모양이다. 있는 그대로 그려진 왕비는 꽤나 흉했고, 왕과 왕비는 그 그림을 보자마자 방을 나가버린다. 곧바로 왕은 고야을 불러다놓고 엉터리 자작곡을 바이올린으로 켠다. 고야는 그제서야 깨달은 듯, 왕이 원하는 '진실'을 말해 준다.
6. 진실의 증거자: 고야의 그림 3
그러던 중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15년 후 나뽈레옹 보나빠르뜨가 이끄는 '혁명군'은 에스빠냐로 진주한다. 약탈과 폭행을 일삼는 '혁명군'들. 고야는 허울 좋은 혁명이 실은 변질된 것이라는 점을 그림을 통해 증거하기로 마음먹는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것이 실은 또다른 권력에의 탐욕이었으며 나뽈레옹이라는 독재자를 만들기 위한 수순에 불과하였다는 것. 에스빠냐 사람들에게 있어서 혁명군이라는 것은 결국 침입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야는 말한다. 여기서 고야의 그림은 진실의 증거자 역할을 한다. 감독은 예술가를 진실의 증거자로 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다른 예술가들보다 고야는 더더욱 그런 진실성을 띤 예술가다. 곰브리치(1997, 485)는 그의 『서양미술사』에서 고야가 그린 에스빠냐 왕의 초상화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사실 그에게 스페인 궁중에서의 지위를 확보해준 초상화들은 얼핏 보면 반 다이크나 레이놀즈 류의 어용 초상화들처럼 보인다. 그가 마술을 부리듯 비단과 황금의 반짝임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티치아노나 벨라스케스를 연상시키지만 사실 고야는 그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옛 거장들은 권력에 아첨했지만 사실 고야는 그것을 버리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는 그들의 초상화에서 허영과 추악함, 탐욕과 공허함을 낱낱이 드러냈다. 자기 후원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던 궁정 화가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7. 진실 대 거짓
어쨌든 혁명군의 진주로 종교재판소는 폐지되고, 이네스도 풀려난다. 만신창이가 된 이네스는 길을 걸어 고야의 집에 도착한다. 그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글로 고야에게 말하였고, 고야는 이네스를 구할 길을 찾다가 우연히, 사라졌던 로렌조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혁명군과 함께 혁명의 이상을 배워가지고 왔다. 고야는 그에게 이네스를 데려간다. 이네스는 로렌조에게 '우리' 아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로렌조는 미친 모양이라며 이네스를 격리시킨다. 사실 고야로서는 알 수 없다. 이네스가 정말 로렌조의 아이를 낳았는지, 혹은 이네스의 환상에 불과한 것인지. 실제로 이네스는 정신이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론: 알리시아와 진실의 존재 의의
그러나 알리시아의 등장으로 고야는 이네스의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고야는 그들 둘을 만나게 해 주려고 애쓰지만, 영국군의 등장으로 안타깝게도 성공하지 못한다. 로렌조는 알리시아를 만나 많은 돈을 주고 남미로 보내려고 하지만, 알리시아는 거절한다. 그리고, 이내 혁명을 등에 업고 기세등등했던 로렌조는 영국군을 피해 혁명군과 함께 도망가다가 잡힌다. 그에게 사형이 언도된다.
알리시아는 아마 자신의 아버지일 로렌조가 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옆 사람과 잡담을 나눈다. 이네스는 어느 춘부의 아이를 자신과 로렌조의 아이로 잘못 알고 '아버지'에게 아이를 보이려고 형장으로 나와 기쁘게 로렌조를 본다. 로렌조는 죽어 달구지에 실려 가고, 이네스는 그런 로렌조를 좇는다. 그 뒤로 고야가 그들을 보고 있다.
알리시아는 진실을 모르고, 이네스는 잘못된 것을 진실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진실은 이 세계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편의상 존재하는 것일 뿐인가. 밀로스 포만 감독의 견해는 무엇인가.
나로서는 그가 그래도 진실이라는 것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고 보고 싶다. 적어도 《고야의 유령들》이라는 영화 제목은 그걸 말해주고 있다. 나는 복수로 쓰여진 '유령들'이란 고야의 그림들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그림들은 세계에 대한 정직하고 정확한 묘사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야는 사건에 역동적으로 개입하면서도, 무엇보다도 관찰자의 역할을 떠맡았을 것이다.-----
참고문헌
Gombrich, Ernst Hans Josef. 1997. 『서양미술사』. 백승길·이종숭 옮김. 서울:예경.
Russell, Jeffrey Burton. 2001. 『마녀의 문화사』. 김은주 옮김. 서울:다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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